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 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