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록수] 불개미와 같이(3)
동혁은 한참이나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서, 창호지로 새로 바른 들창이, 석양에 눈이 부시도록 반사하는 회관을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회원들을 돌려다 보며,
“우리 낙성식두 못해서 피차에 섭섭헌데, 그 대신 뭐 기념될 일 하나 해볼까?”
하고 벌떡 일어선다.
“무슨 일요?”
하는 회원들의 얼굴에서는,
‘간신히 오늘 하루나 쉬려는데, 또 무슨 일을 허자누.’
하는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그저 괭이허구 삽허구만 들구서 나만 따러들 오게나.”
하고 동혁은 회관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이을 때 쓰던 사닥다리를 둘러메더니, 산등성이를 넘는다. 회원들은 멋도 모르고 동혁의 뒤를 따랐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도 점점 엷어질 무렵에는, 회관 앞마당이 턱 어울리도록, 두 길 세 길이나 되는 나무가 섰다.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 같은 겨울에도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는 교목(喬木)만 골라서 ‘봄이나 가을에 심어야 잘 산다’고 고집을 하는 회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다가, 옮겨 심은 것이다.
그것은 동혁이가 근처를 돌아다니며 미리 보아두었다가, 나무 주인에게 파다 심을 교섭까지 해두었던 싱싱한 나무들이었다.
새로운 회관에 들게 되는 날 아침에,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는 더한층 새되고 씩씩하였다. 조기회원들이,
“엇둘! 엇둘!”
하고 체조를 하는 소리도, <애향가>의 합창도, 전날보다 우렁찬 것 같았다.
새집을 구경도 할 겸, 새로 닦아놓은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는 바람에, 그동안 게으름을 부리던 조기회원들도 전부 다 오고, 타동에서 온 구경꾼도 오륙십 명이나 되어서, 운동장이 삑삑하게 찼다.
오늘은 영신이가 조직해주고 간 부인근로회의 회원들도, 십여 명이나 건배의 아내를 따라서 참례를 하였다. 아무에게도 낙성식을 한다고 광고를 한 것도 아니요, 건배는 무슨 일이든지 크게 버르집고(파서 헤치거나 크게 벌려 놓는다) 뒤떠들려고만 든다고, 동혁이와 의견 충돌까지 되었지만, 오늘 아침만은 누구나 은연중에 농우회관 낙성식을 거행하는 기분으로 모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은 평소와 같이, 조기회가 끝난 뒤에도 헤어지기가 섭섭한 듯이, 어정버정하며 동혁을 바라다본다. 그 눈치를 챈 건배는,
“여보게, 회원두 더 모집해야 헐 텐데,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연설 한마디 허게그려.”
하고 동혁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건 선전부장이 헐 일이지, 왜 나더러 허라냐?”
하고 동혁이가 사양을 하니깐, 건배는 그 말을 못 들은 체하고 회관 정문 앞으로 나서더니,
“여러분,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지금 이 회관을 짓자고 맨 먼저 발설을 했고, 우리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해주는 박동혁 군이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공포를 하고 나서는,
‘인젠 말을 허든지 말든지 나는 모른다’는 듯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선다. 운동장에서는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동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너 어디 두고 보자’는 듯이, 건배의 뒤통수를 흘려보고는 회원들의 앞으로 나섰다.
엄숙한 태도로 여러 사람의 긴장된 얼굴을 둘러 보다가,
“준비 없는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하고 한마디 하고 나서, 등 뒤의 회관을 가리키며
“이만한 집 한 채를 얽어놓은 것이 결코 자랑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집을 지으려고 여러 해를 두고 별러오다가, 오늘에야 낙성을 하게 된 것을 여러분도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 집은 연재(재질이 비교적 연한 침엽수 따위의 목재)가락 하나, 짚 한 단까지도 회원들이 가져온 것이요, 목수나 미장이 한 사람도 대지 않고, 우리가 이 염천에 웃통을 벗어부치고 불개미처럼, 참 정말 불개미처럼 두 달 동안이나 일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만한 집 한 채나마 우리 한곡리 한복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집은 우리 농우회원 열두 사람의 집이 아니요, 여러분이 유익하게 이용하시기 위해서 지어놓은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곡리의 공청, 즉 공회당으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잠깐 눈을 내리감았다가, 얼굴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 한마디만 머릿속에 깊이 깊이 새겨두십시오. ‘여러 사람이 한맘 한뜻으로, 그 힘을 한곳에 모으기만 하면, 어떠한 일이든지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 . 우리는 여름내 땀을 흘린 그 값으로 이 신념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버덤 더 많은 사람이 똑같은 목적으로 모여서, 꾸준히 힘을 써나간다면, 이버덤 더 어려운 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믿고저 하는 바입니다.”
하고 부르짖고는, 숨을 돌린 뒤에 목소리를 떨어뜨려,
“우리는 일을 크게 버르집고, 겉으로 떠들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낙성식 같은 것도 하지를 않습니다마는, 그 대신 우리는 우리 동리 여러분께 좋은 음악을 들려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를 닦는 달구질 소리, 마치질(마치로 무엇을 박거나 두드리는 일) 자귀질(자귀로 나무를 깎는 일) 허는 소리가 온 동리에 울리지야 이바노브나 않었습니까? 저 소대갈산까지 찌렁찌렁 울리지 않었습니까? 그 소리가 무엇버덤도 훌륭한 음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을 무너버리고 깨뜨러버리는 파괴의 소리가 아니라, 새로 짓고 일으켜 세우는 건설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고 기쁜지, 조금도 괴로운 줄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동혁은 그 말에 매우 감격해하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여러분! 이 집이 터지도록 우리의 장래의 일꾼들을 보내주십시오! 아침저녁으로 글 배우는 소리가 그칠 때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 집이 꽉 차면 우리는 이 집버덤 더 큰 집, 또 그 버덤도 더 굉장히 큰 집을 짓겠습니다!”
그 말에 회원들은 손바닥이 뜨겁도록 박수를 한다.
그때에 건배는, 여러 사람의 앞으로 썩 난서면서,
“한곡리 만세!” 하고 두 팔을 번쩍 쳐든다.
“만세!”
여러 사람이 고함지르듯 하는 만세 소리에, 새로 심은 동청 나무에 앉았던 참새들이, 깜짝 놀라 포르르 날아갔다.
하루는 동혁이가 회관에서 주학을 마치고 나오는데(새집으로 옮겨 온 후 아이들이 부쩍 늘어서 주학까지 하게 되었다) 석돌이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저 강 도사댁 작은 사랑(주로 아들이나 손자가 거처하는 사랑) 나으리가, 저녁때 잠깐 만나자구 허시는데요.”
한다.
“왜?”
동혁은 불쾌히 대답을 하였다. 석돌이는 눈썰미가 있고 영리한 대신에, 얕은꾀가 많아서 항상 경계를 하는 회원이다. 더구나 강 도사 집 전답에 수다 식구가 목을 매어단 사람이어서, 이 집에 심부름을 다니는 것은 물론, 박쥐 구실이나 하지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강 도사 집 살림살이의 실권을 쥔 맏아들인 기천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까닭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글쎄, 왜 또 오라는 거야?”
동혁은 거듭 물었다.
“알 수 있세요. 조용히 꼭 좀 만나자구 일러달라구 헙시니까요.”
“누가 왔든가?”
“아니오, 혼자 계시든걸요.”
“음, 알었네.”
동혁은 확실한 대답을 아니 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기천이는 면협 의원이요, 금융조합 감사요, 또 얼마 전에는 학교 비평 의원이 된 관계로, 면장이 나와서 한곡리도 진흥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회장이 되도록 운동을 해보라고 권고를 하고 갔었다. 기천은 명예스러운 직함 하나를 더 얻게 된 것은 기쁘나, 군청이나 면소에서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하는 체해야만 저의 면목이 서겠는데, 제가 수족같이 부릴 만한 청년들은 말끔 동혁의 감화를 받고, 그의 지도 밑에서 한몸뚱이와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저는 개밥에 도토리 모양으로 따로 베져났다(‘성나다’ 혹은 ‘화나다’를 의미하는 사투리).
저희 집의 논을 하고 돈을 쓴 낫살 먹은 작인들 같으면, 마구 내리누르고 우격다짐을 해도, 그저 ‘잡어 잡수’하고 꿈쩍도 못 하지만, 나이 젊고 혈기 있는 그 자질들은 까실까실해서 당초에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워낙 기천이가 대를 물려가면서 고리대금과 장릿벼로, 동리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치부를 하였고(주독으로 간이 부어서 누운 강 도사는, 지금도 제 버릇을 놓지 못한다. 당장 망나니의 칼에 목을 베지려고 업혀가는 도적놈이, 포도군사의 은동곳(은으로 만든, 상투를 튼 뒤에 그것이 다시 풀어지지 아니하도록 꽂는 물건)을 이빨로 뽑더라는 격으로, 여전히 크게는 못해도 방물장수나 어리장수에게 몇 원씩 내주고 오푼 변으로 갉아 모아서는, 기직자리 밑에다 깔고 눕는 것이 그의 마지막 남은 취미다. 몇 해 전까지도 아들만 못지않게 호색을 해서, 주막의 갈보, 행랑 계집 할 것 없이 잔돈푼으로 낚아 들여서는, 대낮에 사랑 덧문을 닫기가 일쑤더니, 운신을 못 할 병이 든 뒤에야 그 버릇만은 놓을 수밖에 없이 되었다) 저 혼자 사람의 뼈다귀인 것처럼 양반 자세가 대단해서 적실인심(인심을 많이 잃음)을 한 터이라,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년들은 기천이만 눈에 띄면, 무슨 노린내가 나는 짐승처럼 얼굴을 돌리고 슬금슬금 피한다. 그중에도 성미가 부푼 동화는,
‘조놈의 발딱 젖히고 당기는 대가리는, 여부없이 약 오른 독사뱀 같드라.’
하고 먼발치로 눈에 띄기만 해도, 외면을 해버린다. 그 아우는 ‘노새’라고 놀리기는 하면서도, ‘그래두 기만이는 강가의 중시조(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지’하고 간신히 사람 대우를 하지만....
‘또 무슨 얌치 빠진 소릴 헐려누.’
하고 동혁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기천이를 보러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동화가 자꾸만 묻고, 건배까지,
“왜 혼자만 꿍꿍이셈을 치나?”
하고 궁금히 여기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면장이 왔던 날, 기천이는 술상을 차려놓고 동혁이를 청하였다. 그날은 면장 앞이라 그런지, 평소처럼 점잔을 빼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이 박 군이야말로 참 대표적으로 건실헌 우리 동지입니다. 이번 그 회관 집만 허두래두 이 사람이 혼자 지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하고 새삼스러이 동혁을 소개하였다. 소개가 아니라, 이러한 모범 청년이 제 수하에서 일을 한다는 태도다. 동혁은 ‘동지’하는 말을, 기만의 입에서 들을 때보다도 구역이 나서, 입에도 대지 않은 술잔을 폭삭 엎어놓았었다. 그래도 기천이가 연방 ‘동지’를 찾으면서 하는 말을 종합해보면,
“면장께서 바쁘신데도 일부러 나오신 건 다름 아니라, 우리 동네두 진흥회를 실시해야 되겠는데, 내야 어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인가? 허니 자네들이 힘을 좀 빌려줘야겠네. 자네야 중요한 역원이 돼줄 줄 믿는 자리지만, 다른 젊은 사람들두 다 함께 회원이 돼서 일을 해보두룩 하세.”
하고 애가 말라서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동혁은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난 헐 수 없세요. 우리 농우회 일만 해두 힘에 벅찬데, 한 몸으로 두 가지 일은 도저히 헐 수 없쇠다.”
하고 딱 잡아떼고 일어섰다.
동혁이가 이번에는 버티고 가지를 않으니까, 기천이는 호출장처럼 명함을 들려 집으로까지 머슴을 보냈다.
“작은사랑 나으리께서 꼭 좀 건너오래유. 안 오면 이리루 오시겠다구 그러세유.”
하고 머슴애는 어서 일어서기를 재촉한다. 기천이는 면협 의원이 되던 날 아침에, 행랑 사람과 머슴들을 불러 세우고,
“오늘버텀은 서방님이라구 그러지 말구, 나으리라구 불러라.”
하고 일장의 훈시를 하였던 것이다.
동혁은 중문간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입맛을 다시다가,
“저녁 먹구 건너간다구, 가서 그러게.”
해서 머슴을 보냈다. 가고 싶은 생각은 손톱 끝만치도 없지만, 집으로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싫어서 가마고 한 것이다.
저녁 뒤에 그는 말대답할 것을 생각하면서 큰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대문가넹 들어서는데, 작은사랑 툇마루에서,
“아 그래, 제깐 녀석이 명색이 뭐길래, 내가 부른다는데 냉큼 오질 못 헌다드냐?”
하고 그 되바라진 목소리로 머슴애를 꾸짖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동혁은 ‘나 여기 대령했소’하는 듯이 바로 지척에서 으흠으흠 하고 기침을 하고,
“저녁 잡수셨세요?”
하며 들어섰다. 기천은 도적질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옴씰해서, 반사운동으로 발딱 일어서기까지하며,
“아, 자네 오나?”
하고 반색을 한다. 그 푼푼치(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 못하게 생긴 얼굴을, 횟배(회충으로 인한 배앓이) 앓는 사람처럼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뜻밖에 동혁이와 마주치는 순간, 금세 반가운 낯으로 표변하는 표정 근육의 민첩한 움직임은, 여간한 배우로는 흉내를 못 낼 것 같다.
“아 이 사람아, 난 여태 저녁두 안 먹구 기다렸네.”
하는 것도 허물없는 친구를 대하는 태도다.
“그럼 시장허시겠군요.”
하고 동혁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듯이, 툇마루 끝에 가 걸터않았다. 방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회관을 지은 뒤에 처음 총회가 있어서 곧 가봐야 겠세요.”
하고 한사코 들어가지를 않았다. 방으로 들어만가면 으레껏으로 술상이 나오고 술을 억지로 권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예서래두 한잔 해야겠네, 술을 입에두 안댄다니 파계를 시키군 싶지만, 워낙 자넨 고집이 센 사람이 돼놔서....”
하고 준비해놓았던 술상을 내왔다. 술이란 저의 집에서 사철 떨어뜨리지 않고 밀조를 해먹는, 보기만 해도 고리타분한 막걸리 웃국이요, 안주라고는 언제 보아도 낙지 대가리 말린 것에, 마늘 장아찌뿐이다. 칠팔 년이나 면서기를 다니는 동안에, 연회석 같은 데서는 남이 태우다가 꺼버린 궐련 꼬투리를 주워 피우면서도 ‘단풍’ 한 갑 아니 사 먹던 위인으로는, 근래에 교제가 부쩍 늘어서 면이나 주재소에서 양복쟁이가 나오면, 으레 술가지 내는 것이다.
“하아 이거, 내가 사람을 앉혀놓고서 인호상이자작(술병과 잔을 당겨 스스로 술을 따라 먹다)을 허니, 어디 맛이 있나?”
하고 <고문진보> 뒷다리나 읽어본 티를 내지 못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숙습(熟習)이 난당(難當)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수습이 난방이로군’하는 따위가 예사여서, 정말 글방에서 종아리깨나 맞아본 사람의 코웃음을 받는 때가 많다.
기천을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술기운을 빌리려는 것이다. 사실 동혁의 앞에서는 무슨 말이고 함부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농우회에도 다른 회원들 같으면, 그 반수가 저의 집의 소작인이니까, 여차직하면 ‘논 내놔라’한마디만 비치면은 설설 기는 터이니 문제가 되지를 않고, 건배만 하더라도,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원체 허풍선이가 돼서, 술 몇 잔에 속을 뽑히는데, 농사터는 한 마지기도 없이 엉토리로 사는 사람이니까, 돈을 미끼로 물려서 낚아볼 자신도 있다. 그러나 유독 동혁이만은 그야말로 눈의 가시다. 천생으로 사람이 묵중해서 당최 뱃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데, 근처에 없는 고등교육까지 받아서, 마주 앉으면 제가 도리어 인금(사람의 가치나 인격적인 됨됨이)에 눌리는 것 같다.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고무신의 때가 고약처럼 묻은 버선 바닥을 쓰다듬던 손으로,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켜고는, 족제비 털 같은 노랑 수염을 배비작거려서 꼬아 올리더니,
“좀 허기 어려운 말일세만......”
하고 반쯤 외면을 한, 동혁의 눈치를 곁눈으로 훑어본다.
“말씀 허시지요.”
동혁은 ‘또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하면서도 들으나 마나 하다는 듯이 어둑어둑해 가는 땅바닥만을 들여다보고 앉았다.
기천이는 실눈을 뜨고 손톱 여물을 썰더니,
“자네 그 회관 짓기에 얼마나 들었나?”
하고 다가앉는다. “돈이요? 돈이야 얼마 안 들었지요.”
기천은 다리를 도시리고 고쳐 앉으며 용기를 내어,
“이런 말을 자네가 어떻게 들을는지 모르겠네만 진흥회가 생기면 회관이 시급히 소용이 되겠는데, 당장 지을 수는 없구....거기가 동네 한복판이 돼서 자리가 좋아. 그러니 여보게, 거 어떻게 재목 값이든지, 품삯꺼정 넉넉히 따져서, 내게루 넘길 수가 없겠나? 자네들은 한 번 지어봐서 수단이 났으니까, 딴 데다가 다시 지으면 고만일 테니....자네 의향은 어떤가?”
하고 얼굴을 반짝 쳐든다. 너무나 염치 빠진 소리에, 동혁은 어이가 없어서,
‘얼굴 가죽이 간지럽지 않느냐’는 듯이 기천을 빤히 쳐다보다가,
“왜 돈 만 원이나 내노실 텝니까?”
하고 껄껄껄 웃었다. 기천은,
“아아니, 이 사람 웃음읫 말이 아닐세.”
하고 금세 정색을 한다.
“글쎄 웃음읫 말씀이 아니니까, 웃을 수밖에 없군요.”
동혁은,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 하늘을 우러러, 다시 한 번 허청웃음을 웃었다.
“허어 이 사람, 그래두 웃네그려. 그 집을 이문을 붙여서 팔라는데, 실없이 웃을 게 뭐 있나?”
기천은 동혁이가 저를 놀리는 것 같아서, 눈살을 찌푸린다.
“글쎄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 집은 돈 아니라, 금덩어리를 가지구두 팔거나 사지를 못 헙니다. 돈만 가지면 무슨 일이든지 다 맘대루 될 줄 아시는 모양이지만, 억만 원을 주구두 남의 정신만은 사지를 못헐걸요. 그 회관은 팔려면 단돈 몇 백 원어치두 못 될진 모르지만, 우리 열두 사람이 흘린 땀으루 터를 닦었구요, 붉은 정성으루 쌓어논 기념탑이니까요. 우리 손으루 부서버린다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두 그 집엔 손가락 하나 대지를 못 헙니다!“
”아아니, 글쎄 그런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허구 헌 말일세.“
”혹시나라뇨? 한 단체가 공동으로 합ㄹ혁을 해서 지어논 집을, 나 한 개인이 팔어먹을 생각을 혹시나 허구 있을 것 같어서, 그런 가당치 않은 말씀을 끄내셨나요?“
이 한마디에 기천은 고 빳빳하던 모가지가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
기천은 두 눈만 깜짝깜짝하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부벼 껐다 하며 속으로 안간힘만 쓰고 앉았다.
‘돈으로도 굴레를 씌울 수 없는 이 젊은 녀석을, 어떡허면 꼼짝 못하게 옭아 넣을까.’
하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한곡리’서 대를 물려가며 왕 노릇을 해오던 터에 역시 대를 물려가며 ‘소인 소인’하고 저희 집 전장을 해먹던 상놈인 박가의 자식 하나 때문에, 위신이 떨어지고 돈놀이 해먹는 세력까지 은연중에 꺾이는 생각을 하면, 이가 뽀드득뽀드득 갈렸다.
그러나 자는 호랑이 코침 주기로 동혁이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열두 회원이 이해관계를 떠나서 벌떼처럼 일어날 듯한 데는 겁이 더럭 났다. 더구나 한 번 심술만 불끈하고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동화가, 무슨 짓을 할는지 그것도 무서웠다. 동화에게는 두어 번이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양 사나운 꼴을 당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자에 와서, 눈이 제자리에 박히고 귀가 바로 뚫린 사람이면 한곡리에서는 박동혁이가 중심이 되어 동리 일을 하고, 인망과 인심이 농우회원에게로 쏠린 줄로 인정을 하는 데는, 눈에서 쌍심지가 돋으리만치 시기심이 났다.
그래서 어떠한 수단이든지 써서,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헤살을 놓을 계책을 생각하느라고, 밤이면 잠을 못 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장차 발기될 진흥회의 역원이 되어달라고 간청을 해도 말을 아니 들으니까, 그 회관을 몇백 원이라도 주고 매수를 할 꾀를 낸 것이었다.
동혁은 갑갑한 듯이
”그만 가봐야겠세요.“
하고 뻣뻣하게 한마디를 하고 일어선다. 기천은 놓치면 큰일이나 날 듯이, 동혁의 손을 잡고 매달리듯 하며,
”여보게 동혁이,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라고 너무 빼돌리지야 이바노브나 말게. 나두 동네일이 허구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사뭇 애원을 한다. 동혁은, 잡힌 손이 냉혈동물의 몸에나 닿은 듯이 선뜩해서, 슬며시 뿌리쳐싿.
기천은 또다시 실눈을 뜨고 무엇을 생각해보더니,
”그럼, 자네들 회에 나 같은 사람두 회원이 될 자격이 있나?“
하고 마지막으로 타협안을 제출한다.
”만 삼십 세 이하의 남자로 회원 반수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입회를 허락한다‘는 농우회의 규약이 있으니까요.“
동혁의 대답은 매우 냉정하다.
”그럼, 사십이 넘은 나 같은 인생은, 죽어버려야 마땅허겠네그려?“
기천은 간교한 웃음을 짓는다.
”아, 그래서 어떡허게요. 그렇게 유력허신 분이 돌아가시면, 우리 동네의 큰 손실일걸요.“
하고 동혁은 씽긋 웃으며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