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순(申復淳, 1464~1541) 묘갈명(墓碣銘) - 신광한(申光漢)
工曹參議申公墓碣銘
가지가 큰 나무에 잎이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에 흐름이 유원한 것과 마찬가지로 후덕한 사람은 그 후손이 번창하니, 이것은 진실로 필연적인 이치인데, 내가 대대로 내려온 우리 가문에서 이를 더욱 징험해 보았다.
공은 나의 종형(從兄)이다.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시조인 성용(成用)으로부터 드러나 4세를 거쳐 덕린(德隣)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과(文科)로 이름을 드러냈다. 고조(高祖) 휘 포시(包翅)가 처음으로 아조(我朝)에 출사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었고, 증조(曾祖) 휘 장(檣)은 공조 좌참판(工曹左參判)을 지냈다.
할아버지 휘 숙주(叔舟)는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지낸 분으로 네 번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공(功)이 종사(宗社)에 있었으므로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지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나의 선고(先考)는 8형제로 공의 아버지 휘 준(浚)은 그중다섯째이다. 그는 젊어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가문을 일으키고, 벼슬이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는데, 두 번 훈맹에 참여하여 고양 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소안공(昭安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소안공은 판관(判官) 유수창(柳秀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순(天順) 갑신년(甲申年, 1464, 세조 10)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복순(復淳)이요, 자(字)는 순지(淳之)로 나면서부터 영특하였는데, 비록 부귀한 집안에서 성장했으나 자못 학업에 뜻을 두고 문장을 짓는 데 능하였으며 해서(楷書)를 잘 썼다.
그러나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다가 갑인년(甲寅年, 1494, 성종 25) 가을에 문음(門蔭)으로 처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보임되고 중부 주부(中部主簿)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되고 장예원 사평(掌隷院司評)에 뽑혀 제수되었는데, 이는 공의 영명한 자질이 반영된 바임으로 다른 사람도 공평하다 일컬었다.
품질(品秩)을 올려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가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낭관(郎官)은 임무가 중하여 양과(兩科)를 거치지 않고서 이 자리로 옮기도록 허여하는 경우는 반드시 재주와 명망이 있어야 하는데, 공이 이 직책을 맡음에 있어 물론(物論)이 흡족해 하고서 모두 그가 재능이 있다고 일컬었다.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으로 승진했다가 또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으로 승진했는데, 모두 드러난 치적이 있었다. 마침내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승진했으니, 이는 상사(上士)가 된 것이었다. 다시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옮겼다.
을축년(乙丑年, 1505, 연산군 11) 봄에 나라에 제사지낼 일이 있어 일을 집행한 자들에게 모두 가계(加階)하였는데, 공에게는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제수하였으니, 이는 하대부(下大夫)에 해당하는 품질이었다.
병인년(丙寅年, 1506, 중종 원년) 가을에 지금 주상(主上)이 즉위할 때 원종 공신(原從功臣) 일등(一等)에 참여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으며, 이윽고 서반(西班)으로 옮겨 절충 장군(折衝將軍)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또 사복장(司僕將)을 겸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509, 중종 4)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3년상을 마치자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었고, 또 황주 목사(黃州牧使)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였다. 다시 부평(富平)ㆍ안변(安邊) 양부를 맡았는데, 공이 이르는 곳마다 끼친 사랑이 많았으므로 백성들이 오래도록 그를 사모하여 그 마음이 쇠하지 않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순리(循吏)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공이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있을 적에 나 신광한(申光漢)이 조정에서 파직되어 평민의 처지로 있었는데, 공의 친족을 친히 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서 공의 사람됨에 대해 더욱 탄복하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실제 기록이다.
병으로 인하여 급히 관직이 갈렸으나 뒤에 또 회양(淮陽)ㆍ춘천(春川)ㆍ인천(仁川) 3부(府)를 맡다가 조정으로 들어가 부호군(副護軍)이 되고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으며, 또 나아가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맡는 등 공이 주부(州府)를 맡은 것이 모두 아홉 곳인데, 그 일에 임하여 근면하고 집에 기거할 적엔 검소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함엔 인애로웠으므로 치적을 평정함에 있어 모두 최상이었으니, 아마도 옛날의 이른바 선인(善人)일 것이다.
파주 목사를 맡은이래 쌓인 피로로 초췌해져 병이 되었으므로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공훈을 우대하여 죽을 때까지 그 봉록(俸祿)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공이 졸함에 향년 78세였으니, 또한 능히 그 세덕(世德)을 계승하였다고 이를 만할진저.
공은 상호군(上護君) 이욱창(李郁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부인은 공보다 47년 먼저 죽었으므로 아들 딸이 모두 어렸으나 공은 끝내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측실(側室)에겐 또한 아들, 딸이 있다.
영(泳)ㆍ탁(濯)ㆍ열(洌)ㆍ황(滉)은 모두 적출(嫡出)이다. 영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탁은 부사과(副司果), 열은 정략 장군(定略將軍)이고, 황은 경진년(庚辰年, 1520년 중종 1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양천 현령(陽川縣令) 재임 중에 공의 상을 당하였다. 우순린(禹舜隣)ㆍ김수(金洙)ㆍ이경(李璟)은 각각 관작이 있으며, 세 적출(嫡出) 딸의 사위다.
영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석정(碩汀), 다음이 석심(碩深)이고 딸은 참봉(參奉) 유대림(柳大臨)에게 시집갔다. 석정은 공의 제사를 봉행한다. 탁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석륜(碩淪), 다음이 석회(碩淮)이고 딸은 생원(生員) 성수(成修)에게 시집갔다.
김수는 3남을 두어 인우(麟佑)ㆍ인보(麟輔)ㆍ인필(麟弼)이고, 1녀는 김인(金認)에게 시집갔다. 이경(李璟)은 4남을 두어 언눌(彦訥)ㆍ언묵(彦默)ㆍ언우(彦愚)ㆍ언로(彦魯)이고, 딸은 안공민(安公敏)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어리다. 석정에겐 단(湍)이란 아들이 있고, 그 밖의 내외의 증손은 매우 많다. 단은 종손인 까닭에 이름을 쓴다.
혼(渾)ㆍ지(漬)는 측실에서 난 공의 소생인데 모두 관상감 직장(觀象監直長)이 되었고 술업(術業)에 능하며, 자녀를 두었으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생략한 것이다. 아! 공의 행적을 살펴 그 선함을 알게 되었도다. 선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복을 받아서 자손이 번성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명(銘)을 쓰는 것이다.
工曹參議申公墓碣
木之枝大者葉茂。水之源深者流遠。人之德厚者其後繁。是固理之必然。吾於吾之家世也益驗矣。公吾從父兄也。高靈之申。著自始祖成用。歷四世至德隣。俱以文科顯。高祖諱包翅。始仕我朝。爲工曹參議。曾祖諱檣。工曹左參判。祖諱叔舟。議政府領議政。四參勳盟。功在宗社。封高靈府院君。贈諡文忠公。吾先考兄弟八人。公之考諱浚。第居五。少捷上科起家。至兵曹參知。再參勳盟。封高陽府院君。贈諡怡安公。怡安娶判官柳秀昌之女。以天順甲申生公。諱復淳。字淳之。生而穎悟。雖長於富貴之中。頗意學業。能屬文。善楷書。屢擧不中。甲寅秋。以門蔭初補義禁府都事。授中部主簿。未幾。陞司憲府監察。選拜掌隷院司評。英明所照。兩造稱平。陞秩爲宗親府典簿。遷戶曹正郞。郞官任重。非兩科而與是遷者。必有才望。公之爲是職也。物論洽然。咸稱其有幹。陞尙衣院僉正。又陞司贍寺副正。皆有見績。遂拜掌樂正。是爲上士。復移尙衣院正。乙丑春。國有祀事。執事者皆加階。公特受通政。是爲下大夫之秩也。丙寅秋。今上卽位。參原從功一等。拜工曹參議。尋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又兼司僕將。己巳。丁內艱。服闋。拜護軍。出刺永興府。又牧黃州。皆以病辭。復刺富平,安邊兩府。所至多遺愛。民之思之。久而不衰。由是得循吏名。公之牧驪州也。某罷官于朝。依以爲氓。親親仁民之政。目見而身霑。益服公之爲人。此實錄也。因病徑遞。後又刺淮陽,春川,仁川三府。入爲副護軍。兼五衛將。出牧坡州。公作州府凡九。其莅事勤。居家儉。子民仁。考績咸最。殆古之所謂善人者歟。牧坡以來。積勞成瘁。移病就第。然朝廷優以功勳之後。使不絶其祿。以至於終。其卒也。壽七十有八。亦可謂能繼其世德者歟。公娶上護軍李郁昌之女。生男四女三。夫人之亡。先公四十七年。男女咸在幼稚。公竟不娶。側室亦有男女。曰泳。曰濯。曰洌。曰滉。皆嫡出也。泳。司憲府監察。濯。副司果。洌。定略將軍。滉。擢庚辰武科。任陽川縣令而遭公喪。禹舜隣,金洙,李璟。各有爵。三嫡壻也。泳有子二女一。長曰碩汀。次曰碩深。女適參奉柳大臨。碩汀奉公祀。濯生二男一女。長曰碩淪。次曰碩淮。女適生員成修。金洙有三男。麟佑,麟輔,麟弼。一女適金認。李璟生四男。彥訥,彥默,彥愚,彥魯。女適安公敏。次女幼。碩汀有子曰湍。內外曾孫甚衆。湍宗故書。曰渾曰漬。側產也。皆爲觀象監直長。善術業。有子女而不書者。略之也。
差乎視公之履。而知其善。善由而福。福而至於枝繁而條遠。茲豈偶然耶。是爲銘。<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