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曼茶羅, Mandala)”는 기본적으로 우주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즉 신들이 거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이며, 우주의 힘이 응집되는 장소입니다. 만다라는 태장계와 금강계로 구분되는데, 태장계만다라는 하나에서 여럿을 향해 움직이고 금강계만다라는 여럿에서 하나를 향해 움직인다고 합니다.
“만다라”는 ‘밀교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불교미술’을 뜻하는 말로도 쓰입니다. 한중일 세 나라는 일반적으로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의 묘사를 근거로 하여 만다라를 그린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사각형 또는 원형의 신성한 단에 경전에 의거하여 조성하고, 모든 의식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파괴함이 원칙이나, 때로 완성된 만다라를 회화로 그려 경배와 명상의 대상으로 모시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만다라”를 그림이 아닌 소설로 읽었습니다. 바로 김성동 선생의 『만다라』입니다. 그 『만다라』를 쓴 김성동 선생이 작년(2022년) 9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오늘서야 알았습니다. 고인이 되신 김성동 선생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소설 만다라에서 만다라는 무엇이었을까? 지산과 법운, 두 승려에게 화려한 불화(佛畵)로서 만다라는 세속 세계였다. 엉터리 승려같은 지산에게 영향을 받은 법운은 세속세계와 수행 사이에 고민하다가 기차역에서 절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고 세속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자신의 해탈은 고요한 절간이 아니라 세속의 장삼이사들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출처 : NEWS M(http://www.newsm.com). 김기대
<9월 25일 유명을 달리한 김성동 선생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눈물이 많았다. 이유는 대개 선친 때문이었다. 술자리에서 선친 김봉한 선생과 그 동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날은 거의 어김없이 눈물을 쏟았는데, 문제는 우리가 만나 그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선생과 만난 이유가 바로 그분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외로워서 우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양평 우벚고개 험한 산중에 살 때 그랬다. 나와 후배들이 긴 술자리에 지쳐 일어서려면 몇 번이나 붙잡다 못해 헤어지는 현관 앞에서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거의 매번 그랬다.
양평 용문사 앞으로 이사를 하고는 한결 나아졌고, 우리의 권유에 따라 충주로 오신 후로는 김인국 신부와 임종헌 한의사가 더없이 따뜻한 벗이 되어 눈물 흘릴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 생애 마지막 한 해는 참으로 행복하고 의욕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다행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선생의 75년 생애는 불행했던 우리 역사가 준 상처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힘겨운 시간이었다. 식민지 시대 대일투쟁으로 시작해 해방 후에는 농민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된 아버지, 남편과 뜻을 함께했다가 두 차례에 걸쳐 긴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김성동 문학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선생의 생애 후반기 18년 간, 가장 가까운 문학의 후배이자 말벗으로 살아온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된 선생의 아픔을 이 짧은 지면에서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런가?
김성동 선생은 나와 후배들을 만나기만 하면 5시간이든 10시간이든 쉬지 않고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가끔은 본인 이야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은 이야기, 젊은 수행자로서 고민했던 이야기, 또 이를 소설로 써서 작가가 된 과정, 그 소설 때문에 승적도 없던 조계종에서 파문당한 이야기도 여러 번 했다.
비록 절에서는 쫓겨났지만, 작가가 되어 많은 사람의 사랑도 받았지만, 선생은 여전히 수행자였다. 선생은 이사를 간 집마다 제일 볕이 잘 드는 실내에 뭉툭하니 못생긴 돌덩이를 모셨는데, 미완성인 채로 버려져 땅에 파묻혀 있다가 장맛비에 드러난 돌부처였다. 양평 산중에 살 때는 대문 옆에 세워진 돌에 이렇게 새겨 놓았다.
‘비사란야(非寺蘭也).’ 절 아닌 절이란 뜻이니, 본인의 삶 그 자체가 수행의 길이었음을 말해준다. 선생의 이름을 문단에 알린 소설 ‘만다라’는 한국 구도소설의 백미(白眉)로, 구도자로서 선생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만다라’는 출가한 지 6년째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풀지 못하던 수좌 법운 스님이 지산이라는 파계승을 만난 뒤 수도 생활에 변화를 맞는 과정을 그렸다. 파계승 지산은 술과 여자를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거침없는 언동을 일삼는다.
하지만, 상식을 깨는 지산의 언동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이 깃들어 있다. 법운은 지산의 영향을 받아 그동안 얽매여 있던 이분법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소설은 두 승려의 방황을 통해 불교계의 모순과 인간의 위선을 드러내며, 개인의 자유와 해탈의 의미를 묻는다. 어찌보면 한국전쟁 중 처형된 아버지를 둔 법운은 선생의 분신일 수도 있겠다.
성정이 올곧아 불의를 참지 못한 부모를 만난 죄로 평생을 통한에서 벗어날 수 없던, 본인 역시 세속의 더러움을 참지 못해 쓴 소리 바른 소리만 하다 외롭게 살아야 했던 김성동 선생이 부디 정의로운 새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외롭지 않게 사시기를 빈다.>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안재성 소설가
저는 군에 있을 때에 소설 『만다라』를 읽었습니다. 솔직히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었고 제가 그 책을 읽고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책이 있으니까 읽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른 책에서 작가 “김성동”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김성동은 법명 정각(正覺)으로 수행 중이던 29살에 소설 ‘목탁조’로 등단했다가 내용을 문제 삼은 불교계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했다. 1978년 역시 불교를 소재로 삼은 ‘만다라’로 한국 문학 신인상에 당선됐고 만다라는 베스트 셀러를 기록한다. 뒤이어 1981년 임권택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된 만다라도 흥행에 성공했다.2008년에는 개봉된지 27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CNN이 뽑은 아시아 최고의 영화 18편에 포함됐다. 여기 포함된 다른 한국 영화는 봉준호의 괴물(2006년)뿐이었다.》NEWS M(http://www.newsm.com). 김기대
저는 김성동 선생의 작품 중에 2001년 창비에서 나온 『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른 작품은 제 기억에 별로 없지만 이 소설은 오래 남아 있습니다.
저는 김성동 선생을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분이 고인이 되신 이문구 선생과 함께 보령 출신이라는 점에서 늘 가깝게 생각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말들이 익숙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이문구 선생은 두어 번 뵙고 사진도 많이 찍어서 보내드렸고 장례식 때 조문도 갔는데 김성동 선생의 부음은 알지 못했습니다.
많이 늦었고, 많이 부끄럽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