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애굽기 33장 18-23절, 로마서 11장 33-36절, 누가복음서 10장 21-24절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창조절 여덟째주일, 종교개혁주일)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전교인 야외예배의 장소로 가면서 들은 이야기 하나를 성도님들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요즘 낙엽이 길거리에 많이 떨어져서, 떨어진 낙엽을 쓸고 길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 힘들어 권사님이 아시는 아파트의 한 관리자분이 일을 그만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그렇구나. 일이 힘드니 그만두는 사람이 많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때쯤 일을 그만두고 다시 편해질 때 일을 구하는 게 똑똑하고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어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이복희 권사님 따님이 이제 일 좀 그만두시고 편하게 지내시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복희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낙엽 다 쓴 뒤에나 그만둬야겠다. 나 그만두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힘들어서 안 된다.”
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계시던 박종신 집사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니, 그 사람 예수 믿는데요?” 차 안에 계신 모든 분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선택이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선택은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도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익이 되고, 편한 것을 먼저 선택하는 삶을 똑똑하다 여기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그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살아 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요,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세 본문의 말씀을 통해 어떤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출애굽기 본문의 첫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18절) 모세는 어떤 이유로 하나님께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고 있습니까?
출애굽기 33장으로 올 때까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기적과 은혜가 많았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친히 모세를 부르셨고, 노예로 살던 이집트 제국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해 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물을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켜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시고, 사람이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 모세와 친구처럼 말씀하셨다고도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미 평생을 두고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기적과 은혜를 경험한 모세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께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19절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 살 수 없기에 ‘얼굴은 보여주지 않겠지만, 등은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모세가 죽지 않도록 모든 상황을 세심하게 살펴서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조치해 주셨습니다.
21절부터 23절을 보면, 모세를 바위 위에 세우시고, 영광이 지나갈 때 바위 틈에 집어넣으시고, 다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손바닥으로 친히 가려주셨다가 손바닥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감탄사가 다 나왔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얼마나 세심하게 챙기고 배려하시는지가 이 구절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모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뭔가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에 차서 움직이는 사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리라 또는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는데도 또 영광을 보여달라고 한단 말이야?’,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을 수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행동을 모세가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화 한 번 내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어쩌면 참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서, 수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모세에게서도 우리처럼 연약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고, 쓰러지고, 또 일어났다가도 다시 의심하고 쓰러지는 믿음의 삶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삶이 있다는 게 우리로서는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기에, 우리는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가 하나의 분명한 표본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을 이끌고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고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
그러자 모세는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주십시오!”(13절)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요청에,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14절)라고 답하셨습니다.
성도님들은 이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현재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은 상태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직접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네, 알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할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또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15절)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고 이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모세는 한 번 더 확인합니다.
또다시 물어보는 모세도 대단하지만, 이런 요청에 계속해서 응답하시는 하나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17절)
이제 두 번이나 하나님의 음성으로 확실한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이제 세 번째 요청을 하고 나섭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 18절입니다.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이쯤 되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요청을 모세가 믿음이 없기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의 여정과 전쟁은 나와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와 함께 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한 발자국도 갈 수 없습니다.’라는 전적인 의존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거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습니다. 내 계획, 내 힘과 능력, 내 지식과 경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교회의 일도 우리는 이러한 세상 적인 방식과 계산을 따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안 됩니다!”라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내 힘으로 해보고, 내 계획, 지식, 경험으로 계산해서 일을 진행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이들이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지금 바울이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당시 로마는 어떤 곳입니까? 당대 최고의 이성과 과학, 철학과 법학, 군사력과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시스템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야말로 세상의 중심이자 가장 ‘똑똑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바울은 탄식 섞인 찬양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33절)
바울이 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두고 고심을 넘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선택받은 백성이요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가장 먼저 영접하고 구원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율법과 지혜를 자랑하던 이스라엘은 자기 의에 빠져 복음을 거부하고 넘어졌고, 오히려 자격 없다고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거대한 자신의 계획을 펼쳐 가고 계시다고 바울은 기록합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신비 앞에서 바울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완전히 무용지물임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율법을 이만큼 지켰으니 구원받겠지”, “내가 이만큼 먼저 드렸으니 하나님이 답례로 복을 주시겠지”(35절) 하는 인과응보라는 상식적인 사고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도 주님의 마음을 다 알 수가 없으며, 주님의 조언자가 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구원과 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긍휼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선택을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내 지식, 경험을 내려놓는 겸손과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에 나를 맡겨 함께 흘러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제 세 번째 본문인 누가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21절)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0장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송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파송된 제자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기념될 만한 배경이나 신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대도, 배낭도, 신발도 챙기지 말고 오직 말씀만 의지해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런 힘도 배경도 없던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보고하기를,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난 현장을 보시며,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쁨이 충만해져 이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앞선 출애굽기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누구인지가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지식, 경험, 종교적 의로움과 계획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 계산하려 들고, 하나님께 조언하려 들며,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구원과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바로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어린 아이는 부모가 없으면 단 하루도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모세처럼 “주님이 함께 안 가시면 한 발자국도 못 갑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세요!”라고 고백하는 사람, 바울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길은 내가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 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전대도 배낭도 없이 오직 말씀만 의지하며 나아갔던 제자들처럼 겸손하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철부지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세 본문의 이야기를 이렇게 함께 엮어 보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지 못하고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주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교만한 태도 때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되,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겨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매달리며 의지하려는 자에게는 영광을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이자 이단경계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려주는 이 의미는 우리가 왜 오늘도 교회를 개혁해야 하는지, 우리 자신을 개혁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단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500여 년 전 중세 교회는 스스로 똑똑해져서, 바울의 말씀과 정반대로 인간이 무언가를 바치면 구원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맞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공로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에, 모세처럼 그리고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만 매달리겠다는 겸손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단들 역시 바울의 고백을 거스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비밀과 심판의 계획을 다 파악했다며, 성경의 비유를 자기들만의 공식으로 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크고 깊은 신비를 자신들의 지식 안에 가두어 놓고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한 자’가 되어 교만의 바벨탑을 쌓는 것, 그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내 경험과 기준, 내 고집과 편견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내 일터에서 낙엽이 쌓이는 것을 보며, 힘드니까 당장 그만두는 것이 똑똑해 보이지만, 다음에 올 사람을 생각하며 묵묵히 낙엽을 마저 쓰는 그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리석음이자 참된 지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삶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완벽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의 은혜만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영광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내 지식과 기준, 목적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손길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맡기며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