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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질문하는 인간 Homo interrogatorius
ysoo 추천 0 조회 47 18.05.15 12: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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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인간 Homo interrogatorius

 

① 나의 첫 질문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 진보와 발전은 의문과 질문에서 비롯된다. 인류 문명과 문화를 바꾸는 과학과 기술이야말로 의문과 질문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들이다. 의문을 질문으로 바꾸어 제시하고 제기하는 과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 인간과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본다<필자 주>.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1533~92)가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말은 ‘끄세주(Que sais je?)’였다.

이 말을 나는 중학교 때인가 “내가 무엇을 알랴?”라는 뜻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요즘의 번역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가 대세인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알랴?”는 남들에게 던지는 반어적 질문에 가깝고, “나는 무엇을 아는 가?”는 스스로에게 묻는 대자적(對自的) 의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의문과 질문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봉건 사회에서 성실한 회의론자 몽테뉴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로서 ‘인간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데’ 봉사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식의 목적은 현세에서 더 올바르게, 더 생산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 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의 의문 또는 질문을 통해 서양인들은 천국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생활을 적극적으로 영위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몽테뉴의 정신은 독일의 레클람, 미국의 펭귄, 일본의 이와나미(岩波)와 더불어 세계적 문고로 알려진 프랑스의 끄세주문고라는 이름에 지금도 살아 있다.

 

승려시인 한용운(1879~1944)의 시 ‘알수 없어요’는 이렇게 돼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 시는 본질적으로 의문인가 질문인가.
여성적 어조와 반복되는 의문형 시구를 통해 한용운은 절대자인 임에 대한 그리움과 절대자의 신비, 그리고 불교의 윤회사상과 연기설(緣起說)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진술한 부분은 소멸의 이미지를 생성의 이미지로 연결한 고차원적 역설이다.

 

의문이 개인적이며 내적이며 대자적(對自的)인 것이라면 질문은 사회적이며 외적이며 대타적(對他的)인 것이다. 의문이란 무엇인가를 의심스럽게 생각하거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문제나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질문이란 모르거나 의심나는 점을 남에게 묻는 것이다. 인간은 의문이 생기면 자신이나 타인 또는 사회와 시대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된다.

 

질문을 하는 행위는 묻는 행위 자체이면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
인가를 묻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며 묻는 것은 발언하는 행동이며 묻는 것은 의견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질문을 함으로써 답을 얻지만,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 나간다.

 

소통과 공감의 방법 ‘질문’

 

프랑스의 작가 겸 실존철학자 사르트르(1905~80)는 <존재와 무>라는 저서에서 질문은 인간이 세계에 탐구적
으로 관계하는 원초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질문은 인간이 물어지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앎의 비존재,존재가 부정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적 비존재, 그 존재를 규정하는 한정으로서의 비존재라는 3중의 무를 조건으로 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는 언제나 무가 따라다닌다고 한다. 난해한 말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1908~61)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질문은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관계로서 철학 그 자체라고 말했다. 철학이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지각적 믿음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남에게 질문하고 함께 답을 구해가는 과정은 정치일 수 있다. 여기에서의 질문이란 소통과 공감의 방법이며 지금 여기의 대중의 생각은 물론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장래에 대한 독심술일 수도 있다.

잘 묻는 사람은 잘 듣는 사람일 수 있다. 묻는 것을 꺼리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말은 적게 하고 묻기를 좋아하며 크게 다스리라는 이른바 소언(少言), 호문(好問), 치대(治大)의 제왕학이 전승돼 왔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말을 적게 하면 억울하게 오해
받거나 의견이 없는 사람으로 비치기 쉽고, 물으려면 그 만큼 자신을 낮춰야 되며, 크게 다스리려면 무수히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 자라면서 여러 사물과 일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며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 의문
을 질문으로 바꾼다. 어린 아이의 끝없는 질문을 생각해 보라.

질문 자체의 존재를 알게 된 뒤에는 질문하는 방법에 눈 뜨게 되고 질문을 하는 계제와 시점을 이해하게 되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을 때의 반응과 대처방법을 익히게 된다. 그런 과정의 학습과 반복을 통해 의문자는 질문자로, 질문자는 응답자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질문 중심의 교육 이뤄져야

 

나의 최초의 질문은 무엇이었던가. 남들이 기억해 주는 나의 첫 질문은 할아버지에게 던진 것이었다. 두세 살
무렵,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이 버릇없는 손자는 수염을 잡아당기며 “밥 어디로 먹었니? 요기로 먹었니?”하며 입을 가리켰다고 한다. 수염을 쥐어뜯는데도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귀여워 허허 하고 웃던 할아버지는 “그래,요기로 먹었다. 입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질문에 무슨 의미라고 할 만한 건더기가 하나라도 있었을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살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 밥은 입으로 먹는다는 것, 그 두 가지를 어린 녀석이 알고 있었다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천재는 어려서부터 비상하고 특별한 질문을 해 어른들을 놀라게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천재성이나 비상
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 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는동안, 필자가 남이나 교사에게 던진 질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사물이나 삶에 대한 의문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를 질문으로 바꾸는 사회화과정이 익숙
하지 않았다. 아울러 우리나라 교육도 질문을 중시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질문보다는 경청, 그리고 무엇보다
암기에 치중할 뿐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의견 제시와 토론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교육에 익숙지 않다.

 

천자문을 배우는 학동 중에서 똑똑한 아이는 맨 처음 나오는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부터 의문을 갖는다.

하늘이 검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하늘은 파란데 왜 검다고 하나요?”

이런 질문에서부터 새로운 사고와 사상이 펼쳐질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질문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잘 알아야 한다.

 

 

 

 

② 스승과 제자

 

시처럼 아름다운 산문 <유몽영(幽夢影)>을 쓴 중국 청나라 때의 문인 장조(張潮·1659~?)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성현이 아닌 바에야 어찌 능히 알지 못하는 게 없으랴?

하나만을 알고 그 하나에 그칠까 두려워 그 둘을 알기를 구하는 자는 제일 윗사람이요,

그 하나만을 아는 데 그치고 다른 사람의 말로 비로소 그 둘이 있는 것을 아는 자는 그 다음 사람이요,

그 하나만 아는 데 그치고 다른 사람이 그 둘이 있다고 해도 믿지 않는 자는 또 그 다음 사람이요,
그 하나만을 아는 데 그치고 그 둘이 있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싫어하는 자는 아래의 아래 사람이다.”

 

 

이 말은 사실 ‘영원한 스승’ 공자(BC 551~BC 479)의 곤학론(困學論)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아는 사람이 으뜸이요, 배워서 알게 된 사람이 그 다음이다. 깨닫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힘써 배우는 사람은 또한 그 다음이다. 깨닫지 못했는데 힘써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장 하류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래의 아래(下之下)’보다 더 못한 사람은 아닌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 있다는 말 자체를 모르는 ‘아래의 아래의 아래’ 사람은 혹시 아닌가?
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둘도, 셋도 있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은 누구든 다 나의 스승이다.

 

 

질문과 답변으로 태어나는 스승과 제자

 

중국 당나라 때의 문인 한유(韓愈·768~824)는 ‘사설(師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치며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면 누군들 의혹이 없겠는가? 의혹이 있으면서도 스승에게 배우지 않는다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전도(傳道) ·수업(授業)·해혹(解惑) 세 가지를 스승의 역할이라고 갈파한 한유의 글은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의혹을 풀어주는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교사의 날(9월 10일) 하루 전 베이징사범대를 방문했을 때 ‘전도·수업· 해혹’을 인용하며 학생들을 잘 가르치라고 당부했다.

 

 

▶▶ 공자와 제자들이 음악을 즐기 는 고사를 그린 ‘행단고슬(杏壇鼓瑟)’. 겸재 정선 작.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스승과 제자는 질문과 답변으로 만난다.
질문이 답변일 수도 있고 답변이 질문일 수도 있는 관계 속에서 둘은 새로 태어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만난 황상(1788~1870)은 재주가 둔한데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다산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를 주었다.

아울러 병심확(秉心確·마음을 굳게 가짐)을 강조한 다산은 수많은 질문에 적절한 답으로 제자를 이끌어갔다.

 

질문의 중요성에 대해 조선 후기의 선비 혜환 이용휴(1708~82)는 ‘호문설(好問說)’에서 “순(舜)임금과 공자도 묻기를 좋아했는데 이보다 못한 사람들은 어찌 해야 하겠느냐”며 “사물의 명칭이나 수치와 같은 것은 반드시 묻기를 기다린 뒤에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가르치는 게 좋은 스승인가. 공자는 개인별 맞춤형 질문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스승에게 말린 고기 열 마리를 바치는 속수(束修)의 예절을 갖추면 누구든 가르쳤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69?~BC 399)도 ‘문답의 교육자’였다. 그는 델포이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강조했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 추구’에 주력한 게 소크라테스다.

 

참스승은 공 들여야 만날 수 있어

 

스승과 제자는 문답과 학문만이 아닌 정의 교류로도 만난다.

혼인한 뒤 황상이 잘 찾아오지 않자 삐친 다산은 편지에 “아내와 각방을 쓰라”고 할 만큼 서운해 했다. 스승이 세상을 뜨면 상복을 입지는 않지만 3년 동안 마음속으로 애도하는 심상(心喪)을 치른다고 한다. 그러나 스승의 사세(辭世)는 3년 만에 탈상을 할 수 있는 작별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을 알게 해 준 것은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글이다. 우리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은 것을 알게 됐다.

 

 

▶▶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 비드 작. 왼쪽에 앉아 있는 이가 플라톤이다. Jacques-Louis David - The Death of Socrates

 

 

스승은 어디에나 있다고 한다.

공자는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고 했다.

덕무상사(德無常師),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말도 있다.

시는 한 글자만 바꿔도 확 달라진다. 한 글자만 고쳐 주어도 나의 스승, 일자사(一字師)다.

또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라고 한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다 내 스승이라니 사람은 물론 환경이나 사물도 스승인 셈이다. 그러니 굳이 스승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선현 등의 글이나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사숙(私淑), ‘남 몰래 선한 것을 본받는다’고 한다.

이와 달리 스승에게서 직접 배우는 것을 친자(親炙), ‘고기 굽는 것을 보며 배운다’고 한다.

누가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일까? 그런 스승을 공들이지 않고 저절로 만나는 것은 지복(至福)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택사삼년(擇師三年), 스승을 고르는 데 삼년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한다

 

스승을 만날 때는 항상 의혹을 품고, 의문을 머금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서예가 박원규 씨의 아호는 하석(何石)이다. 하(何)는 육하원칙을 다 담은 의문사다. 늘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의문이 샘솟는다.

하석은 스승 강암 송성용(1913~99)에게 수시로 질문을 했고 스승은 언제나 기탄없이 답해 주었다고 한다. 한유가 말한 해혹자(解惑者)의 전형이다.

퇴계 이황(1501~70)은 “스승은 산속의 샘터와 같아서 제자들은 각기 필요한 만큼 마시고 간다(如群飮於河 各充其量).”고 말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공부한 만큼, 의문을 가진 만큼 마실 수 있을 뿐이다.

문도 알아야 할 수 있다. 질문에도 질이 있다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에게 “나루터가 어딘지 물어오라”고 지시한 데서 문진(問津)이라는 말이 생겼다.

강을 건너는 나루터는 중요한 삶의 길목이다. 인문사회학자와 과학기술인·예술가 등 40여 명은 2008년부터 학제 간 연구·토론모임인 ‘문진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잘 보이지 않는 길과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를 함께 찾자는 취지이다.
사람은 나루를 함께 찾으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를 연구해 온 대학교수는 제자로부터 “왜 그렇게 아우구스티누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어물어물했던 그는 그뒤 “아우구스티누스 안에 내 모습이 있어서.”라는 대답을 마련했다. 제자가 질문을 통해 스승을 계발한 것이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못한 게 아니며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나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우생(友生)을 자처한 스승이 있다. 선생님이 아니라 벗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나는 감춘게 하나도 없다. 너희들에게 무슨 행동이건 보여주지 않은 게 없다(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고 말했다.


나는 지금 어떤 스승이며 어떤 제자인가?

어떤 문진을 하고 있는가? 늘 잊지 않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글_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글쓴이는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논설실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일보 논설고문,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
동대표,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출처 :

THE SCIENCE & TECHNOLOGY

2014 + 12 과학과 기술

 

 

 

.................

 

 

 

 

 

 

살구꽃과 행단(杏檀)

 

살구와 관련된 고사성어(古事成語)에 '행단(杏檀)' 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유지(遺趾)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그후 학문을 하는 곳, 강당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공자는 어느날 숲속을 산보하다가 조금 높은 언덕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글을 읽게 하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장자(莊子)》)

그후 송(宋)나라 건흥(建興) 연간에 공도보(孔道輔)가 공자의 묘(廟) 앞에 단을 만들고 그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어 행단이란 이름을 붙였고 금(金)나라 때 학사 당회영(黨懷英)이 행단(杏檀)이란 두 글자의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행단 주변에 심었다는 나무가 살구나무냐 은행나무냐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행(杏)자는 살구나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은행나무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곳이 강학(講學)의 장소였다면 정자나무를 생각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은행나무가 타당한 것처럼 생각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림에 이 고사도(故事圖)를 그린 〈행단고슬(杏檀鼓瑟)〉이란 화제의 그림(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주위에 서 있는 나무가 살구나무가 아닌 은행나무처럼 보이며 거문고는 다른 사람이 타고 있고 공자는 경청하고 있다.

 

그리고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행단변증설(杏檀辨證說)〉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행(杏)은 도행(桃杏)이라고 하는 경우의 행(杏)이 아니고 문행(文杏)의 행(杏)을 말하는 것인데 속명으로 은행 또는 압각수(鴨脚樹)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동성묘(東聖廟) 뒤에 있는 명륜당(明倫堂) 앞뜰에도 둘레에 문행이 심겨 있는데 역시 행단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위의 그림이나 글에서는 명백하게 행단의 나무를 은행나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중국의 백과전서식 문헌인 《사문유취(事文類聚)》 《연감유함(淵鑑類函)》 《시학전서(詩學全書)》 등의 문헌에는 행화(杏花)조에서 행단을 설명하고 있고 장저(張)의 시에 "살구꽃 핀 단 위에서 퉁소소리를 듣는다(杏花壇上聽吹簫)"는 구절이 있고 이군옥(李郡玉)의 시에 "서로 행화단 속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相約杏花壇裏去)"는 구절을 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의 강희맹(姜希孟)의 시에도 "단상의 살구꽃 붉은빛이 반은 사라졌다(壇上杏花紅半落)"고 되어 있다.

 

민요 〈꽃노래〉와 《심청전》의 〈화초가〉의 가사에서도 "칠십 제자 강론하니 행단춘풍에 살구꽃"이란 구절이 있고 〈변강쇠가〉에서는 "살구나무 베자하니 공부자(孔夫子)의 강단"이란 구절이 나온다.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 실려 있는 〈행단예악(杏檀禮樂)〉이란 그림에는 살구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로 보면 행단의 나무를 살구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살구꽃과 행단(杏檀)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3.10, (주)넥서스)

 

 

 

 

 

 

본문중에 "스승에게 말린 고기 열 마리를 바치는 속수(束修)의 예절을 갖추면 누구든 가르쳤다" 는 글이 있는데 "말린 고기 10개를 묶은 것을 속(束)" 이라 했습니다. '열 마리'가 아니고 '열 개'의 오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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