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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가락국 (42 년 ~ 562 년) 520년 존속
가야국은 대륙에서 기원(42년)하여 여러 나라로 분국하여 국제무역으로 번성한 나라이며, 오국과 유사한 존속기간을 가진 중앙집권적인 체제이기보다는 교류 중심의 느슨한 연립체제로 제족국의 중요한 나라중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동이제족을 구려 라 하였는데, 구려는 곧 가라의 소리바꿈된 호칭으로, 우선 하라족 태양족이 가라족인데, 우리말의 ‘하’ 줄 소리가 ‘가’ 줄 소리와 교체되기 쉽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 되면서 가야족이 되어, 가라의 '라' 줄소리가 '아' 줄소리로 교체된 것이며, 참고로 한(韓)족은 하나족에서 모음이 탈락한 사례라 봅니다.
또 참고하면 한자의 본딧말에는 요동은 구려하, 흑룡강은 가마마라(검은강), 송화강은 솔호물(만주어, 솔호. 몽고어, 솔코), 고구신사는 고마신사, 가마쿠라는 고구려사람들 고을, 등이 있습니다.
기록에 가야국의 계통은 삼한이 오가야의 종주국으로 되어 있으며, 국력이 이웃보다 약하여 신라의 간섭을 받지만 대체로 각나라들이 독자적인 나라로 운영 번성하다가 신라에 복속(503년)된 나라이며, 각각의 나라들은 연맹이 아니라 느슨한 연합으로 서로 경쟁하고 독자적으로 존속하고 공생하였지만, 역사에서 신라가 가야의 조력이 없었다면 삼국일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물질문화상 기술이나 해양문화역량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나라들입니다,
영역은 동쪽으로 황산강(안휘성 남부에 있고, 황산에서 상해 동쪽으로 흐르는 샛강)이 있고, 서남으로는 창해(동해)가 있고, 서북으로는 지리산(광서성 울림현 하지현 동쪽 지주) 이 있으며, 동북으로는 가야산이 있으며, 남쪽에는 국미(복건성 복주 마미산)가 있는 왜의 영역과 접해서 그 활동 영역은 한반도 보다 몇곱절 더 넓었던 광대한 지역입니다.
이와 다른 해양해역은 광대한데, 동이황산 은 반도 동신라 서지역, 서남이창해 는 인도양 지역, 서북이지리산 은 운남성 점창산, 동북이 가야산은 동신라 남해 가야산, 남이위국미 는 동남아 모든국 해안의 해로와 해연안 강들의 해역인데, 최근에 밝혀진 내용으로 스웨덴 감라 웁살라의 왕릉이 우리와 같은 계통의 언어를 쓰는 사마인들의 왕릉으로 추정되며, 가야고분과 형태와 규모가 유사하지만 이 사마인들은 부여계일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제철과 해운이 국가사업이였던 가야는 시기는 불명확하나 왜의 지역이나 일본 미나마 임방에 분국을 두어 철을 얻으며, 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잔여세력들은 일본으로 밀려나 규슈지역을 장악하고, 소가 씨라 불리우며 아스카문화에 일조하는데, 이 때 사용하던 선박을 금관선이라 하여 금관가야 선박으로 보이고, 수해군이 주둔한 각지 요충지에는 금관성을 두고 해사업무를 총괄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가야의 금해부는 독자적인 외교권으로 한반도 남부에 설치된 역참시설을 총괄하고, 은그릇 은기를 쓸 정도로 풍부한 재정을 가졌고, 삼국지 위서 왜인 조에 한남도 남부의 구야한국이 있는데, 여기서 가야의 금관선을 만들고, 국재해양경찰 역을 하였는데, 금관의 나라에서 남옥과 북옥을 두고, 법을 어긴 일왕들을 가두었다고 나옵니다.
일설에 최초 가야 영역으로 북경 요동에서 동으로 1천여리 해안 지역에 북동쪽에 신라와 접하고, 남서에 백제를 접하며, 동에 바다를 접하는 발해만 지역으로 도읍하였는데, 지역에 소머리 형상이 보이는 가야산이 있으며, 이 가야산 (요녕성 호로도시 대홍라산) 에는 혁거세왕과 수로왕이 연관되는 정견모주의 신화가 있고, 최치원이 은둔한 곳이라 하였는데, 이 대홍라산(가야산) 서쪽에는 해인사로 추정되는 천연사가 있다 하며, 또 요녕성 흥성시에는 구지봉, 금관성, 망산도, 도 있으며, 흥성 수산은 마치 거북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수산이 구지봉이며, 흥성고성(사방 8백여미터)은 금관성이고, 시 동남 국화도가 망산도가 된다는 설입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가야의 강역에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방향이 약간 비틀어져 기록되어 있지만, 가야의 강역이 동쪽은 황산강까지, 서쪽은 지리산까지, 북쪽은 가야산까지, 남쪽은 바다에 닿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알아 보다시피 북쪽의 가야산은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에 있는 대홍라산을 말하는 것이고, 황산강은 발해 금주만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칠리하를 말하는 것으로 비정되고, 지리산은 지금의 진황도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을 말하는 것이며, 창해는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지금 발해 북쪽 진황도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이 역사서에 언급되는 갈석산이 아니라, 반도의 지리산(방장산)이었고, 산동성 태산이 반도 탐라의 한라산입니다.
본래 가야라는 말은 대륙 가의 해역을 낀 지역이란 뜻이 들어 있어, 6개 해역을 각 나라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는데, 이는 당시에 해양에서 경쟁하는 백제 해양세력과 도처에 많은 해적들이 있어 이를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고, 무장 수군과 이중 선복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군선이나 상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난함선 모형은 오늘날에도 발굴 부장품으로 선상부와 선하부가 겹으로 되어 있는 이중으로 된 배모양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6개 해역과 연락소들은 멸망하여 신라로 귀부되므로 신라해상 무역지로 운영되었으며, 나중 고려가 신라를 접수하면서 금해부를 따로 만들어 업무를 총괄케하여 운영하였으며, 고려의 해역과 연락소로 운영되게 됩니다.
지금의 구주와 대마도는 단군조선때 삼한이 각기 나누어 관리하던 곳으로, 임나라 하였는데, 고구려에 속하다가, 그 중 섭라 대마도는 해운길목에 있어 가야의 영유권을 백제에 탈취 당하자 극반한 가야가 신라에 기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제가야국들은 육로나 해상운송과 함께 봉수를 이용한 연락체계를 갖추었던 나라로, 가야인들은 국가 기원 전부터도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였고, 일본 고대사에 처음 등장하는 기원전 1세기부터 규슈 후쿠오카 지역을 건설하였으며, 대륙에서 열도로 도래한 무당 히미코는 구주 수십여 부족을 통일합니다.
참고로 청양, 허촌, 황산, 구자산, 묘수, 안휘성 궤지, 라는 지명이 가락국의 지명이 있으며, 가야국 안휘성 청양을 중심으로 아래로 강수가 흐르며, 북서족으로 지리산, 독산, 잠산, 사성,이 있고, 동북으로 함산, 독산,이 있고, 서남으로 덕안이 있고, 동남으로 허촌, 구자산, 황산, 구화, 조수가 있는데, 삼국지나 후한서에는 고구려의 북평, 어양, 상곡, 신성, 태원, 과 왜의 남월, 주애, 이주, 단주, 회계, 태, 의 사이에 가야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설에는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어쩌면 해운강국 가야의 천문전문가들의 기록이 신라와 혼재하였다면, 신라의 관측 기록이 어쩌면 가야의 기록일 수도 있다고 하며, 가야가 기원할 시기가 한나라와 흉노, 동호에서 갈라진 선비, 오환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흥망성쇄가 달린 시기와 겹치고 있고, 이 때 가야가 여러나라 소국 형태로 독자적 세력으로 생긴다는 것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다툼이 없던 대륙 중남부 지역에서 여러 종족들이 분활하여 개국한다는 것은, 초기 아홉종족의 9간 이름이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등인데, 이 한자의 뜻이 나도 간, 너도 간, 저도 간, 이 되니, 아무 종족이나 9간에 속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시사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금관가야국 가락국 (42 년 ~ 가락국 왕력 532 년, 가야국 562 년) 존속 490 년.
가락국은 우적도 부근에 있던 단군조선 번조선의 6개 부족으로 나라가 망하자 유민으로 지냈는데, 당시 번조선의 속방인 서안의 한나라 멸망과, 왕망의 신나라 개국시 혼란과 끊임없는 내란 등,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지자 남하하여 양나라 땅 강소성 양성현 김해소경 금주 양주에 구야국에서 금관가야국으로 도읍하다가, 이미 정착한 사로국 부근 거북산 구산 이 있는 절강성 순안 지역으로 와서, 김해부 김해경(절강성 임해군)에 나라와 도읍을 옮겨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신라가 5세기 중엽 팽창정책으로 선회하자 백제, 왜와 함께 대비책을 강구하며, 수도를 옛 양주로 천도하였으나 멸망하며 신라로 귀부하게 되는데, 공식적으로는 10세 구해왕 구형왕 때 신라 24대 진흥왕(537∼572년) 12년에 멸망하지만, 처음과 마지막 도읍지 양주, 금주, 강주, 진주,는 모두 같은지역으로 주변영토가 반도 보다 커서 광대합니다.
초대 왕 김수로왕 뇌질청예 (42~199년)에서 10세 구형왕 까지이나 명확하지 않으며, 가락국이 개국하여 500년 간 왕조를 지속하며, 왕조의 재위는 번조선 유민을 주축으로 서안지역에서 금주를 거쳐 정착한 제족들 모두 9부족들이 지도자 간 칸 아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 등 아홉 명의 추장이 있었으며, 금관가야국 전신 변진구야국을 포함한 번조선 왕조를 금관가야국으로 함께 수록하여 수로왕 재위가 길어집니다.
설화에 나타나는 수로왕은 처음 대륙 강소성 회음현 귀주성 구산에 탄강하셨다. 라고 하고, 수로왕은 출신기록 없는 변한유민의 수장이라 하기도 하지만, 일설에는 파형동기를 들어 부여족으로 보기도 합니다.
신라와 같이 유민이나 초대왕에 대한 뚜렸한 기록이 없어 출신에 대한 여러 설들이 많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들은 배달국시대부터 비의가 숨겨 내려온 조직집단인 쇠부리 청동, 제철 생산의 부족민과 그 지도자 6인과 수장 간 칸으로 단군조선 번조선 지역에 있었던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또한 수로왕의 김씨성은 신라 김씨와 같은 소호금천이라 보는것은, 가락이 정착한 지역이 소호김천의 태생지 소호, 현호, 청양(안휘성 남부)여서이고, 나라의 문장을 두마리 물고기 형상 쌍어문인 것은, 가락국의 다수의 수장들이나 족민들이 옛 홍수시절 우나라의 화백인 별호가 쌍어 곤곤인 '곤' 족민들의 후예로 그시절 홍수를 다스렸으나, 나라가 상나라에 망하자, 번한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 족민과, 허왕비 또한 곤오 족민들이어서, 그들의 상징인 물고기를 국가 상징으로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소호김천의 무덤이 산동성 곡부에 있는데, 이 무덤은 고구려나 백제의 무덤과 같고 한제족국에는 거의 없는, 사각의 피라미드인 것이며, 신라부인 김씨의 묘비에는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 금천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 김씨의 세조이시다, 라고 뚜렷이 밝히고 있어, 김일제 이전에 소호 금천씨가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것이며, 이 신라부인 김씨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기에, 문무왕 김춘추에 이어 훨씬 후대사람들까지 자신들의 시조를 그렇게 알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참고로 물고기를 문장으로 쓰던 곳은 인도 아요디아 드라비다족, 페르시아 주변지역, 바빌론, 등으로 많으며, 중북방지역은 숙신, 스키타이, 월지, 쿠산, 앙소문화의 하족, 등 여러 지역이나 족명에 쓰였습니다.
또한 수로왕비 허황옥도 곤의 후예가 진출한 인도 아유타국은 추정지로 사천성 안악현, 서장성 서북부, 대승불교의 전통적인 국가로, 함달왕의 공주태생으로 사천성 보주 안악현으로 귀향했다가, 뱃길로 장강 양자강을 타고 망산도 앞바다 가락경내로 48년에 와 수로왕의 비가 되며, 이 함달왕가 또한 쌍어를 문장삼으며, 후세를 김씨와 허씨로 번갈아 성씨를 부여하여 허씨 성씨를 독자적으로 남기게 됩니다.
참고할 일설에 한국어는 우랄 알타이어가 아니라 남방 인도계 언어인 길약어 일 수 있고, 한글과 거의 같은 글을 인도 소수 민족이 쓴다고 하는 설이있어, 허황옥의 래왕설과 함께 인도와의 관련설을 말하고 있으며, 또 일설에 최치원 석이정전에는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의 감응을 받아 형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동생 금관가야왕 뇌질청예를 낳았다하여, 가락국기 기록에 반하게 썻는데, 이것은 가락국 전체 통합을 의식하고 쓰인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설은 국가운영이 국왕의 단순한 치세도 있겠지만, 여기에 종교적 체제의 하나인 범국가적 배달화백 제도 같은 복합적 운영체제가 제족인들에게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만큼 민심이 만들어져 왔음을 이해 할 필요가 있는것은, 왕조와 귀족들이나 기록하던 사관들의 생각보다 범신교라는 종교적 권능이 나라 민심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신라 초대 혁거세 왕을 추대한 부족 수장 소씨 벌도리는 곤을 조상으로 하던 성씨이고, 가락국 국왕으로 추천한 수장 아도간 또한 곤을 조상으로 두고 있어, 사로국과 가락국 국왕 추대 상황은 겹치게 됩니다.
한편 산서성 부근 청구땅 고유에 있던 유울국, 가야국의 가실왕이 있었는데, 그가 가야금을 만들고, 시가 가시리를 지어 별리를 노래하였다 하여 우륵과 함께 유명하며, 가야금과 함께 고려시가로 불리우게 되는데, 가실왕의 기사는 가야사에 잔여 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에 나오는 왕조는 초대 수로왕(42~199년 금관), 이진아시왕(42,대가야, 반파국). 2세 거정,거등왕(199~253년). 3세 마품왕(253~291년). 4세 거질미왕(291~346년). 5세 이시품왕(346~407년). 6세 좌지왕(407~421년), 금림왕. 7세 취희왕(421~451년). 8세 질지왕(451~492년), 이뇌왕, 가실왕(반파국). 9세 검지왕(492~521년), 10세 구해 구형왕(521~532년) 월광, 도설지왕. 이며, 국의 계보는 금관, 대가야, 안라국, 소가야, 탁순국, 탁기탄, 보라국, 초팔국, 반파국 등이 있습니다.
또 가락국에서는 국왕의 이름을 다른 방법으로도 불렀다고 되어 있는데, 김수로왕, 도왕, 성왕, 덕왕, 명왕, 신왕, 혜왕, 장왕, 숙왕, 양왕, 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숭선전지 가락국 선원세계에는, 시조대왕의 휘호를 수로라 하고, 후한 광무제 18년 임인년 음력 3월 15일에 나라를 열었다고 되어 있고, 그때 나라의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라 했으며, 수로왕은 158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장지는 김해부 서쪽 300보인 구지봉 남쪽이고, 묘지 방향은 자좌원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정북쪽으로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기록에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국, 안라국, 다라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졸마국, 걸찬국, 사이기국, 염례국, 탁순, 탁기탄, 등 12개 소국의 이름이 기원전 543년에 스리랑카 비자야왕과 인도 남부 타밀인 판디아 왕국 출신 공주인 둘째 부인 야쇼다라 왕비 사이에 낳은 12 자녀 이름과 일치하는데,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또 10세 구형왕의 손 무력, 손 서현, 손 김유신은 신라의 대장군으로 14회의 크고 작은 격전을 승리로 이끌어 삼통의 공로로 후에 신라국왕 흥무대왕으로 추존 받았으며, 당시 백제와의 결전지 항성, 독산, 동성, 잠산, 백마하, 황산, 평원, 대산, 덕원, 등이였으며, 8세 이뇌왕 시절 가실왕은 신라왕가와의 혼인동맹과 함께 백결선생 우륵과 함께 음률과 시가로 유명하며 후예가 일본으로 진출합니다.
참고로 고대로부터 북방에 위치한 제족들이 움직일 때는 항시 이웃 유사족들과 짝무리를 짖는데, 단군조선과 고구려는 실위, 흉노, 돌궐, 슬라브, 등의 나라와 이고, 남방으로 백제와 가야는 왜, 일본,과 짝하였습니다.
첫 수도 금주도 컷지만 도읍지 김해경은 절경 황산이 있으며, 절강성 임해군 인데 임해군에는 궁전 평해전과 임해전이 있었는데, 임해전은 방대하여 당시 백관들과 외국 외교관들의 연회처로 유명하였으며, 신라와 고려에 귀속 후 고려에서도 수리증창하여 계속 쓰이게 되며, 또 김해경에는 둘레 천오백보의 나성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때 증축하여 둘레 2만7천9백보 누각 1만3천개 4대문 8중문 13개소문을 두었다 합니다.
또 김해부내에 금해부를 설치하여 금관가야가 총괄하는 방대한 오가야국 해역들과 연락소들을 배당, 변경, 관리하였는데, 이 일 또한 신라와 고려조 까지 이어지고, 고려 태조시 가락국,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의 담당치소 변경이 기록에 나옵니다.
불교와 차문화는 허황후의 오라비 장유화상 성우와 같은 차인으로부터 불교의 남방전래설과 더불어 인도에서 차가 직접 전래됐을 것으로 보이며, 훗날 신라 문무왕 즉위년(661)에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이 자신의 외가쪽 시조이므로 종묘제사를 합해서 계속 지내라고 명한 사실과, 매년 세시에 술을 빚고 차와 떡, 밥, 과일 등을 차려 수로왕묘에 제향을 올렸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왕실 제물에 차가 쓰였다는 말은, 차가 고급문화를 형성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며, 차가 일반 평민사회에까지 전파된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인데, 이렇게 불교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이고, 미륵신앙 까지 가야인들에 의해 사방으로 퍼지게 됩니다.
해양영역은 동쪽으로는 안휘성 황산강을 경계로 하여 현 일본 구주의 아소산 축후천, 황산강은 미주의 미시시피강,
서남쪽으로는 창해의 싱가폴 해협을지나서 인도양 까지이고, 서북쪽은 지리산(점창산) 으로 경계하고, 홍하를 타고 올라가서 현 중국 운남성, 점창산 해역, 동북쪽으로는 가야산 인 반도 낙동강을 타고 올라가서 가야산, 남쪽으로는 나라의 꼬리 라 해서 왜의 세력과 교우하는 지역으로, 남쪽으로는 아시아 대륙의 모든 국가들의 해안가로, 대륙의 남해안과 반도의 남해안을 해양 영역으로 추정하며, 특히 실론, 스리랑카와 인도해역이나 구주 열도 해역을 개척한 수로왕의 업적은 해상왕국의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대가야 (42 년 ~ 562 년) 존속 520 년
시조 아진아시왕, 내진주지왕 뇌질주일(42~ )을 시조로 6세 금림왕. 7세 하지왕. 9세 이뇌왕. 10세 월광태자(520년), 도설지. 16세 도설지왕(~562년). 을 끝으로 사로신라에 귀부하여 5백여년의 가야해양 제국은 멸망합니다.
가락국기에는 시조 아진아시왕을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동생으로 나오지만, 최치원 석이정전에는 아진아시왕이 형으로, 수로왕이 동생으로 나오며, 석순응전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는 곧 정견의 10세손인데 아버지 이류왕이 신라국의 이찬 비지배의 딸에게 구혼하여 태자를 낳았다. 했으니 이류왕은 곧 뇌질주일의 8세손이 된다. 하여, 이것은 가락국의 고기와는 합치하지 아니한다. 하는데, 아므튼 이 형제들이 가야 6국을 세웠다 하였지만, 사실상 국가 시초와 종말의 기록이 모호하고 미비합니다.
가령 신라의 24세 진흥왕(534~576년) 조와 같다란 가실왕은 나라별 해양영역에서 반도와 9주 열도가 대가야 영역이고, 그의 후예가 일본에 진출한 점을 들어, 세수를 모르는 대가야의 왕으로 보이지만, 일설에는 금관가야국왕으로 보기도 하는데, 가실왕은 십이현금 곧 가야금을 만들었으며, 또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므로 성음 또한 일정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악사 우륵에게 명하여 십이곡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때 우륵이 지은 열두곡은 하가라도·상가라도·보기·달이·사물·물혜·하기물·사자기·거열·사팔혜·이혁·상기물, 등이었으며, 가야가 망하게 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신라의 진흥왕은 그를 국원에 두고 가야의 음악을 계승케 하며, 우륵과의 관계를 보면 가실왕은 신라 진흥왕과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가실왕의 후예가 일본에서 대가 이어지고 있는 사례는, 일본 도래 가야계 성씨가 7개 확인되며, 그 중 가라가실왕 후예의 씨족으로 미치타노무라지(道田連)가 있다고 기록에 나오는데, 그가 가실왕의 후예가 맞다면 훗날 일부 고구려, 백제 왕족이 그랬듯 대가야 왕족의 일부도 멸망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기록에 5세기 초 반파국이 대가야읍 연조리에 도읍하다는 기록이 있어, 대가야도 변진반로국 부터의 왕조사를 아진아시왕 대로 묶어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조의 기술과 같이 재위 기간이 길어진 것으로 보여주며, 일설에 대가야는 박트리아 토카라 라는 이름을 계승한다는 설이있어 왕조 서방전래설을 말하기도 합니다.
도읍을 고령군으로 삼고 두개의 현 야로현과 신복현이있는데, 야로현은 하남성 서평현 75리 여서, 산동성, 강소성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양영역은 동신라와 일본해역들의 섬들과 내륙의 강들을 포함하므로, 반도의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내륙 경상북부지역까지 강 주변지에 있었던 여러 읍락들과 김해, 남원지역등에는 많은 가야 능들이 남아있고, 여러 부장품들인 철제무기류, 청동거울, 금동신발, 토기, 등의 유물들이나 일본 규슈 북방의 여러 유물들은 대가야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되지만, 이 능들과 유물들의 조성시기는 당시이거나 후에 반도 진출세력들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라 초기에는 가락국에 비해 미약했으나 중반 이후에는 도약하여 금관가야를 제치고 가야제국을 대표할만큼 국력이 강해지고, 금관가야 멸망 후에도 30여년 동안 건재하였는데, 이는 선진철기 기술문화와 해양력의 확장 증강에 기인하고, 일본 고분시대를 이끌만한 역량이 강화되어 일본 역사문명사를 한층 높게 바꾸어 버립니다.
안라국
아라가야 혹은 안라가야라 하며, 기록에 사비회의는 541년과 544년에 걸쳐 백제와 가야제국들 왜 소국들의 국가 회담으로, 당시 대륙의 평화 공존과 정착을 모색하기 위한 나름 규모있는 국제회의로 주로 백제국에서 의장국으로 회의를 주재하였고, 이 회의는 백제의 성왕과 가야 소국 수장들이 참석하며, 신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가야 연합국들은 신라와의 교섭을 계속 시도하였는데, 이때 사비회의에 참석자 명부에 안라국의 2인자격인 차한기 지위의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은 이름이 유일하게 기록에 남아있으며, 나라에 대한 기록은 찾을길이 없지만, 일본서기 기록은 안라국은 일본을 해양영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가야
엣 고자국 고성(강소성 고순현 남쪽 30리에 있다)으로 도읍하고, 문화량현, 사수현(강소성 숙천현 동남에 있다)두 현이 있으며, 고성 김씨 기록에 시조는 소가야 막내 막로왕으로 나옵니다.
영역 내에 구암사 십선사 청량사는 신어산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어산은 감로사에 있다는 기록으로, 감로사는 신어산에 있다 했으며, 감로사는 지금 대륙의 강소성 진강현 북고산이라 했는데, 북쪽에 있는 고산인지 북고산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북고산이 강소성 단도현 북쪽 1리에 있다고 적고 있으며, 지형으로는 산이 우뚝 솟은 입구에서부터 강으로 이어져 삼면이 물로 되어 있다고 했으며, 이곳에는 황금색과 붉은 색의 두 산이 나란히 있고 경치가 수려해 사람들이 말하기를 삼산, 즉 세 개의 산의 서울이란 뜻으로 불려졌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 지도에 남경시 동쪽에 있는 진강시에는 감로사가 있고 신어산도 있으며, 구암사·십선사·청량사, 운점산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진국사와 명월사도 진강현 주변인 명월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해양영역은 고자에 연락소를 둔 고자국 말레이 반도 해역으로 보입니다.
탁순국 기록은 백제와 일본서기에 4세기 중엽 말금한기왕 마지막 아리사등왕 (~ 538년)이 있습니다.
탁기탄 일본서기에 말대 함파한기왕(~529년) 로 나오는데, 함파왕이 실명입니다.
벽진국 (성산가야)
벽로왕. 도읍은 벽진인데, 지금의 경산(호북성 경산현) 이며, 해양영역은 필리핀 해역으로, 이 필리핀 사람들이 대륙을 거칠 때 들리는 큰 섬이 오늘날 대만인 탐미다례인데, 사서에 보면 이곳을 다스리는 군장의 이름이 바로 성주로 나오고 있으며, 왜가 고조선 회귀세력이라고 할 때, 대륙 서쪽의 해안쪽이 아닌 태평양 쪽에서 접근하는 것은 유일하게 이 필리핀 지역 밖에 없고, 이를 성산가야로 비정하는 것입니다.
사벌국 (고령가야)
고로왕. 함녕군은 곧 함녕현 장안현 지역입니다. 고령가야가 호북성이나 섬서성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해양수로영역으로 절강, 복건성, 으로 보이며, 이 복건성은 좌우로 길게 놓여진 가락국과 남북으로 대륙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고, 또 필리핀이나 대만등에서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기록에 이 복건성 지역이 한동안 비워있는 상태로 있었는데, 당시 부여가 한나라에게 비단길을 열어주는 대신, 부여나 삼한사람들이 교류 할 수 있도록 동서남북의 교차로인 이 복건성을 비워달라는 외교협상에 성공을 하여 남부여가 위치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옛날에 동서남북의 교차로를 편안히 한 이란 의미로 고령 이라는 가야로 불리워졌다고 봅니다.
아라가야
일명 아야 라고 합니다. 본래 아시량국으로 되어있으며, 아나가야로 불린다고 했으며, 도읍은 지금의 대륙 함안이며, 소삼현, 현무군(사천성 중강현)과 장함현, 의령현이 이에 속합니다.
참고 일설로 조선개국왕 이성계와 막역한 여진족 이지란의 아버지 이름이 아라불화(아라 부카)의 아라는 ‘화살’을 의미하는데, 아라가야가 의 '아라' 가 같은 한자 화살을 의미하므로, 아라가야 또한 활제작과 활을 잘 쏘는 나라로 보인다고하여 아라가야를 위나라를 계승한다고 하는데, 해양영역으로는 함안 연락소가 있었던 월남과 주변 해역으로 보입니다.
광개토태왕 비에 안라병사들 이야기가 나오며, 이 안라혹은 아라가야는 오늘날 월남을 뜻하기도 하고, 만약 태왕이 이들과 싸웠다면, 태왕께서 진출한 곳은 최소한 오늘날 광동성 지역이 되는데, 이곳은 고일본이라 불리운 해양세력
들이 접근하거나 진출하는 요충으로 남북의 관방로와 대운하 등의 교역로 확보가 태왕의 왜의 정벌인 셈입니다.
기사에 404년 갑진에 이때 왜가 대방에 쳐들어왔기에 붕련에게 군사를 움직여 왜선을 공격하게 하였더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은 해적 무리들이었으며, 천왕인덕이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인덕은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고, 상은 서구를 왜의 땅으로 보내어 그 진상을 알아보게 하였다. 하여, 광개토태왕은 왜에 대한 통치책임을 대운하에 대한 동맹관계에 있는 인덕에게 맡기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고, 따라서 이런 통치책임에 대해서 인덕은 사죄하는 그런 관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비화가야
영토 없는 가야로 배달화백 교육기관 경당, 소도와 관련하지만, 해양영역은 삼도해 남왜 해역으로 보이는데, 가락국 일본부가 있던 인도네시아 동부해역으로, 스리 비자야 왕국에서 태양의 섬으로 여긴 오늘날 슬라웨시 주변의 삼도왜가 자리잡은 남왜의 해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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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국은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는 뚜렸한 왕조나 일정한 외교 교섭이 없지만, 대륙이나 반도의 해안지역이나 섬에서 흩어져 집단을 이루며 살아 온 것은 사실이므로, 틀없는 기록들을 모아 참고하여 정리합니다.
옛부터 아시아 대륙이나 반도의 연안지역 거주자들에 대하여서는 왜라 불렀다는 것은 여러 사서들에 의해 검증되고 있지만, 기록들이 가야나 백제, 위, 등 해안 여러 제족들을 통칭해 왜라고 기록된 것들이 많아 신빙성은 떨어집니다.
그러나 기록에 북위는 물길이다. 일명 말갈이며 일곱부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후 서로가 뒤엉켜 합쳐져서 당나라 초에 흑수말갈과 속말 이렇게 이부로 나누어졌다. ...그후 이름을 고쳐 발해라 하였다. 하고, 왜는 원래 동이였으며 전국시대 때는 위(220~265년 46년간)나라였으며, 6세기 말경까지 후위, 동위로 그 명맥을 유지했고, 왜란 위가 작아져서 변화한 명칭이며, 수서 열전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 뿐만이 아니라 말갈, 유구, 왜국까지 동이라 소개 하고 있는 실정이였습니다.
왜의 소국들은 주로 바다를 끼고 섬들이나 연안에 주로 거주하는데, 바다는 사실 한자음인 해는 매(每)의 물(水)이라는 뜻이되는 바, 매는 아이를 낳는 어미의 뜻으로서 사람이 불어난다는 뜻으로 쓰였던 글자로, 즉 햇님의 아이를 낳아 부풀리는 것이 [每]라는 글자의 속뜻인 것이며, 여기에 다시 물을 뜻하는 삼수변을 덧붙인 것은 해(日) 무리(衆)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으로, 결국 바다는 햇, 달, 즉 햇님, 땅님이라는 뜻이되며,
바다가 해와 달의 합일체라는 사실은 백(白)에 대한 강희자전에서 백도는 명도라 한다라고 하여, 바다와 연결가능한 백도와 밝도의 두 가지 발음을 제시하고, 뜻을 정리해보면, 백도는 그림을 그리는 일, 혹은 백정과 같이 실제로 동물을 해체하거나 술을 빚는 일 등과 관련되며, 이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흰옷을 걸치고 띠로 덮은 초가에서 살았으며, 이들을 가리켜 백민, 백도라 했다고 하여, 이 모든 일들이 동이들의 직능에 포함된다 할것입니다.
또 바다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단어가 바로 밭이며, 글자 모양을 보면 알수 있듯이 전(田)은 곧 피라밋을 나타내는 고(古)의 변형이므로, 밭의 고어는 받이 되는데, 이 말은 수메르어 바드와 곧바로 연결되며, 받은 동이들의 터전으로 받에 살던 이는 받이가 되며, 이 말은 영어 바디와 연결되고, 이 사실은 동이들의 중심 역할이 몸받이였던 사실과 직결되어, 씨내리와 씨받이가 동이들의 역할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견해가 올바른 것임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씨받이가 바로 바다와 연결되는 것은 씨가 sea(바다)와 seed(씨)의 두가지 씨는 알과 함께 쓰여 씨알이 되는데, 이 말을 고상한 쪽으로 풀면, 씨실(가로 줄)과 날실(세로 줄)이 되어, 베나 그물을 짜내게 되는데, 여기서 씨줄, 날줄로 짜진 천이 신라때 세오녀가 왕에게 가져가 제사지내면 없어진 해가 살아 난다는 신물로도 표현 됩니다.
여기서 날실은 일줄로서 해실이 되고, 씨실은 지실로서 달 줄의 뜻이 되고, 지는 중국음이 지이고, 땅귀신의 뜻으로 귀나 제와 같은 뜻이며, 여기서 보일 시변이 떨어져 나가면 씨(氏)가 되어 혈통을 나타내며, 또한 바다는 신전이라는 성격 때문에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있는데, 여기서 바다의 새로운 개념이 파생되어 밧 따 즉 바깥의 땅이 그것으로, 동이의 신전인 삼신산은 지금도 풍수지리의 기본원칙으로 지켜지는 배산임수, 즉 앞은 물이 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주는 지형조건을 선택하여 건설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추측은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물가의 비탈 언덕을 의미하는 것과, 아사달이 단순한 종교적 신전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도읍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반드시 군사적 수비문제를 고려해야 했던 사실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 배산임수의 원형은 바다나 호수 속의 섬이었을 수도 있으며, 이와같은 생각은 신전의 주인인 용왕의 처소가 못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집니다.
왜의 영역은 광범위하게 지금의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섬이 본거지로 분화 하였으며, 열도보다 이르게 일본이란 국호를 처음 쓰던 곳인데, 개괄적으로 보면 사로신라와 백제 개국 전에는 양자강 이남 남해안 까지 해안지역과 대만 까지 영역으로 하다가, 사로국과 가야가 개국한 기원후 시절에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영역이 확대 되었으며, 3세기 남북조 시대는 내륙영역이 거의 사라지고 타이완에만 왜국으로 국한되었으며,
4~6세기에 대륙지역을 다시 회복하고, 백제 멸망 후에는 타이완에만 왜국이 있다가 일본(670년)이란 국호를 쓰게 되는데, 양자강 이남의 왜는 본래부터 가야, 백제, 사로, 고구려 사국의 78개 제후국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사실 왜의 중심 영역인 동남아 지역은 본래 순다랜드라 하여, 빙하 내지 간빙시절 바닷물이 빠져 지금의 인디아지역 민큼 커다란 대륙이 조성되었고, 아열대 기후에 많은 동물들과 인간들이 살았던 곳이여서, 대륙에서 인종의 출발을 묘족이라 하지만, 이보다 더이른 시기의 순다랜드의 종족들은 어찌보면 동북아인의 뿌리가 되는 관계로, 왜족이라 하는 족을 바라 볼 때는 왜의 중심부가 왜 이지역임이 드러나며, 또 이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이야말로 수많은 종족의 기원이 됨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기록에는 낙랑의 바다 한 가운데 왜인들이 있으며, 이들은 나누어져 1백여 국이 있었다. 하고, 또다른 기록에는 개나라는 거연에 있으며, 남왜와 북왜는 연나라에 속한다."라고 하여 현재의 북경과 요동반도를 거점으로 한 나라들인데, 왜가 연나라에 속한다면 산동반도 지역과 요하 동부지역을 지칭하고 있는 기록이며, 후한(25~220년)때 논형을 쓴 왕충은 '주나라 때 천하가 태평하여 월상에서는 하얀꿩을 헌상하고 왜인들은 활집을 특산물로 바쳤다.' 라 기록해 활과 활집을 쓰던 숙신인을 왜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도 관경사국 시절에 제족 사서와 한족국측 사서를 종합하면, 남왜는 인도의 촐라왕국에서 보르네오지역이며, 서왜는 비미호가 거주하고 있었던 메콩강 주변의 왜인 섬나곡국인 오늘날의 태국 지역이고, 동왜는 중미지역과 이를 넘은 쿠바지역이며, 북왜는 인덕왕이 있었던 열도로 크게 나눌 수가 있으며, 이러한 동서남북을 총괄하는 왜를 대왜라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 강화도에서 서울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왜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었으며, 이때의소문국은 의성지역으로 남대천, 쌍계천, 위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서 조선조때까지 오늘날 미얀마지역에 교류 할 수 있는 특별 구역 즉 해외 임내지역으로 미약하나마 계속 교류를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대왜가 바로 백제와 신라, 가야가 신속하였다는 왜이고, 현 서울 지역이 신소도국이 동서남북의 왜를 총괄하는 대왜였다는 것은 사서에 자주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제족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까닭은 일제강점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수륙의 길이가 3,000리이다. 대해가운데, 산과 섬을 의지해서 거주한다. 위나라 때에 중국과 통역을 보내는 나라가 30여국인데, 모두 자라고 칭한다. 이인은 이수를 모르고, 단지 날짜로 계산한다. 하여 이수를 모른다는 말은 선박으로 다니므로 날짜만 안다는 것이며,
또 기록에 그 나라의 국경은 동서가 5개월 걸리며, 남북이 3개월 걸리는데, 각기 새로운 바다에 이른다. 왜국의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거주하는 것은 야마퇴라고 하는데, 즉 위지에서 말하는 야마대를 뜻한다. 하여, 여기에 보면, 범선으로써 동서가 5개월 걸린다고 했는데, 이는 태평양을 가로질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며, 컬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2개월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 이는 대왜가 총괄하는 동서남북의 왜지역을 선박으로 여행할 때 걸리는 시간인 것으로 신대륙 부상국의 활동상도 알 수 있게 됩니다.
후한서 선비전에 178년 경에 단석괴가 큰 호수에 물고기가 많은 것을 보았는데, 고기를 잡을 줄 아는 자들이 없던 차에 왜인들이 어로에 능한 것을 알고 왜인국을 공격하여 이들을 잡아와 물에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책에 57년경 '중원 2년 동이 왜로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헌상하였다.'고 하면서 그 주석에 '왜는 대방의 동남쪽의 큰 바다 가운데 있으며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하며, 왜로국에서 조공하러 예방하였다고 하여, 대방은 만주 요동 지역이거나 황해도에 나타난 지명이므로 하나 같이 동이제족들을 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왜의 발음인 와는 물길의 발음인 와지. 옥저의 발음인 오쥐 등과 만주어인 '와지' 즉 숲의 사람(동쪽의 사람)이라는 말과 의미나 발음이 동일하며, 뜻은 '해뜨는 곳' 입니다.
또 예족의 '예' 라는 말도 만주한반도 일대의 민족을 통틀어서 일컫는다는 점을 든다면, '왜'라는 말 또한 북만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는 제족을 비하하는 말인 멍청하고 둔한 종족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이고, 설문해자에도 왜라는 것은 순종을 잘하고 멍청하고 둔한 종족. 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송나라(960~1127) 도화견문지에는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왜라는 말은 매우 치욕스러운 이름이어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또 이 나라가 동쪽의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들 스스로 일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고려의 속국이다.' 라고 하고, 삼국지에도 왜인이 한인으로 왜인국이 한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면 와류의 언어들인 왜류의 언어 와·와지·오쥐·와디·와지,는 숙신류어 주신, 조선, 제신, 식신, 등이나 고려류어 고려, 물리, 고구려, 구려 등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의미로 '해뜨는 곳의 사람들' 로 이를 한자로 쓰면 동이 또는 일본이 되는데, 일본에서 해뜨는 곳은 바로 태평양이 되어 일본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되므로, 결국은 그 말은 많은 반도의 제족들이 열도로 건너가 일본을 건설했다는 말이 됩니다.
기록에는 요하 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이식되는 2세기말 이래 많은 사람들이 낙랑에서 한반도 방면으로 유입된 사실과 요동과 만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남하와, 선비족과의 전쟁으로 촉발된 부여계의 유민 5만여인의 대대적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부여계 가야인들과 왜인들은 남부에 정착하거나 열도로 이주하는 대이동 사태를 만듭니다.
이 기록들은 왜에 대한 처음 기록이지만 동이제족이 해안 해로상에 거주하던 관계상 왜라고 표현한 것과 당시는 바다라는 '해' 의 표현이 강과 강 사이를 해중이라 표현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인데, 특히 내륙 깊숙히 살아온 한족 사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게, 장강 양자강에서 한반도 서남해안까지 해안선을 따라서 이동과 교역이 쉬운 연안민들의 실제 사정을 알기는 어려워 곡필한 것으로 한서가 유독 많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남아있는 한족들의 기록에서는 왜인이나 왜국은 안개 속에 가려져버린 실체로 되어버렸습니다.
왜는 본래 열도 일본국이 아니라 대륙과 반도 간에 걸쳐 있었던 해안부족 소국들이며, 왜와 가야 백제는 하나의 공생하던 밀접한 관계로 7세기 경 일본이 공식적으로 국호를 내세울때 까지 이 관계는 게속 이어지게 되며, 일반적으로는 남조, 백제, 가야, 왜의 관계와 북조, 고구려, 신라,의 관계를 나누어 친밀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가야가 미미한 존재로 보여 왜라 불리우기도 하는데, 이 사실은 광개토대왕비문에 대표적으로 언급됩니다.
영락 14년(404) '왜가 법도를 지키지 못하고 대방계를 침입하였다'. 하여, 왜는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해안제족들을 가르키는 말이였는데, 당시의 왜는 가야의 소비자로서, 이를테면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소비자 중심의 세력이었고, 가야는 그 소비처가 있었기에 더욱 국력이 강화될 수 있었고, 가야가 좀 더 우월한 위치에서 왜와 밀접하게 얽히게 됩니다.
일본의 고분시대 전방후원분의 거란 정착에서 4~5세기는 변혁의 시대로 가야 북부 규슈 정권에서 오사카 일대 긴키근기의 야마토 대화 정권으로 전환된 시기이며, 야마토 정권은 가야의 철 수입 루트를 장악하고 철기 문화를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김해 대성동고분군 세력이 5세기 대에 종적을 감추고 주력이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의 변혁을 이끌어 냈다고 봅니다.
일설에는 일본으로 넘어간 대성동고분군 세력이 신공황후, 응신천황, 16세 인덕천황과 관련 가야 계통의 지배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으로, 가야와 왜가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동시에 일본 주민들은 직접 가야에 와서 왜계 가야인으로 정착해 살기도 하는데, 부산이나 김해에서 서민들이 사용하던 일본계 토기(하지키)가 발굴되기 때문이며, 가야는 급할 때는 왜인 용병도 불러 써온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본기에 없는 가야와 왜를 관련시켜 많이 서술하고 있고 아예 가야를 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령, 왜가 동해 바다를 통해 신라에 쳐들어왔다는 식의 기록에서 그 왜는 일본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가야일 수 있다는 말이며, 고구려본기에서 광개토대왕 전후에 황해도에 왜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제였을 것이나 뭉뚱그려 왜라고 표현했던 것으로 백제는 가야와 왜의 용병도 갖추었을 것입니다.
한편 가야는 현재 한국이나 일본에서 모두 서자 취급 하고 있는데, 현재의 일본은 백제지향적이며 가야를 멸시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백제의 고도 부여를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인 '나라'와 비슷한 곳이라며 향수 달래듯 찾고 있고,
그에 반해 가야는 임나라며 정복했던 곳으로만 부각시켰을 뿐, 일본 역사와 문화의 원류로서 조명하지 않고 있어, 가야가 5세기까지 대륙에 존재하다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 동신라로 오므로 그 존재감이 떨어져일 것입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의 내물왕(356~402)~지증왕(500~514)까지 백수십년 동안은 왜인과의 전투기사가 높은 농도로 열거되어 있는 반면, 가야에 대한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지증왕조 6세기에 들어서면, 이제까지 빈번하게 보이던 왜인 관계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되고, 대신 가야 관계 기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가야가 신라의 팽창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백제왕이 주재로하는 회의에 제왜신들과 임나 제한기 등이 참가한 회의로 가야의 부흥책을 논의 하였던 시건과 연관이 있을걸로 보이며, 나라별로 백제가 맹주로 있었으며, 또 위의 기록이 신라초기부터 줄기차게 나타나 신라를 침범하던 왜가 500년을 전후로 나타나지 않다가 800년경에 나타나는데 이 때는 열도에 일본국이 성립한 다음 잔여한 해연안에 산제한 가야제족들이나 왜의 세력들이라 보이며, 가야가 멸망한 이후 신라를 괴롭혀왔던 왜가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기록에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의 가운데에 있다.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가 있고, 땅은 산림이 많다. 좋은 밭은 없어 해물을 먹는다. 오래부터 백여개의 소국이 서로 접해있는데, '위'때에 이르러 삼십국이 통하여 좋게 지내고 있다. 호수는 칠만이다. 남자는 크고 작음이 없고,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하였다.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고 일컷는다. 또한 상고때에 사신으로 중국에 이르러 모두 스스로를 대부라 칭하였다고 한다. 옛날 '하'나라 '소강'의 아들은 '회계'에 봉하였더니,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함으로써 교룡의 피해를 면하였다.
이제 '왜'인이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 잡기를 좋아하고, 또한 문신을 함으로써 물짐승을 피하고, '회계' '동치'의 동쪽으로 이러한 헤아림이 도리가 아닌가 한다. 남자의 옷은 횡과 폭으로써 단지 서로 이어서 묶고, 꿰메지 않는다. 부인의 옷은 홑이불과 같고. 중앙을 뚫어 머리를 넣어 입고 모두 머리카락을 풀고 맨발이다. 땅은 따뜻하고, 풍속은 벼를 심고, 베와 마, 양잠으로 직물한다. 땅에 소와 말이 없고,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이 있으며, 쇠로 화살촉을 한다. 집이 있으며, 부모형제가 처하는 곳이 다르다. 음식에 단두를 사용하고, 시집, 장가할 때 돈과 비단을 가지지 않으며, 옷만으로 이에 헤아린다.
죽은자는 관은 있고 곽은 없으며,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고, 상을 당하여 울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장사를 마치면,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가 씻어 스스로를 깨끗이 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을 없앤다. 큰 일이 있으면, 뼈를 구워 길흉을 점친다. 올바른 세월과 사절기를 알지 못하여, 다만 가을에 추수때를 기하여 그 해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의 목숨이 많아, 백년 혹은 팔구십년이고 나라에 부녀가가 많으나 음란하지 않고, 시샘하지 않는다. 다툼과 송사가 없고 가벼운 죄를 지은자는 죽이고 그 처는 노비로 삼고 무거운죄를 지은 자는 그 가족을 멸한다. 옛날에는 남자를 왕으로 하였는데, '한'말 '왜'인이 혼란하고 공격하며 벌하여 안정하지 않아 여자가 이에 왕으로 섰다. 이름을 '비미호'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왜는 일반적으로 동이제족를 가리키는 여러 용어들 가운데 하나로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왜는 가야 제국의 총칭이지만, 후한서 등의 한족 사서에 나타나는 것은 주로 동이제족 가운데 만주나 해안과 관련된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왜는 일본이라는 형태로 굳어져 왜라는 말이 일본의 중심 지역인 현재의 오사카나 교토 지역에 나타난 것은 최소 5세기 이후로 그 이전 기록들은 주로 만주나 한반도 등지에서 나타나므로, 왜라는 말은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되고, 일본열도는 많은 제족인들이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게됩니다.
기록에 2세기 비미호는 후반 왜국에서 분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자 왕으로 옹립되었는데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보좌했다고 하며, 239년과 244년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위나라로부터 친위왜왕이라는 봉호와 금인자수, 동경 100매를 하사받기도 했고, 신라는 아달라왕 20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예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가야인이 비자야 왕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은 것처럼 비미호 란 말도 비지야왕의 국무총리를 비미호, 비미크라 하며, 5세기경의 임나는 광동성 중산시 지역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며 이세라고도 하고, 왜와 이웃하였으며,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며,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쪽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의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하였으며.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아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의 옛읍이다. 라 하였습니다.
왜 5왕에 대한 기록은 찬왕(413~436년) 유송이 송나라(420~479년) 에 3차례 사신(421~430년). 진왕(438~443년) 왜국왕 직위수여. 제왕(443~477년) 451년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와 신하 23인은 군과 군을 제수받았다. 흥왕(462~477년) 462년에 송에 사신 직위 승계, 안동장군 왜국왕의 직위를 제수. 무왕(477~) 제수직 모두 승계. 로 4세기~5세기에 보이고, 이후 왜, 대화 일본,이라는 야마토 왕조가 최초 통일을 이룹니다.
이들 다섯 왕은 5세기를 관통하여 일본열도 최고의 지배 구조로서 본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지휘를 받아 야마토 왜를 위시한 6국을 산하에 거느리고 열도를 대표하여 중국에 사신과 상표문을 보내며 열도를 통할하는 지위에 위치하였으나, 이들에 대한 출신이나 어떠한 천왕인지 등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것은 3세기초 경부터 열도로 이주한 백제인들의 소국들을 통할하기 위해 고이, 근초고왕 때부터 6국으로 나누어 왜왕 제도를 만들게 되어 백제의 지배구조 하에 있었는데, 5세기에 고구려계 왜왕 찬왕, 진왕,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참고로 일본이란 국호는 671년부터 사용하며, 명나라부터 일본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러한 일본 국호를 쓰기 시작한 정황은 수서(589~618년) 동이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왜국, 으로, 구당서(618~907년) 동이열전,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일본, 으로, 신당서(618~907년) 동이열전,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으로 나타남으로서, 초기에 왜국과 일본국이 같이 나오다가 점차 일본국만 나오므로, 일본 부여계와 왜국 가야계의 통합한 것으로 보이며, 이 7~8세기부터 타이완과 열도에 일본국으로 영역을 명시하는 기록이 계속 등장하게됩니다.
단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