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에뤽시마코스가 말했다네. “자 그럼, 파우사니아스가 이야기를 멋지게 시작해 놓고도 끝마무리를 만족스럽게 못했으니 별 수 없이 내가 그 이야기의 뒤끝을 마물러 주도록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이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이지. 에로스가 두 부류가 있다는 건 그가 멋지게 구분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하지만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그리고 아름다운 자들에 대해서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른 것들 속에도 (즉 모든 동물들의 몸에도 땅에서 자라나는 것들에도, 그러니까 말하자면 있는 모든 것들 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 기술인 의술로부터 깨달았다고 생각하네. 그 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랄 만한 신인지, 그리고 어떻게 모든 것에, 즉 인간적인 사물들과 신적인 사물들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지를 말일세.
나는 이야기를 의술에서 시작할 것인데, 그건 우리가 그 기술에 특별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네. 몸들의 본성이 바로 이 이중의 에로스를 갖고 있네. 몸의 건강함과 병듦이 다른 것이고 서로 비슷하지 않는 것이라는 게 흔히 받아들여지며, 비슷하지 않은 것은 비슷하지 않은 것들을 욕망하고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건강한 것에게 있는 사랑이 다르고 병든 것에게 있는 사랑이 다르지. 방금 전에 파우사니아스가 말했듯이 사람들 가운데 훌륭한 자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방종한 자(제 멋대로인 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추한 일이라네. 바로 그처럼 몸들 자체에 있어서도 각 몸에 속하는 것은 훌륭하고 건강한 것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의술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이지.) 나쁘고 병든 것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추한 일이고 또 누군가가 기술에 능한 자가 되려면 그것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 말아야 하네.
-주) 이 주제는 플라톤이 이미 초기의 《뤼시스》에서 다룬 바 있다. 그 작품 215e에서는 거의 같은 용어와 취지를 담은 고찰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네. 가장 반대되는 것(enantiὸtaton)dl 가장 반대되는 것에게 가장 친구거든. 각 사물은 [자기와] 비슷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즉 자기와 가장 반대되는 것]을 욕망하니까(epithymein) 말일세. 즉 건조한 것은 습한 것을, 찬 것은 뜨거운 것을, 쓴 것은 단 것을, 날카로운 것은 무딘 것을, 텅 빈 것은 채움을, 꽉 찬 것은 비움을 욕망하고, 다른 것들도 같은 이치(logos)에 의해 그러하네. 반대되는 것은 반대되는 것에게 자양물(trophè)이니까.”
골자만 말하면 의술은 채움이나 비움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몸 안에서 하는 일들에 대한 앎이며, 이런 일들에서 아름다운 사랑과 추한 사랑을 분간하는 자가 있다면 이 자야말로 가장 의사다운 자이네. 또 그는 환자의 몸이 한 사랑 대신 다른 사랑을 얻을 수 있도록 변화를 일으켜 주는 자이네. 그리고 사랑이 안에 생겨나야만 하는데 정작 안에 없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만들어 넣어 주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랑이 안에 있을 때는 제거해 줄 줄 아는 자가 훌륭한 장인(匠人)일 것이네. 사실 그 몸 안에서 가장 적대적인 것들이 서로 친하도록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어야만 하거든. 그런데 가장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에게 가장 적대적이지. 차가운 것이 뜨거운 것에게, 쓴 것이 단 것에게, 마른 것이 축축한 것에,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이 그러하네. 이런 것들에 사랑과 한 마음을 만들어 넣어 줄 줄 알았기에, 여기 이 시인들(아리스토파네스와 아가톤을 가리키는 듯)이 말하고 또 나 자신도 그들을 따라 믿고 있듯이, 우리 조상 아스클레피오스께서 우리 기술을 확립하셨던 것이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대로 의술 전체가 이 신(에로스)을 통해 조종되며, 체육 기술과 농사 기술도 마찬가지이네. 그리고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는 자라면 그 누구에게도 시가(詩歌) 기술이 이것들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이 분명하다네. 아마 헤라클레이토스도 바로 그런 말을 하려 했던 것 같네. 비록 적어도 그가 사용한 어구로만 보면 그리 멋지게 말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그는 하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 ‘그것 자체가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화합한다. 마치 활과 뤼라의 조화가 그렇듯이’라고 말이야.
-주)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51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히폴뤼토스가 《모든 이교들에 대한 논박》 Ⅸ.9에서 전해 주는 이 단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일치하는지(homologeei)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뤼라의 조화처럼 되돌아가는 조화이다.”
그런데 조화가 불화한다거나 계속 불화하는 것들로부터 조화가 있다고 말하는 건 대단히 불합리하지. 하지만 그는 아마도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려 했던 것 같네. 고음과 저음이 이전에는 불화했는데 그러다가 나중에 일치하게 되어 그것들로부터 조화가 시가 기술에 의해 생겨났다고 말이야. 확실히 고음과 저음이 적어도 아직 불화하고 있을 때는 그것들로부터 조화가 있게 될 수는 없거든. 조화는 화음이요, 화음은 일종의 일치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불화하고 있는 것들이 불화하고 있는 동안은 그것들로부터 일치가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네. 그런가 하면 불화하고 있는 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조화시킨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네.) 바로 리듬의 경우도 꼭 그렇듯이 말이네.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가 이전에는 불화했는데 나중에 일치되어 그것들로부터 리듬이 생겨나 있는 거지. 그런데 이것들 모두에 일치를 집어넣는 주는 것이 앞의 경우에서는 의술이었던 것처럼 이 경우에는 시가 기술이네. 서로 간의 사랑과 한 마음을 만들어 넣어 줌으로써 그렇게 한다네. 그리고 시가 기술은 이번에는 조화나 리듬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하는 일들에 대한 앎이네.
-주) ‘화음’(和音)의 현대적 의미는 높낮이가 다른 소리가 ‘같은 시점에’ 울려 잘 어우러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 symphὸnia가 플라톤 시대에 동시에 울려 나는 소리를 가리키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같은 시점에’ 울린다는 것이 꼭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리듬의 경우 움직임의 단위들이 앞 단위들을 빨리 또는 느리게 따라오느냐에 따라 일정한 리듬이 생기는데, 그 경우처럼 여기 화음의 경우도 어떤 높이의 소리가 앞소리에 뒤따르느냐에 따라 소리의 일정한 어울림이 생긴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적어도 조화와 리듬의 구성 그 자체에서는 에로스의 일들이 분간하기 어렵지 않고, 이중의 에로스도 여기에는 아직 없네. 그러나 리듬과 조화를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할 경우가 있겠는데, 곡조와 운율을 만들거나 (그걸 바로 사람들은 ‘작곡’이라 부르지)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제대로 이용하거나 (그게 바로 ‘교양 교육’이라 불리는 거지.) 하면서 그렇게 하지. 바로 이런 경우에는 어려움이 있고 훌륭한 장인이 필요하네. 앞서의 경우와 똑같은 이야기가 다시 나오게 되었거든.
-주)에뤽시마코스는 “사람의 경우 훌륭한 자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제멋대로인 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추한(즉 수치스런) 일이라는 파우사니아스의 말처럼, 몸의 경우에도 각 몸의 훌륭한 요소에 잘 대해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요 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나쁜 요소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추한 일이며, 이렇게 몸의 요소에 대해 적당한 처우를 하는 것이 의술이다”라고 말했는데, 똑같은 이치(logos)가 시가 기술에도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 가운데 질서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고 아직 그렇지 않은 자들의 경우는 그들이 더 질서 있게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갑게 대해 주어야 하고 이들의 에로스를 지켜 주어야 하는데, 이 에로스가 바로 아름다운, 천상의(우라니오스) 에로스요, 천상의 뮤즈 여신에 속한 에로스이네. 반면에 많은 송가의 뮤즈 여신에 속한 에로스 즉 범속의(판데모스) 에로스는 그걸 적용할 때 누구에게 적용하든 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네. 그것의 쾌락은 누리게 하되 그 어떤 방종도 만들어 넣지 않도록 말이네. 이는 우리 기술에서 요리 기술에 관련된 욕망들을 훌륭하게 사용하는 것, 그래서 질병 없이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이네. 그러니까 시가 기술에서나 의술에서나 그리고 인간적인 일이건 신적인 일이건 막론하고 다른 모든 일들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에로스 각각을 지켜보아야 하네. 둘 다가 그것들 안에 있으니까 말일세.
한 해의 계절들의 구성도 이 둘로 가득 차 있네. 그리고 방금 전에 내가 말한 것들, 즉 뜨거운 것들과 차가운 것들, 마른 것들과 축축한 것들이 서로에 대해 질서 있는 에로스에 이르게 되어 절제된 조화와 혼화를 얻게 될 때는, 그것들이 찾아와서 인간들과 다른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에게 번성과 건강을 가져다주게 되며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네. 반면에 방자함을 가진 에로스가 한 해의 계절들에 대해 더 힘을 갖게 될 때는 많은 것들을 망치고 해를 끼치네. 이런 것들로부터 역병과 다른 많은 불규칙한 질병들이 짐승들과 식물들에게 곧잘 생기곤 하거든. 가령 서리, 우박, 녹병(綠病, erysibai)이 생기는데, 이건 이런 것들이 서로를 침해하고 질서를 어지럽힘에 의해 생긴다네. 바로 이 일들에 대한 앎, 즉 별들의 움직임이나 한 해의 계절들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하는 일들에 대한 앎이 천문학이라 불리네.
게다가 더 나아가 온갖 제사들, 그리고 예언술이 관할하는 것들(이것들이 바로 신들과 인간들 상호 간의 교제인데.)은 다름 아닌 에로스를 지키는 일과 치유하는 일에 관련된다네. 누군가가 질서 있는 에로스에게 살갑제 응하지 않고 또 그를 존경하지도 않고 모든 행동에서 그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나머지 한 에로스에게는 그렇게 할 경우, 부모들에 대해서든 (그들이 살아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간에), 신들에 대해서든 온갖 불경건이 곧잘 생기곤 하니까 말일세. 바로 이 일들과 관련하여 에로스들을 잘 살피고 치유하는 일이 예언술에 할당되어 있으며, 예언술은 이번에는 인간들과 관련된 에로스의 일들을 앎으로써, 즉 그 일들 중에 온당함과 경건으로 이른 것들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신들과 인간들의 친애를 만들어 내는 자라네.
이렇게 많은 큰 능력을, 아니 한마디로 말해 일체의 능력을 에로스 전체가 갖고 있다네. 하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신들에게 있어서, 좋은 것들과 관련하여 절제와 정의를 갖고 일을 이루어내는 에로스, 바로 이 에로스야말로 가장 큰 능력을 갖고 있고 우리에게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 주며 우리가 서로서로와 그리고 우리보다 더 뛰어난 이들인 신들과 사귀고 친구가 될 능력을 갖게 해 주네.
그런데 아마 나도 (즉 파우사니아스가 그랬듯이) 에로스를 찬양하면서 많은 걸 빼먹었을 수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부러 그런 건 아니네. 내가 뭔가 빼놓은 것이 있다면, 아리스토파네스, 그걸 채우는 게 자네가 할 일일세.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그 신을 찬미할 작정이라면 그렇게 찬미하게나. 자네 딸국질도 멈췄으니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