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조성자
동네 병원에 요즘 환자가 많다. 대학병원 예약이 힘드니 이쪽으로 몰리는가 보다. 피검사와 골다공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실 앞에서 기다린다. 대기자 전광판에 이름이 아직 오르지 않은 걸 보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의자에 앉아 폰으로 영화를 본다. 지금 보는 것은 오래전에 만화로 봤었던 것인데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보고 있다. 일본이 잘한 것 세 가지 중 하나가 만화라고 생각한다. <공각 기동대>는 재미있다. 그 옛날에 인공지능을 상상한 이런 sf를 만들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나의 영화 취향 중 첫째가 공상과학이다. 사이언스가 이런저런 픽션 속에서, 다시 말하자면 예술가의 상상 속에서, 발명과 창조를 이루어 온 건 사실이지 않은가. 어린 시절 본 sf 중에 <혹성 탈출>은 충격이었다. 남녀 주인공이 무슨 알약을 먹고 마주 보고 앉아서 손바닥만 서로 맞대고 황홀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쇼크였다. 제목은 잊었지만 또 다른 영화 속 장면도 기억난다. 미래 세계가 배경이었는데 여주인공이 큰 부상을 입었다. 영화가 나온 시절 뿐 아니라 2024년 지금이라 해도 인간 의사 여럿이 몇 시간 동안 할 법한 외과 수술을, 영화 속에서는 큰 캡슐 안에서 로봇이 금방 뚝딱 해내는 것이었다. 수십 년 앞서간 상상이었다.
70 평생 공상과학 영화를 즐겨왔는바, <스페이스 오디세이>, <콘택트>, <매트릭스>, <마이너리티 리포트>, <인셉션 >, <삼체>, <블레이드 러너 2049>, <그녀>, <가타카> 등등 제목만 떠올려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인간의 상상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맷돌에서부터 비행기를 거쳐 컴퓨터와 스마트폰과 로봇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는 상상의 발달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AI 세상이 급속히 전개되고 있다. 어찌나 빠른지 겁이 날 지경이다. 미래에 없어질 직업이 예측되고 있다. 악기 연주,그림 그리기,소설 창작은 물론이고, 내년 2025년에는 AI가 만든 영화가 인도에서 나올 예정이라 한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게다가 엄청난 속도다. 세상의 변화가 요즘처럼 빠른 때는 인류 역사에 없었지 않나.
그러니 궁금하고도 궁금하다. 인공지능이 최고로 발달하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그다음의 세계는 또 무엇이 가능할까? 그다음은?
나의 할머니는 라디오 매니아셨다. 하루 종일 경청하시는데 나와 동생들도 저녁 시간에 방송되는 연속극은 함께 할머니 방에서 듣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라디오를 즐기셨지만 텔레비전은 인생 후반에 접했다. 냉장고도 보셨다. 그러나 세탁기는 못 써보고 돌아가셨던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텔레비전 세대이지만 핸드폰은 아니었다. 자동차도 못 몰아보셨다. 삐삐는 써 보셨지만 컴퓨터는 못 보고 돌아가셨다.
나의 어머니는 핸드폰이 있었다. 컴퓨터도 배우고 싶다고 하셨다.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핸드폰, 컴퓨터를 접했지만 은행에는 직접 가셨다. 유튜브도 모르고 돌아가셨다. AI란 단어를 들어보셨을까?
나도 이제 칠순이 되다 보니 친구들과 모이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종종 듣는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친구도 있다. 욕심 없이 편안히 살다가 어느 정도 노쇠한 나이에 죽는 것에 반대할 생각은 없으나, 마음속에서 "노노노. 안돼"가 나온다. 왜? 궁금해서다. 과연 이렇게 빠른 속도로 진보하고 있는 세상의 다음은 무엇일까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호기심 때문에 빨리 죽기 싫다.
이를테면, 나의 사후에 ''컴도 잘하고, 화상전화도 해보고, 쳇 gpt도 써보았으나, 수직 비행기도 못 타 보고, 달나라 여행도 못해보고, 죽은 가족들과 가상 대화도 못해보고, 피검사도 주사기로 피 뽑아서 하고, 엑스레이, 시티, 엠알아이까지 밖에 모르고, VR게임도 못해보고, 자율 자동차도 못 타 보고, 손가락으로 자판 두들겨서 수필 쓰던 분''으로 기억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시시하다.
"다음 환자분"
간호사가 진료실 문 앞에서 부른다. 내 차례다. 시간이 빨리 간다.
[광주문학]2024 가을호에 실린 글.
첫댓글 100년 동안의 이야기이가 짧은 글에 다 있네
언제 죽어도 "그다음"은 못보니 호기심을 가진채 지금 죽어도 호상인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