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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 보이는 비(卑)는 마치 갑(甲)자와 같은 모양과 손을 뜻하는 우(又)가 위아래로 결합된 회의(會意)에 속하는 글자이다. 소전(小篆)에 이르러 갑(甲)이 현재 자형의 위 부분처럼 잘못 변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손으로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부터 몸을 방패 뒤에 숨긴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비겁(卑怯)하고 비굴(卑屈)한 병사를 연상한 것으로 보인다. 비(卑)는 본래 '비겁하다' '비굴하다'는 의미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천하다[卑, 賤也]라고 하여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형용하였다. 비천(卑賤)이란 말은 여기서 생겼다. 비열(卑劣), 비비(卑鄙) 등과 같이 쓰인다. 형제의 자손은 본인의 자손에 비해 지위를 낮게 보아 그 친속을 비속(卑屬)이라 한다. 이 밖에 '아첨하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는 갑(甲)의 모양을 부채로 해석하여 부채를 들고 다른 사람을 시원하게 해주거나 벌레를 쫓아 주던 데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겸덕(謙德)으로 자신을 함양하여 다스리고 나아가 겸허하게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뜻이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 요즘이야 말로 목청만 큰 비인(卑人)이 아니라 진실로 비양(卑讓)의 덕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닐까.
김영기.동서대 중국어전공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