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시 모음 7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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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박경리
노오란 은행나무
군데군데
붉은 지붕 푸른 지붕
군데군데
고속도로 가득히
석양은 깔려 있고
들판 볏가리 위에
새들
하루 마지막을 쪼고 있다
초라한 내 생애의 가을
차창 밖에는
눈부신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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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박경리
다 그렇게 살다 갔을거야
응어리 삼키는 강가
구름 한 점 내마음 한 점
한 점
점만큼 줄어든 영혼
펴 보면 갈청 같이 엷을거야
찢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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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길
박경리
인도 아래 숨어 있는 동네
슬레이크 지붕 낡은 집
흰 모자 쓴 늙은 남자가
황매 핀 마당을
싹싹 쓸고 있다
차도에서는
맹수같이 울부짖으며
트럭이 달려가고
마당의 세발자전거 목마가
숨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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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같은 것이 흔들린다
박경리
억울하게
애잔하게
세상 떠난 사람
얼마나 많은데
하찮은
욕망을 위해
아수라같이 사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내 신음이 가소롭다
내 의문이 서글프다
분노가 무너져 내린다
희망의 문은 절벽
내 한 것만큼 살고
너 한 것만큼 살고
사필귀정에 매달은
가냘픈 거미줄이
흔들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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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박경리
뜨게 바늘에 실 감으며 말했다.
"늙으면 나는
거지가 될 것 같다. "
고등하고 다니던 내 딸이
노발대발 악을 썼다.
세상 험한 것을 그나마 몰랐던 모녀.
"네 말이 맞다"
보따리 짊어지고
진실 찾아 이 집 저 집
기웃거린다 했는데
"네 말이 맞다. "
그런 것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하늘보고 땅 보고
날은 저무는데
나는 아직
거지가 못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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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박경리
그리움은
가지 끝에 돋아난
사월의 새순.
그리움은
여름밤 가로수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
그리움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은
우수의 나그네.
흙 털고 일어나서
흐린 눈동자 구름 보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그네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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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박경리
분홍 빛 내리닫이 입고
딸에게 친구들에게
손 흔들며 작별하고
수술실에 들어갔었던 그 해 여름
눈을 떴을 때
하루사이
세계지도 같이 기미가 쓴
딸의 얼굴이 보였다
글쓰는 굴레 벗어버리고
고뇌와 분노의 굴레 벗어버리고
미움과 절망도 다 벗어버리고
그해 여름은 불행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1
박경리
생각해 보니
가슴에 수술을 받은 것은
열아홉 해 전이였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
선풍기 소리가 쉴 새 없던 팔월
병실이 술렁였다
병원이 온통 술렁였다
북쪽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헤어졌던 내 동포가 온다고
신문은 폭풍같이
눈앞에서 퍼덕거렸다
그해 여름 2
박경리
내 딸이
병실에 쟈스민 향을 피워 주었다
옥잠화 몇 송이도 꺾어다 주었다
열아홉 해 전 여름날
잃어버린 한쪽 가슴
상처 달래려 했던가
향기 높은 옥잠화
붕대 사이에 끼워 두었다
치료실 시멘트 바닥에
시들은 옥잠화 떨어졌을 때
의사 보기 민망하여
얼굴 붉혔다
꽃과 향기와 피
북쪽 손님들 돌아가고
세상은 온통 허무했다
잃어버린 한쪽 내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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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
박경리
새벽 네 시쯤이면
원주천 따라 구름다리 돌아가는
기차
레일 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두운 선로 밝히며
수많은 인명
이끌고 가는 기관사
국토 가르며,
외길
기차 몰고 새벽을 가는 사람
어떤 눈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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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박경리
이제는 누가 와야 한다
산은 무너져 가고
강은 막혀 썩고 있다
누가 와서
산을 제자리에 놔두고
강물도 걸러내고 터주어야 한다
물에는 물고기 살게 하고
하늘에 새들 날게 하고
들판에 짐승 뛰놀게 하고
초목과 나비와 뭇 벌레
모두 어우러져 열매 맺게 하고
우리들 머리털이 빠지기 전에
우리들 손톱 발톱 빠지기 전에
뼈가 무르고 살이 썩기 전에
정다운 것들
수천 년 함께 살아온 것
다 떠나기 전에
누가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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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박경리
어느 해나절
꽃가지 꺾어서
내밀던 눈동자
꽃과 향기는
바다의 물빛
휑하니 뚫린 신작로
걸어오다
돌처럼 바라보던 눈동자
가로수의 푸르름은
바다의 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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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설
박경리
섣달 그믐날, 어제도 그러했지만
오늘 정월 초하루 아침에도
회촌 골짜기는 너무 조용하다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푸짐한 설음식 냄새 따라
아랫마을로 출타중인가
차례를 지내거나 고사를 하고 나면
터주대감인지 거릿귀신인지
여하튼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채판에 담아서
마당이나 담장 위에 내놓던
풍습을 보며 나는 자랐다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음식 내놓을 마당도 없는 아파트 천지
문이란 문은 굳게 닫아놨고
어디서 뭘 얻어먹겠다고
까치설이 아직 있기나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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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1
박경리
꿈을 꾸었다
여행길에서
일행을 잃고
애타게 찾아 헤매는
외로운 꿈이었다
일어나서 연탄불 갈아 놓고
형광등 밑에
쭈그리고 앉아
꿈을 생각하는 한밤중
멀리 자동차 달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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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박경리
수국이 비에 젖는다
염천 아래 목말라 하더니
매달아 놓은 강아지
그도 정에 메말라
나그네 내미는 손 반기더니
비 바라보며 앉아 있네
드리워진 발 밖에
홍당홍당
물받이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
어드매가 행선인가
기차의 기적
레일 굴리는 소리
정다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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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사
박경리
안개 뚫고
남해 금산사에 오른다
안내인은
경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애석해 했지만
내 허약한 몸에
정수리를 쪼개는
햇볕이었다면
비가 쏟아졌다면
어찌 이곳에 올랐으리
벼랑에 선 금산사
거룩한 선심이여
오르내리며 절을 지은
그 넋들은 지금 어디에
수미산에 안좌해 계시는가
소망 여쭙고
내려오는 중생
수많은 중생
싸구려 흰 불라우스에
해맑은 얼굴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백성들
참으로 그들이 희망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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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
박경리
살갗이 터지고
등이 휘어진
고목 한 그루
망망대해
육지는 아득한데
노 잃은 사공
꽃과 같이 피었던가
나비같이 날았던가
이정표도 없이
내세에는
꽃으로 태어날까
나비로 태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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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박경리
느티나무에 실려 있는
앙증스럽고 섬약한 눈꽃들
포근포근한 눈밭에
폭폭 찍혀 있는 고양이 발자국
아아 좋타!
두 팔을 벌리는데
팔 내리는 순간
쓸쓸해진다
찬란한 눈꽃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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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말
박경리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했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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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박경리
보름 전야
불 끄고 잠자리에 들다가
환한 창문
보름달을 느꼈다
대보름 아침
연탄을 갈면서
닭 모이을 주면서
손주네 집에서는 오곡밥을 먹었을까
자멱질하듯
시시로 떠오르는 생각
차 타면 몇 십분에 가는 곳
멀고도 멀어라
글을 쓰다가
말라빠진 날고구마 깨물며
슬프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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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동거리
박경리
자주색 두루마기 펄럭이고
구두 소리 울리던
돈암동 거리엔 바람이 불었다
크다만 플라타너스 잎이
소리내어 떨어지고
청춘의 쓰라림이 맴을 돌았다
돈암동 바람 불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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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법이나 한 얘긴가
박경리
내 손주들 보고 얘기했다
심심산골 싸리꽃 피는 곳
작아도 집은 궁전같이 꾸며 놓고
이슬 밟으며
개울가에 가서 빨래하고
텃밭에는
파 마늘 배추 고추 도라지 더덕
온갖 채소 다 심어 놓고
닭은 네댓 마리 기르는 게 알맞겠고
양 한두 마리 풀밭에 매어 놓고
살구며 대추 자두 밤
먹을 만큼 나무 자라게 하고
그렇게 살아라
될 법이나 한 얘긴가
아아 될 법이나 한 얘긴가
화학약품 같은
식탁 위의 반찬 내려다보며
앙상한 손주들 팔다리 쳐다보며
눈물 삼킬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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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박경리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빨아서 풀 먹인 모시 적삼같이
사물이 싱그럽다
마음이 욕망으로 일그러졌을 때
진실은 눈멀고
해와 달이 없는 벌판
세상은 캄캄해 질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좇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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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박경리
물새는 소리!
악몽이다
어제는 수도꼭지가 터져서
물바다 되고
오늘 또 목욕탕 물탱크가 샌다
이리 저리 살펴보고 만져보다가
모터 스위치 내려놓고
마룻바닥에 주질러 앉았다
유리창 밖은 새까만 어둠
새까만 어둠이다
유성에서 떨어진 외계인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이사 왔을 때
그 때, 모터가 고장이 나서
물 길어오던 눈 길
넘어져서 엉엉 울었다
누가 와서
날 일으켜 주지 않나
아이같이 울었다
꿈속에서도 물새는 소리
밤 한가운데
몽유병자처럼 공간을 헤매며
물탱크 수도꼭지 보일러실을 찾아다녔다
유리창 밖은 새까만 어둠
차가운 마룻바닥
길 잃은 아이처럼 마냥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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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가
박경리
붓끝에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그게 참여다
붓끝에
청풍 부르는 소리 있어야
그게 참여다
사랑이 있어야
눈물이 있어야
생명
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
그래야 그게 참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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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내
박경리
옛날에
떠개라는 미친 사내가
진주에 살았었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길 막고 서서
앞, 앞이 말 못한다, 하며
가슴 치고 울던 사내
갈래머리 소녀 적에
보았던 일
비 오는 날
나를 사로잡는다
그는 새가 되었을까
앵무새가 되었을까
그는 꽃이 되었을까
달맞이꽃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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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박경리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이 안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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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울음
박경리
바다 우는 소리를 들었는가
어떤 사람은
울음이 아니요
샛바람 소리라 했지만
나는 지금도 바다울음으로 기억한다
수평선에 해 떨어지고
으실으실 바람이 불면
바다는 뭍을 치고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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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박경리
밤이 깊은데 잠이 안 올 때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방 수술 후
뜨개질은 접어 버렸고
옷 짓는 일도 이제는
눈이 어두워
재봉틀 덮개를 씌운 지가 오래다
따라서 내가 입은 의복은
신선도를 잃게 되었는데
십년, 십오 년 전에 지어 입은 옷들이라
하기는 의복 속에 들어갈 육신인들
아니 낡았다 어찌 말하리
책도 확대경 없이는 못 읽고
이렇게 되고 보니
내 육신 속의 능동성은
외친다 자꾸 외친다
일을 달라고
세상의 게으름뱅이들
놀고 먹는 족속들
생각하라
육신이 녹슬고 마음이 녹슬고
폐물이 되어 간다는 것을
생명은 오로지 능동성의 활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은 보배다
밤은 깊어 가고
밤소리가 귀에 쟁쟁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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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배
박경리
뱃고동 소리는
맘속의 작은 시냇물
떠나지 못한 설움
바람 부는 방죽
휘영청 달과 함께
듣던 뱃고동 소리
그 항구에
가스등 술렁이고
남망산 모롱이
돌아가던 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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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
박경리
내 영혼은
폭포 타고 흐르는가
조각배에 실리어
만경창파 떠도는가
멀고먼 곳에
별빛 깜박이는데
내 영혼은
한밤에 우는 소쩍새
해벽 깎아지른 곳의
죽지 부러진 도요새
캄캄한 저승길
이 시각에도 누구 가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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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박경리
대추나무 밤나무 잣나무
잎새들 다투어 떨어지고
하마 오늘밤은 서리 내릴라
낙엽 쌓인 밭고랑 누비며
살며시 정답게 배추 보듬어
짚으로 묶어 준다
목말라 하면 물 뿌려 주고
푸른 벌레들 괴롭히면
돋보기 쓰고서 잡아 주고
떨어진 낙엽 털어 주고
폭폭 흙 파서 거름 묻어 주고
배추의 입김
살아 있는 것의 가냘프고
때론 강한 입김 느끼며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여름 한철 나는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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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박경리
사람들이 가고 나면
언제나 신열이 난다
도끼로 장작 패듯
머리통은 빠개지고 갈라진다
사무치게
사람이 그리운데
순간 순간 눈빛에서 배신을 보고
순간 순간 손끝에서 욕심을 보고
순간 순간 웃음에서 낯설음을 본다
해벽에 부딪쳐 죽은
도요새의 넋이여 그리움이여
나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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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사마천)
박경리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天刑(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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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박경리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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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박경리
원주천 강변 지나서
운전기사 정비공들
드나드는 식당가 지나서
손바닥만한 채마밭
삭은 판잣집에서
우우 짖으며 강아지 달려나온다
산마루에 해가 솟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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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라는 이름의 고양이
박경리
모로 누워서
눈감고
아이들 집 고양이 생각을 한다
어미를 졸라
오천 원을 얻은 원보가
새끼 고양이를 안고 오던 날
내가 목욕을 시켜 주었다
이번에 가니까
많이 컸었다
오줌 쌌다고 성화하는 어미
원보는 냉큼 고양이를 안고 가싿
목욕탕에서
어리광 섞인 고양이 울음
사위가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합니다
식구들 모두 소리내어 웃었다
모로 누워서
눈을 감고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다
살구라는 이름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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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박경리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닯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럽다는 고들빼기꽃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
삶
박경리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닯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럽다는 고들빼기꽃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
생명의 아픔
박경리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밀도 짙은 연민이에요
연민
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설명 없는
아픔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이
가장 숭고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길러주는
사랑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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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만드신 당신께
박경리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도 당신이 열어주실
틈새를 믿었습니다
달콤하게
어리광부리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는
늘 행복했는지
행복했을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게
천수(天水)를 주시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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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1
박경리
커피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
시간의 소리가 들려 왔다
세월을 마시듯이
커피를 삼킨다
제발 소리를 내지 말아 다오
톱니바퀴에 끼어 돌아가는 시간
모터가 시간을 토막내고
미치겠구나
나는 강물로 살고 싶은데
나는 구름으로 살고 싶은데
아아 들판 싱그러운 풀로
살고 싶은데
시간 2
박경리
밥을 먹고 나면
오히려 허기가
가슴으로 밀려온다
자아, 이젠 뭘 하지?
일 매듭짓고 나면
난장판 같은 자리
이 허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무관세음보살!
밖에서는 이 지상 나무 모두가
미친 듯
바람에 시달리며 울부짖고
그 속을 뚫으며
가느다란 시간 지나가고 있다
☆★☆★☆★☆★☆★☆★☆★☆★☆★☆★☆★☆★
시인
박경리
시인은
사과 한 알갱이 훔치는 것을
옳다 하질 말라
비록 그들이 가난할지라도
시인은
시기의 암울한 눈빛
그것을 어찌 당연하다 할 것인가
그들에게 여벌이 없을지라도
옳다 함은
그들을 기만하는 것
당연하다는 것도
그들을 경멸하기 때문이며
진실이 아니다
저 역사의 봉우리 봉우리
기만하고 경멸하며
백성들 울음 모아 진군한 영웅들
혁명의 황금알은 저이가 먹고
벌판으로 내어쫓긴 백성들
시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 팔지 말고
권리 못지않게 의무 행하며
생명의 존엄
도도하게 노래하라 해야 한다
☆★☆★☆★☆★☆★☆★☆★☆★☆★☆★☆★☆★
신 새벽
박경리
신 새벽에
더덕 향기 따라
가보았다
제 줄기 타고
감아 올라간 더덕넝쿨
애처로웠다
드센 대추나무 밑에
소나무 한 그루
옹색하게 연명하더니만
어느새
메말 버렸네
마른 솔가지 분질러
더덕넝쿨 감아 세워 주며
소나무야
미안하다
인생도 또한 너와 같단다
우주만상 생명 있는 것
모두 한(恨)이로구나
☆★☆★☆★☆★☆★☆★☆★☆★☆★☆★☆★☆★
아침
박경리
고추밭에 물주고
배추밭에 물주고
떨어진 살구 몇 알
치마폭에 주워담아
부엌으로 들어간다
닭 모이 주고 물 갈아주고
개밥 주고 물 부어 주고
고양이들 밥 말아 주고
연못에 까놓은 붕어새끼
한참 들여다본다
아차!
호박넝쿨 오이넝쿨
시들었던데
급히 호스 들고 달려간다
내 떠난 연못가에
목욕하는 작은 새 한 마리
커피 한 잔 마시고
벽에 기대어 조간 보는데
조싹조싹 잠이 온다
아아 내 조반은 누가 하지?
해는 중천에 떴고
달콤한 잠이 온다
☆★☆★☆★☆★☆★☆★☆★☆★☆★☆★☆★☆★
어머니
박경리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 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 했다
불효막심 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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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소
박경리
몇 해 전 일이다
암소는 새끼랑 함께
밭갈이하러 왔다
나는 소의 등을 뚜드려 주며
고맙다고 했다
암소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고
새끼가 울면
음모오--하고
화답을 하며 일을 했다
열심히 밭갈이를 했다
이듬해였던가, 그 다음다음 해였던가
밭갈이하러 온 암소는 혼자였다
어딘지 분위기가 날카로워
전과 같이 등 뚜드려 주며
인사할 수 없었다
암소는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농부와 실랭이를 하다가
다리뼈까지 삐고 말았다
농부는
새끼를 집에 두고 와서 지랄이라하며
소를 때리고 화를 내었다
옛적부터 금수만 못하다는 말이
왜 있었겠는가
자식 버리고 떠나는 이
인간 세상에 더러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자식을 팔아먹고
자식을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인간 세상에 부모가 더러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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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
박경리
산 첩첩
밤새 우는 소리도 없고
한계령 넘을 적에는
눈발이 보이더니
밤도 가고
바람 눈 멎은 곳에
화평도 아닌
햇빛 들치네
하잘 것 없는 목숨
육십년 고개를 넘었는데
산 첩첩
밤새 우는 소리도 없고
옷자락 남루한 나를
산은 바라만 보고 있네
저승길이 얼마만큼인가
돌아보지 말고
갔으면 좋으련만
사무친 수많은 것
어디에 놔두고 가야할지
산 첩첩
밤새 우는 소리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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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 1
박경리
차창 밖에는 전주
끝없는 전주의 행렬
바람에 날린 물방울
차겁게 얼굴을 친다
내가 울고 있었던가
비 지나간 산등성이
피빛 같은 붉은 흙
낫을 놓고 담배 피우는 사내
가로수 등지고 앉아 있었다
오막살이 한 간
땅 위에 이루지 못하고
부엉새 같은 나
닦아도 닦아도 흐려지는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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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숙
박경리
언덕 위
숲에 싸인 친지집
밤 열두 시
하동 거리엔
전쟁처럼 세기말처럼
오토바이의 굉음 연달아 울리고
막막하다
또각또각
시계 소리
쇳날같이 지나가는 시간
벽에는
염주 늘어져 있고
액자엔 부처님 거룩한 말씀
막막하다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은
무량번뇌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는
메아리, 메아리도 없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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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박경리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라야의 짐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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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오는 날 아침
박경리
오늘은 딸애가 오는 날
해 돋기 전에
비름나물 뜯어
우물가에서 씻는데
못 먹을 것은 눈에 뵈네라
어머니 목소리 생각하며
검불을 걷어 낸다
백로가
머리 위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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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박경리
옛날 그 바닷가에서
내 어린 마음에도
산천이 척박함을 느꼈다
옛날 그 바닷가에서 돛단 배
수평선 넘어가는 것보고
내가 혼자인 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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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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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박경리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목이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 본들 徒勞無益(도로무익)
時間(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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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박경리
내 조상은 역신이던가. 끝이 없는 유배
새끼 낳은 고양이 밥 챙겨 주고
손 열고 문 씻고 정적의 덩어리 속으로
파닥이는 나비같이 들어간다.
동산에서 나비 잡는 꿈을 꾸었던가
꽃 술에서 꿀을 빠는 나비를 보았던가
황사 속을 맴돌고 헤집고 이 자리
나는 책상 하나 안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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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저쪽까지
박경리
욕탕에 누워서 듣는 빗소리
몸은 재가 되어 사그러지는데
물받이에 물 떨어지는 소리
생명의 송가
세상은 살아서 숨쉰다
나는 살아 있는가
생각은 물방울 소리같이 투명한데
은하수 저쪽까지 닿을 듯 투명한데
육신은 어디 있는가
푸른 강줄기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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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는 사내
박경리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서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 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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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박경리
담배 한 가치 뽑아
입에 물고
사물을 응시한다
책상 밑에 노트 몇 권
마음에 우주가 밀려온다
실오라기 하나 나풀거린다
권태의 덩어리와
낙엽 쓸어 옮기는 의욕이
상합 상쇄하며 자맥질한다
끝이 없는 슬픔과
모닥불 같은 따뜻함이
노닐며 다투며 젖어오는
한밤의 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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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靜物)
박경리
손바닥에 머리 받치고
돌아눕는다
내 머리통은
사과알 만 했다
따뜻했다
고동도 들려왔다
살아있었구나
시간은 모터 소리처럼 지나가는데
나는
정물같이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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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박경리
해야만 했던 일 끝나면
춤을 배워볼까
하얀 버선발 세우고
학이 날개 펴듯
두 발 허공에 띄우며
나도
예쁘게 춤을 출 수 있을까
주변 가지런히 챙겨 놓고
노래라도 배워봤으면
접은 부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나도 신명내며
노래 할 수 있을까
학과 같이 춤을 추고
소쩍새같이,
아니 아니 그냥
신명 내어 노래 부르다
죽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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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샌 밤
박경리
토인비의 역사연구를 읽다가
재봉틀 앞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묵은 유행가책 꺼내어
노래를 불러 본다
무한한 것은 저만큼 서 있었고
생활은 내 곁에 얼질러져 있었고
장난기도 좀 부려 보았는데
갑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에
웃었다
창백한 형광등
커피는 식어 있고
원고지는 난무하고
시각마다 시체가 되는 사물
지겹게 울어대던 개구리
밤새 울음도 멎고
까치 소리에
창문 밖 내다보았더니
옥색 아침이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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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박경리
새빨간 칸나가
교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일본인 여선생은
해명하려는 내 뺨을 때리며
변명하지 말라 호통쳤다
항구에서는 뱃고동 소리
칸나는 더욱 붉게 타고
어린 나는
진실에 힘없음을
깨닫고 울었다
어른이 되어
더러
해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치욕을 느꼈다
차츰 나는
해명을 하지 않게 되었고
홀로 되었다
외로움은 치욕보다
견디기 힘들지 않았고
소쩍새 울음이나 들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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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
박경리
타일렀지
이곳은 자유의 천지
해야 할 일 충분하고
푸성귀 아쉽지 않았고
거닐 수 있는 울타리 안은
꽤 넓은 편이며
밤에는 소쩍새 우는 소리
타일렀지
이곳은 나의 자유
해방된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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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목 갯벌
박경리
피리 부는 것 같은 샛바람 소리
들으며
바지락 파다가
저무는 서천 바라보던
판데목 갯벌
아이들 다 돌아가고
빈 도시락 달각거리는
책보 허리에 메고
뛰던 방천길
세상은 진작부터
외롭고 쓸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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恨
박경리
육신의 아픈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덧나기 일쑤이다
떠났다가도 돌아와서
깊은 밤 나를 쳐다보곤 한다
나를 쳐다 볼 뿐만 아니라
때론 슬프게 흐느끼고
때론 분노로 떨게 하고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을 한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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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박경리
한밤에 눈 사북사북 밟고
내리막길 내려간다
축축히 젖은 신문
철문 사이에서 뽑아 들고
사북사북 눈 밟고 돌아온다
불 켜놓은 내 방의 창문
눈 쌓인 느티나무 그물 같은 잔가지
하늘을 올려다본다
큰 별 하나
화등잔같이 달려올 듯
먼 산기슭에는 교회당
빨간 네온의 십자가
세상은 온통 잠들어 있다
아아 세상은 온통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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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
박경리
베개를 겨드랑 밑에 받치고
팔굽 세워
손바닥에 머리 얹으면
거미줄 늘어진 형광등이 보인다
서편 창문에
잦아드는 밝음
해거름인가보다
세계는 죽어버린 것일까
막막함과 분노는 방안 가득
하마 터질 듯한데
고요하다
종말처럼 고요하다
지구는 참 고요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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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
박경리
가까이 올수록
진실은 사라져 간다
실상은 허상이었다
기차를 타고
기선을 타고
떠나갈 때만 진실이었다
오 하느님
진실은 영원한 피안이오니까
언어의 목마름 몸부림
진실은 가지 못할 피안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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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
박경리
내 님은
풀발 선 흰 셔츠 입고
산마루 돌아가는 뒷모습
내 님은
밤 기차 차창 안의
눈감고 앉아 있는 옆모습
내 님은
멀리, 멀리 , 서천
날아가는 외기러기 같은 사람
말 나눈 적 없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
이승도 저승도 아닌
만나 본 적이 없는 그가
진정 내 님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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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
박경리
흐린 날은
수술 자리가
지네 달라붙은 듯 진득거려서
참 싫다
누워 있지도 못하고
뜰을 서성거린다
상처입은 짐승같이
서성거린다
해저 동굴 속에
웅크린 듯
언어를 잊고
불안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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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노새
박경리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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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억울하게
애잔하게
세상 떠난 사람
얼마나 많은데
무조건
세상 떠남은
어떠한 이유라도
슬프지요
오랜만에
박경리 시인님의
글 다시보네요
힐링되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