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묘지 자찬묘지명 광중본(自撰墓誌銘 壙中本)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與猶堂) 뒤편 묘지로 올라가는 입구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는 글을 빼곡히 쓴 표지판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명 인사의 문집(文集)에서는 문집이나 그 문집 주인공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墓誌銘)이 실려 있게 마련인데 대개는 주인공 주변의 인물 중에 문장이 출중한 사람이 쓰게 마련인데
다산(茶山)의 경우에는 그 묘지명을 자기 이야기를 자신이 써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다.
자신이 지은 묘지명이란 뜻의 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글은 남이 내 생애를 정리하면서 평가하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생애를 정리하고 자신을 평가한다는 특별한 행위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왜 스스로 이런 글을 썼을까?
한 가지 느낌이 가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마저도 뛰어넘어
자신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을 지닌 선비였다는 점이다.
세상의 시선(視線)이든 죽음이든 훗날의 평가든 상관없이 눈감는 날까지 나의 삶을 살겠다는 자기다짐이 아닐까.
다산(茶山)이 이렇게 자신이 썼다는 점을 밝힌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묘지명(墓誌銘)이란 본래 타인(他人)이 “죽은 자를 위해 쓰는 글”이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을 때에는 묘지명(墓誌銘)을 학자나 문장력이 좋은 사람으로 부터 받아서 그 글을 사기(沙器)에 새겨 넣고 불에 구워서 시신과 함께 묻었다.
묘지명을 새겨 넣은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증거물인 셈이다.
이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을 알림과 함께 한 사람의 평생 행적에 대한 준엄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래서 묘지명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역사를 위해서도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글 내용에 그 의미가 깊다.
그런 묘지명(墓誌銘)을 남이 아닌 죽은 자 자신이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고 미리 써놓아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통이 아닌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스스로 자기 묘지명을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남들이 쓰는 묘지명은 죽은 자를 위한 맹목적 예찬의 글이 많고 거짓된 내용으로 꾸며지는 폐단이 많았다고 한다.
더욱이 이름과 가계(家系) 등 내용의 일부만 바꾸면 어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서식화(書式化)된 묘지명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의미 없고 가차 없는 죽은 글에 대한 생명력 없는 평가를 거부하려는 반발의식에서 아예 자기 자신이 묘지명을 쓰고자 하였다.
남들의 허황된 찬사(讚辭)를 듣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기록하려는 의식은 자의식이 강한 학자와 문사(文士)들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다.
기묘사화 때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음애(陰厓) 이자가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내가 역사에 무슨 큰일을 남겼다고 남에게 묘지명을 받겠는가?
하는 겸손한 생각에 의하여 스스로 쓰기도 하고,
또 자기가 살아온 삶과 개성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안다고 하여 자신이 쓰기도 한다.
조선후기 들어 이러한 일은 일부 학자와 문사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중국 시류(時流)의 영향도 있었다.
명대(明代)의 저명한 문인인 서위(徐渭)나 장대(張岱)의 “자위묘지명(自爲墓誌銘)”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게 살아온 문학과 예술가의 삶을 마음껏 표현해내었다.
이렇게 스스로 묘지명을 쓴 인물들 가운데에는 유척기(兪拓基),
남유용(南有容), 강세황(姜世晃), 박세당(朴世堂), 김택영(金澤榮)등이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글은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삶과 가치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다산(茶山)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은 문집(文集)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의 두 가지가 있는데,
아래 명(銘)은 광중본(壙中本)으로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國譯)글이다.
이곳 여유당(與猶堂) 다산(茶山) 묘지 입구에 세워놓은 표지판의 내용을 필자가 사진을 찍어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다산(茶山)의 생애(生涯)를 요약해서 볼 수 있는 좋은 내용이기에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농월



정약용 선생이 회갑이 되던 1822년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묘지명(墓誌銘)이라는 문체(文體)를 빌러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文集)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이 있으며, 아래 명(銘)은 광중본(壙中本)으로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國譯)글이다.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墓)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鏞), 호(號)를 사암(사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러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조(英祖) 임오년(1762)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聰明)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정조7 1783)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13 1789)에 갑과(甲科)의 제2인으로 합격했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郎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兵曹)참의(參議)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 1797)에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23 1799)에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 와서 승지(承旨)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경신년(정조24 1800) 6월달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다.
이달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승하(昇遐)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15세(영조52 1776)에 풍산 홍씨(豊山 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 이익(星湖李瀷)선생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벽(李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 1787)이후 4~5년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정조15년 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禁令)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 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흥흥하여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등이 서교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얼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 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 조정의 뜻)를 얻으니, 용과 전(銓)이 또 체포당하였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의 작처(酌處 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함)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용(鏞)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冤 원통함을 호소함)으로 방축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鏞)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엮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ㆍ안옥(按獄)ㆍ무비(武備)ㆍ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ㆍ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 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총애와 가장(嘉獎)이 동렬(同列)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ㆍ내구마(內廐馬)ㆍ문피(文皮 호표(虎豹)의 가죽)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陳)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고조의 휘(諱)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에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荷主之寵(하주지총)-임금의 총애 입어
入居宥密(입거유밀)-근밀(近密)에 들어갔네.
爲之腹心(위지복심)-임금의 복심(腹心) 되어
朝夕以昵(조석이닐)-조석으로 모셨도다.
荷天之寵(하천지총)-하늘의 총애 입어
牖其愚衷(유기우충)-우충(愚衷)이 열리었네.
精硏六經(정연륙경)-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妙解微通(묘해미통)-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憸人旣張(섬인기장)-소인이 치성해지니
天用玉汝(천용옥여)-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斂而藏之(렴이장지)-거두어 간직하고
將用矯矯然遐擧(장용교교연하거)-장차 훨훨 노니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