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나는 울산으로 갔다. 울산작가회의를 오래도록 끌어온 김태수 시인이 있다. 그는 경북과 대전에서 잠시 교단생활을 하다 경남을 거쳐 울산에 뿌리 내렸다. 방어진 바닷가 초등학교 교장을 삼년 지내다 올 팔월말로 정년을 맞는다. 김시인은 나와는 30년 간 교유해온 선배 문인이다. 그의 시력 33년 작품에 대한 평을 담은 ‘기억의 노래, 경험의 시’가 작가시대에서 펴냈다.
김시인 출판기념회는 울산대공원 가족문화센터에서 열렸다. 교단 동료와 제자들, 선후배 문인들과 문화예술인 등으로 대강당 150석을 꽉 메웠다. 1부에서는 김시인의 문학과 인생과 교직에 대한 지인들의 헌사가 있었다. 보수적인 교육계에 진보적 시인이 교장까지 지냄이 독특한 이력이었다. 그는 유신시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몸을 숨겼던 적도 있는 반골이었다. 글로 사람을 모았고 술잔을 돌렸다.
2부는 시 노래패인 ‘울림과 밴드’의 콘서트가 열렸다. 김시인의 시에 우덕상과 박제광이 곡을 붙인 공연이었다. 사이에 소프라노 박미란과 시낭송가 구경영이 무대에 올라 김시인의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2시간에 걸친 행사를 마치고 공원 입구 식당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오랜만에 만난 문우들과 정담을 나누다 밀양으로 갔다. 밀양 지기와 한 자리 더했더니 밤은 이슥했다.
이튿날 속이 쓰려도 산행을 나섰다. 나는 집 앞에서 101번을 타고 대방동으로 갔다. 대암산 입구는 여러 사람들이 산행에 나서고 있었다. 나는 대암산을 바로 오르지 않고 아파트단지 뒤로 난 길 따라 걸었다. 아파트단지 끝난 곳에는 삼정자동 마애석불이 있다. 마애석불 위로 난 길로 들었다. 휴일을 맞아 산행을 나선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몇몇은 새벽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청의 관련 부서에서는 등산로를 정비했다. 골짝에서 흘러오는 물길은 암거배수 시키고 길바닥 흙을 고르는 작업이었다. 마애불상에서 상점고개 갈림길까지는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었다. 나는 용제봉 방향으로 찾아 올랐다. 내가 사는 반림동 반송공원에는 아카시 꽃이 진지 오래고 때죽나무 꽃이 이지러졌다. 용제봉은 골이 깊어서인지 아카시 꽃이 아직 달렸고 때죽나무 꽃은 이제 한창이었다.
근래 비가 잦아 용제봉 골짝에는 계곡물이 많아 철철 흘렀다. 바위틈을 스쳐 지나는 물소리가 시원스레 들렸다. 나는 대암산이나 용제봉으로 오르질 않고 물이 흘러오는 계곡 따라 올랐다. 올봄에 다른 곳을 다니느라 찾아올 기회가 없었던 용제봉 기슭이었다. 용제봉 기슭에 절로 자라는 머위가 있다. 머위는 집 근처나 텃밭에 자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드물게는 산중에 야생하는 머위도 있다.
석간수가 맑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오르다 머위를 찾았다. 언젠가 이른 봄 용제봉 골짝을 찾았을 때 노루가 먼저 머위 순을 시식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다. 지금이야 녹음이 우거져 산짐승이 뜯어먹을 풀이 지천으로 널렸다. 돋아난 지 오래된 머위는 좀 쇠긴 쇠었다. 그래도 그늘진 숲 아래 자라서인지 보드라웠다. 밭둑의 머위보다 줄기는 야위고 잎은 작았다. 나는 뿌리는 남겨 두고 잎줄기만 땄다.
아마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산중에서 내가 머위 순을 딴 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계곡이 험해지는 골짝을 더 오르지 않았다. 너럭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고 계곡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아주 맑은 물이었다. 힘 들여 산정까지 오르지 않아도 산행의 묘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간밤 늦은 시각까지 채우고 비운 주독이 시원스레 쓸려가는 기분이었다. 숲은 언제나 평온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하산은 계곡을 따라 창원터널 입구로 내려왔다. 지난봄 연분홍 복사꽃이 흐드러진 산도화였다. 야생복숭나무 가지는 동글동글 열매가 맺혀 있었다. 매실보다는 작았지만 과육이 조금씩 살져 가고 있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불모산동 경작지였다. 예전에는 계단식 논에 모두 벼농사는 지었으나 이제는 텃밭으로 바뀐 곳도 더러 많았다. 불모산동 저수지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몇몇 태공이 있었다. 1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