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온돌의보급
● 쪽구들이 사용되던, 조선 전기의 궁궐
조선시대가 되면서 이전과 달라지 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궁궐에서도 온돌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궁궐의 온돌은 흔히 생각하는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온돌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쪽구들이었다.
"헉! 위험하게 나무 쪽구들이라니!"
"그래서 자다가 침상이 불타서 두번 씩이나 봉변을 당할 뻔한 왕도 있었지."
"헐!"
"또 당시에는 쪽구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궁궐의 바닥은 나무로 만들어진 마룻바닥이었지."
고로 조선 전기 궁궐에 장판이 깔려 있다면 대략 고증 실패라고 보면 된다.
당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1563년 2월 5일 명종실록)
"전하, 간밤에 침실에 화재가 발생했다는데 놀라셨을까봐 염려되옵니다."
"아놔, 식껍했지만 괜찮소. 전에도 겪어봤던 일이라 적응됐나봄."
조선 전기 실록에서는 쪽구들 형식의 온돌이 임금의 침실에 놓여졌다고 했는데 실은 나무 침상 아래에 화로를 넣어 따뜻하게 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온돌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을때 사용하던 임금의 임시 거처에는(1637년)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쪽구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결코 따뜻하지 못했지."
"왜?“
"당시 허겁지겁 피신하느라.."
"상당수의 식량과 물자(땔감 포함)들을 성 밖의 창고에서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거든."
"아놔, 추워."
그런가하면 당시 궁궐에는 임금의 거처 외에도 병자들의 치료를 위해 특별히 온돌을 만들어주기도 했었다. (1425년 7월 19일 세종실록)
"전하, 성균관 유생들이 요즘 정마철을 맞아 습진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하옵니다."
"저런, 몸이 가려우면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울텐데."
"그래서 말이온데, 온돌을 만들어서 환자들을 치료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구나. 한 5간(5평) 정도 크기로 만들도록."
하지만 기록으로 보자면 쪽구들(아궁이가 내부에 있는 형식)인지 온구들(아궁이가 밖에 있는 형식)인지는 의문이다.
한편 연산군은 추운 겨울날 (1506년 1월 26일 연산군일기)
실내에서 가면극을 즐기기 위해 급하게 쪽구들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심심한데 가면극이나 즐기려고."
"전하, 날이 추운데 지금 가면극을 즐기시는 건.."
"아놔, 말이 많네. 그러면 방에다가 온돌을 만들면 되잖아."
그래서 온돌을 만들도록 시켰다.
아마도 아래와 같은 쪽구들을 만들게 하여 가면극을 감상했을 것이다.
● 전면 구들 '온구들'의 등장
아궁이가 밖으로 되어있는 '전면 온돌'의 형태를 '온구들'이라고 하는데
기록으로만 보자면, 16세기 중반에 최초로 등장하게 된다.(1553년 9월 17일 명종실록)
"전하, 환관 박한종이 경복궁의 강녕전을 홀라당 태워먹었습니다."
"이런, 큰일을 봤나! 그래 원인이 무엇이더냐?"
"박한종이 하인에게 강녕전에 습기가 많다며 불을 바짝 때도록 했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하인은 실내가 너무 뜨겁다고 생각해서 문을 열어서 확인해보려고 했으나.."
"박한종 이넘이 자물쇠를 잠그고 그냥 본체만체 나가버렸다고 하옵니다."
"이런 괘씸한 일이!"
기록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이때의 온돌은 밖에서 불을 때는 전면 구들이었다.
즉, 이것이 문헌상 나오는 최초의 온구들의 내용이다.
하지만 유물을 통한 실증은 이보다 훨씬 앞선 연대를 가르치고 있다.
1997년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 아래에 조선 초기에 번창했던, 암사지 절터를 발굴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나온 온돌의 형태가 바로 온구들이기 때문이다.
회암사지가 건립된 시기는 고려 후기 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미 온구들을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다.
● 민가의 온돌 보급 : 16세기 후반 ~ 17세기 초
조선 시대 임금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온돌을 놓는 것을 꺼려했다.
백성들이 온돌을 놓기 시작하면 산에 나무를 마구 베어다 쓸 것이니 내버려 두면
큰 폐단이라는 염려가 있었고 또 온돌방이 만들어지면 방 하나에 남녀가 뒤섞여 자는 턱에 풍속이 저해될까 두렵다는 이유로 온돌의 대중화를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온돌은 면면히 보급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온돌이 널리 보급된 시기는 임란·호란 이후로써, 무릇 17세기 전반 무렵이다.
18세기에 쓰여진 '청성잡기'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온돌이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된 것은 김자점(1588~1651)에 의해서다."
"그전까지 방은 모두 마룻바닥이었고 온돌은 오직 노약자 전용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인조가 김자점에게 물었다.
"요즘 도성을 둘러싼 산에서 계속해서 산불이 나니 걱정이라능."
"전하, 그건 바로 산에 솔잎이 수북히 쌓여서입니다."
"그래서, 무슨 대책있어?“
"도성에 사는 사람들한테 온돌을 만들어도 좋다고 허락하시옵소서."
"그리고?“
"그러면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솔잎과 마른 장작 등을 수거해서 올테니 저절로 화재 걱정을 덜게 될 겁니다."
"옳거니!"
그리하여 한양 사람들에게 온돌을 허락했으니 그 뒤로 온돌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얘기다.
이쯤 궁궐도 대대적으로 전면 온돌방으로 개조를 했다. (1624년 3월 5일 선조실록)
"전하, 듣자하니 요즘 사대부 집에서는 노비들도 죄다 온돌방에서 지낸다고 하던데.."
"아직도 궁궐에는 마루방이 많아 궁녀들이 추위에 힘들어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렇더냐? 그럼 궁궐도 싹 다 온돌로 깔어." 이랬다.
그런가하면 당시 지방에서도 서서히 온돌이 보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16세기 후반 유희춘의 미암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1570년 9월 26일 미암일기)
"갑자기 감기 증세가 조금 있다."
"어제 마룻바닥에서 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온돌방에서 잤다."
유희춘은 제주도로 귀향을 가면서 새로 집을 지었는데 이때 손님방은 마루방으로 만들면서 두평짜리 서재는 온돌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유희춘은 마루방에서 자기도 하고 온돌방에서 자기도 했던 모양이다.
다만 이런 현상은 보편적인 모습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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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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