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닐 때에 교과서에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는 동화가 있었습니다. 둘이서 하나마나한 경주를 했는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엉금엉금 거북이가 깡충깡충 토끼를 이겨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가 느린 것을 알고 쉬지 않고 달리기도 했지만 토끼의 방심 때문이었습니다. 토끼는 거북이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만했습니다. 그 자만이 토끼를 방심하게 만들었고 당연히 이겨야 할 경주를 어이없게 망치고 말았습니다(잠16:18).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어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의 여정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와 같습니다. 여기서 거북이는 마귀의 권세인 사망입니다. 따라서 거북이를 이겨야만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습니다(계21:7~8). 영생을 얻기 이전의 생명인 육신은(창6:3) 지렁이 같아서(사41:14) 끈질기게 쫓아오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이 지렁이 안에 살게 됨으로(고후4:7) 거북이를 이기는 토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고전15:55~57).
거북이와 벌이는 경주의 결승선에는 예수께서 붙잡으신 부활의 생명이 푯대로 꽂혀있습니다. 거북이보다 먼저 결승선에 도착하면 이 푯대를 붙잡음으로 예수처럼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계21:24). 그러나 사망의 권세인 거북이에게 지면 이 푯대를 붙잡을 수 없게 됩니다. 토끼가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사망인 거북이를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만입니다. 너무 일찍 승리를 확신하면 마귀의 미혹이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벧전5:8).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롬8:12~13). 그래서 그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오직 푯대를 향해 달렸습니다(빌3:10~14). 사실 바울 정도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거북이를 이길 수 있음에도 동료 토끼들보다 힘써 달렸습니다(고전15:10). 그는 마치 거북이가 아닌 모든 토끼들과 경주하는 것처럼 자기의 몸을 치면서까지 달렸습니다(고전9:24~27). 그렇기에 그는 결승선에 들어오면서 두 손을 번쩍 들 수 있었습니다(딤후4:6~8).
첫댓글 아멘, 방심하지 않고 바울처럼 끝까지 경주를 마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