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범 교수 유작전
생명과 맞바꾼 평면으로부터의 일탈,
그리고 영혼의 징표
한지, 한지 점토, 토분을 사용하며 전통 제재가 원초적으로 가지는 평면성과 그 표현성을 극복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건강을 너무 과신하며 작품과 목숨을 맞바꾸게 되었다.
글 | 박남희 (경북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노태범의 작품 세계는 시기적으로 3기로 분류할 수 있다. 제 1기는 평면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의 시기로 된장국을 연상하는 토분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색채와 자유롭게 전개된 다양한 이미지가 파노라마를 이루어 끝없는 상상력과 풍성한 알래 고리를 담고 있다. 다보탑, 장승, 다양한 이미지들이 자동 발상적(Automatism)인 연상 작용을 통해, 숨은 그림 찾기처럼 여백에 감추어지고 드러남을 반복하여 구조적이며 현대적인 미의식을 자신의 언어로 융합하였다. 또한 나무, 옹이를 이용하여 부조적 효과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수묵과 공존하는 나무의 질감,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곡선의 형상에서 생명체의 생기를 느끼게 하였다. 별 효용 없는 나무토막의 구불거리는 선, 밟히고 구겨지고 찢겨진 종이의 파편들을 통해 입체성을 얻고 입체성은 다시 평면으로 환원되어, 자연스러운 형상이 야기한 선의 아름다움에서 생명체의 생명력, 생명의 도약(elan vital)을 야기한 작가의 신선한 용기와 패기를 발견한다.
제 2기는 1993년에서 1997년 사이 광주 예술대학에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남도의 조형 감각, 호남의 자연과 풍광에 몰입하면서 한국적 자연의 미와 전통적 토속성을 무의식적으로 방출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후일 그의 작품 세계의 뚜렷한 근간을 이루게 된다. 한지를 물에 풀어 죽을 만들고 그 위에 채색을 안착시켜 종이 점토의 독특하고 편안한 질감을 통해 한국인의 질박하면서 투박한 미의식과 순박함을 펼치며 기(氣)를 응축한 활달한 선들의 움직임이 살아 있다.
제 3기는 색채가 구수하고 은은한 색조로 정리되어 단색조를 지향 한다. 선과 형이 일치되어 상형 문자와 같이 도식화 되어 기호의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며 차분하게 원숙한 경지로 정리된다. 상징적 형상과 강렬한 선들이 마치 돗자리를 연상하듯 조밀하고 밀도 있는 공간 위에 평면을 일탈한 부조적 공간으로 치밀하게 형성되며 강한 선묘로 응축되었다.
일상적 삶의 절망과 좌절도 색채를 걸러내듯 삭여 버리고 실재와 같은 간접물을 형성함에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자연친화적인 작품 세계, 그래서 돗자리 같고, 된장국 같다. 그 속에서 잠재된 생명의 힘, 영혼의 징표, 영혼의 생명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천천히 차분하게 음미해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선사시대의 암각화를 연상하듯 선(line)이 형(form)이 되고, 면(phase) 이 되어 주술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부적이 갖는 무속성(巫俗性)을 고형화(Concrete form) 하였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 집필하며, 연구실 밀폐된 공간에서 스스로를 단절하며 수도승처럼 작품에 매진하던 모습, 스티로폼을 시너로 녹이며 자신의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리는 줄 모르며 고민하고 속앓이 하던 모습이 선하다.
2007년 4월 안동 MT에서 몹시 허리가 아파하더니 이후 폐암이 확인되었고, 힘겹게 취득한 박사학위가 너무 서러워 몹시 흐느꼈던 그가 2008년 8월 작고하기까지 우리에게 여전히 80년대의 맑고 소박하였던 청년으로 남아있다. 광주예술대학에서 성실한 교육자로 교수의 본분에 충실하였던 그가 경북대학교에 임용되어 직장 동료로서 모교를 사랑하였던 제자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경북대학교를 너무나 사랑하였던 인간 노태범, 작품을 위해 목숨을 버린 화가 노태범, 학과와 선후배 동문들을 어우르던 큰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그의 작품 세계가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하기를 기대한다. 이승에서 못다 이룬 예술 창작의 꿈, 생명과 맞바꾼 창조적 세계에 대한 열망이 예술가의 집념을 넘어 천국에서 영원히 아름답게 꽃 피우기를 기도하며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그의 영전(靈前)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