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註- 전북 익산은 백제의 도읍지였던 충남 공주.부여와 마찬가지로 궁성, 성곽, 사찰과 왕릉 등 왕도(王都)로서의 유물과 유적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지난 73년 설립된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이같은 유물.유적과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백제 말기 익산 천도설(遷都說)을 줄곧 제기해 왔으며 지난 22-23일 연구소 설립 30주년을 기념해 이를 주제로 한.중.일 고대사 전문가들이 참석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 학설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일 경우 익산의 위상이 바뀌고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지난 30년간 논란을 빚고 있는 천도설과 향후 연구과제를 `백제말 익산 천도설'이라는 제목으로 7회에 나눠 점검한다)
`익산은 백제말 도읍지인가?'
(익산=연합뉴스) 전성옥 기자= 전북 익산이 독자적 문화권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익산지역은 마한,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지만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들 유적.유물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려는 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뜻이 모아져 지난 73년 원광대학교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설립됐다.
마백연구소의 노력으로 익산은 지리.군사.산업적 여건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이래 문화의 중심지였음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연구소의 여러 학문적 성과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익산이 백제말 천도지라는 일관된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려는 각종 발굴조사다.
익산은 고대국가 도읍지가 갖춰야 할 지리적 요건은 물론 궁터, 국가 및 왕실 기원 사찰터, 왕릉, 성곽터와 왕도였음을 시사하는 지명과 설화가 풍부하다.
우선 `왕궁리'(王宮里)라는 지명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곳은 `왕궁평' `왕검이' `왕금이'`왕금성' 등의 별칭도 갖고 있어 왕궁터였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지난 76년 마백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왕궁리 유적은 장방형(長方形)의 궁성임이 확인됐으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5년째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백제말 왕궁이라는 설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또 삼국유사(三國遺史) 무왕조(武王條)에 전하는 서동설화(薯童說話)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90년대 말 확인됐다.
각종 문헌에서 무왕과 선화비의 능으로 전하고 있는 쌍릉(雙陵) 역시 왕릉인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과 비슷한 형식이어서 이들의 무덤임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밖에 오금산성과 미륵산성, 저토성 등 수많은 백제 양식의 성곽이 왕궁을 외곽에서 방어하는 외성(外城) 역할을 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국가기원 사찰인 미륵사지와 왕실기원 사찰인 제석사지를 비롯한 여러 절터도 고대 도성불교(都城佛敎)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익산의 위상과 관련해서는 `백제 무왕이 익산에 별도를 두었다'는 `별도설'(別都說)도 제기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천도설'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에 관련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익산이 백제 말기 행정수도 역할을 했다'는 `행정수도설'도 나와 `별도설'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천도설은 우리의 역사서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중국 육조(六朝)시대 문헌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가 백제 무왕 때 천도했다는 사실을 기록, 이를 뒷받침하고 익산지역 발굴조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됨에 따라 갈수록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다.
원광대 전 총장으로 마백연구소를 30년째 이끌고 있는 김삼룡(79) 소장은 "익산은 마한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후손들이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백제 무왕은 이 세력과 결탁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백제의 중흥을 꾀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