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문화유산 여행길
정온 선생 종택
조선시대 충신 동계(桐溪) 정온(鄭蘊 · 1569-1632) 선생의 종택으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름철 강우량이 많고 겨울철에 추운 산간지역인 거창지역 기후를 고려하여 남방식과 북방식 특징이 모두 반영되어 있으며, 신분에 다른 공간 구분과 남부지방 양반집 형태가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중요민속문화재 제205호)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습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부분이 간반(間半) 규모입니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안채도 남향인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됩니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됩니다.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입니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의 안뜰인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습니다.
서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이 있습니다. 곡간 뒤편에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마당 동쪽에는 서향한 뜰 아랫채가 있는데 4칸 집입니다. 사당은 안채의 향원에 삼문을 짓고 그 안에 있는데, 전퇴가 있는 3칸 집입니다.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부재도 넉넉하면서 장대하고 훤칠해 보입니다. 학술적 가치는 집 전체의 평면구성에 있습니다.
황산전통한옥마을
수승대 국민관광단지 건너편에 있으며, 1540년(조선 중종 35년) 요수(樂水) 신권(愼權) 선생이 은거하며 1540년 '구연재'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한 이후로 거창 신씨의 집성촌이 되었습니다. 마을 안에 1.2km의 옛 담장(등록문화재 제259호)은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한 토석담으로, 활처럼 휘어지며 이어지는 모습이 전통 고가와 잘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노론계 학자인 황고 신수이 선생이 입향을 하면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황산전통한옥마을의 가옥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 강점기 시대의 지방 반가(班家)의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입니다. 남아 있는 한옥은 약 50여 호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고, 모두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씨족 부농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높이 15m, 수령 600년에 이르는 '안정좌'(安亭座)나무라 부르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1927년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건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릅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사랑채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며져 있어 당시 큰 지주였던 집주인의 재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명승 수승대(搜勝臺)
원학동 맑은 물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간직한 곳으로,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사신을 근심스럽게 송별하는 곳이라고 하여 수송대(愁送臺)라 불리다가, 1543년 퇴계 이황 선생이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이름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여 수승대(搜勝臺)라고 이름 짓는 개명시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수승대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역사문화 체험과 즐길 거리가 많으며 특히 계곡의 맑은 물 가운데에 앉아 있는 거북바위는 수승대의 명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거북바위
계곡 가운데에 떠 있는 바위의 모습이 거북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바위 둘레에는 퇴계 이황 선생이 수승대로 개명할 것을 제안한 5언율시를 비롯, 옛 풍류가들의 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북바위 앞에는 시인묵객들이 물가에 앉아 시문을 지을 때 사용한 자연반석 벼루를 뜻하는 연반석(硯磐石)과 흐르는 물에 붓을 씻은 곳이라는 의미의 세필짐(洗筆짐)이 있습니다.
관수루(觀水樓)
구연서원의 문루(門樓)입니다. 구연서원은 1540년에 요수 신권 선생이 서당을 세워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694년(숙종 20)에 구연서원으로 개칭하여 요수 신권,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 선생을 제향하였으며, 1808년에 황고(黃皐) 신수이(愼守이) 선생을 추향하고 있습니다. ‘觀水’란 <맹자> 진심장구편 ‘물을 보는(관수)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비의 학문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습니다.(유형문화재 제422호)
요수정(樂水亭)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척수대(滌愁臺) 사이 물가에 처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뒤 수파를 만나 1805년 그 후손들이 현 위치에 옮겨 세웠습니다.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세운 건물로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수승대의 경치를 완상하고 시회와 교육 등을 위해 솔숲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정자 건물로 형태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전통적인 정자건물 형식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산간지역의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의 내부에 방을 들이고 있어 이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자연의 기운에도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삼합(三合)이 있다고 하는데, 바위와 물, 그리고 소나무가 함께 갖추어진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입니다. 바위의 화기(火氣)와 물의 수기(水氣)가 서로 상극인데, 목기(木氣)인 소나무가 중화적 매개체로 연결되어 영지(靈地)를 일구어낸다고 합니다. 이 요수정이 자리한 곳은 너럭바위와 물,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 완벽한 삼합지로 풍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신권 선생의 호이기도 한 정자 이름 ‘요수’는 공자의 ‘樂山樂水’에서 그 뜻을 가져왔습니다.
용암정(龍巖亭)
용암정은 삼동천의 하나인 원학동(猿鶴洞) 골짜기에 계곡을 따라 흐르는 위천(渭川)가에 세워진 경승입니다. 용암 임석형(1751-1816)이 1801년 창건 후, 1864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용문 곁에 있는 큰 바위에 세워 용암정이라 합니다. 월성계곡 행기숲 끝자락에 자리 잡아 주변 경관이 아름답습니다. 2012년 명승 제8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자연 암반에 걸터앉은 용암정의 자태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한 한 마리의 학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춤추며 날아갈 듯 우아한 모습을 한 빼어난 건축물입니다.
농산리석불입상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생동감을 잃지 않는 조형성 등 통일신라의 무르익은 사실적 양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석불의 광배와 받침대인 연화대좌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2005년 보물 제14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석불의 머리 부분은 높고 두툼한 상투 모양이며 얼굴은 둥글고 온화하며 옅은 미소를 띠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행기숲
서동(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로 돌아갈 때 국경지대인 월성계곡에 다다라 이곳의 빼어난 경관에 넋을 잃고서 피로도 풀 겸 며칠 쉬어간 곳입니다. 또 고려의 침공에 위협을 느낀 경순왕이 후백제에 도움을 청하려 보낸 사신이 이곳에 다다랐을 때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임을 증명하는 신표인 인장을 이곳에 숨기고 종적을 감췄다는 곳이어서 해인정(解印亭)이라고도 불립니다. 해인은 인장을 싼 보따리를 풀었다는 뜻입니다.
갈계숲
조선 명종 때 임득번과 그의 아들 3형제 임훈, 임영, 임운이 여러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노닐던 곳으로, 수령 200~300년 된 소나무 · 물오리나무 · 느티나무 · 느릅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주 멋있는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숲 안에는 가선정, 도계정, 병암정 등의 정자가 있습니다.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임훈(林薰 1500~1584)은 언양현감 · 비안현감 · 광주목사 등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갈계숲과 갈계리라는 명칭 모두 임훈의 호인 갈천(葛川)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갈천 선생의 또 다른 호를 따서 세워진 가선정이 있어 가선림, 마을 이름을 따서 치내숲, 청학교가 놓인 뒤 청학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금원산자연휴양림
선비들이 공부하는 유안청이 자리하였다는 유안청계곡은 길이가 2.5km에 이르며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하여 곳곳에 아름다운 폭포와 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높이 80m의 직폭인 유안청 제1폭포, 길이 190m의 와폭인 유안청 제2폭포, 붉은 빛깔을 띤 화강암을 깔고 쏟아져 내리는 물결모양이 마치 노을바탕에 흰구름이 흐르는 것 같은 자운폭포가 자태를 뽐내는 등 아름다운 숲과 계곡을 지닌 곳에 조성된 자연휴양림입니다.
높이 50m, 둘레 150m나 되는 우리나라 단일 바위로는 제일 크다는 문바위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바로 위쪽의 직립 암벽에 본존불과 보살상을 새겨 전체를 보주형으로 처리한 고려시대 삼존불인 국가지정보물 제530호인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상이 있습니다. 선녀가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목욕을 하던 자리였다는 선녀담은 아기를 못 낳는 여자가 이 소(沼)에 목욕을 하고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룬다는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숲속의 여행길로는 전국 제일의 휴양지로 꼽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