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과 입추가 지났지만 내 토굴에는 아직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감나무와 호두나무 가지에 앉은 왕매미의 이명(耳鳴) 같은 울음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더위 무서워 문 두껍게 닫고 냉방을 하고 외롭게 하는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사랑하는 나의 앳되고 청순한 신부들 넷이 나흘 전에 잇따라 찾아왔다.
그녀들의 나이는 이팔(열여섯)쯤일 터이다. 그녀들은 옥색 치마저고리에 옥색의 버선을 신고 옥색의 고깔을 쓰고 눈 내리뜨고 옥색의 향기를 풍기며 수줍어하며 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녀들을 맞았다. 그녀들의 체취가 내 토굴 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일흔 살을 훨씬 넘긴 나이와 부끄러움을 잊은 채 그녀들의 체취를 허기진 듯이 들이킨다.
그녀들과 함께 에어컨디션 바람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나란히 드러눕기도 한다. 이리저리 뒹굴기도 하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기도 하고, 그녀들과 함께 책장을 넘기기도 하고, 더불어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그녀들과 추파를 나누며 차를 마시기도 한다.
그녀들을 옆에 둔 나는 그들의 향기에 허기져 한다. 나는 수시로 그녀들 몸과 얼굴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 향기를 맡는다. 그녀들의 고소하면서도 배릿한 행기는 내 허파로 들어가고, 피에 녹아 온몸 구석구석을 휘돌아다닌다. 그녀들의 체취에 푹 절어 있다. 나는 그녀들의 모양새와 비슷한 수컷 꽃 한 송이로 피어난다.
내가 코를 그녀들의 몸 가까이 들이대면 그녀들은 수줍어하며 몸을 떨면서 외튼다. 여름을 타는 것인지, 아름답게 향기를 뿜는 일이 힘들어서인지, 얼굴과 살결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힘들어서인지, 신부로서의 품위 지키기와 꿈꾸기가 힘겨워서인지, 그녀들의 겨드랑이와 콧등과 이마에 구슬 같은 땀이 서려 있다. 그 유리보석 같은 그녀들의 영롱한 땀방울이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녀들의 안타까운 체액 앞에서, 나는 열없어 하며 그녀들의 초조를 떠올린다. 아름다움과 예쁨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것은 우주를 아름답고 향기롭게 장식하는 일 아닌가.
그녀들의 몸은 신화를 품고 있다. 봉(鳳)의 눈초리를 닮은 귀와 턱과 이마, 노자의 곡신(谷神, 道의 공허함을 산골짜기에 비유해서 이르는 말로 노자의 도에서 생긴 말)을 연상케 하는 도톰한 입술과 목구멍, 그녀들은 바야흐로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 추사 김정희 선생의 대표적 명작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문인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싶다.
그녀들은 이 늙은이에게 젊음의 기를 불어넣는다. 멀고 먼 데로 흘러간 젊음의 골목길과 먹구름 수런대는 항구의 부두에서의 입맞춤 같은 달콤한 회억을 떠오르게 하고, 나를 별나라에서 온 소녀를 사랑한 소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 소년은 별나라에서 뽑아온 별꽃 한 송이를 분에 심어놓고 날마다 물을 주었는데, 어느 날 별나라에서 백마를 타고 온 왕자가 그 꽃을 도둑질해갔다. 소년은 내내 우울증을 앓으면서 울었다.
지난 한밤중에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고 소나기가 주룩주룩 내렸다. 천둥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무서워 떠는 그녀들을 품에 깊이 안아주었다.
땡볕이 가승을 부리는 한여름 토굴 창틀에 앉은 난초 한 분이 옥색 꽃들을 피워 올렸는데 꽃대의 곁가지마다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다,
하얀 하늘빛을 머금은 채 말똥거리는 그 우주만다라에 대하여 한 손님이 말했다,
난초가 저 꽃들을 뿜어내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이라고
그 수정 같은 땀방울들을 내내 성스러워 하다가 용기를 내어 만져보니 끈적거리는 진액이다,
내 아내는 세 아이를 모두 안방에서 나를 밖으로 내보낸 다음 장모의 조력만으로 낳았는데 비명 소리 한 번도 내지 않았다 응아 하는 아기울음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아내의 얼굴에는 비지땀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어머니도 나를 낳을 적에 그러셨으리라,
그래 죽살이치는 사랑의 내공 없이 그 어느 것인들 이루어지겠는가.
―〈사랑의 내공〉 전문
<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한승원, 도서출판 푸르메, 2014)’에서 옮겨 적음. (2019.06.25.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