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지불(辟支佛, pali. 빳쩨까붓다/paccekabuddha) >
벽지불(辟支佛)을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프라트예카붓다(pratyeka-buddha),
빠알리어로 빳쩨까붓다(pacceka-buddha)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 원어 프라트예카(pratyeka), 빠아리어 빳쩨까(pacceka)는
모두 ‘홀로’ 또는 ‘도움을 받지 않고(by oneself)'를 뜻한다.
‘벽지불’이란 스스로 진리를 깨달으신 분을 말한다.
모든 성자들도 스스로 진리를 꿰뚫고 가르침을 스스로 경험하거늘
왜 벽지불을 두고는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분이라고 하는가?
물론 모든 성자들도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지만 여기서는 그런 통찰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의지해 진리를 통찰한다.
다른 이로부터 가르침을 듣지 않고는 예류도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르게 깨달음을 성취한 분[正等覺者]은 다른 이들의 의지처가 되면서
진리를 깨닫는다. 그러나 이 벽지불들은 다른 이의 도움도 없고
또는 다른 이를 인도할 능력도 없이 진리를 깨닫는다.
그러므로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벽지불들이라고 한다.
빠알리어의 경우, 빳쩨까(pacceka)는 paṭi(~에 대해)+eka(하나)가 합성된 단어로
그 뜻은 ‘각각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별도로, 홀로’라는 말이다.
따라서 원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에 따르면,
(skt)프라트예카 붓다 또는 (pali)빳쩨까 붓다는,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은 이를 뜻하는데,
한역 경전과 논서들에서는 이러한 원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을 반영해 대개 독각(獨覺)이라고 번역한다.
예를 들어,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한 <대지도론> 등에서
벽지불(辟支佛)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현장(玄奘: 602~664)이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 <대비바사론>, <구사론>, <유가사지론> 등에서는
독각(獨覺)이라 번역하고 있으며, 독수성(獨修聖)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교법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나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깨달아서
세상에 법을 선포하지 않고, 반열반에 드는 분이 바로 벽지불(독각, 연각)이다.
벽지불을 벽지가불타(辟支迦佛陀)라고도 한다.
벽지불(辟支佛)이란 중국에서 빳쩨까(pacceka)라는 음을 소리 번역한 것이고,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며, 혼자 깨달았다고 해서 독각(獨覺)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물의 원인을 따져서 깨달았다고 해서 연각(緣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어 연각(緣覺)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연(緣)으로 깨쳤다’는 뜻으로
12연기를 관찰해 깨달음을 증득한 이를 뜻한다.
12연기를 관찰해 홀로 깨쳤다는 뜻에서 연일각(緣一覺)이라고도 하고,
인연법을 관찰해 깨쳤다는 뜻에서 인연각(因緣覺)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에서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3승(三乘)의 교의를 주장하면서 성립된 것으로,
3승의 교의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성문승(聲聞乘)은 ‘사성제의 관찰이라는 탈것[乘]’을 뜻하고,
연각승(緣覺乘)은 ‘12연기의 관찰이라는 탈것[乘]’을 뜻하고,
보살승(菩薩乘)은 ‘6바라밀의 실천이라는 탈것[乘]’을 뜻한다.
원래 연각승이라는 말은 ‘12연기의 관찰이라는 탈 것’ 즉
12연기의 현관(現觀)이라는 수행 또는 교법을 의미했으나,
이러한 수행 또는 교법에 의지해 성도(聖道)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도 함께 가리키는 말이 됐고,
이에 따라 연각(緣覺)과 연각승(緣覺乘)은 서로 동의어로 사용되게 됐다.
연각 또는 연각승이라는 낱말은 3승의 교의를 주장하거나 지지하는 대승불교 경전과 논서들에서 주로 사용된다.
한역 <아함경>에서는 연각(緣覺) 또는 벽지불(辟支佛)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독각(獨覺)’이라는 낱말이 사용되고는 있으나 연각 또는 벽지불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고타마 붓다가 무사독오(無師獨悟)한 것,
즉 스승에 의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한 것을 가리키는 뜻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독성(獨聖), 독수성(獨修聖) 혹은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불리며,
흰 눈썹과 수염을 길게 기른 노승의 모습으로써 묘사되며, 독성각이나 삼성각이라는 전각에 모셔지고 있다.
벽지불은 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성문(聲聞, sravaka)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 즉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도(道)를 깨치고,
고요와 고독을 즐기며 설법교화를 하지 않는 성자를 말한다.
벽지불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남을 깨닫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므로 완전한 부처와는 구별된다.
즉, 깨달았다는 뜻에서는 부처님과 같지만 중생들에게 법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부처님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과도 다르다.
상좌부 불교에 따르면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에는 부처, 벽지불, 아라한의 세 가지가 있다.
아라한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제자, 즉 성문(聲聞)이라고 한다.
부처, 벽지불, 아라한은 모두 깨달은 분들이지만 깨달음의 자질은 서로 다르다.
부처님은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할 수 있지만
벽지불은 홀로 지내는 부처들이어서 원칙적으로 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다.
아라한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긴 하지만 부처님처럼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벽지불은 남에게 법을 전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얻은 깨달음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꾼 꿈’에 비유된다.
그리고 벽지불의 지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보다 낮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한 시기에 오직 한 분만 출현하는 부처님과는 달리 출현하는 벽지불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은 히말라야에 있는 간다마다나산(香醉山, Gandhamādana)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인연의 법칙을 관찰해 정각(正覺)을 이룬 뒤
삼칠일(21일) 동안 선정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한편,
자기가 깨달은 인연의 이치를 중생들에게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그러나 정각의 진리가 너무 어려워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대로 열반에 들어버릴 것을 생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의 상태를 독각(벽지불, 연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범천(梵天)이 석가모니 앞에 나타나서 법을 설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타락과 고뇌가 더할 것이므로 마땅히 설법해야 함을 간청했고,
이에 석가모니는 중생교화를 결심했다. 이때의 석가모니는 독각이 아니라 부처이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상으로는 연각이나 독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연각이나 독각의 독자적인 가르침도 없다.
대승불교에서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법문을 연각의 근본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구분은 뚜렷한 근거가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각이니 벽지불이니 하지만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부처나 아라한(성문), 보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일종의 설화 상태로 가상한 것이기에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고승들이 삼승의 법을 밝힐 때 연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조선 중기의 고승 언기(彦機)는 “부처님이 성문을 위해 사제(四諦)를 설하고 연각을 위해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하고, 보살을 위해 방등(方等)의 법문이나 <화엄경>을 설했지만,
그 모두가 한 가지 이치에서 설해진 것이고, 그 근본이 묘심(妙心)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초기경전 맛지마 니까야(116) <이시길리 경(Isigili Sutta(MN116)>은
벽지불(辟支佛, 연각, 독각)에 대해 소개하는 경이다.
부처, 즉 깨달은 자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여래-아라한-정등각」과 「벽지불(독각, 연각)」,
이렇게 두 부류이다. 부처는 스승 없이 깨달은 아라한을 말하는데,
「여래-아라한-정등각」은 깨달음 이후 세상에 법을 설한 부처이고,
「벽지불(독각, 연각)」은 법을 설하지 않은 부처이다. 세상에는 탑을 세울만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여래-아라한-정등각과 벽지불, 그리고 여래의 제자와 전륜성왕이다.
이때, 「벽지불(독각, 연각)」은 아라한보다는 위, 여래-정등각의 아래에 위치해 자리하는데,
공양 받을만한 자 즉 복전(福田)에 속한다.
다음은 <이시길리경(Isigili Sutta(MN116)>에 나오는 법문의 일부이다.
「“비구들이여, 이 이시길리 산은 다른 이름과 다른 명칭을 가졌었다.
비구들이여, 옛날에 오백 명의 벽지불들이 이 이시길리 산에 오래 머물렀다.
그들이 이 산에 들어가는 것은 봤지만 들어간 후로는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보고는, ‘이 산이 이 선인(仙人)들을 삼켜버렸다.’라고 말했고,
그래서 이시길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는 벽지불들의 이름을 말하리라.
비구들이여, 나는 벽지불들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리라.
비구들이여, 나는 벽지불들의 이름을 설하리라. 그것을 듣고 마음에 잘 잡도리하라.
이제 설하리라.”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아릿타라는 벽지불이 이 이시길리 산에 오래 머물렀다.”」
다음 역시 <이시길리경(Isigili Sutta(MN116)>의 일부이다.
「상좌부에서는 부처님께서 불자들의 보홀를 위해 설하신 빠릿따(護呪)로 분류하는 경전이 몇 가지 있다.
<이시길리경>도 그 중 하나로 유명한 경전인데, 이 경전은 부처님이 탄생하시기 전에
이시길리산에 머물렀던 벽지불을 찬탄하는 법문이다.
<이시길리경>을 독송하는 분들에게 호법신장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한다.
실제 남방에서는 귀신에 의해 시달림을 당하는 불자들이 이 경전을 독송한다고 한다.」
문자적으로 ‘이시길리(isi-gili)’는 선인仙人(isi)과 산山(gili)의 합성어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본경이 보호주(保護呪)로 암송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경은 <맛지마 니까야>의 보호주라 할 수 있다.
보호주 혹은 호주(護呪)로 옮긴 단어는 빠릿따(paritta)이다. 이것은 ‘보호’라는 뜻을 가졌으며,
일반적으로 질병이나 악령의 해코지나 다른 위험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을 뜻한다.
빠릿따는 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4부 니까야와 <숫따니빠다> 등의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경들인데
보호의 목적으로 독송되기 때문에 빠릿따라 불리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첫댓글 아릿타라는 벽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