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 나타난 노동의 의미
1.성경에 나타난 노동의 의미
노동 문제는 산업 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문제라 이에 대한 가르침을 구약 성경에서 찾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구약 성경은 노동 문제에 대해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노동의 문제는 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라기보다 중심 주제들에 덧붙어 나타날 뿐이다. 또 노동에 대한 구약 본문의 수도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노동에 관한 구약 성경의 체계적인 가르침을 -이를테면 '구약의 노동관‘하는 식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작업이 된다. 그런 만큼 이 글에서는 그냥 노동에 관해 말하는 구약 성경 본문 가운데 몇 가지를 뽑아 그 내용을 간추려 보려고 한다.
① 노동을 뜻하는 구약 성경 히브리 낱말들
구약 성경 히브리말에는 '노동'또는 '노동하다'를 뜻하는 낱말이 여럿 있는데 다음 세 가지 정도를 써보도록 하겠다. 우선『아바드』라는 동사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흔히 '섬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쓰임새에서 이미 일함과 섬김, 노동과 봉사는 사람의 사람됨의 본질에 속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음으로는 『아말』이라는 명사와 그 동사형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흔히 '수고','수고하다'를 뜻하며 전도서에서 노동의 힘듦과 노동의 성과에 대한 회의를 표현하는데 자주 쓰인다. 또 '하다', '만들다'는 뜻을 지니는 『아사』와 그 명사형『마아새』도 '노동하다','노동'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② 노동하시는 하나님
구약성경은 사람의 노동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노동에 대해서 말한다. 이를 테면,온 누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몸소 노동하신 열매로 생긴 것임을 창세기 첫 부분이 알려 준다. 창세기1장7절,16절,25절은 하나님께서 각각 궁창을, 두 큰 광명을, 짐승을 '만드셨다'하고, 2장7-8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사람을 위하여 동산을 '심으시는'노동을 하셨다고 함이 그런 보기이다.
③ 노동하도록 지어진 사람
이렇게 스스로 노동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만드신 사람에게 삶의 터전으로 동산을 만들어 주신 다음 그 동산을 '갈고 지키도록' 사람을 동산에 자리 잡게 하셨다고 창세기 2장15절이 일러 준다. 이는 사람은 노동하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뜻한다. 흔히들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른 까닭에 벌로 노동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잘못이다. 2자15절은 아직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기 전의 상황을 말한다. 이에 앞서 2장5절은 아직 땅에서 식물이 돋아나려면 하나님이 비도 내리셔야 하지만 사람이 땅을 '갈아야'함을 암시한다. 2장5절과 15절에서 '갈다'를 뜻하는 히브리 낱말이 바로 『아바드』이다. 사람은 이처럼 땅을 가는 노동을 통하여 먹을거리를 만들어 낸다. 이리하여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그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노동하여 먹을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특별한 피조물이 된 것이다. 이 점은 따먹지 말라 명령하신 나무 열매를 따먹은 벌로 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달라진 바가 없다. 다만 이제부터는 이 일이 몹시 힘들어지게 된 것이다. 3장19절에서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다'한 것이 바로 이를 뜻한다. 노동 자체가 죄의 삯은 아닌 것이다. 죄의 결과로 그 노동이 수고로워졌을 뿐이다. 이리하여 노동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할 바이지 사회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사람은 그 누구이든 노동해야 한다. 이는 숙명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 가르침이다. 스스로 노동하셔서 온 누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사람도 노동하는 피조물로 만드셔서 자신과 이웃의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도록 하신 것이다. 특별히 창세기 2-3장은 이 노동의 근본이 농업노동임을 분명히 알려 준다. 따라서 땅을 가는 일을 없이 보는 오늘의 흐름은 구약 성경에 말하는 노동과 어긋난다. 농업노동 아닌 생산노동에 대해서는 4장2절과 20-22절이 말한다. 거기에 보면 농사짓는 일 말고도 짐승을 치는 일과 음악 하는 일과 기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말 해 둘 것은 구약성경은 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나눌 줄 모른다는 점이다. 땅을 갈든, 양을 치든, 음악을 하든, 기계를 만들든 노동은 전인격적인 활동임을 구약성경은 전제하고 있다. 또한 정신노동보다 육체노동을 못하게 보는 것도 구약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출애굽기 31장26절,35장25절 30절,36장1절 같은 곳에서는 손으로 하는 일조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으로 말하고, 이사야 28장26절에서는 농사 기술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본디 열심히 노동하던 사람들이었음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를테면, 열왕기상19장19절을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 엘리사는 '열두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갈고 있었고, 아모스 7장14-15절을 보면 아모스는 그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짐승을 먹이고 돌 무화과나무(개역성경에서는 '뽕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④ 노동의 삯은 보장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의 노동에는 정당한 삯이 보장되어야 함을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채어 형의 미움을 산 탓에 정든 어버이 집을 떠나 멀리 외삼촌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된 야곱은 스무 해가 넘도록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꾀를 부려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도 하였지만 마침내는 외삼촌에게서 벗어나 홀로 서기 위해 가족과 재산을 거느리고 외삼촌 몰래 달아난다. 이 사실을 늦게 서야 알고 뒤 쫓아 온 라반이 야곱을 따라 잡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라반으로 하여금 야곱을 해꼬지 하지 말라 하신다(31장23-24절). 이리하여 야곱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 이야기가 담긴 30-31장을 보면 부당하게 삯을 받지 못한 야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이처럼 야곱과 라반 사이에 일어난 갈등의 이야기는 노동으로 삶을 일구어 나가는 사람이 힘이 없어 억울함을 겪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정당한 삯을 보장해 주신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이런 흐름에서 야곱이 꾀를 써서 재산을 늘린 것과 고용주인 라반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고 달아난 것을 그리 나쁘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한다면 힘 있는 쪽에서 바르게 품삯을 주지 않고 그 힘에 맞서 권리를 찾을 방도가 없을 경우에는 이러한 비상수단을 일종의 정당방위나 자구행위로 인정한 듯하다. 이러한 정신은 또한 지닌 바가 없어서 그냥 노동으로써 먹고 사는 품꾼의 삯을 제 때에 주라는 율법 규정에서도 드러난다.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19:13)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에까지 끌지 말라…'(신24:15)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말라기를 통하여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한 자를 심판하리라 하신다(말3:5) 또한 신명기 28장30-33절에서는 사람이 노동한 열매를 스스로 맛보지 못하고 남에게 빼앗김을 불행으로 여긴다.
⑤ 강제 노동은 좋지 않다.
여기에 덧붙여 기억할 일은 강제 노동을 구약성경은 결코 좋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1장 14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해야 했던 노동의 내용 자체는 흙을 이기고 벽돌을 구워 집을 짓고 성을 건설하며 농사를 짓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애굽 사람들이 이 노동을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수단으로 삼았기에 이스라엘은 울부짖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이 개입하신다(출2:23-25, 3:7-8, 5:1-23, 6:6-7) 또한 나중에 솔로몬과 르호보암이 건축사업에 백성들을 동원하였을 때 이들이 기꺼워하지 않았음은 열왕기상 12:1-20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⑥ 쉼이 있는 노동
또한 구약 성경은 노동이 규칙적인 쉼과 어우러져야 함을 가르친다. 이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9-10)는 명령 다음에 "이는 엿새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20:11)고 그 까닭을 밝히신 데서 잘 알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노동과 쉼이 한데 어우러지는데서 완전해지듯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삶도 노동과 쉼의 어우러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쉴 새 없이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무조건 기계적으로 쉼을 주장하기 힘든 그런 경우에는 그 같은 상황이 생기도록 한 원인을 알아 고쳐야 하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이 땅에서 무엇을 그저 많이 얻으려고 스스로 쉴 새 없이 일하거나 남에게 일만 시키고 쉬지 못하게 함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⑦ 수고롭지만 기쁨도 주는 노동
사람의 '수고'에 대해 거듭거듭 말하는 전도서에서 우리 개역 성경이 '수고'라고 옮긴 히브리 낱말 『아말』과 그 동사형은 보기에 따라 '노동','노동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본디 이 낱말은 '지치다','지치게 되다'는 뜻을 지니지만 구약성경에서는 '노동'이란 뜻으로 쓰일 뿐 만 아니라 그 노동의 과정으로서 '지침','피곤','수고','고통'과 노동의 열매로 얻어지는 '소득'을 뜻하기도 한다. 전도서 1:3절 같은 데서는 사람의 노동이 수고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렇게 수고롭게 노동해 보았자 별 소득이 없음이 『아말』로 표현된다(또2:11,23,4:4,8,5:15등) 4:7-12절에서는 상속자가 없는데도 끝없이 노동하는 사람의 경우 (개역성경8절에서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로 옮긴 부분) 그 누구를 위해 노동하느냐 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 도우면서 노동하면 그 수고에 대해 보상받으리라 한다. 이처럼 전도서에서는 사람의 노동이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좋지 않게 말하면서도 달리는 2:11절과 5:18절과 9:7-9절 같은데서 노동으로 얻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기쁨이 있다는 점을 말한다. 한 가지 특별히 기억할 만한 구절로는 5:11절을 들 수 있다. 곧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가 그 말씀인데 얼핏 보기에는 이 구절이 건강한 삶은 많은 부에 있지 아니하고 노동에 있음을 뜻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부의 무상함을 말하는 흐름을 타고 있어 문맥을 고려하면 노동은 사람을 지치게 함을 뜻한다고 하겠다. 또 한 가지 히브리 낱말 『아말』과 관련하여 기억할 만한 구절은 시편 127:1절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사람의 노동하는 것이 제대로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러한 점은 신명기 14:29, 15:10, 16:15절 등에서 하나님 백성이 손으로 하는 바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는 것과 통한다.
지금까지 구약 성경 몇 군데를 뽑아서 노동에 대해 말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사람이 노동하여 하나님 주신 세상을 잘 가꾸고 지키도록 하심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 노동에는 정당한 삯과 규칙적인 쉼이 뒤 따라야 한다는 점, 노동이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하나님 주권 아래 그 노동을 통해 기쁨이 사람에게 허락되었다는 점, 노동하는 농사꾼들, 품꾼들, 종들, 외국인들을 잘 대해야 한다는 점, 강제 노동은 좋지 않다는 점 등이 그 가르침이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노동과 직업관에 근거하여 우리가 가지고 적용시켜야 할 직업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보고 또한 성경 인물의 직업관을 통해 실제로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2. 성경적 직업관의 네 가지 원리 이해하기
먼저 성경적인 세계관의 근거한 네 가지 원리에 입각해서 직업에 대한 문제를 이해할 때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직업관의 기본 정신을 깨닫고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각자 자신이 일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목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창조의 원리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일’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창조될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일이란 경제적인 소득이 따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주부가 집에서 가사를 돌보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명하신 일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현재 각자 주어진 일터에서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② 타락의 원리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인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타락해버렸다. 아담과 아와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들 사이에도 분리가 일어났고 그들이 하던 일에도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또한 일하는 것이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다. 또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들이 만들어 지기도 하였다. 특히 범죄와 직접 관련된 직업들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사회악을 조장하는 비윤리적인 일들 말이다. 이런 직업들로 고통 받을 때마다 우리들은 죄악의 실재를 알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③ 구속의 원리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직업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일에 대한 창조 원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이 말씀처럼 자기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여겨 주께 하듯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일이 새로운 의미로 받아 들여 질 것이다. 그것은 분명 바람직하고 옳은 인식일 것이다.
④ 완성의 원리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9:10) 이 땅에 살 때에는 일이 있으나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는 일이 없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안식이 있고 그것은 창조 사역을 끝내고 안식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일을 하면서 바로 이러한 완성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실 그 나라를 염두에 두고 주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그 분의 계획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 직업인들은 성경적 직업관의 뼈대가 되는 이 네 가지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일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목적을 정립할 수 있다.
2. 우리가 일해야 하는 이유?
보통 사람들의 일하는 동기를 물어보면 두 가지 대답으로 나뉜다. 하나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아실현이다. 이 두 가지는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이지만 일의 의미를 하나님의 뜻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그 동기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직업의 동기는 무엇일까? 직장 사역 전문가인 덕 셔먼(Doug Sherman)이 제시하는 직업의 동기를 참고하여 생각해보자.
① 다른 사람 섬기기
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남을 섬기는 것이 일하는 동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통해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일은 이웃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섬기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② 가족과 자신의 필요 채우기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 2:9) 이 말씀처럼 바울 사도 자신도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 이렇듯 자기 가족이나 친족을 경제적인 면에서 돌아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악하다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직업이 경제적인 보상을 얻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임에 틀림없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에게 주어진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또 일에 대한 결과로 경제적인 보상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축복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③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재물 얻기
일 자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자신과 가정의 필요를 채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돈을 버는 자세도 필요하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 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시 37:25-26)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엡 4:28) 저 말씀들처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일이며 동시에 마땅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우리는 땀 흘려 일해야 한다.
④ 하나님 사랑하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영적인 감정이나 종교적인 행위로만 제한해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열심히 일하는 것을 연결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순종이다. 그렇게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업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우선 직업을 결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 하는 과정과 결과까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사를 하나님의 뜻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결단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직업을 결정하고, 일하는 과정과 결과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3. 직업의 소명 가지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직업에 대한 소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직업 선택에 있어서 신중해야 하며 그 결정권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
① 나의 부르심
사람들은 대개 목사나 선교사 같은 이른바 성직과 관련해서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예를 보면 그렇게 느끼기가 쉽다. 하나님이 모세나 바울을 부르신 동기와 그 과정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사실상 성경보다는 교회의 전통이 평신도들을 하나님의 소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많지는 않지만 흔히 성직이라고 일컫는 일이 아닌 일반적인 직업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나님의 소명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해야 할 것이다.
② 나에게 맞는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각자 맞는 능력을 부어주셨고 또 그것으로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재능,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직업의 부르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약공급이라든지 술장사 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리가 없다. 직업의 귀천은 없지만 선악은 존재하고 또 그 선악은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 있고 우선순위가 분명하다면 직업에 대한 선악 구별은 쉬울 것이며 또 각자의 재능에 대한 발견도 올바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일을 맡기실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순종으로 응답해야 한다.
4. 비전과 사명
직업과 연관하여 비전이라는 단어와 아울러 사명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최근에는 기업들도 사명선언서를 작성하고 개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명을 진술해 보게 하여 인생에 대한 목적의식을 분명하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정의도 다르고 때로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성경적인 직업관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①‘존재 목적’이 비전이고 ‘나의 역할’이 사명!
비전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데 비해 사명은 부분적이고 구체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로 ‘내가 존재하는 목적’을 비전이라 하고 ‘그 속에서의 나의 역할’을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 비전과 사명에 관해 더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이었다. 그 비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예수님에게 주어진 사명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 특이하게도 예수님의 일생에서 30년 동안 주어진 사명은 목수였고 그 후 3년 동안의 사명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약한 자들을 고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마지막 사명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며 돌아가셨다. 그리고는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이 말씀대로 베드로와 바울의 비전은 세상에 나아가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일생을 헌신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달랐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사역했다면 바울은 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같은 비전을 가졌지만 사명이 달랐던 것이다.
이렇듯 비전은 평생을 통해서 변함없이 한 사람의 생애를 이끌어주는 소망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사명은 그 사람의 성장 과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그에게 주어진 독특한 은사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전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 사명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직업관을 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삼위 일체 하나님과 성경적 직업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을 향해 아비멜렉과 그 무리들이 이렇게 고백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21:22)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창26:28) 이방인이었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서 ‘무슨 일을 하든지’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성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삼위 일체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백성인 크리스천들과 함께 하신다. 삼위 일체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게 존재하실 뿐 아니라 구별되게 자기 백성들의 삶에 관여하시면서 온전한 연합을 이루신다. 이런 삼위 일체 진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일과 일상적인 삶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갖게 해준다. 삼위 일체 하나님에 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부 하나님, 창조 사역의 주역
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로버트 뱅크스는 『일꾼 되신 하나님(God the Worker)』이라는 책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여덟 가지 이미지를 소개하고 있다. 작곡가와 연주가, 대장장이와 토기장이, 옷 만드는 사람, 정원사와 과수원지기, 농부와 포도원지기, 목자, 천막지기, 건축가등이 그것이다. 이 이미지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관념 속에 있는 종교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각자의 일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충성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② 휴식은 하나님의 배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일과 함께 쉼도 허락하셨다. 하나님 자신도 천지를 지으신 후에 안식하신 것처럼 말이다. 만약에 안식이 없는 일을 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그 일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열심히 일한 만큼 안식을 누려야 할 것이다. 안식이라고 해서 마냥 자거나 마냥 노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안식은 주인 되신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일을 통한 아버지의 뜻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자 예수, 구원 사역의 주체
① 직장인의 기본자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기본자세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육신의 아버지를 따라 목수로 일하고, 하늘의 아버지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사람의 연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일을 하셨고 그 일의 완성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이다. 때때로 일이 육신을 위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 그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마다 목수 일에 성실하셨던 청년 예수를 떠올리도록 해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바울이 했던 말처럼 크리스천 직장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② 일터에서 고난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리자!
주님의 지상 사역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십자가의 고통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삶의 근원이 된 동시에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는 당시 종의 신분이었던 성도들이 까다로운 주인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견디도록 권면하면서 바로 그것이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길이라고 말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8) 이 말씀에서도 전해주듯이 직장에서 고난을 받을 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칠 때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며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 것에 오히려 기뻐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성령하나님, 성화 사역의 주체
① 일에 필요한 능력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
성령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주해서 맡겨진 일을 할 때마다 은사를 주신다.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그 맡은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도록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각종 재주를 갖게 하신다. 사람들은 보통 개인의 지혜와 능력으로 맡은 일을 하려고 할 때가 많지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조차도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일터에서 성령께 도우심을 구할 때, 내주하시는 성령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직장 생활에 필요한 성품과 성령의 열매
직장에서 대인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대인 관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는데 성령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성령을 좇아 사는 삶 이어야 한다. 성령이 그들의 삶 속에서 온전히 열매 맺게 될 때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선함, 충성, 온유함, 절제 등의 성품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열매들은 일터 속에서 만들어질 때 엄청난 능력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4) 삼위 일체 하나님과 크리스천 직장인
일에 치이다 보면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천 직장인은 그저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기만 한다고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일터에서 역사하시는 삼위 일체 하나님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삼위 일체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6. 일과 예배는 둘이 아닌 하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우선되는 사명은 물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드리는 한 시간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예배와 삶, 일은 어떻게 연관시켜야 할 것인가?
① 삶 자체가 곧 예배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사람’보다 ‘예배하는 사람’을 먼저 찾으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과 같다. 직장이나 학교, 또는 교회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곧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사람들을 통해 예배 받기 원하신다. 또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맡기신 세상을 다스리는 일보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예배를 원하실까? 매일 교회에 가서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해야 하는 것이 예배일까? 물론 그것도 예배이지만 예배는 근원적으로 삶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명령을 수행하는 일을 통한 예배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1:27) 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셨다. 일을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 할 때 하나님께 예배드린단 마음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②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예배의 시작
구약에서는 일과 예배가 같은 단어로 사용될 만큼 그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이렇게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자체가 예배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에 대한 창조 원리의 회복일 것이다.
7. 요셉의 직업관
직업은 하나님의 또 다른 연단과정이다.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의 사람으로 변할 수 있게 된다. 단,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만 말이다.
요셉 또한 여러 가지의 직업을 통해 연단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기다렸다. 결국 그는 총리대신이라는 높은 직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훈련에 다듬어진 결과다. 그러면 요셉이 어떻게 그 연단을 이겨내고 변화되었는지, 직업관은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지,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을 살펴보도록 하자.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살만한 두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막내로서 특별한 아버지 총애에 힘입어 일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해 바쳤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박함과 교만함이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요셉이 형들로 인해 17세 때 애굽으로 팔려간 후, 무려 13년 동안 두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는데 한번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가정 총무로서, 또 한번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의 전옥 대행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두 가지 연단을 받는다. 하나는, 자신의 잘못된 인격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온전히 바꾸는 일이다. 요셉은 과거에 자기가 형들을 억울하게 했던 상황들을 그 반대 입장에서 겪게 되고,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삐뚠 인격을 올바로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요셉이 두 번째로 겪게 되는 연단은 나중에 될 총리대신으로서 갖추어야할 경영훈련이었다. 성경에서 ‘그의 주인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한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주인이 자기 소유를 다 맡겼다’라고 표현할 만큼 요셉은 충실하였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사건도 잘 이겨내면서 사람의 눈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앞에서 일하는 자가 되었다.
요셉이 겪었던 두 가지 연단은 참으로 힘든 과정이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지어 쓰기도 했고 자신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과정 속에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 때문에 자신을 팔았던 형들까지도 용서하게 된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는 현실에 나타난 직업의 겉만을 보지 않고 내면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바라보았던 것이다.
직업이란 이런 것이다. 직업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며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마땅히 그것을 통해 훈련받을 것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8. 동화로 본 참된 일의 의미
- 세 나무의 꿈 -
【아주 먼 옛날, 아기 나무 세 그루가 살고 있었습니다. 세 나무들은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첫째 나무가 말하길, “우와! 저 반짝이는 별들을 좀 봐! 다이아몬드 같지 않니? 저 보석을 많이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함이 될거야.” 이어 둘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냇물이 흘러서 어디로 갈까? 아마 넓고 시원한 바다로 가겠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범선이 되어서 멋진 왕의 모시고 큰 바다를 항해하고 싶어.”마지막으로 셋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난 키가 아주 커질 거야.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뻣뻣하게 서 있는 나를 보면 크신 하나님을 생각하겠지?”
그날 이후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바람도 불고,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 세 사람이 산마루에 올랐습니다.
“우와! 이 나무는 참 아름답군! 아주 안성맞춤이야.”
“이 나무는 아주 튼튼한걸! 난 이걸로 결정했어.”
“난 뭐 아무 나무라도 괜찮아.”
그렇게 세 사람은 이야기를 한 후 나무들을 베어갔습니다.
“우와 이제 아름다운 나무가 되겠지?”
“난 이제 큰 배가 되어서 멋진 왕을 모시고 바다로 나가게 될거야.”
“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세 나무들은 기대감으로 들떴습니다. 그러나 첫째 나무는 보석함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저 소나 말의 먹이를 담는 구유가 되었습니다. 둘째 나무는 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멋진 왕이 아닌 비린내 나는 물고기를 싣는 고깃배가 되었습니다. 셋째 나무는 길고 두툼한 기둥이 되어 목재소 한 켠에 쌓여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야. 난 그 산에 남아서 하늘을 향해 서 있고 싶었는데…”
어느 겨울 밤, 젊은 부부가 아이를 안고 왔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구유에 눕혔습니다. 그 아기는 만왕의 왕이었습니다.
“집에 있었으면 내가 요람을 만들어 줬을 텐데.”
“그래도 구유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두 젊은 부부는 말했습니다. 첫째 나무는 아기 예수님을 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담고 있구나!”
둘째 나무로 만든 낡은 고깃배에 어느 날 한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올라왔습니다. 배가 한 가운데 왔을 때였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쳤고 고깃배는 무서웠습니다. 그 때 한 남자가 바다를 향해 말했습니다. “잠잠하라!”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와! 내가 하늘과 땅의 왕을 모시고 있구나!”
어느 금요일 아침, 셋째 나무는 몇 해 만에 목재소가 아닌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한 남자의 어깨에 걸쳐진 채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병사들은 남자의 손발을 묶어 셋째 나무에 못 박았습니다. 사흘 뒤 세상은 새롭게 변하였습니다. 셋째 나무는 예수님이 못 박히신 그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튼튼하고 가장 영화롭고 싶었던 세 나무의 꿈은 더욱 멋지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짧은 동화를 통해 ‘일’에 대한 사명과 참된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그리고 세상에 보기에 하찮게 느껴지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고 계획하신 길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값진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그 일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고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눈과 각자의 잣대의 틀 속에서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 뜻을 따르고 마땅히 그 일을 하는 것이 믿는 자로서의 자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직 부족하고 나약한 나이지만, 내 직업관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과 또 나의 순종할 것들에 대해서 담아 보고자 한다.
9. 나의 직업관
-나의 비전, 나의 사명
나는 고등학교 때 방송반을 한 이후로 쭉 기자가 되는 것을 꿈꿔왔다. 나는 그것이 내 사명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그 생각은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나는 기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란 것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때부터 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절 써주세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해 주세요.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 알려주세요,” 나의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셨다. 오히려 침묵하셨다. 나는 그렇게 1년을 아무런 사명을 꿈꾸지 못한 채 지내야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분명했던 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과 난 하나님의 계획대로 내 삶을 꾸려가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넌 뭐가 될 거니?”라고 물어볼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 대 놓고 “전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아직 모르지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은 본드에 붙어버린 것처럼 전혀 떨어지지 않곤 했다. 그렇게 마치 어둠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다리에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만 같았던 1년이 지나가고, 나에게 내 미래 계획에 관한 실마리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동’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단지 아동에 대한 마음이었다. 구체적으로 교사도 아니고 아동 심리치료사도 아닌 단지 ‘아동’그대로였다. 하지만 난 감사했다. 드디어 나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만큼 많이 성숙해졌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의 방향을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직 아동 이외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그 가운데 소명이 있기에 지금은 아무것도 불안해하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물론 나의 미래 설계도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지만 현재의 삶도 하나님이 주신 일에 속하고 또 그 가운데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한 시간 한 시간 공부하고 생활하는 것이 예배가 되길 원하고 또 모든 것을 주님께 하듯 하길 원한다.
이 과제를 준비하면서 직업관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고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또 하나님께 영광 올리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최관하 선생님이 쓴 ‘울보선생’이란 책을 보게 되었는데, 이 책은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독교사라는 사명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또 그 학교라는 일터 가운데서 항상 기도로 준비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려 애쓰고 또 인격적으로 대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일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새삼 느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행하는 것이 믿는 자로서 가져야 할 직업관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요즘 사회에는 물질 만능주의가 온 사람들의 목적의식을 지배해 그들의 인생 목표도 돈에 도달하고 있다. 그래서 직업을 선택할 때도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먼저 판단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열중한다. 돈이 많으면 편한 사회, 대접받는 사회 속에서 누구라도 돈을 많이 가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돈에 내 목적을 두지 않겠다. 내가 일하고 공부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지 내 수중에 돈을 한 푼 더 모으려는 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직업과 사명이 돈을 많이 벌 수 없는 것일지라도, 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쁜 삶이라면 마땅히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더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 직업의 종류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넓은 세상이다. 넓은 세상이니만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도 넘쳐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때론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곳곳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것들이 진리로 둔갑한 채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올바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을 온전히 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어려운 길을 이미 택했고, 내 앞엔 그 길만이 놓여 있다. 세상이 보기엔 어렵고 재미없는 길일지 모르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은 나에게 있어 제일 즐겁고 신나는 길이다. 또 내 앞을 환히 비춰주는 등불 같은 믿음이 있기에 더욱 평온한 길이다.
《참고 문헌》
크리스천@직장 - 방선기 지음
구약성서가 말하는 노동 - 박동현 교수(장신대, 구약학)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젼 - 리챠드 미들톤․ 브라이안 왈시 공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 홍선건 지음
울보 선생 - 최관화 지음
첫댓글 사람이 노동하여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잘 가꾸고 지키도록 하심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고..
일과 예배는 둘이 아닌 하나..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창조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예배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