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95
9월26일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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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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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애욕은 그 빛이 감미로우며>
요즘 "청장년급사증후군"이란 증세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다국적 연합군처럼 포위해오는 과로와 스트레스,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우리의 육체에는 과부하가 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생이 제대로 활짝 펴보지도 못한 채 요절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지요. 특히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어제도 저희 집에 사는 한 아이 아버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48세의 나이에 말입니다. 병원 영안실로 가던 차안에서 아이는 할말을 잃은 채 눈물만 뚝뚝 떨구었습니다. 흐느끼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는 일 외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말없이 이승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육신이란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천년만년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것 같았는데, 육신을 내려놓기란 순식간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육신이란 이렇게 유한합니다. 결국 숨 한번 떨어지면 모든 것이 그걸로 끝입니다. 결국 우리의 육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잠시 빌린 영혼의 거처입니다. 육체란 어느 정도 빌려 쓰다가 때가 오면 하느님께 반납해야할 유한한 대여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강경한 표현까지 동원하시면서 우리에게 영혼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육체적인 불구가 영적인 불구보다 차라리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시는 젊은 분들, 건강한 분들, 내게는 아직 멀었으려니 생각하지만 육신의 소멸에는 순서가 없답니다.
죽음이란 순식간에 우리 곁에 다가와 앉습니다. 숨이 끊어진 우리의 육신은 단 몇 일도 지나지 않아 땅에 묻힐 것이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형태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의 본모습입니다.
그에 비해 영혼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육체는 떠나가도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지속될 존재가 영혼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값진 투자, 안정된 미래를 위한 진정한 투자는 잠시 지나가는 육신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영혼을 위한 투자입니다.
이제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우리의 지독한 이기심과 그릇된 욕망을 내려놓도록 합시다. 이제 우리를 영적으로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모든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잘라내도록 합시다.
잠시 지나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말고, 그저 나약한 우리 육신의 안위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두지 맙시다. 뜬 구름처럼 흩어져버릴 유한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만날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법구경의 말씀처럼 가까이 사귄 사람끼리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깁니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연정에서 근심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오늘 복음과 너무나 유사한 구절도 있군요 "애욕은 그 빛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산산이 흐트려 놓습니다. 관능적인 애욕에는 이와 같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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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과 땀과 눈물의 순교자요, 나라와 백성을 극진히 사랑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순교자 성월을 맞아 배론 성지에 와 있습니다. 땀과 일과 눈물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생애와 영성을 깊이 묵상하며 지내는 중입니다. 신부님께서는 1821년에 태어나셨으니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인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 모음집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바오로딸)를 통독하고 있는데, 편지 한 편 한 편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세 번에 걸친 통독을 다 끝내고 책을 덮은 순간 밀려오는 감정은 동종업계 종사자로서의 큰 부끄러움입니다.
부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는 입국하는 즉시 죽음이 확실시되는 조선 땅이었는데, 목자 없이 고생하는 양떼들 생각에 거듭 목숨 걸고 임국을 시도했습니다. 이 길도 실패, 저 길도 실패 만 5년간의 노력 끝에, 5번에 시도 끝에 겨우 꿈에 그리던 조국 땅에 입국합니다.
겨우 겨우 조선 땅에 입국했을 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엄청난 대성당 앞에 수많은 교우들이 줄지어 서있었습니까? 예쁜 화동들이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습니까? 편안한 사제관에 짐을 풀었습니까?
절대 아니었습니다. 입국 후 최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번뜩이는 박해의 칼날이었습니다. 간첩이나 도둑도 아닌데, 언제나 남의 시선을 피해 밤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까마득한 산속 깊은 곳에 숨어사는 교우들을 찾아봐야 했습니다.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고, 고달픈 인생이었지만, 최신부님은 박해시대 힘겹게 살아가는 교우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에너지를 오로지 교우들의 영성생활 증진을 위해 쏟아 부었습니다.
저는 그런 최신부님 모습 묵상하며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내 남아있는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가? 생각해봤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1년 6개월 동안 전국 129개 교우촌을 쉼 없이 돌며, 수많은 신자들에게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그가 걸어 다닌 거리는 매년 7천리(2,800Km), 순교 전까지 9만리(35,000Km)에 이릅니다. 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54번 왕복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걸은 길은 평탄하고 호젓한 산책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교우들을 찾아 최양업 신부님은 언제나 오르락내리락 제대로 된 등반을 해야만 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생활을 끝도 없이 계속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이처럼 길 위에서 사목생활의 전부를 보낸 땀의 순교자, 거듭되는 과로로 인한 일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가 최양업 신부님이셨습니다.
까마득한 산골짜기에 위치한 교우촌을 방문할 때마다 최양업 신부님과 교우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헤어질 때면 ‘이제 언제 또 이분들을 만나려나?’, ‘과연 다시 살아서 만날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과 땀과 눈물의 순교자요, 나라와 백성을 극진히 사랑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생애와 영성은 오늘 우리 교회에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님의 탁월한 신앙과 영성이 더 널리 알려져서, 진행 중에 있는 시복시성 작업이 원만히 진행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기도문)
지극한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보내주시어
혹독한 박해로 쓰러져 가는 한국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으니
그 자애로운 은총에 감사하나이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굳건한 믿음과 불타는 열정으로 구만리 고달픈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방방곡곡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돌보는 데
온 정성을 다 바쳤나이다.
자비로우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성인 반열에 들게 하시고,
저희 모두가 그의 선교 열정과 순교 정신을 본받아
이 땅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몸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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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YoTOMvEM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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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해야 하는데, 뱀에게까지 친절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은 이렇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어떤 사람을 고발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가 아니었는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제자들의 기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이는 오히려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약간 뜬금없어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그 흐름을 보면 친절엔 보상이 반드시 따른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굴지 말고 친절하면 그 보상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지만 하나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비바람이 치던 날 밤, 필라델피아에 온 한 노부부가 하룻밤을 머물고자 허름한 호텔을 찾아들었습니다. 도시의 축제 때문에 그 호텔에도 빈방이 없었습니다. 이때 종업원이 노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객실을 모두 다 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늦은 시간에 다른 숙소를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밤 한 시에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선생님 부부를 내보낼 수는 없군요. 그러니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라도 쉬었다 가시면 어떨까요?”
노부부는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며 그 종업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방값을 내면서 노부부의 남편이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주인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호텔 하나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종업원은 농담으로 여기고 빙긋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1876년, 그 종업원은 비바람 치던 날 밤에 만났던 노부부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초청장과 함께 뉴욕 왕복 기차표가 동봉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을 찾아갔고, 그를 초청한 노신사는 뉴욕 5번가 34거리로 가서 하늘 높이 솟아있는 새 빌딩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건물은 무려 1,900개의 객실을 갖춘 거대한 호텔이었습니다.
노인은 그 종업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운영해보라고 지어 주는 호텔일세.”
단 한 번의 친절로 3층짜리 허름한 호텔 야간 종업원이었던 그가 이제 1,900개의 객실을 갖춘
뉴욕 한복판 호텔 지배인이 된 것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갚은 노인은 ‘존 제이콥 아스터’라는 월토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경영자였습니다. 그 종업원의 이름은 ‘조지 C 볼트’입니다. 그는 원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첫 총지배인이 되었고 나중에 ‘호텔왕’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친절을 베풀기 위해 자기 방을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친절은 분명 자기에게는 불친절입니다. 자기에게 친절하면 남에게 친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절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웃입니다. 자기가 방에서 편안히 쉬면서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가혹하라고 하십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자르고 발이 그러면 발을 자르며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에게 친절한 것은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어쩌면 이는 당신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너무 온화하므로 남들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이라는 질책도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찬 서리처럼.’과 같이 이와 연관된 세상에 떠도는 말이 많습니다.
자신에게 모질수록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입니다. 너무 관대하여 죄를 짓게 되고 그러면 그 죄책감을 무마하기 위해 타인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도 그 대상이 보답할 줄 모른다면 어떨까요? 그 친절의 대상이 존 제이콥 아스터였기 때문에 호텔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만약 강도였으면 더 많은 것을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도 무조건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호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는 그 내용이 명확히는 떠오르지 않아도 금자씨가 13년 동안 감옥에서 친절을 베풀어 그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복수를 도와준다는 것쯤은 기억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절을 베푸는 동안은 금자씨 자신에게는 가혹한 감옥생활이었습니다. 자신이 편하면서 친절을 베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반면 금자씨에게 복수를 당하는 백선생은 누구에게도 불친절했기에 자신을 도와줄 친구가 없었습니다. 물 한 잔도 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야 끝이 좋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친절할 것인지, 이웃에게 친절하기 위해 나에게 불친절해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한 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의 맛은 짜릿하지만 결국, 금자씨를 도와준 인물들은 살인자의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친절을 베풀면 사탄과 한패가 됩니다. 해적선에서 친절을 베푼다고 그것이 선행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절대 친절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자아(ego)입니다. 예수님은 타인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혹독하여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나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되어야만 친절이 가능한 이유는 나도 하나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나에게 그 친절을 다 베풀면 이웃에게 물 한 컵 줄 힘도 사라집니다.
내가 친절을 베푸는 자아는 영원한 뱀입니다. 뱀이 나에게 어떤 보상을 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아를 뱀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당합니다. 해적선에서의 친절은 그냥 해적질의 일부일 뿐입니다. 자아에게 친절하여 베푸는 친절은 받으면 안 됩니다. 나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에 친절하기 위해 베푸는 선악과를 먹어 공범이 되었습니다.
죄를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아와 사탄의 유혹에 친절한 사람입니다. 자아는 자기가 받은 친절을 더 큰 갈증으로 되돌려 줍니다. 어리석은 친절은 우리를 죄와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사실 이웃도 자아가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 한 컵의 친절을 베풀 때도, 나를 위해서거나 이웃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드리는 친절만이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도 뱀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친절을 투자합시다. 예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친절을 온전한 친절로 되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죄짓는 자의 친절을 받거나 그에게 친절하면 그것은 서로의 죄를 무겁게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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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모세는 여호수아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또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 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마르 9,38-43.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그것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에서는 구마 행위를 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38절)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차맷돌은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43-48절)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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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한 부분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부분을 잘라 던져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알아듣고 죄를 지은 육신을 잘라 낸다면, 우리는 정화되고 자꾸 반복되는 죄를 짓지 않게 될까요? 아닙니다. 의식과 생각이 바뀌지 않고서는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나약함 때문에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가슴 위에 돌덩이를 하나 올려놓은 듯이 답답하고 힘들며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믿고, 주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탁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성사,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 자주 참여하며 우리의 영혼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깨끗하게 치유받은 나병 환자(마르 1,40-42 참조), 시력을 되찾은 바르티매오(마르 10,46-52 참조), 죽음에서 되살아난 라자로(요한 11,1-44 참조)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자비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35면 참조).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자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죄에서 멀어지고,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 우리의 강함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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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것을 잘라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1-42)
이 말씀에서 ‘마실 물 한 잔’은 ‘아주 작은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 일이 선행과 사랑이라면, 그 일 덕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틀림없이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라도” 라는 말은, “한 사람이라도”라는 뜻이기도 하고, “한 번이라도”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한 번이라도 죄짓게 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는 말씀은, 지옥벌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겠다는 심정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남을 죄짓게 하는 죄’가 ‘큰 죄’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평생 죄만 짓고 살던 사람이 어쩌다가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선행을 한 번 실천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 그가 지은 죄들은 어떻게 되나? 또 평생 착하게 살던 사람이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될까? 그러면 그가 평생 실천했던 선행과 사랑들은 어떻게 되나?”
이 의문의 답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에제키엘서에 있는 다음 말씀들도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심판과 멸망’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평생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선행이라도 실천한다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은 해야 합니다. (살아서 다 못하면 연옥에 가서.) 만일에 선행을 실천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 일은 선행이 아니라 위선이고, 그러면 그 일은 선행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평생 착하게 살다가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했다면, 그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평생 진심으로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곧바로 회개하고 보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어떤 이유로 변절해서, 자신의 ‘과거의 삶’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과거에 잘 살았던 것이 모두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심판 시점에서 ‘현재 상태에 대한 심판’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인가?”를 보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은 모두 마쳐야 합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 9,43-48)
이 말씀은 실제로 손, 발, 눈을 잘라 버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유혹들을 단호하게 물리쳐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잘라 버려야 할 것은 손, 발, 눈이 아닙니다. 유혹이 왔을 때 그 유혹에 넘어가는 ‘마음’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어떻게 잘라 버려야 하나?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15.19.24-25ㄱ)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죄를 짓게 하는 마음을 잘라 버리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잘라 버리는 방법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죄를 짓게 하는 유혹들을 넓은 뜻으로 ‘사탄의 유혹’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물리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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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의 신체는 5장 6부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 있으면서 우리가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음식이 들어오면 소화시켜서 에너지로 만들고, 그 에너지를 온 몸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혈액형이 있듯이, 우리의 5장 6부도 사람에 따라서 8가지 체질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중에 ‘수음체질’이라고 합니다. 수음체질의 특징은 추위를 많이 타고, 위장이 약하다고 합니다. 찬 음식보다는 따뜻한 음식이 몸에 좋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더위보다는 추위에 약한 편입니다. 갈증이 나면 찬 물도 먹지만 몸에는 따뜻한 물이 좋은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를 더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5장 7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하나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스마트 폰입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95%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고, 전 세계에는 50억의 인구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스마트 폰으로 은행 업무를 하고, 스마트 폰으로 강의를 듣고, 스마트 폰으로 쇼핑을 하고, 스마트 폰으로 예약을 하고,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합니다.
지금의 인류를 ‘포노사피엔스’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회사는 대부분 스마트 폰에 기반을 둔 회사라고 합니다. 스마트 폰을 세상에 내놓은 애플, 스마트 폰으로 검색의 시대를 연 구글, 스마트 폰으로 소통의 시대를 연 페이스 북, 스마트 폰으로 쇼핑의 시대를 연 아마존이 있습니다. 스마트 폰을 만들고, 스마트 폰의 뇌인 반도체를 만들어 내는 삼성전자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넷플렉스, 유트브, 카카오톡은 모두 스마트 폰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동차가 들어오면서 마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호롱불은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습니다. 수돗물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우물도 사라졌습니다. 50억 명이 사용하고 있고, 이들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금융과 유통 그리고 소통과 음악이 스마트 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스마트 폰 시대에 적응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우리는 스마트 폰으로 미사를 보았고, 스마트 폰으로 비대면의 상황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생각의 틀을 바꾸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언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지역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함께 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권위와 독선 그리고 소유와 독점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소통과 겸손 그리고 개방과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에서 정한 난민과 이민자들을 위한 날입니다. 한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한국정부에 협력했던 현지인들을 모두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현지에 남으면 박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70명 중에는 어린아이가 150명가량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정부의 이와 같은 결정과 행동은 국제사회에도 모범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늘 새로운 ‘틀’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역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오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모든 물은 흐르고 흘러 넓은 바다로 가야 합니다. 신학생 때 배웠던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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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재현 베네딕토 신부님]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코 복음 9장 43절)
진짜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9월, 순교자 성월과 관련하여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산모의 고통과 피가 세상에 뿌려짐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산고와도 같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서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수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도 누군가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로마에서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를 시작으로, 베드로와 바오로 등 수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교회가 꽃 필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1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말 그대로 교회의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며, 박해시대 때에 순교자도 많았지만 배교자도 많았음을 기억해 봅니다.
초대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 안에서도 그 배교자들을 보면, 단순히 믿음을 잃어서 배교하는 경우보다는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서 배교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사람들 사이의 ‘인정’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렸다기보다는, 마음이 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렸다는 얘기입니다. 죄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머리가 잘리고, 손발이 찢겨야 했지만,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죄와 맞서는 오늘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작은 순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우리 삶 안에서도 충분히 순교할 수 있고, 그 순교로 나 자신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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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님]
<똘레랑스(tolérance)’와 앵똘레랑스(intolérance)>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둘째 죄짓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예수님의 강한 가르침입니다.
첫째 부분에서는 관용이 강조되고 둘째 부분에서는 무관용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의견이 다른 점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죄에 대해서는 아주 가혹합니다.
전반부에서 요한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았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코 복음 9장 38절 한 구절에서 ‘우리(ἡμῶν 헤몬)’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희’ 즉 ‘우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를 막아 보려고 하였고, 왜냐하면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저희’ 혹은 ‘우리’를 여러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 즉 ‘우리’는 열두 제자를 비롯한 예수님의 직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집단 비의식은 본인들을 스스로 ‘우리’라는 특정 범주 안에 묶어두고 거기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관용의 미덕입니다. 리옹 가톨릭 대학교의 성서학자로서 신학대학장이던 장 삐에르 러모농 신부는 오늘 이 성서 구절이 프랑스 ‘똘레랑스(tolérance)’ 정신의 바탕이 된다고 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관용의 선험적인 조건은 열려있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하느님과 진리는 독점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무차별적인 다원주의도 배격해야 하겠지만 편협한 배타주의도 배격하는 것이 바로 톨레랑스의 본정신이라고 합니다. 똘레랑스 정신이 교회일치운동이나 종교간 대화의 바탕이 됩니다. 프랑스어 똘레랑스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관용(寬容)'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똘레랑스 정신은 동양적 의미의 너그러움을 단순히 의미하지 않습니다. 똘레랑스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입니다. 관용은 진실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한 존경을 포함하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에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똘레랑스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 제자들에게 관용적 자세를 요구하던 예수님께서 후반부에서는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가혹한 ‘앵똘레랑스(intolérance)’ 즉 무관용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삼진아웃이 아니라 원 스트라이크 바로 아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조를 바꾸어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하십니다.
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의 최후는 보나마나입니다.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조금의 관용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보인 태도와는 사뭇 다른 가혹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쓴소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걸려넘어지게 해서도 안되지만 자기 스스로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체기관의 절단과 관련하여 가혹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주님께서 손이 스캔들을 만든다고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한다고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이 범죄하게 한다고 눈을 뽑아 던져 버리게 되면, 그러면 남아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 비유들은 실제로 손이나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라고 하는 명령이 아니라 걸려 넘어져 죄를 짓는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강조하는 셈족 특유의 과장법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똘레랑스(tolérance)’ 즉 관용의 원리입니다. 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틀린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이고, 진실의 개별성과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심전심이고 역지사지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은 배타성의 닫힌 원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둘째 죄를 끊어 버리는 단호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죄와 마귀와 육신을 끊어버리고 어둠의 자식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답게 죄를 끊어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의 삶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손, ‘우리’끼리만 모이는 발, 남을 단죄하는 매의 눈을 모두 자제시켜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 다른 사람에게는 관용의 원리를 그리고 자신에게는 죄를 끊어버리는 ‘춘풍추상(春風秋霜)’,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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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순교자 성월의 첫날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여 기도했던 교회는 이제 마지막 주일을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로 기립니다. 이렇게 거듭, 가난한 이웃과 지구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라 싶어서 마음이 저릿합니다.
하느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당신의 뜻 안에서 기쁘게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왜곡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며 무시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오만과 오판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강자 독식의 세상 법칙은 오늘도 힘없는 이들에게 가혹하기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국을 등지고 정든 고향을 떠나는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겁에 질린 모습이 바로 인류의 민얼굴입니다. 놀라운 과학 문명을 이뤄낸 세상의 민낯입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갖은 재해와 수해 소식은 이미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신음하고 있는 땅과 하늘의 비명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사명은 명백합니다. 그 무엇보다 앞서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원해야 옳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기도야말로 주님의 도우심을 땅에 임하게 하는 튼튼한 동아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차별화 된 삶이야말로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은 모세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수월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냈을 것입니다. 도무지 아닌 짓거리에 매달려서 어둠 속에서 헤매는 세상을 위해서 모세처럼 주님께 납작 엎드려 빌고 은혜를 청하는 통 큰 믿음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힘든 세상이기에 더욱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처럼 세상을 위한 중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세상의 죄를 고백하며 세상의 죄를 보속하며 세상을 위하여 ‘이 죄인’을 먼저 때려 주십사 청하는 담대한 믿음을 기꺼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독서에서 만나는 모세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보잘것없다며 투정을 부리는 어리석은 백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편이 되어 호소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저마다 제 천막 어귀에 앉아 우는 소리”를 내면서 하느님 속을 뒤집고 있는 그들 앞에 나서서 오히려 “저를 죽여주십시오”라며 목숨을 건 탄원을 올리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독서 말씀과 복음에서 만나는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와 주님의 수제자 사도 요한의 모습에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그날,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 가운데 두 명이 자신의 장막에 있다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서 예언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라고 나섰던 속이 좁은 여호수아에게 베푸신 하느님 은총의 크기를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막아보려 했다며 으스대듯 보고했던 졸장부 사도 요한의 변화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요.
바라건대 오늘, 2021년 연중 제26주일이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편이 되려는 조급함으로 상대를 판단하며 상처를 주는 일을 삼가기 바랍니다. 옹졸하고 성급하고 까칠하여 ‘끼리끼리’ 편을 먹고 담을 쌓는 어리석음이 사라지기 바랍니다.
하여 하느님께서 꼭 좀생이 같은 우리를 여호수아처럼 담대한 믿음인으로 변화시켜 주실 수 있도록 틈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졸렬하고 치사한 우리 모두를 사도 요한처럼 엄청난 사랑을 살아내도록 이끌어주실 수 있도록 영혼의 문을 열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구실만 생기면 오만해지고 조그만 틈에도 사랑은 새어나가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여 깨어 지내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한없이 허술하고 허약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십니다. 앓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려 당신의 희생을 봉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힘없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부탁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요청하십니다.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부디 그리스도인 안에서만은 땅의 뜻에 따라서 하늘을 움직이려는 억지가 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더 이상은 감히 미사를, 기도를 자신의 영달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참으로 소중한 이들을 보듬어 살펴 돕는 진정한 복음을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인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살맛이 나기를 소원합니다. 더 배려하고 넉넉히 나눔으로써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우뚝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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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듣기 섬뜩하다. 팔이 죄를 지으면 팔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눈을 빼내 내던져 버리리라고 하신다. 죄를 단호하게 끊어버리라고 강조해서 하신 말씀이다. 해 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가 먼 것처럼 하느님 나라와 죄는 결코 함께 있을 수 없다.
죄를 좋아하는 사람 없고, 죄 없는 사람 또한 없다. 성인들도 모두 죄인이었다. 그들은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 던졌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는 장애인들만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어찌 보면 실패했던 사람들이다. 인생길 어느 시점에서 예수님을 만나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삶의 방식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버리고 주님의 것으로 바꾸었다. 빛이신 주님을 만나 자신과 삶의 태도의 죄스러움을 발견했던 거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 8).”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한 말이다. 주님이 나의 죄를 적발하시는 게 아니라 주님의 빛이 어두운 곳에 감추어져 있던 나의 죄스러움을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스스로 회심하고 회개하게 초대하신다.
인생길에서 단 한 번 전격적으로 회심하는 게 아니라 여러 번 그렇게 하면서 점점 하느님과 가까워진다. 태양을 맨눈으로 직접 보면 눈을 다치는 것처럼 참 빛이신 주님을 한 번에 직접 뵙게 되면 죄의 무게와 후회의 괴로움이 너무 커서 죽을 거다. 그것이 잘못인 줄 깨닫게 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줄 모르고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죄를 없애주시려고 주님이 행하신 보속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면 너무 송구해서 그 자리에서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나을 거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견딜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씩만 우리의 잘못과 죄스러움을 발견하게 해주신다. 하느님은 인자하시고 참 좋은 분이시다.
그런데 무죄한 상태가 회심의 종착지가 아니다. 회심하고 회개하는 이유는 더 많이 더 깊게 더 넓게 사랑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감히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고 혹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친구를 위해서 예수님처럼 목숨을 내놓는다. 죄를 피하기 위해 팔다리를 잘라내는 단호함과 용기로 이웃을 사랑한다. 그게 우리의 하느님 사랑이다.
예수님, 주님은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들을 보자마자 치료해주셨고, 죄의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도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냄새나는 음식물쓰레기봉투를 뒤져보지 않는 것처럼 저의 죄를 캐보지 않겠습니다. 나약함과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품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이콘입니다. 그 안에서 성찰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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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26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의 협조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과 ‘그 일꾼들을 막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1 독서>에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일흔 명의 원로를 뽑아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두 명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한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수가가 모세에게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모세는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민수 11, 29)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 38)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이지, ‘우리 자신’의 양이 아입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뿐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우리들’만의 일치를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라는 인간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 37)라고 하시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 9,39)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를 따르는 이가 아니라 하여 그를 막는’ 제자들의 옹졸한 마음을 질타하십니다. 사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를 당신 협력자로 모으십니다. 곧 교종이나 주교, 성직자나 수도자, 세례 받은 신자들만을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물며, 자기 형제들을 막는 일은 더 더욱 안 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 된다는 독선을 부리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해도 되지만, 너희는 해서는 안 된다고 편을 가르지 않게 하소서! ‘우리’라는 특권으로 다른 이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의 양떼가 아니라, 당신의 양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스스로에게 갇히는 일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게 하소서! 비록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타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며,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자신의 이기와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제 손과 발과 눈이 제 마음과 공모하지 않게 하소서! 그 뿌리를 잘라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제 몸과 마음을 절단하고 수술하시어, 온 몸이 망가져 사라질지라도 더 귀중한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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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오늘은 '2021년 제107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더욱더 넓은 '우리'를 향하여"라는 담화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모습,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당신 모습, 다양성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모습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형태 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너지고 있는 '우리'를 살리자."고 호소하십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어디에 있더라도 마땅히 지역 교회 공동체 그리고 하나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이고, 한 지붕 아래 사는 식구이며, 한 가정의 일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실존적 변방(우리 주변)에 사는 이주민들과 난민들과 실향민들, 인신매매의 피해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더욱더 넓은 '우리'를 향한 여정에 '모든 이가 함께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9,40.42)
죄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너에게 따뜻함과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너와 나누지 않으면서 나만의 이익을 앞세운 욕심과 탐욕의 죄를 과감하게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야고5,1.3)
우리 주변에는 나의 따뜻함과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 특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이주민과 난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삶으로 하느님을 전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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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마르코 9,38-43.45.47-48(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죄의 유혹을 단단히 물리쳐라)
그때에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함께 할 수 없는
열 가지 이유보다
함께 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을 보듬는 사람인가
함께 할 수 있는
열 가지 이유보다
함께 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을 내치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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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스파게티를 좋아해서 가끔 직접 해 먹습니다. 주로 혼자 해 먹는 것이기에 1인분만 하면 되는데, 사실 그 양 조절이 쉽지 않더군요. 스파게티면 봉지 뒤쪽에 1인분을 알려 주는 동그라미에 맞추면 1인분이라고 하는데 그 양을 보면 너무 적어 보입니다. 실제로 약간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줌 더 넣어서 삶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더미처럼 불어난 면의 양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적당히 1인분’은 제게 너무 조절하기 힘든 양입니다.
‘적당히’라는 말의 모호함으로 일상 안에서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적당히’입니다.
그러나 ‘적당히’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냥 부족하거나 반대로 많은 것이 더 편합니다. ‘적당히’가 정답처럼 생각되면 ‘대충’하게 될 뿐입니다. 삶에 적당히는 없습니다. 주님의 일도 '적당히'가 안 됩니다. 늘 최선을 다해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적당히 대충해서 따르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적당히'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따르라고 하십니다.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시지요. 손이 죄짓게 하면 그 손을 잘라 버리라고 합니다. 또 발이 죄짓게 하면 역시 잘라 버리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그것을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적당히’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적당히'가 아닌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삶도 ‘적당히’에서 멈추고 맙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같은 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도 주님의 뜻을 따른다면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으려고 했던 제자들의 뜻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함께 사랑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가야 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랑의 길을 어떻게 실천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을까요? 적당히, 대충이라는 모호한 말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확실한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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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수는 그만!>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면 당사자의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편의 훈수를 둬서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내 편이 없는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안 좋습니다.
바둑이나 장기만이 아닙니다. 음식 먹을 때도 훈수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고기를 구울 때 땀만 나면 뒤집은 뒤 바로 먹어야 한다는 사람, 돼지고기는 땀이 나기 전에 뒤집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람, 샤브샤브 먹을 때 야채는 숨만 죽으면 바로 먹어야 한다는 사람, 생선회를 고추장 찍어 먹는다고 먹을 줄 모른다고 면박을 주는 사람 등등…. 음식에 대한 훈수도 이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음식에만 그럴까요? 남의 삶에 대한 훈수 역시 차고 넘치는 것 같습니다. 남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상대방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데서 감사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간섭으로는 관계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은 훈수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좋은 삶을 직접 살아서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훈수쟁이가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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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아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풍성한 가을의 여유를 지니시기 바랍니다.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 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행동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 9,45-47)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이 스쳐 지나갈 말이 아니지요. '세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권력과 돈과 허영을 쫓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봉사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출세와 출세를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싶은 유혹에 잘 맞서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49-50)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보존하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주기 위한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기 맛을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각 음식의 맛이 좋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하면 소금 맛만 느껴지고 다른 식재료의 맛은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십시오.”(에페5,10)
지옥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지역은 엄연한 실재입니다.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마음의 불안을 느낄 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옥불의 뜨거움은 현세에서 불의 뜨거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원한에 사로잡힐 떼에 영혼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만 지옥은 온갖 증오와 원한 분노,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가 허락되는 이 지상의 삶에서 천국을 희망하고 지옥의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천국을 완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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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한 삶>
-예닮의 여정-
집무실의 책꽂이를 일별하던중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삶’이 한눈에 들어왔고 지체없이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지혜는 곧 행복한 삶이요 어리석음은 불행이다’, ‘진리에 도달함으로써 우리는 행복해진다’, ‘지혜로운 사람의 정신에만 행복한 삶이 깃든다’, ‘참행복은 진리인 하느님의 관상’이라는 말마디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어지는 성인의 고백입니다.
“당신 친히 곧 그들의 기쁨이십니다. 당신 곁에서, 당신을 두고, 당신 때문에 기뻐함, 그것 자체가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행복은 없습니다.”
흡사 시편의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행복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 있습니다. 행복의 원천인 주님과 함께 있음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행복기도의 다음 고백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행복의 ‘만듬’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누구나의 권리요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행복의 열쇠입니다. 예전 나눴던 자작시 행복도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을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이래서 예수님 닮기의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한번 뿐이 없는 삶, 행복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자 권리요, 하느님이 최종 심판정에서의 물음도 ‘너는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일 것입니다. 어떻게 행복한 삶을,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겠는지 그 구체적은 방법을 나눕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다음 수행도 원활해 질 것입니다.
첫째, 관대한 마음을 지니십시오.
주님은 너그럽고 자애로우십니다. 주님을 닮아 참으로 관대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감으로 계속 마음을 넓혀감이 답입니다. 나의 한계에 좌절할 때 마다 한없이 높고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1독서 민수기의 모세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고 그들은 예언을 합니다. 마침 진영 안에 머물러 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영이 내려 예언하자 이에 당황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이를 말리라 강권합니다. 모세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모세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정말 하늘 같이 넓은 하느님 마음을 닮은 모세입니다. 이런 장면과 흡사한 장면이 오늘 복음의 제자 요한과 스승이신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이를 막았다고 의기양양하는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입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하느님의 은혜에 시기, 질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요 이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조임금이 이순신 장군을 시기했기에 이순신 보다는 원균을 추켜 세웠고, 또 율곡을 시기했기에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습니다. 선조임금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시기, 질투는 우리의 본능적, 보편적 정서요, 이를 지양止揚하고 관대한 마음을 지녀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평생 수행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탐욕을 자제하십시오.
무지의 시기猜忌요 무지의 탐욕입니다.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창세기의 원죄 역시 결국은 인간의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을 지칭한다 생각이 듭니다. 온통 탐욕에서 기인한 타락상 가득한 세상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합니다. 바로 무한한 탐욕의 내면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탐욕은 맹목盲目이라 눈이 없습니다. ‘지혜의 눈(혜안慧眼)’을 지녀야 비로소 통제되는 탐욕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대한 처방은 하느님의 지혜요 사랑뿐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2독서 야고보 사도입니다. 부자들의 탐욕을 질책하는 야고보는 그대로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변합니다. 그대로 오늘의 탐욕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를 회개에로 이끄는 야고보 사도의 예언적 외침입니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옷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깨달은 이들에게는 언제나 마지막때입니다. 하늘에 쌓아야 보물을 땅에 쌓는 어리석은 탐욕의 부자들입니다. 양극화로 치닫는 시대, 누구보다 부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요 우리 내면의 탐욕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예언자 야고보 사도의 외침은 너무나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의 눈이, 불의의 피해를 호소하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대해 마음의 귀를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혼자서가 아닌 더불어의 행복에 탐욕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나누는 삶이, 또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셋째, 죄를 짓지 마십시오.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말고 이웃을 죄에로 유혹하지도 마십시오. 이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은 얼마나 큽니까? 아무리 밖에서 좋게 잘 봐줘도 죄로 인해 안으로부터 부패하고 무너져 내리면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사랑해도 턱없이 부족한 인생인데 죄로 인해 낭비되고 파괴되는 삶의 피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죄는 영혼의 암癌과 같습니다. 크고 작은 죄가 없습니다. 죄라면 무조건 배척해야 하고 무엇보다 고백성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시스템과 같은 기도와 공부와 일이 조화된 삶중에 끊임없는 회개로 죄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에 대한 처신은 얼마나 단호한지 충격적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버려라.”
그대록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죄의 결과가 영혼의 파괴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호히 죄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지체없이, 끊임없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죄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도구, 주님의 도구로 쓰여야할 우리 몸의 지체인 손, 발, 눈입니다.
주님을, 이웃을 사랑함이 죄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요 예방이요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죄를 지을수록 회개와 더불어 온힘을 다해 주님과 이웃을, 자연을 사랑할 때 영육의 치유와 건강이요 행복한 삶입니다.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은 선택이자 발견입니다. 참으로 사랑을 선택하여 실천할 때 발견되는, 선물처럼 주어지는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관대한 사랑, 탐욕을 자제하는 사랑, 죄를 짓지 않는 사랑을 선택하여 이런 사랑 실천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의 열쇠는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예닮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항구하는 길뿐이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의 예닮 여정에 항구함으로,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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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교회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로 정한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경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 기적을 일으키자 제자들이 나서서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막지 말라"고 오히려 제자들을 제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다니는 이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두 견해의 차이는 "우리"의 범위입니다. 제자들의 "우리"의 범위는 아직 닫혀 있고 편협합니다. 예수님의 "우리"는 무한히 열려 있기에 경계조차 희미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마르 9,42)
당신을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예수님께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제도 안에서 어떤 신분으로 타이틀이 부여된 이들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 작고 미소해서 눈에 띄지조차 않는 이들까지도 혹여 누군가로 인해 죄를 짓게 될까봐 염려하고 안타까워하시지요.
제1독서는 광야에서 일흔 원로에게 영이 내린 일화입니다.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주님께서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원로들에게 나눠 주신 일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모세의 시종인 여호수아가 걱정합니다. 원로들이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져 사사건건 주님의 뜻이라고 나서면 모세의 입지가 불안해질까 염려해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모세는 오히려 이를 반깁니다.
모세는 자기 혼자 탁월한 지도자로 군림하기보다, 모든 백성이 하느님 뜻을 알아듣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나 위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울려퍼집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고 소리 높여 우십시오."(야고 5,1)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부자들이 쌓은 재물과 옷, 금과 은 등이 썩고 좀먹고 녹슬었으며, 바로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리라고 일갈합니다. 썩고 좀먹고 녹슬었다는 건 필요도 없는 잉여의 것들을 쌓아두고 다시 찾지도 않았다는 의미이까요.
"품삯 가로채기, 사치, 쾌락, 기름진 마음, 의인을 단죄하고 죽임"(야고 5,4-6 참조)
여기서 부자라 일컫는 이들은 단순히 재물이 많은 이들이라기보다, 스스로 규장해 놓은 "우리"의 범위가 좁디 좁아서 주위의 가난하고 곤고한 이들의 절박한 생존은 아랑곳없이, 차라리 썩고 좀먹고 녹슬어도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기를 좋아하는 부류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꾼들의 정당한 삯을 가로채고 사치와 쾌락으로 제 몸뚱이만 섬기며 마음에는 기름기가 가득 차 사람된 도리에 무뎌졌습니다. 가난한 이들 편에 서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의인들을 단죄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이들이지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보면, 후반부는 죄를 지은 지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잘라 버려라, 빼 던져 버려라."(마르 9,43.45.47)
죄를 지은 주체는 그 사람이고, 엄밀히 보자면 죄는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런데도 단지 행동에 옮겼을 뿐인 손이나 발, 눈을 제거하라시는 건, 결국 그것들이 없으면 처참해지는 존재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만큼 죄를 엄중히 생각하고 전인적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의미를 반어적으로 하신 듯합니다.
어쩌면 사람 사이의 죄는 "우리"의 범위를 축소하고 폐쇄시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범위를 자기와 가족, 뜻이 맞는 사람들 정도로 한정한 이들은 그 경계 밖에 존재하는 이들을 외면하거나 적대하고, 심지어 해를 입혀도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으니까요. 그 역시 나와 함께 "우리"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들을 서슴없이 하는 그 자체가 곧 죄일 겁니다. 야고보서에서 언급된 부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지요.
필요 이상으로 움켜쥐고 닫고 밀쳐내는 손,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형제들을 짓밝고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즐기며 불편한 진실 앞에서는 질끈 감아버리는 눈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없애버리라 하신 지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정치와 종교, 이념과 환경, 생계와 차별 등의 문제로 무수한 이들이 고국을 떠나 삶의 터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잖은 이들이 더 지독한 사고와 질병, 폭력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어가고 있지요. 동방 끝에 자리한 우리나라도 어느새 이 현실을 마주한지 꽤 되었습니다.
인권과 환대, 평화의 지향이 우리 안에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두려움과 차별의 벽을 허물고 함께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뜻을 찾는 데 마음을 모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범위를 한없이 확장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손을 펴고 발길을 내디디며 눈을 여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작은 자들이니까요. 오늘 특별히 우리 주위에 있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따뜻한 손길과 눈길을 보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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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6Sq4rQ1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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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막지 마라."(마르 9, 39)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던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다.
죄가 있기에
용서가 있고
죄가 있기에
회개가 있다.
끊어내야
할 것이
참 많은
우리들
삶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다만 죄를
잘라내라고
말씀하신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은총과
결단의 새로운
삶이다.
막을 수 없는
결단과
실천의
변화된 삶이
우리들
복음이다.
잘라 내고
빼어
던져 버리는
결단과 실천의
삶이 회개이다.
진리에
눈을 뜨는
회개이다.
막을 수 없는
진리의 힘찬
결심이
시작되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들 삶이다.
진리를 만나는
은총은 우리
삶에서
시작한다.
참된
진리는
구원을
얻게한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신다.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울 수
없고
잘라내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다.
버려야 할 것은
악습이며
맞이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주님이다.
주님의 사랑은
막을 수 없으며
참된 믿음은
회개를 미루지
않는다.
구원을
막을 수 없다.
구원의
기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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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cpbc 특집 프로그램■
<순례, 김대건을 만나다>
- 성지순례 -
◇1부 '야훼 이레'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다.
버그내 순례길
https://youtu.be/57quc7q5dxg
◇2부 '앗숨' 부르심에 응답하다.
청년 김대건길
https://youtu.be/GU8-5PbbdvM
◇3부 '탈리타쿰' 일으켜 세우시다.
천주교 제주교구 순교길
https://youtu.be/zofcR8_6Ewk
◇4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다.
강경성지/성당, 나바위 성지
https://youtu.be/RGJL0NVg3KA
◇5부 '호산나'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제물진두 순교성지, 갑곶 순교성지, 백령도성당
https://youtu.be/qbOlxnjpu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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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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