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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 우리 시의 경우
<현대문학이론학회-문예사조>
포스트모더니즘
-우리 詩의 경우
3기 양근애
Ⅰ. 서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정의 내리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지금까지 객관적으로 검증할 만한 연구가 거의 100년의 거리를 두고 진행된 것인 만큼 한 시대를 파악하는 작업은 후대의 거시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분야의 어떤 학문을 다루는 경우에 있어서 거칠게나마 현 시대를 고찰하는 작업은 필수적이고도 기본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학문이란 잠정적으로 그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학문의 연구에서 어느 정도 그 시대의 사상적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개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쿤은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그 시대의 지배적인 과학 사조를 형성하고 있는 과학 개념 이론 등을 총칭하여 그 시대의 정상 과학이라 이름하고, 새로운 사조가 출현하고 기존의 정상 과학과 충돌하여 마침내 주도권을 빼앗아 가는 과정을 패러다임의 충돌 현상으로 기술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가장 객관적이라 불리는 자연 과학 분야에서마저도 시대의 사조, 조야하게 표현해서 '유행'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음을 말해 주고 있는데, 하물며 변화무쌍한 인간의 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예측하려는 인문 과학 분야의 연구 과정에서 사조의 영향은 필수불가결 한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지배적 사상 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의 성격과 특성에 가장 적합한 분석 방법과 분석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그 시대 지식인들의 노력의 결과였기에 그 시대의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지배적 사조라는 것은 그 시대의 가장 큰 특성을 결정짓는 것인 만큼 과연 그 시대의 지배적 사조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조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그 시대에서 먼 거리를 두고 있을 경우에는 그러한 작업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가까운 시대일수록, 특히 우리가 현재 속해 있는 사회의 지배적 사조를 묻는 질문에 만약 접하게 된다면, 그러한 질문에의 답은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사상 사조의 변화 과정은 대개 그 전의 사조에 대해 변증법적인 특징을 보이는 수가 많고, 그 결과 현사조와 대안 사조는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므로, 결국 그 시대의 지배 사상에 대한 논의는 그 전의 사조에 대한 논의, 그리고 현 상황이 그 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치밀하고도 폭넓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자칫 피상적으로 그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아직 근대를 체험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러한 위험성을 경계한 조심스러운 경고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현 사회에 지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성과가 있으리라 기대한다.
Ⅱ.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1.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과의 관계
대부분의 문예사조가 그러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그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러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큰 요인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의 관계에 따라 ‘모더니즘의 반발 또는 연장’의 상반되는 개념으로 정의되는 데 있다.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성립된 문예사조로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성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유물론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는데, 모더니즘은 이러한 유물론적 우주관을 부정한다. 그리고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부정한다. 또한 모더니즘은 미래와 현실에 대해 부정적이며 형식의 완결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성격은 문화의 고급화를 초래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 이라는 관점에서 본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이 시기적으로 모더니즘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유물론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처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자본주의’라는 같은 뿌리(모더니즘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을 옹호하는 입장이다)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연결선상에 있는 문예사조라는 것이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반발’ 이라는 관점에서 본 근거는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가지 도전 양상이다. 모더니즘과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작품의 권위나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악, 자타라는 대립이 해체된다. 또 해체의 기법을 통해 형식의 완결성이 파괴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부정했으므로 반발이라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갖는 의미는 굉장히 다양하다. 단순히 낱말만 가지고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말은 어의 자체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임을 쉽게 말해 주고 있다. 포스트(Post)란 말은 '후'란 의미와 '탈'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닐 수 있는데, 사상이란 차원에서 본다면 하나의 사상과 그에 대한 '후'사상이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교체되는 경우란 거의 없기 때문에 시간적 선후를 따지는 '후'라는 의미보다는 반발과 대안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탈' 의 의미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에 더 어울리는 것일 것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탈근대'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탈근대의 의미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이 반발하고 나선 모더니즘의 가치란 무엇인가?
데카르트가 신에 대비되는 판단의 주체, 즉 생각하는 자아(Cogito)를 방법적 회의로써 발견해 낸 후, 인간은 자신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성의 신화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운동에서 절정을 이룬 위와 같은 경향은 이성, 자율성, 과학 기술, 역사 인류 전반의 진보 등에 대한 거의 맹목적일 정도의 신뢰를 그 사상적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계몽주의적인 인간관 세계관 역사관은 그 후 계몽주의의 시대가 가고 낭만주의 허무주의 등이 판을 칠 때에도 서구인들의 기본 의식으로 의식의 저편에 자리 잡아서 그 전통을 모더니즘에까지 내리게 되었다. 모더니즘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예술 사조로서 그것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명하게 발현되었다는 점이다. 계몽주의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채, 19세기말의 세기말적 풍조, 즉 타락한 부르주아들의 생활, 딜레탕티즘 등에의 환멸을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모더니즘은 '예술에 있어서의 자율성의 중시'를 그 특징으로 함과 동시에 그러한 자율성이 잘 드러날 수 있기 위해서 예술 기법과 제재, 그리고 그것들의 표현 양식, 구도 등에 있어서 극도의 이성 지향적 주지적 태도를 보였다. 즉 모더니즘은 비록 그 표현 양식에서 기존의 예술 사조, 더 나아가서 철학 사조와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그 기본 맥락에서 서구의 이성 중시, 합리성 존중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반해서 일어난 사조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인 성격은 자연히 드러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선 이성에 대한 불신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이성을 불신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은 개개인을 억압한다고 생각되는 사회의 각종 규제나 이데올로기들(이러한 것들을 료타르는 대서사라 지칭한다)의 존재와 당위를 거부하며, 개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함으로써 사회 분석에 있어서 더 이상의 계급적 논의가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이는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오늘날 쓰여지고 있는 문학, 음악, 미술, 영화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결말보다는 조금은 황당한, 그래서 관객들을 열린 해석으로 초대하는 듯한 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각종의 이지적인 모더니즘적 기법을 배제하고 새로운 기법을 찾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행하고 있으며, 그 결과 작품 전체에서 신기함과 기묘함, 야릇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감상자를 익숙해진 환경에서 이탈시키는 효과를 가져와서 결국 자신이 옳다거나 정상이라고 믿어 왔던 각종 제도 환경 등에 의문을 갖도록 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및 전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어원상 기본적인 성격이 어느 정도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주 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주장하는 이론들이 많아지면서 그 성격이 좀더 구체화되어야 할 필요를 갖게 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에서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상이한 함의를 지니게 된다.
우선 다니엘 벨류의 포스트모더니즘론을 살펴보자. 이 흐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이 벼랑 끝에 선 끝에 일궈 낸 모더니즘의 극치로 본다. 즉 모더니즘은 개인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끝에 서구 사회의 중심 윤리였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더니즘의 논리에 점점 말려들어 가서 기존의 윤리관 가치관과 빈번한 충돌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충돌, 모순의 끝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논리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쾌락의 전면화, 예술과 생활의 경계 허물기, 충동의 자유 등을 주 논리로 내세우는 사조라는 주장이 이 학파의 핵심이다. 이에 비해 데리다, 료타르 등의 프랑스 구조주의의 전통을 잇는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을 과학의 정당성 확보 방식의 변화로 본다. 즉 모더니즘 시대가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대서사에 의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시대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는 대서사의 정당성과 능력에 회의를 품고 그 대안으로서 수행성의 원리와 패러로지를 제시한다. 파편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역설, 창의, 이의 등을 중시하는 배리의 원리가 중요함을 이들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과 대비되는 하나의 뚜렷한 특징을 가진 사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는 프레데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들 수 있다. 제임슨은 자본주의를 세 시기, 즉 시장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다국적-소비자본주의(후기자본주의) 로 구분하는 에른스트 만델의 구분을 우선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들 세 시기에 각각 대응되는 지배적 사조를 사실주의,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본다. 이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경제적 사회적 필연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사상들과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관점은 독일 비판 이론의 대표자격인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론인데,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과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함으로써 위의 세 이론과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에 긍정적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론이 억압적 성격을 가진 모더니티 혹은 합리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다 모더니티의 합리성 그 자체를 파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하면서, 포괄적인 합리화 프로젝트의 추진을 통하여 완전히 의사소통적인 민주적 문화 공동체의 형성을 현대 문화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은 5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그 논의가 시작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창자 중의 한 명인 이합 핫산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을 ‘포스트모데르니스모(중남미 문단에 일고 있는 새로운 물결)’라는 용어가 사용된 1934경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용어가 만들어진 것은 이보다 훨씬 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모더니즘 내부에 싹트고 있는 작은 변동을 나타낸 것으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의미상으로 차이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예의 개념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1960년대, 레슬리 피들러 등의 비평가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모더니즘 문학에 도전한 대중문학을 가리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가 있다. 그 후, 6,7년대의 여러 가지 사회적 변동-우주 시대의 개막, 인권 운동, 반전, 반핵 운동, 문화의 다원화 운동, J. F. K와 킹 목사의 암살 등-을 겪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을 정의하는 용어에만 그치지 않고 철학 등의 학문적 세계(객관적 현상의 모든 범위)나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로 그 의미가 확대 적용되어 학문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대중문화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리를 굳히는 계기가 된다.
Ⅲ. 해체시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문학에 국한 된 것이기는 하나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도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여러 대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강좌를 개설했으며 대규모의 학술회도 여러 번 개최되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여러 각도에서 해석한 논문들도 많이 발표되었다.
한편, 문단에서는 소설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품들이 창작되어 대중과 한층 가까워진다. 포스트모던 계열의 소설에서 김수경의 「자유종」(90),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92)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90) 이인성의 「한 없이 낮은 숨결」(87)등이 있다.
또 80년대 후반에 창작되기 시작한 해체시 역시 우리 문단의 새로운 시도로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는 모더니즘 시학을 해체한다는 해체시의 포스트모던적 성향외에도 몇 가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바로 해체 기법상의 모순으로 포스트모던과 모던 의 성향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해체시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발전하는 우리 문단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리 시에 있어서 해체시가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해체시의 양상
미국의비평가 퍼킨스는 5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 일부 시에서 모더니즘 시학을 해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특성을 자발성, 개성, 자연성, 개방성의 네 가지로 나누어 요약한다.
우선 자발성이란 자발적 언술을 뜻한다. 이런 언술은 용어 자체가 암시하듯이 모더니즘의 시학으로 불리우는 신비평의 시적 원리가 강조하는 인위적이고 압축된 형식에 대한 부정이다. 포스트모던 시가 이런 형식성을 해체하려는 것은 그것이 창조과정의 자발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가 지향하는 자발성은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삶을 좀더 자유롭게 실현한다는 데에 목적을 둔다.
둘째, 개성이란 모더니즘 시학(신비평의 원리)이 강조하는 ‘몰개성(개성의 일률화)’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발이다. 신비평의 원리에 따르면 시인과 시적 화자는 구별된다. 따라서 시인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삶과 시 속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삶도 단절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는 이런 대립이나 단절을 부정한다. 따라서 시인과 시적 화자는 구별되지 않으며 시를 통해 시인의 목소리가 어떠한 제약없이 표출된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시인의 자전적인 삶이 내포되어 있다.
셋째, 자연성이란 시의 소재로 자연을 노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스러운 정서와 경험을 노래한다는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앞 시대의 모더니스트들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정서와 경험을 노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최소한 초월적 현실, 혹은 이상적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포스트모던 시는 이런 원형이나 신화에 대한 향수가 허구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어떤 유토피아도 존재하지 않는 일상적 삶의 세계를 그대로 노래한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요소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개방성이란 규격화된 형식에 대한 반발이다. 모더니즘 시에서는 형식의 완결성-내적 유기성, 통일성, 수미 상관 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는 이런 구성을 부정하는 ‘부정’ 자체를 시의 소재로 한다. 이때 해체라는 용어가 사용될 수 있다. 해체는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념이나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런 해체의 기법으로 콜라주(추상적 구성), 산문적 에세이(운율이 파괴된 시), 패러디(풍자적 모방), 패스트쉬(혼성모방)등이 있다.
2. 텍스트의 해체1- 내적 해체
텍스트의 내적 해체는 앞서 언급한 해체의 양상처럼 모더니즘 시학을 해체하며 그러한 해체는 단어, 문법 등 텍스트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기법에는 어휘배열의 기법, 목록의 기법, 난해한 문장의 기법, 기계적 구성의 기법, 무한한 형태변환적 기법, 시니피앙 원리에 의한 기법 등이 있다.
위에서 열거한 기법들을 개념과 시를 통해 살펴보자.
어휘배열의 기법은 시인이 독자에게 자신만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낱말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기법이다. 이때, 낱말들은 시인만의 생각을 전달하므로 기술어, 외래어, 고어 등 대체로 자주 사용되지 않는 희귀하거나 현학적인 단어가 주를 이룬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개성은 표출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더니즘 시어가 가진 난해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원래의 목적과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시어 또한 난해해질 수도 있다. 시인만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희귀하거나 현학적인 단어를 선호했기 때문에 시는 자연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시 기법에 모순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 ■ ■ ■ ■ ■
눈썹이없는아이가눈썹이없는아이를울린다
역사를
심판해야한다■■ ■ ■ ■■
심판해야한다고 니콜라이베자르에프는
이데올로기의솜사탕이다
이 시는 김춘수의 <처용단장 3부 39>로 ‘목록의 기법’의 보기이다.
여기서 우선 눈의 띄는 것은 단어결합의 사회적 약속인 통사에서 이탈된 시행이다. ‘역사는’과 ‘인간이’를 기호화하면서 단어의 결합법칙을 부정했다. 또 2행, 3행, 4행, 5행 에서처럼 모든 단어를 붙여씀으로써 띄어쓰기를 부정했다. 마지막으로 각 시행에는 어떤 의미상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위의 주체와 서술어가 유리되어서 제각각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특성이 바로 목록의 기법의 특성이다. 목록의 기법은 ‘목록’이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시어들을 몇 개의 특성으로 묶어 나눔으로써 해체를 노린다. 한편, 목록은 이 시에서처럼 시어를 문장부호와 같이 기호화할 뿐, 어떠한 주제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다. 난해한 문장의 기법은 시어의 연결을 서툴게, 문맥에 맞지 않게 구성함으로써 해체를 노리는 방법이다. 이때 문장을 어색하게 구성하는 이유는 모더니즘 시가 인위적이고 압축된 형식의 추구를 통해 ‘문장꾸미기’에 치중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독자의 시선을 잘 꾸며진 문장에서 어색한 문장으로, 문장의 표면에서 시가 내포한 주제로 돌려놓기 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제된 시행을 보여주기 위한 탈고의 불필요성을 암시한 것이라 하겠다.
무한한 형태변환적 기법은 ‘척추(중심생각)’가 없는 문장을 형태만 바꿔가며 나열하는 기법이다. 이를테면 ‘나는 꿈꾼다 나는 너를 갈망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식으로 문장의 형태를 주어, 목적어, 서술어 수준에서 바꿔가며 나열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을 여러 형태로 바꿔서 나열되는데, 항상 변화하는 문장구조를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이렇게 변형된 문장을 강조하는 것은 ‘나는 너를 꿈꾼다’는 의미가 아니가 문장 자체가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즉 이런 문장의 존재의미는 문장 자체의 배열에 있게 된다.
시니피앙 원리에 의한 기법은 알파벳 A, B, C, D에 의한 구성이다. 시니피앙은 언어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의미 또는 결합에 필연성이 없는 소리기호이다. 시니피앙을 해체에 사용한 이유는 시니피앙이 아무런 뜻이 없는 소리기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니피앙의 사용유무와 관계없이 시의 주제는 동일하다.
여기서 또다른 해체의 모순점이 발견되는데, 시니피앙이 주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굳이 이것을 사용하지 않고도 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A, B, C, D 혹은 ■, ■, ■이 문장 앞에 와야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형식이 생겨난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이것은 작가의 자기모순이 되는 셈이다.
소설에서는 존 바르트가 ‘문자들(letters)'이라는 7개의 알파벳으로 소설을 완성한 예가 있다. 끝으로 기계적 구성이란 하나의 텍스트를 따르면서 또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방법이다. 위에서 언급한 알파벳에 의한 구성법이나 1, 2 ,3에 의한 구성법도 이미 완성된 체계를 따른다는 점에서 기계적 구성의 예라 할 수 있겠다.
3. 텍스트의 해체2- 외적 해체
텍스트의 외적 해체는 작품/독자, 작품/사회, 작품/작품 식의 2항대립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다. 이때, 해체는 텍스트의 밖에서 풍자, 모방, 서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해체는 모방, 풍자, 서술의 대상인 텍스트와 그것에 대응되는 텍스트 간의 대립까지 해체한다.
외적 해체의 기법을 논하기에 앞서 텍스트 간의 경계해체는 어떠한 양상을 띠는지 개략적으로 정리해 본다.
■세계와 텍스트의 대립해체
■시인과 텍스트의 대립해체-모더니즘의 경우, 텍스트를 지배했던 시인의 절대적인 권위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약화되거나 파괴됨.
■텍스트와 독자의 대립해체-텍스트의 절대적 가치가 와해됨 : 독자는 텍스트에 참여하여 작가의 물음에 응답하여야 함.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자율성은 텍스트/텍스트의 대립을 전제로 함. 이때 텍스트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기법에는 패러디와 패스티쉬가 있음.
패러디는 기존의 개념이나 형식과 같은 꼴을 취하고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이다. 이것을 일컬어 흔히 ‘풍자적 모방’이라 한다. 패러디는 다시 반어적 패러디와 풍자적 패러디로 나뉜다.
반어적 패러디의 의미는 ‘모순적 시도’이다. 모순적 시도는 우선 목적하는 바가 두 가지 이상이어야 하며 그 목적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는 시의 한 기법이라는 점에서 예술적인 미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대상을 풍자한다는 점에서 풍자의 효과, 즉 사회적 효용성을 노린다. 따라서 예술과 사회는 단절되지만 동시에 연결되며, 과거와 현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말은 패러디의 반어적 성향을 의미한다. 이 반어성이 전제되기 때문에 ‘반어적 패러디’라는 말이 가능하며 그것은 ‘조소적 모방’과 구별된다. 또 두 텍스트는 유사성을 가지지만 주제는 정반대인 차별성을 갖는다. 그 유사성과 차별성은 비판적 거리를 두고 수행, 반복된다. 이런 점이 전제될 때 패러디는 비판성을 가진다.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이 시는 장정일의 <라디오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88)으로 비판적 패러디의 성격을 볼수 있다. 비판적 패러디는 다른 텍스트의 주제나 가치를 비판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시의 부제가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인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반어적으로 모방’ 한다. 그렇다면 이 시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김춘수의 <꽃>이 의도하는 존재론적 탐구에 대한 풍자이며 비판이다. 각 시행별로 이러한 특성을 살필 수 있는데, 1연과 4연을 통해 정리해 보자.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의 <꽃>이 그 꽃만이 이름을 불러 존재를 인식시켰다면 장정일은 <라디오의 단추>와 같이 기계적인 조작이나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을 움직이면 존재가 인식된다고 했다. 이것은 김춘수의 <꽃>의 존재가 가지는 고귀함, 존엄성에 대한 풍자이며 더 나아가 존재의 하찮음, 미비함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우리들은 모두/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라디오’와 ‘사랑’의 동격처리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사랑’과 ‘라디오’는 그 위치가 바뀔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의 감정인 사랑과 물질 문명의 산물인 라디오를 동격으로 처리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사랑의 가치에 대한 부정이며 더 나아가 그런 사랑의 대상인 ‘존재’에 대한 풍자이며 비판이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비판적 패러디는 반어적 패러디와 같이 어떠한 효용성을 지향하기보다는 꽃을 라디오의 단추로 풍자적 모방하면서 김춘수의 존재론적 탐구에 수정을 가한다. 이것이 바로 비판적 패러디의 목적이다.
한편, 비판적 패러디의 맹점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경계해체의 양상에서 언급한 대로 모더니즘적 가치관, 작가의 권위가 강조되고 존중될 때 작품을 임의로 수정, 개작하는 것은 작가의 절대적 권위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패러디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전체에 대해 기존의 문인, 독자들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종의 실험이 포스트모던 시 혹은 우리 시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런 풍자나 비판은 시의 발전에 촉매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패러디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가치에 대한 탐구가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아 너는 어디로 훨훨 나돌아 다니다가 지금 되돌아와서 수줍게 웃고 있느냐 새벽닭이 올 때마다 보고 싶었다 꽃아 순아 내 고등학교 시절 널 읽고 천만 번을 미쳐 밤낮 없이 널 외우고 불렀거늘 그래 지금도 피 잘 돌아가고 있느냐 잉잉거리느냐.......(하략)
이 시는 박생배의 <희시3>으로 패스티쉬의 기법이 잘 나타난 시이다.
패스티쉬는 흔히 ‘혼성 모방’으로 해석된다. 혼성 모방이란 여러 개의 텍스트를 섞어서 모방해 하나의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다. 패스티쉬 역시 패러디처럼 기존의 텍스트를 모방한다. 그러나 패스티쉬는 텍스트를 모방하지만 그 모방에는 동기가 없다. ‘동기가 없다’는 것은 모방되는 텍스트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 시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파소 두 번째의 단편>과 <부활>을 텍스트로 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시의 텍스트는 서정주의 텍스트를 비판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다만 각 텍스트 간의 대화, 상호 텍스트성을 보여준다. 이 시는 앞의 장정일의 시처럼 텍스트를 모방하고 개작하지만 그것을 비판, 풍자하려는 의도는 없다. 또 그것을 절대적 가치로 삼지 않는다. 단지 서정주의 텍스트를 어떤 목적도 없이 우연의 법칙에 의해 뒤섞어 모방함으로써 패러디와는 다른 패스티쉬의 효과를 노릴 뿐이다.
Ⅳ. 결론
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략적인 개념정의와 그 변별점으로서의 우리 시에서의 해체시의 경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 완전한 하나의 사조로 자리매김 하기에는 그 무성한 이론에 비해 그 성과가 미비했다는 한계가 있고 그 용어에서부터 모더니즘을 기저로 한 것이니만큼 모더니즘으로부터 얼마 만큼의 탈출을 꾀했고, 또 그 시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뒤따르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분분한 것이었다. 다만 조심스레 결론 내리는 것은 지금까지 해체시를 통해 살펴본 우리나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의 모순에서 드러난 것처럼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이기 보다는 연장에 가까운 형태라는 것이다. 또한 이승훈의 견해를 요약해 말하면, 우리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망이란 미국의 경우 이 사조가 1960년대의 아방가르드적 요소, 특히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적 시들에 나타났고 1970년대에 오면서 그 요소가 소멸하면서 절충주의적인 시들이 나타났듯이, 우리의 경우에도 1980년대의 이른바 해체시가 아방가르드적 요소를 보여주었으며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런 요소가 차츰 소멸해 감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시운동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문학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싹은 이미 나타났고 앞으로 그것의 비판적 수용과 주체적 시도에 의해 발전하리라는 낙관적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전개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와 타 예술 장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은 조심스레 남은 문제로 돌리고자 한다. 문학에 있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창작품은 무한하게 양산되고 있으며 단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품들은 문학, 특히 소설을 중심으로 꾸준히 창작되었고 몇몇 작품들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 것이다. 또 최근에는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등의 작품들이 가장 대중적인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영화에까지 옮겨져 흥행이나 예술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관심은 더욱 집중되리라 본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재고를 요한다. 타 예술사조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서구 상업주의가 낳은 외래문학이라는 인식만으로 앞으로의 전망마저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새롭고 참신한 작품들에 대한 흐름이 재평가 될 수 있을 때 우리 나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정립은 물론 우리 문학의 발전도 뒤따를 것이다.
<참고문헌>
■이승훈 외,『포스트모더니즘과 문학비평』1994, 고려원
■권택영,『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고영복 외,『현대사회론』,사회문화연구소, 1995
■오생근 외,『문예사조의 새로운 이해』 문지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