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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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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걷기 좋은 섬길’ 글 싣는 순서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은 12월에도 여전히 푸르다. 겨울에 걷기 좋은 섬길 3곳을 소개한다.
① 한겨울 동백 터널, 통영 우도 둘레길
② ‘웃는 고래’ 상괭이 찾아, 완도 개머리길
③ 절해고도 섬길, 여수 초도 상산봉
초도에 가면
김진수
가슴에 별이 진 사람 초도로 가라
여수항 뱃길로 48마일
삼산호, 신라호, 덕일호 훼리호,
순풍호, 데모크라시, 줄리아나 오가고
뱃길 빨라질수록 발길은 멀어져도
해초처럼 설레는 낭만은 있다
이슬아침 소바탕길로 상산봉에 오르면
낮고 낮은 햇살에도 퍼덕이는 금비늘
희망은 가슴 터질 듯 수평선에 이르고
달빛 수줍은 갯바랑길을 따라
은하수 시거리가 이야기꽃 피우는
초도, 그 풀섬에 가면
아직도 총총한 별들이 뜬다
지난 19일 전남 여수 초도 상산봉에 오른 김진수 시인. 정상에 그가 쓴 시 '초도에 가면'이 걸려 있다. 김영주 기자
김진수(64) 시인과 여수 초도(草島) 상산봉(339m)에 올랐다. 섬 가운데 우뚝 솟은 상산봉은 김 시인이 소싯적 소를 몰고 풀 뜯기고, 소풍 가던 길이다. 초도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고등학교 때 여수로 나갔다가 4년 전 다시 초도로 돌아왔다. 지금은 상산봉 아래 가장 큰 마을, 대동리 이장이다. 그와 함께 상산봉에 오른 두어 시간은 시인의 말대로 “어릴 적 품은 꿈을 다시 꾸게 하는 길”이었다.
지난 19일 오전 7시, 전남 고흥군 녹동항에서 평화페리 11호에 몸을 실었다. 여기서 1시간50분을 달리면 여수 초도에 닿는다. 초도로 가는 배편은 녹동과 여수 2곳인데,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뜨는 쾌속선은 7시50분에 출발해 2시간을 가야 한다.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요량이라 1시간 빠른 배를 탔다. 또 평화페리 2층 객실은 따뜻한 온돌방으로 서울에서 밤새 달려온 여행객이 휴식 같은 시간을 제공했다. 실제로 거의 모든 탑승객이 누워 있었다.
여수 초도 상산봉. 김영주 기자
길이가 족히 50m는 돼 보이는 페리는 초도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상산봉을 향해 나아갔다. 마침 이날 눈이 내려 초도는 반백(半白)의 섬이 됐고, 상산봉 북쪽은 제법 쌓였다. 여수에서 직선에서 약 70㎞ 떨어진 초도에 이처럼 눈 쌓인 날은 거의 없다고 한다. 운수 좋은 날이다. 초도는 ‘풀섬’이란 뜻이다. 잡목과 잡초가 무성해 붙여진 이름이다.
차준홍 기자
배가 섬에 닿은 9시쯤, 귀밑머리가 허옇게 센 김진수 시인이 선착장에 나와 있었다. 그는 마을 이장 일을 하면서 초도여객선터미널 매표소에서 발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작은 섬 매표소마다 직원을 두지 못하는 해운사의 사정 때문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시인이 모는 1t 트럭을 타고 일주도로를 달렸다. 최근 아스팔트로 단장한 섬 둘레길은 7.7㎞. 한나절 정도 걷기에 좋다.
“여수에서 거문도 가기 전에 있는 초도는 때 묻지 않은 섬입니다. 여태 개발의 바람이 타지 않아서죠. 실제로 여긴 민박만 있고 ‘펜션’이나 ‘리조트’는 없어요. 육지에서 2시간 거리, 딱 섬이죠. 요즘 섬은 연도교로 이어진 곳이 많아 섬 같지 않은 곳이 많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초도는 원초적 매력이 있어요. 여름엔 해안가 바위틈에 전복이 보일 정도로 바다가 깨끗하고, 숭어·전어·전갱이 등 철마다 잡히는 고기는 연안 고기하곤 맛이 달라요. 바다가 깊고, 오염이 안 된 덕분이죠.”
초도 출신답게 그는 횟감을 잘 안다. 특히 ‘겨울 고기’ 예찬론자다. “봄·여름 산란 철에 잡히는 고기보다 한겨울 기름기가 가득 찬 고기가 가장 맛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서 나는 삼치 삼합, 거문도 인근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겨울 민어 등이다. 예전 레저 기자 시절, 그의 도움을 받아 지면에 소개했던 것들이다. 시인의 부인은 여수에서 오랫동안 횟집을 했다.
트럭을 타고 대동항 맞은편, 의성항에 들렀다. 여수에서 오는 배가 닿는 항이다. 배를 기다리는 사이, 잠깐 갯바위로 내려가 보니 톳과 보말·거북손·담치(토종 홍합)가 가득 붙어 있었다. 이런 갯것들이 ‘섬 바탕길(해안가)’에 가득하다고 갯바위에서 낚시하는 섬 주민들이 말했다.
여수에서 출발한 쾌속선엔 제법 승객이 있었다. 이튿날 “풍랑주의보가 예고돼 있어, 급히 섬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이라고 김 시인이 말했다. 그는 배에서 반찬거리와 과일이 담긴 박스를 받아 트럭에 실었다. 마을 부녀회에 전달해줄 반찬감이다. 마을 이장의 일이다.
어릴 적 꿈 되새기는 ‘초도에 가면’
청바지에 지팡이를 들고 상산봉을 오르는 김진수 시인. 등산로 옆으로 초록 잎이 여전하다. 김영주 기자
상산봉 오르는 길은 대동리와 의성마을 사이 바람재에서 시작했다. 길은 차가 들어갈 만큼 넓고, 바닥엔 보도블록이 깔렸다. 10여 년 전 국고 지원 사업이다. 그땐 신작로가 생겨 좋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김 시인은 “지금처럼 걷기가 유행할 줄 알았으면, 예전 흙길 그대로 놔뒀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바람재부터 상산봉 정상까진 1.5㎞ 거리다. 두어 시간이면 쉬엄쉬엄 다녀올 수 있다. 10여 분 걸어가니 ‘샘터’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봄에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길이라고 한다. 또 주변으로 정금(상동나무)이 여전히 푸릇푸릇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정금은 10~11월에 꽃을 피우고 봄에 열매를 맺는다. 블루베리와 비슷한 정금은 달달하고 맛있다.
“예전 어른들이 여기서 화전을 부쳐 먹으면서 봄놀이하던 곳입니다. 아이들은 정금 따먹으면서 놀던 곳이고요. 아직도 이렇게 정금이 많아요. 사람들이 블루베리만 알고 토종 정금을 모르는데, 봄에 여기 오면 정금이 지천이에요. 예전엔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정금을 따먹고 놀았는데. 그때 오면 참 좋아요.”
여수 초도 상산봉 오르는 길 옆에 연한 초록빛을 띤 정금(상동나무). 김영주 기자
길은 아주 편했다. 길에 눈은 스스로 녹아 없어졌다. 이날 기온은 영상 3~4도. 바람이 불지 않아 따뜻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언덕에 송신탑이 자리 잡고 있었고, 정자가 있었다. 20여 분쯤 더 올라가니 두 번째 정자가 나타났다. 이곳이 김 시인이 소싯적 아지트로 삼았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 여기 ‘묵전(묵은 밭)’이 있었어요. 여기서 소 매놓고 풀피리를 불기도 하고, 소털 뽑아 공을 만들어서 애들끼리 배구를 하기도 하고요. 초도를 풀섬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반반한 곳은 어김없이 풀이 많아서 생긴 이름입니다.”
소의 털을 뽑아 공을 만든다? 소의 털을 골라주던 빗으로 등과 배를 빗겨주면 털이 숭숭 빠지는데, 여러 마리의 소에서 나온 털을 뭉치면 둥그런 모양이 됐다고 한다. 돼지의 방광으로 축구공을 만들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소털로 배구공을 만들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도시에서 외떨어진 섬 소년들만이 하던 방식인 셈이다. 시인의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한 편의 동화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상산봉 정상은 서너 개의 암봉이 엉겨 붙어 우뚝 솟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진입로를 닦고 난간을 세워 손쉽게 오를 수 있지만, 예전엔 암릉을 기어올라야 했단다. 초도 사람들도 마음먹고 올라야 하는 곳이었고, 그래서 섬 개구쟁이의 아지트가 됐다.
여수 초도 상산봉. 정상 데크에 그의 시 '초도에 가면'이 걸여 있다. 김영주 기자
‘상산봉’이라고 적힌 정상석 바로 옆, 나무 데크에 김진수 시인의 ‘초도에 가면’ 시를 새긴 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초도의 후배 몇몇이 뜻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시는 ‘가슴에 별이 진 사람 초도로 가라’ 이 한 줄로 설명됩니다. 가슴에 별이 진 사람, 꿈을 잊어버린 사람들이겠죠. 대부분 어릴 적 꿈, 희망, 설렘, 낭만 이런 거 잊고 살잖아요. 저 자신도 포함해서. 그런 사람들이 여기 초도에 오면 길에서 정금 따먹고, 풀 냄새 바람 냄새 맡고, 후박나무 가시나무 푸른 숲길을 걷고. 그렇게 걸으면서 어릴 적 꿈을 다시 꾸게 한다는 것이죠. 또 이 근방엔 달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아요. 저 아래 동네를 달떼기미라고 했는데, 달이 뜨는 동네라고 뜻이지요. 달이 뜰 시간, 별이 총총한 시간에 이 길을 걸어도 참 좋습니다.”
차준홍 기자
일망무제 ‘360도 뷰’ 상산봉
여수 초도 상산봉. 정상석 너머로 역만도가 자리 하고 있다. 신년 일출 명소라고 한다. 김영주 기자
상산봉 정상에 서니 김 시인이 그렇게 자랑하던 ‘360도 뷰’가 펼쳐졌다. 섬 북쪽으로 고흥과 완도 땅이 해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고, 그 사이에 수십 개 무인도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맑은 날은 멀리 장흥 천관산(724m) 능선이 또렷이 보인다고 한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문도의 실루엣이 보였다. 맑은 날엔 제주 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동쪽으로 손죽도와 남동쪽 역만도가 보였다. 특히 1월 1일 상산봉에 오르면 역만도 위로 해가 떠오르는데, ‘뫼 산(山)’ 자 두 개가 붙어 있는 듯한 역만도의 두 봉우리 사이로 해가 올라온다고 한다.
바람이 불지 않아 정상에 서 있을 만했다. ‘가슴에 별이 진 사람 초도로 가라’ 시구를 떠올리면서. 누구나 김 시인이 말하는 ‘초도’를 가슴에 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고향의 산기슭일 수도 있고, 어릴 적 살던 좁은 골목일 수도 있고, 같이 뛰놀던 동무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나의 초도’를 생각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또 1월 1일 강원도의 높은 산이나, 동해가 아니라 이곳 상산봉에서 역만도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 같은 장면일 것 같다.
여수 초도 민가 옆 마늘밭. 김영주 기자
내려오는 길, 김 시인은 이장의 삶에 대해 말했다. 환갑이 넘어 고향으로 내려올 땐, 책 보고 시 쓰는 낭만적인 일상을 기대했지만, 막상 내려와 보니 더 복잡한 일에 휘말리게 되더라고 했다. 주변 섬보다 개발이 덜 된 초도는 이제야 섬 곳곳을 정비하고 외지인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초도의 대소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 많다고 한다.
“처음엔 저어했는데, 생각해 보니 거절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키워준 게 초도의 산바탕 갯바탕인데,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은 힘이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야지요. 사실 고향 사람들은 시인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지만요, 허허.”
초도의 대동과 의성마을은 최근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섬 지역 특성화 사업’에 선정됐다. 섬 주민이 주체가 된 소득 사업과 마을 특화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는 섬별로 10년간 최대 50억원이 지원된다.
여수 초도 밥상. 김영주 기자
마을로 내려오니 시인의 부인이 점심을 걸게 차려 놓았다. 섬에서 나는 횟감과 해초가 한 상이다. 숭어회를 얹은 초밥과 겨울에 잡은 전어회, 보말과 거북손 무침 등이다.
“겨울에 나는 전어를 떡전어라고 해요. 그만큼 찰지다는 뜻이겠지요. 여기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횟감입니다. 초도는 육지와 동떨어져 있고, 외지인이 많지 않아 섬 고유의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주변 갯바위가 살아 있어 해초가 싱싱하고요. 양식장 많은 섬에선 이런 자연산 해초가 다 사라지고 없어요.” 김 시인과 부인은 민박도 함께 한다.
여수 초도 밥상. 김영주 기자
여수 초도 가는 길
겨울철 여수 초도 가는 배편은 여수에서 1회, 고흥 녹동항에서 1회 운항한다. 두 편 모두 초도를 거쳐 거문도에 닿고, 다시 초도를 거쳐 뭍으로 나온다. 겨울엔 풍랑주의보가 내린 날이 많아 결항도 잦다. 여수에서 가는 쾌속선보단 녹동에서 출항하는 차도선(평화페리 11호)이 결항이 덜한 편이다.
녹동~초도를 오가는 평화페리 11호는 오전 7시 녹동항을 나서 9시 전후 초도에 닿는다. 또 이 배는 오후 2시30분에 초도를 떠난다. 당일 여행으로 스케줄을 짠다면 섬에서 약 5시간30분 머무를 수 있다. 일주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돌고 상산봉에 오르내릴 수 있는 시간이다. 점심은 선착장 주변 민박집에서 해결할 수 있다. 단, 예약해야 한다.
여수~초도 쾌속선(웨스트그린호)은 오전 7시50분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해 오전 10시쯤 초도에 닿는다. 또 거문도를 다녀와 오후 3시30분에 초도에서 여수를 향해 출발한다. 수도권에서 KTX를 이용해 여수로 내려간다면 쾌속선을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결항이 잦은 편이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