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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지막때 계시록 진리를 사모하는 자를 위한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자
본문 말씀 : 이사야 52장 1~2절
1 시온이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2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찌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찌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찌어다
에덴동산에 세운 하나님의 첫 사람, 아담에게, 그리고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행복을 선택해라.”, “너는 부유함을 선택해라.”, “너희는 건강을 선택해라.” 이렇게 명령하시지 않으셨다. 행복을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담이 선택해야 될 일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그 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였다는 것이다. 아담이 선택해야 할 것은 행복도, 자식도, 이것도, 저것도, 수많은, 그러한 것이 아니고, 아담에게 택하라고 주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그 말 하나를 어겼더니 인생은 그날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물질도 자기의 삶에 선택해야 될 기로에 서 있게 되고 건강도, 삶에 자식의 문제도, 인간의 모든 문제도, 모든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인생의 피를 말리는 일들이 자기 앞에 닥치기 시작한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선택할 것은 말씀 지키는 것 하나였는데 이것 하나가 안 되면 인간은 수십 가지의, 자기 스스로가 고난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런 어리석은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선택하기 시작하면 내가 행복을 선택하지 않아도, 내가 부유함을 선택하지 않아도, 내가 건강함을 선택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 속 하나에 이것이 다 들어 있는 줄로 믿는다. 내가 선택해서 갖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 주셨다. 말씀 하나를 어기니까 인생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한 자녀들이 어떤 축복 속에 있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 구원 받은 자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모습도 잠깐 보여 주고 있다.
시온이여 깰찌어다
시온은 하나님 앞에 선택 받은 자의 다른 이름이다. 예루살렘, 다 선택 받은 자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자녀요” 이 말과 같다. 그러면 시온이,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을 할 일이 있다는 것인가? ‘깰 일’이 있다는 것이다. 뭔가는 잠자는 거기에서 깰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시온이 깨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앞에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고 대단한 것인데 내가 깨우침을 받지 못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대단한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당연히 누려야 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을 내가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온의 하나님의 자녀가 깨달음을 받고 살길 원하면서, 깨라는 것이다. 그 무지에서 깨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축복은, ‘너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권세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다스릴 권세가 있었다. 그 다스릴 권세가 당연히 있는 것이다, 사정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당연하게 있어서 실제로 다스릴 수 있었던 건데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 권세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권세를 우리에게 찾아 주셨다. 그래서 힘을 쓸 수 없었던,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 때문인가? 예수님 덕분이다.
우리에게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처럼 살아야 되는, 힘이 없는 자가 아니고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처럼, 행복을 선택하고 건강을 선택하고 많은 것을 선택하고 고민해야 될 것이 아니고, 말씀 하나 지키면 우리는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됐는가?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죄 때문에 정복할 수 없었던, 힘을 잃었던 자가 예수 때문에 다시 정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피조물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는 걸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순간에 나는 어제의 사람이 아니다. 예수 믿지 않았던 어제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 정복의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제의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깨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무능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런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뭐해야 하는가? 깨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시온아, 깨라는 것이다.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그래서 어제의 것은 지나갔다는 것이다. 무능은 지나가고 질병은 지나가고 가난은 지나가고 다 예수 안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내 입으로 선포하고 믿을 수 있을 때, 그것을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전 것은 뭐했는가? 지나갔다.
우리는 어제의 사람이 아닌 줄로 믿는다. 어제의 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앞으로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 어제에 묶여 있고, 어제에 묶인 사람은 또 내일에도 묶여 있다. 반드시 어제에 묶인 사람은 내일에도 묶여 있다. 내일도 묶여 가고 내일,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 염려하고 산다. 염려하고 근심하고 산다.
어제와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닐 줄로 믿는다. 어제와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고 오늘이 바로 나의 날이다. 오늘이 바로 무슨 날인가? 나의 날이다. 내가 기적을 볼 수 있는 날이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일을 정복할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항상, 어제 때문에 묶이고 내일의 염려 때문에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멈추는 어리석은 인생을 따라가지 말고 우리는 ‘오늘’ 승부를 내야 할 줄로 믿는다.
“언젠간 하겠지.”라고 하는 사람은 끝난 것이다. ‘언젠가’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매일 ‘언젠가’이다. 우리에게는 ‘언젠가’가 없고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오늘’만 있는 줄로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선택을 해야 한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기업에 새로운 피조물의 권세를 가지고 오늘 내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어제의 죄 때문에 우리는 문제 삼을 것도 없다.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보혈은 오늘도 새로운 피조물을 만든다. 우리는 내일 닥칠 염려 때문에 내 인생의 삶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내일 받는 은혜, 은혜도 내일 받는 것이 아니고 어제 은혜 받는 것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지금 은혜가 언제 온다? 지금이다. 지금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은혜 받을 때다. 지금이 질병을 끝내야 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지금이 가난을 끝내야 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 삶의 문제를 내려놔야 되는 거지 내일 내려놓는 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 때문에, 내일 때문에, 인생에 살아가는 자기를 묶어 놓지 말고 지금이 은혜받을 때인 줄 믿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때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 (내일이 아니고 어제가 아니고) 바로 오늘이라는 것이다. 오늘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바로 무슨 날인가? 구원을 받아야 될 날이라는 것이다. 언제가? 지금! 그러니까 믿는 자의 성경 전체 중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내일 구원 받는다는 말이 없다. 어제 일로 된다는 말이 없다. 말씀도 마찬가지다. “오늘 너희에게 말하는 말을” 전부 다, 오늘이라는 날 동안에, 전부 오늘이라는 날을 사용한다. 내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성경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 우리는 어제 어떠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이 중요하다.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도 우리는 그 내일 때문이 아니고 오늘 때문에 내일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오늘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일을 맞이해도 그 사람은 똑같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 날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니까, 시온아, 하나님의 자녀야, 깨달으라는 것이다. 깨우침을 받을지어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네 힘을!” 입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피조물의 힘이 있다. 내가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질병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니고, 나에게 들어와 있는 그분 예수는, 나에게 들어와 있는 성령님은 오늘 이 질병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문제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입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매일 새로운 피조물이면서도 새로운 피조물로 살 수가 없다. 어제에 묶여서 살고, 또한 미래에, 과거에 묶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저 ‘어쩌면, 어쩌면,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만 하고 산다는 것이다.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인 줄로 믿는다. 막연한 게 아니고 오늘,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한다. '언젠간 해주실 것이다'가 아니고 오늘이라는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명령해야 한다. 이 문제는 오늘, 오늘! 실제로 오늘 승부를 한번 걸어 봐야 한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가서 그 문제를 보고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오늘 승부를 걸어 봐야 한다.
아픈 것을 향해서 오늘 실제로 승부를 한번 걸어 봐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찌어다!” 이 승부를 한번 걸어 봐야 된다. 오늘 안 됐다고? 내일의 오늘이 또 한 번 있다. 우리는 오늘이 승부를 걸어 봐야 할 때이지 내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과거에, 미래에 묶인다면 그 사람은 믿음의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너는! 너는 이렇게 살아야 될 자가 아니고 예루살렘아, 선택받은 자야, 하나님의 자녀야, 너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살아야 될 자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옷을 입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어제에 묶여 있고 또한 미래라는 염려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걱정으로 산다.
어제와 오늘이, 어제와 내일이 없다면, 사람은 오늘만 승부를 내면 된다면 한번 해볼 만한 일이다. 오늘 하루라고 한다면 견딜 만한 것이다. 오늘 하루만 이기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한번 해볼 만한 일이다.
결론은, 오늘을 못 싸우는 이유는 내일 때문이다. 내일 닥쳐오는 일 때문이다. 그래서 없는 사람이 저축을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다, 더 저축을 해야 되는데 못하는 이유가 뭐에 있냐면 ‘아이고! 이거 가지고 저축을 해봤자, 내일 또 모아 봤자, 이건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오늘이라는 것이다. 오늘 저축을 하면 내일도 들어오는 것이고 모레도 들어오는 것이고 그 다음 것도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없는 사람이 잘 먹고, 있는 사람이 못 먹는 것이다. 왜냐면, 없는 사람은 그것마저 다 먹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거 해봤자 뭐해? 다 먹어버리자!' 이것이다. 있는 사람은 돼지고기 살 돈으로 고등어 먹으면서 저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이 계속 가는 것이고 부유도 계속해서 부유함이 쌓이는 것이다.
부자의 철칙을 보면 부자는 반드시 오늘을 위해서 산다. 그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오늘을 위해서 산다. 그 사람들이 부유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는 줄로 믿는다. 결론은 ‘오늘’만이라면 한번 해볼 만한 것이다. 내일 생각하면 낙심이 안 되는 사람이 얼마큼이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면서 사람이 낙심이 안 되는 사람이 얼마큼이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승부를 내야할 줄로 믿는다.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오늘 한번 명령을 해봐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찌어다.” 진짜로 한번 주님이 하신 대로 그대로 한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승부를 내는 연습을 해봐야 한다. 언제까지 매일 미룰 것인가. 언제까지 그것을 가져갈 것인가. 그래서 ‘예루살렘이여 너는 아름다운 자’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될 자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너의 삶에 너를 어렵게 했던, 세상의 것들에 힘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와 다르고 내 생각과 다르고 내 삶의 추구와 달랐던 이러한 많은 자들 때문에 내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러한 자가 너의 영의 지경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것이다. 내가 오늘을 결정하면, 오늘을 결정해서 믿음으로 살면 다시는 이런 것들이 너의 곁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뭐냐?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지어다
너는 어제 가지고 있던,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던 내 사람, 내 방법으로 살아갔던 이 티끌을 떨어 버려야 된다. 옛사람을 뭐해야 되는가? 옛 생각을, 어제를 털어 버려야 된다. 어제 실패했어도 그 실패를 가지고 오늘 걱정하지 말고 어제의 실패는 내려놔야 할 줄로 믿는다. 어제의 실패, 어제의 죄를 내려놔야 한다.
그 죄를 못 내려놓으면 오늘을 못 간다. 그럼 하나님 앞에 오늘을 못 가는 자가, 어제의 죄 때문에 오늘 못 가는 자가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겠느냐는 것이다.
어제 것을 내려놓고 오늘 가는 자가 하나님 앞에 축복인 줄로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티끌은 스스로가 내려놓는 것이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내려 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위로해서 내려진다고? 아니다. 자기가 깨달아야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내려놓는 것이지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는 내려놓지 못한다.
탕자가 위대한 점이 뭔가? 탕자의 죄는 우리의 죄보다 크다. 탕자는 죄를 많이 진 자다. 아버지의 유업을 다 가지고 가서 다 말아먹었다. 창기랑 말아먹고 세상을 향해서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런데 탕자가 하나님 앞에 회복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너는 죄를 이렇게 졌니? 저렇게 졌니?” 하고 물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탕자가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은 어제 때문이 아니다. 만약에 ‘나 같은 사람이, 어제의 나 같은 사람이, 어제의 팔아먹은 사람이, 어제의 나 같은 사람이’라고 했으면 못 돌아온다. 탕자가 돌아올 때 내일을 생각하면 ‘내가 갔을 때 아버지가 과연 받아 주실까? 다 말아먹은 나를?’ 사람은 과거의 염려와 죄로 묶이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오늘을 뭐하고 있는가? 좌절하고 실망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보고 세상에서 뭐라고 하는가? 이런 사람을 세상에서 뭐라고 하는가? 바보 멍텅구리라고 한다.
자기가 어제의 사람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언제든지, 오늘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권세 아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불쌍한 자다. 어제에 묶여서 오늘 전진하지 못하는 사람, 내일 때문에 오늘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 내려놔야 할 줄로 믿는다. 우리는 승부를 걸어야 한다. 오늘이라는 것을.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지어다
그러니까 네가 앉아야 될 곳은, 이제 티끌을 털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영역이라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유함을 끌어낼 수 있는 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 줄로 믿는다. 새로운 피조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가 깨달아서 출발해야 한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을 때 그 사람이, 탕자가 후회를 했겠는가? 안 했겠는가? 후회했을 것이다. ‘내가 옛날에는, 전에는 이랬는데.’ 하고 후회했을 것이다. 17절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에 스스로 돌이켰다는 것이다, 어디에 묶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에 묶였으면 못 간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벼룩 낯짝은 낯짝이고 우리는 얼굴이다. 벼룩 낯짝 생각하지 말고 어제 때문에 묶이지 말고 내일 때문에, 내일의 염려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지 말고 우리는 오늘 이겨야 한다.
스스로 돌이켰다는 것이다.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겠구나,' 그러면 스스로 돌이켰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 이 사람과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매일 깨닫기만 한 것인가? '아! 잘할게.' 백날 가도 안 된다. 그 사람은 백날 가도 안 된다.
될 수 있는 자는 실패했어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다. 깨닫는 사람이 아니고 일어나는 사람이다. 깨닫는 사람은 '내가 안 해야 할 줄은 알아. 아, 그래 맞아.' 이건 백날 가도 안 된다. 그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보면 벌써 일어났다. 탕자는 ‘어제 때문에’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가졌으면 절대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못할 자다. 그런데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 돌이켰는가? 안 돌이켰는가?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 생각만 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거기서 죽는 것이다. 20절 보면, 깨달은 자가 다음에 행할 일이 무엇인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오늘 본문에, 티끌을 떨어버릴찌어다 마지막 줄에, 네 목에 줄을 스스로 풀어버릴찌어다 누가 풀어야 하는가? 스스로 풀어야 한다. 스스로 깨달았다면 어제에 묶이지 말고 일어나야 한다. ‘아, 나 같은 게.’ 나 같은 게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이다. 내 속에 하나님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질병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이 물질의 문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오늘 삶의 내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오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오늘, 오늘이다. 어제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오늘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매일 될 수 있는 오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예수를 믿는 축복이 아닌가? 왜 예수를 믿는 축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제에 묶여서 오늘을 움직이지 못하고, 내일 때문에 오늘 믿음을 상실하며 어리석게 사냐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스스로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되고 너는 스스로 네 목에 준 줄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 스스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줄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탕자는 스스로 깨달아서 아버지께로 돌이킨 것이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에,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에 일어나서, ‘일어나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아버지는 지금 뭐하고 있는가? 나는 어제 묶였으면 ‘나 같은 게 죄가, 나 같은 게.’ 이럴 것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받아 주셔도 우리는 그래도 최소한 하나님 앞에 ‘나 같은 게.’ 하는 이런 마음은 있어야 한다. 못 가는 ‘나 같은 게.’가 아니고, 가는 ‘나 같은 게. 나 같은 게.’
어제에 묶이면 못가는 것이다. 그런데 탕자가 갔더니 아버지가 “너 같은 게 왔냐?” 원래 생각은 이것이다. ‘나 같은 게.’라는 생각은 “너 같은 게 왔냐?” 이런 말을 하나님이 하실 것 같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배웠다.
내 아버지는 나 하나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소리를 직접 들으셨다. 자기 자식 한번 어디에, 대신 죽는 자리에 내놓는 심정,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피 값을 주고 사셨다. 우리 삶에 있어야 될 일을 다 이루었다. 다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못 찾아 먹는 사람은 뭔가? 바보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을 해 놨다. 전도서10장 5~8절에,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해 아래’라는 말은 세상이라는 뜻이다. 세상은 다 해 아래 있지 해 위에 있는가? 없다. 세상에 사는 중에 이상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 폐단이라는 말은 뭔가? 이 폐단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말도 안 되는 일이 과연 뭘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실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뭘까?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누군가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이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가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권세를 당연하게 사용해야 할 자가 뭔가가 폐단,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뭔가가 잘못됐다.
이 주권을 줬다는 것은 당연히 쓰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 만 원짜리를 가지고 슈퍼마켓에 가서 보여 주면서 “아저씨, 이거 혹시 받으시나요?” 이거 물어보고 사용할 사람이 있는가? 없다. 물어보고 사용하지 않는다. 왜 안 하는가? 이 돈이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 돈을 사용할 주권이 내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반드시 돈의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묻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바보같이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이거 받으시고 3천 원치만 주세요.” 이러면 이걸 보고 뭐라고 하는가? 바보 멍텅구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런 바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멍텅구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주권을 가지고 있는데 사용을 못하는 바보 멍텅구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바보 멍텅구리인가 보겠다.
우매자가 크게
거꾸로 됐다. 무슨 자가? 우매자가. 우매자는 어떤 자인가? 성경에서 사용되는 것은 반대말, 두 가지 말밖에 없다. 우매자라 하면 하나님 백성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 백성은 지혜자다. 그러면 우매자는 세상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 우매자가,
높은 지위를 얻고
어떻게 우매자가 높은 지위에 가느냐는 것이다. 누가 올라가야 하는가? 지혜자가 올라가야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성경은 이 말을 다시 바꿔 이야기하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머리가 되고 꼬리는 절대 되지 않는다고 약속을 해 놨다. 그런데 어떻게 우매자가 네 위에, 네 머리 위에 있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래의 뜻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이 머리라는 것이다. 머리로 주셨는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살면서 이 우매자가 네 머리 위에 가 있느냐는 것이다. 거꾸로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들에게 큰 소리를 치고 산다. 믿는 자를 아주 우습게 알고 산다.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이 머리다. 성경에 꼬랑지로 준 적이 있다는 가? 없는가? 없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우매자가 머리에 앉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꼬리에 가 있는 것이다.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뭐한 자가? 부자는 어디에 앉아야 하는가? 높은 지위에 앉는 것이 당연한데 낮은 데 들어와 있다. 거꾸로 됐다는 것이다. 이게 폐단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부유함 속에,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행복 속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건데 오늘도 불행하게 살아가야 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미 다 이뤄 놓은 일을 가지고 오늘도 염려를 하고 사는 그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주께서 이미 다 이뤄 놨다고 말을 하는데 그 염려를 붙잡고 오늘도 염려 속에서 그 신앙이 오늘도 가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보실 때, 폐단이다. 우리의 허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주권을 주신 줄 믿는다. 우리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부유함을 주신 것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찾아야 되고 낮은 자존감에서 지금 높은 자리를 찾아야 되고 우매자가 앉는 자리가 아니고 내가 앉아야 될 자리라는 것이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종들은 말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다니는도다
그래서 세상이 거꾸로 되어서, 어깨들은 다 고가의 차를 타고 다니고, 사람 파는 사람은 좋은 차 타고 다니고, 사람 팔지 아니하고 착한 사람은 그저 그냥 소형차 타고 다닌다. (이 말은 소형차를 탔다고 문제가 아니고 고가의 차를 못 탔다는 말이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의 사람이 말을 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뭐 하고 다니는가? 걸어 다닌다는 것이다. 거꾸로 됐다.
이게 지금 폐단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새로운 피조물인 줄 모른다. 어제에 묶였기 때문에, 혹은 내일이라는 것이 묶이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이다. 오늘인 줄 믿는다. 이제 걸어 다녀야 했던 것들이 말을 타야할 줄 믿는다. 거꾸로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종들이 말 타고 말 탈 자들이 걸어 다닌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들을 정확하게 넣어 놨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어제로 보지 말고 내일로 보지 말고 오늘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면 우리는 그 믿음의 기적을 한번 봐야 할 줄로 믿는다. 막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봐라. 열 번 사용해서, 아니 오십 번 사용해서 한번 맞는 게 나은가? 한 번도 안 사용해서 한 번도 못 맞는 인생이 나은가? 그러면 우리는 내가 49번 실패 때문에 무서워하지 말고 자기를 향해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50번 사용해서 1번 맞았던 것이, 50번 사용해서 2번 맞고, 50번 사용한 것이 4번 맞고, 5번, 10번 맞는 것이다. 맞다가 보면 이제는 50번 사용하면 49번 맞고 1번 틀리는 것이다. 그러면 한번 해봐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오늘을.
한번 안 됐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한번 해봐야 되는 것이다. 어제의 묶인 사람은 절대로 이것을 못한다. 내일의 염려 때문에 묶인 사람은 오늘을 이길 수가 없다. 오늘뿐이다. 내일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내일 하나님이 부르면 우리는 가야 한다.
지금 있는 이 시간이, 지금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깰찌어다.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알아라. 어제에 묶이지 말고 내일에 묶이지 말라. 오늘이라는 것이다. ‘피차 오늘이라는 동안에 서로 권면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날밖에 없다. 한번 해볼 만한 것이다. 적이 크다? 적이 큰 것은 그만큼 포획물이 많다는 것이다. 포획물이 많기 때문에 적이 큰 것이다. 쥐를 잡아서 누구 코에 붙이겠는가? 참새 잡아 봤자 참새는 털밖에 없다. 이왕 잡는 것, 그냥 송아지 잡으면 먹을 때가 큰 것이 많다. 그만큼 큰 것이다. 크다는 말은 내게 올 것이, 내 몫이 확실히 있다는 것이다.
폐단, 이런 허물을 가지지 말고 내게 주권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찌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찌어다
그러므로 내 자녀야, 하나님의 자녀야, 너는 이제 하나님과 함께 앉는 그 자리에 좀 앉아야 된다는 것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찌어다
이제 내가 잡혔던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풀어야 할 줄로 믿는다. 내가 내려놔야 한다. 탕자처럼 어제에 묶이지 말고 내일에 묶이지 말고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한테 가니까 가락지를 끼우고 옷을 입히고 신발을 새로 신기고 송아지를 잡는 약속, 아버지가 하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는 스스로 풀어야 된다. 어제를 놔야 된다. 내일을 놔야 된다. 어제와 내일을 나, 목사도 잡으면 절대로 신앙을 살아갈 수 없다. 나도 항상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자녀의 새로운 피조물, 오늘 때문에 내일을 내려놓고 어제도 내려놓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는 죄 때문에 고민했지만 오늘은 그 죄가 덜어지는 것이고 점점, 점점 덜어지는 것이고, ‘의’ 속에 살게 되는 것이고, 내일의 염려가 오늘 믿음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 아니겠는가? '스스로 네 목에 줄을 풀찌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염려하는 것은 어떤 염려인가? 스스로 풀 수 있는 염려밖에 없다. 절대로 스스로 풀 수 있는 염려밖에 없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어 있는 부분의 나사로, 어제 죽었다. 시체는 희망이 없다.
그런데 마리아의 믿음은 언젠가는 산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필요 없다. '오늘 영광을 네가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보지 않는가? 그 영광은 오늘 우리도 봐야할 줄로 믿는다. 예수 믿는 동안에 봐야 한다. 인생을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는가? 한번 시도는 해봐야 된다. 아닌가? 이런 복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