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돌담길 걷는 선비의 여유, 예천 금당실마을
물맛이 좋아 ‘단샘’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 예천(醴泉). 충과 효의 고장으로 알려진 예천에서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금당실 전통마을을 찾았다.
허리춤 높이까지 올라오는 낮은 돌담. 구불구불 유선형으로 길을 안내한다. 고택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돌담길의 끝에는 집집마다 대문이 활짝 열려있다. 조선시대 반촌의 으리으리함보다 우리네 고향 인심을 느낄 수 있는 마을. 금당실의 돌담길에 서면 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양,느긋한 여유가 생긴다.
대문이 활짝, 돌담길의 인심
오미봉에서 내려다 본 금당실마을. 푸른 들녘 옆으로 한옥이 펼쳐진다.
“서울에서 여기 오는 길은 부산가는 것만큼 멀게 느껴졌을 거예요. 오는 길이 쉽지 않거든요” 경북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예천군 용문면 금당리에서 박길상(60)이장이 인사를 건넨다. 예부터 마을에 금광이 있었다 하여 ‘금당실’이라 불린 마을은 조선시대 전통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전통마을 탐방은 용문면사무소 일대에서 시작된다. 금당실에는 약 600년 전인 15세기 초 감천 문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그 뒤로 사위인 함양 박씨 ‘박종린’과 원주 변씨 ‘변응녕’의 후손이 대대로 마을을 일궜다. 용문면사무소 터는 변응녕선생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심은 4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다. 큰 홍수가 난 뒤로 3그루의 나무는 사라졌지만 마을 중심부에 남은 한 그루의 느티나무와 사괴당(四槐堂)이라 불리는 전통가옥이 역사를 증명한다.
금당실 전통 돌담.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사괴당 안쪽 7.4km로 이어지는 돌담길에 서면 본격적으로 시간 여행이 펼쳐진다. 소담한 돌담은 고택이 훤히 보일만큼 키가 낮고, 미로처럼 이어진 돌담길의 대문은 모두 활짝 열려있다. “보통 한옥마을을 가면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을 걸어놓잖아요. 그런데 우리 마을은 그렇지 않아요. 문을 닫아 놓으면 먼 걸음을 한 사람들이 볼 게 하나도 없잖아요”라고 박이장의 설명이 이어진다. 돌담길 위에 펼쳐지는 인심이야말로 금당실의 특별한 매력인 셈이다.
십승지 금당실마을 고택 매력이 물씬
금당실마을은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마을산인 오미봉에 오르면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한옥마을의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조선 명종 때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정감록(鄭鑑錄)에서 금당실을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으로 꼽으며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평했다. ‘병화가 들지 못한다'는 지형 때문인지 임진왜란 때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오미봉에서 내려다 본 금곡서원. 소나무가 멋진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금당실은 지난 2006년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돼 고택의 보강공사가 진행됐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하여 재향을 올리는 추원재,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은 원형대로 보존됐다. 이 외에도 마을에는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는 등 훼손됐던 고택들이 옛 모습으로 복원됐다. 고택 탐방 뿐 아니라 ‘지게나뭇길’이라 불리는 좁은 돌담 흙길을 걷는 것은 금당실 여행의 백미다.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을에서 '쑤'라고 부르는 소나무 방풍림에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사람을 마을 주민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 주민들은 고심 끝에 마을의 공동 재산이었던 소나무를 베어 러시아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을 충당했다. 그렇게 베어내고 나니 길이 2㎞가 넘는 송림이 800m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그림 같은 고택/ 금당실 전경을 찍기 위해 오미봉으로 오르는 길. 금곡서원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대는 초록빛 들판 위로 마치 고택이 둥둥 떠 있는 듯하다. 한옥은 자연과 함께 어우러질 때
더욱 빛난다.
선조들의 미적 감각/ 금곡서원 대문 밖에서 사진을 찍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서원의 모습이 보인다. 대문 밖에서도 균형미와 조화미를 잃지 않는 한옥의 멋스러움에 감탄이 절로 난다.
한옥의 이름/ ‘반송재’라 불리는 고택이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고택 마당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반송재’라는 이름이 절로 이해된다. 원래는 다른 쪽에 있었으나 지금의 위치로 옮겨 심은 것이다. 조선 숙종 때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낸 김빈이 낙향하여 1600년대 후반 지은 가옥이다. 1899년 법무대신 이유인이 매입해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2층 돌담/ 금당실의 돌담은 그리 높지 않다. 돌담길을 걷다보면 담 너머로 고택이 한눈에 훤히 들어오는 높이다. 그런데 유독 2층으로 높게 돌담을 올린 곳이 있다. 바로 부녀자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둘러싼 돌담이다. 얼마나 고운 아씨가 살았을까...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터/ 양주대감 이유인은 구한말 정치가이자 ‘대한제국’ 연호 제정을 도운 인물이다. 이유인의 99칸 고택이 금당실에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 자태가 멋진 소나무가 옛 고택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담 너머/ 담 너머로 푸르게 자라난 밭이 보이고 그 뒤로는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한옥이 보인다. 새마을운동 당시 초가지붕을 모두 슬레이트로 바꿨다고 한다. 현재 금당실마을에서는 변형된 한옥을 원형대로 복구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담을 넘는 박/ 금당실 돌담길의 전체 길이는 7km가 넘는다. 이장님을 따라다니지 않았더라면
미로처럼 얽힌 길 위에서 방향감각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불구불 길을 돌아나가면 끊임
없이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담을 따라 탐스럽게 열린 박도 즐거운 풍경 중 하나였다.
사괴당/ 금당실마을 중심가에 있었다는 4그루의 느티나무. 홍수가 나서 현재는 한그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사괴당’ 고택 이름에서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사랑채는 철거되고
정면 5칸 팔작집인 안채만 남아있다.
추원재 사당/ 함양 박씨 입향조 박종린의 유지를 받들어 증손 박영이 1656년 추원재와 사당을 세웠다. 추원재 바로 뒤에 위치한 사당에서는 지금도 함양 박씨 후손들이 제를 올린다.
추원재 사당은 조선중기 건축의 예스러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게나뭇길/ 금당실의 돌담길은 대부분 걷기 좋게 정비돼있다. 그러나 ‘지게나뭇길’이라 불리는 좁은 돌담 흙길 몇 군데는 옛 모습 그대로다. 두세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흙길을 걸어보는 것은 금당실 여행의 백미다.
고택은 수리 중/ 한옥을 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길상이장은 “한옥을 수리하는 것은 새로 짓는 것만큼 힘이 들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래된 건축 재료를 해체하더라도 버리는 법이 없다. 오래된 나무 기둥을 손봐 다른 한옥 보수에 재활용한다.
와송/ 기와 위에 자라난 다홍색 식물이 보이는가. ‘와송’이라 불리는 식물이 무생물인 기와 위에 생명을 꽃 피웠다.
용문면 풍경/ 금당실 고택 탐방은 용문면사무소 안쪽에서 시작된다. 용문면 바깥에서 보면 고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마을의 구석구석이 60~70년대를 연상시키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글,사진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예천 금당실마을 http://geumdangsil.invil.org/ 054-654-2222
고택민박 금당실 덕용재 http://blog.naver.com/muweol 010-9498-7290
첫댓글 금당실마을 곧 진입로 가로수 벗꽃이 피어 바람에 날리면 더 멋지겠죠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는 마을따라 800m 울창한 송림에서 송림욕하며 느리게 걷고
시집 한권들고 벤취에 앉아 숨 고르고...^^*
드라마 황진이 주 촬영지 병암정, 바람이 머무는곳 초간정, 세금내는 소나무 석송령
어린자녀들과 곤충생태체험관, 천문우주센터 등등 둘러볼곳이 많습니다.
덕용재 주변밭에 흰민들레,고본,어성초,익모초 등등 재배하고 꽃 가꾸며
고택민박하고있으니 우리님들 봄나들이 오세요~ ^^
와, 정말 한번 쯤 꼭 가고싶은 곳이네요... 금당실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