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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4).
대장은 오늘 올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었다. 남극대륙의 남극점에 도달하는 경주에서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인내(Endurance)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항해했다. 그는 잇따라 장애물을 만났다. 그의 배는 얼어붙었고 얼음에 의해 쭈그러졌다. 그의 부하들은 코끼리섬이라고 알려진 작은 바위섬에 좌초하게 되었다. 몇몇은 괴저병이 생겨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보급 받은 식료품은 바닥이 났다.
그들은 좌초되어 매서운 추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실망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섀클턴 경은 그의 28명 부하들 모두를 살릴 계획을 세웠다. 그중 5명을 데리고 작은 배를 이용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거친 바다 1,280킬로미터를 밤낮 노를 저어 남 조지아 섬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고 구조대를 편성하려는 계획이었다.[1] 만약 그가 실패한다면, 바다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을 것이고 그의 모든 부하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 동안에 남아 있는 22명은 은신처나 해변이 거의 없는 얼음산으로 뒤덮인 코끼리 섬에 남아 있어야 했다. 바다는 이 차갑고, 바위투성이인 험악한 곳 둘레에서 물거품을 일으켰다. 그러나 섀클턴은 꼭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프랭크 와일드는 섬에서 사람들을 맡아 남게 되었다. 그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었고 또한 구호 하나를 준리하고 있었다. 그는 규칙과 질서를 만들었다. 매일 아침 모든 사람들은 와일드가 “준비하라. 대장은 오늘 올 수 있다!”라는 구호로 일어나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은 그날 아침에 코끼리 섬을 떠나듯이 모든 사람이 침낭 도구를 걷어 올려 챙겨 넣고 짐을 꾸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항해하고 걷고 또 다시 항해하고 이렇게 하기를 4개월,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약속을 지켰다. 1915년 8월 30일, 코끼리 섬의 사람들은 멀리 바다에 보이는 배를 보며 “오, 배다!”라고 외쳤다. 그 아침에 그들은 환호하고 극도로 흥분하여 경축하는 사이에 음식을 타버리고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몇몇은 몇 분간 말을 잇지 못했다. 섀클턴 경은 섬의 뭍으로 가까이 왔으나 뭍에 발을 들여놓진 않았다. 사람들은 배로 뛰어 올랐고 코끼리 섬을 뒤로 한 채 떠났다. 그들은 준비되어 있었고, 대장은 그 날 정말로 와주었다!
우화적으로, 우리는 장애물이 있음에도 견뎌야 할 필요와 직면할 때 때때로 외로운 장소에 버림받거나 잊혀진 것처럼 느낀다. 빙하와 넓은 바다 저편에는 우리의 지구라는 섬에서 걸으셨고 돌아오시길 약속하신 분으로부터 구조 사명이 조직되고 있다. 우리는 포기하고 “그게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 그리고 매일 우리는 “언제나 정말 준비되자; 주께서는 오늘 오실 수 있다.”라는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
우리는 잠자려는 본성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어둠의 자녀들이 아니라, 빛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적 여행에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행성에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오셨다. 그분은 죄에서, 세상에서, 그리고 불행에서 난파된 자들을 찾기 위해 오셨다.
아, 나는 예수님과 함께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은가? 또 한해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고 계시고 그분의 종들과 또 지금 이 글을 통해 말씀으로부터 기별을 보내고 계시다. 그분께서 오실 때 여러분도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4).
밤에 도적같이
우리의 가장 핵심적인 성구의 앞 구절은 도적과 집주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3-44).
위대한 영국의 성경 주석가인 매튜 헨리는 도적은 우리의 적인 죽음이라고 말한다.[2] 그것은 또한 갑작스런 오심에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할 수 있다. 바울은 말한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 5:2). 도적은 우리의 적이다. 그것은 죽음 혹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세주로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오는 주님의 재림이다.
이 비유는 또한 집을 말하고 있다. 헨리는 집은 인간의 영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견해를 넓혀서 방 3개가 있는 집 즉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 이 모든 세 개는 예수님의 재림까지 보전되어야 한다. 우리는 몸에 공급하는 것들, 마음에 넣는 생각들, 그리고 영혼에 영향을 주는 우리가 소지하는 행동,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
로마인들은 밤을 지키기 위해 네 번의 보초를 선다. 각 보초는 약 3시간정도였다. 첫번째 보초는 오후 6시에 시작하였고 마지막 보초는 아침 6시에 마쳤다. 밤에 정해진 시간에 로마 보초병들은 대형을 거쳐 모든 것이 안전하고 이상유무를 확인하러 갔다. 로마 보초병들은 시간이 되면 다음 근무자들로 교체되었다. 우리에게 보초는 죽음이 다가올 수 있을 때의 미지의 시간이나 혹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상징한다. 보초는 삶에서 네 개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청년기, 성인기, 그리고 노년기.
도적은 밤중 어느 순간에도 집에 침입할 수 있다. 죽음은 밤의 도적처럼 어느 순간에도 닥칠 수 있고 대개 가장 예상하지 못할 때 문을 두드린다. 오직 나이든 사람만 죽는다는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한다. 어른, 청년,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쉬도록 부름을 받는다. 어쩌면 최근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후회와 함께 우리의 마음에 붙어 다니는지 알 것이다. 좀 더 시간을 같이 보냈더라면 좋았을텐데 … 좀더 자주 방문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 그랬더라면 좋았을텐데 …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다(watch)”라는 단어를 곧 닥칠 죽음과 연관 지으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14:34).
예수님께서는 또한 “깨어 있다(watch)”라는 단어를 그분의 재림에 연관 지으셨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24:43).
이 날을 기회로 활용해야한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오늘 나는 예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늘 나는 그분의 집, 그분의 교회, 그분의 백성들, 그리고 안식일뿐만 아니라, 다른 예배일에도 더욱 자주 방문하도록 결심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기도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에 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최대한으로 살아야 한다. 오늘 여러분은 “그랬다면 좋았을텐데 …”를 피하도록 결심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죽은 후에는 돌아올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결정하지 않은 것을 원상태로 돌리거나 마무리 짓거나 바꿀 수 없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말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 9:10). 우리는 시간이 얼마 없고 불확실한 것을 깨달을 때만 우리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영원의 맥락으로 조정하기를 배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피로 피해야할 지옥과 얻어야할 천국이 있다.
제가 미국에서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목사로서 상담할 때, 마약밀매와 살인으로 여러 해를 감옥에서 지낸 한 죄수가 배운 것을 저에게 말해줬다. 그는 교도소에서 배운 것을 세 글자 즉 PPT로 요약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PPT가 무슨 뜻입니까?” 명목상 재림교인으로 자란 이 거구의 근육질 사나이는 이렇게 답변했다.
“사람들(People), 장소들(Places), 것들(Things). 내가 이 감옥에서 나갈 때, 저는 전에 사귀던 사람들을 바꾸고, 전에 가던 장소들을 피하고, 전에 하던 것들을 그만 둬야 합니다.” 스스로 자문해보자: 내가 더욱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 장소들 그리고 어떤 것들을 바꿔야 하는지. 내가 죽음 혹은 예수님의 재림을 위하여 무엇을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지? 기억하세자. 이 땅에서 예수님과 걷는 사람들이 나중에 천국에서도 그분과 함께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집주인의 비유에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할 것이 있다. 집주인은 누구인가? 만약 우리가 집을 영혼으로 본다면, 집주인은 의지이다. 의지는 마음을 지배하는 요소다. 거룩해지고 순결해질 의지가 없이는 영혼이 예수님처럼 될 수가 없다. 의지는 영혼의 결정하는 능력이다. 성경은 구원받는 의지를 가지기를 권하고 있다. 의지는 또한 몸과 마음의 건강에 필수적인 것이다.
“의지력은 마땅히 귀중히 여겨져야 하리만큼 여겨지지 않고 있다. 의지가 각성되고 올바른 지도를 받을 수 있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전신에 힘을 나누어 주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놀라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질병을 취급하는데 있어서도 또한 힘이 된다. 의지력이 올바르게 발휘되면, 그것은 상상력을 지배하고 정신과 육체의 질병을 다같이 저항하고 극복하는데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의지력을 활용함으로써 환자들이 스스로 생명에 대하여 올바른 관계를 확립할 때, 그들은 그들의 회복을 위한 의사의 노력에 보다 잘 협력할 수 있게 된다. 원하기만 하면 회복될 수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병들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완쾌되어 행복해지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쾌하고자 결심해야 한다.” –치료봉사, 245.
스페인어 성경인 레이나 발레라 번역본은 “집주인”대신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집주인은 집안의 아버지다. 모든 집의 아버지는 가족과 구성원의 복리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는 그의 온 집안사람을 양육해야하는 즉 음식, 옷, 은신처, 안전, 의료 관리, 그리고 교육 등 일반적인 필수품 등을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적 발달을 돌볼 책임이 있다. 어머니가 집에서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아버지는 집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한다. 아버지는 머리지만 어머니는 심장이다.
“모든 가족은 부모들이 주관하는 교회이다. 부모들이 첫째로 생각할 일은 자녀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족의 제사장과 교사가 되어 그들의 위치를 온전히 그리스도의 편에 세울 때에 좋은 감화가 가정에 끼쳐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성결한 감화는 교회에서 느껴질 것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인식을 받을 것이다. 경건함과 성결함이 가정에 심히 부족하므로 하나님의 사업이 크게 방해를 받는다. 그 누구도 가정 생활과 사업 관계에 있어서 끼치지 못한 감화를 교회 내에 들어와서 나타낼 수는 없다.” –새자녀 지도법, 549.
다른 의미로, 집주인은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또한 목사이기도 하다. 모든 목사는 철저한 성경적 가르침, 설교, 치료, 그리고 상담을 제공할 엄숙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양 무리의 본이 되고(벧전 5:3) 양떼-영적 어린양과 양들-의 복리를 돌봐야 한다. 각 지역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그들의 목사와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한다. 그들은 진정한 부목자들로서 예수님을 대표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지역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들이 되어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목사를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교인으로서, 부모로서, 목사로서,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딛 3:1-2).
함축된 것은 깨어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기 위한 올바른 사고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보며 깨어있고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의 주요 관심사와 의무가 되어야한다. 이 땅의 마지막 날이 되던지 혹은 예수님의 집에 가는 하늘여행의 첫날이 되던지, 정말로,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4).
결혼 준비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예언을 드러내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더욱 준비하는 것에 관한 또 다른 비유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준비의 긴급함과 함께 긴 일련의 계시를 끝맺는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19:7; 21:2).
교회와 새 예루살렘의 도시는 둘 다 스스로 준비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날을 위해 준비하는 신부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교회의 남편으로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승리를 얻은 교회는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라는 단어를 사람의 무리와 건물 둘 다에 동일하게 사용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신부”라는 단어를 교회와 새 예루살렘으로 알고 있는 새 교회 건물에 동일하게 사용하신다.
“혼인 관계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그리스도와 당신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부드럽고 신성한 결합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혼인잔치의 기쁨을 자신의 신부를 데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시는 날, 구원받은 자들이 구주와 함께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식탁에 앉을 그날의 기쁨을 예표하는 것으로 여기셨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 오직 너를 헵시바라 …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것임이니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사 62:5, 4; 습 3:17)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시대의 소망, 151, 1898년.
나는 부모님 집에서 남자 아이들과 자랐다. 이제 나는 아버지이고 여자 아이들로 꽉 차있는 집이 있다. 여자 아이들에게 결혼식은 아주 큰 것이다. 남자 아이들은 결혼식날을 작은 여자아이들만큼 꿈꾸지는 않는다. 저의 어린 여자아이가 언니 중 한명에게 화날 때, “난 언니를 내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있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저주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이다. 있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저주는 혼인 잔치를 위한 혼인예복이 없는 것이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우리의 신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결혼식에 가기 위한 모든 준비와 채비에 대해 저와 함께 생각해보자. 신부는 신랑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는 아주 호감가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길,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 11:2). 여러분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영적인 인도자로 받아들였는가?
신부는 예복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하늘의 혼인식을 위한 예복은 깨끗하고 하얀 세마포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상징이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8). 여러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신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자비의 행실로 예복을 맑고 빛나게 보존하려고 애쓰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얻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역 안에서 그분의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준다. 진정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 안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그들은 죄의 사유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힘을 얻을 수 있다.” –부조와 선지자, 524.
“이 기별은 … 보증물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초청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1, 92.
“온전한 순종이 그리스도의 입혀 주신 의로써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될 것이다.” –영문 시조, 1896년 5월 28일.
신부는 신부 들러리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은 미련하지 않고 슬기로워야 한다. 그들은 신랑이 나타날 때, 결혼식에 참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신부 들러리는 신부와 가까운 친구다. 그들은 세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청년들이 이것을 숙고해야한다.
우리는 미련하지 않고 슬기로운 친구들을 선택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영적 성향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자들은 등과 그릇에 기름을 담아 온 자들이다. 등은 그들의 길을 인도하는 성경이다. 기름은 그들의 생각에 기름을 바르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마 25:4). 여러분의 친구들은 성경을 사랑하는가? 그들은 성경을 읽으며 가지고 다니는가?
신부는 결혼식에 초대할 손님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누구를 예수님께로 초대했는가? 여러분은 누구든 원하는 자들을 초대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의 성별, 교육, 나이, 민족, 인종이 뭐든 상관이 없다.
결정적으로 유일한 요인은 예수님께 오려는 의지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는데 고군분투 하는가? 여러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소식을 나누어주는가?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 (계 22:17; 19:9).
신부는 결혼식을 위한 식단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식단으로 차려내기를 원하실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과 포도주와 그분의 희생이다.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잠 9:2). 예수님은 꿀보다 달고 천국의 만나보다도 자양이 되며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즙 한잔보다도 더 만족을 준다.
신부는 그녀의 큰 결혼식 날을 준비하면서 그 특별한 날이 올 때까지 날짜를 센다. 우리의 영적인 경우에서는 그 결혼식 날짜를 모른다. 우리는 신랑이 언제 나타나실지 모른다. 우리는 지체하는 시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이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신 분을 당장 만날 수 있도록 깨어 언제나 준비되어야 한다. 그 날은 올 것이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훌륭한 독일의 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의 달력에 오직 두개의 날짜만 있다고 말했다. 오늘과 그날 즉 예수님이 돌아오시는 날이다. 아마도 오늘날 개혁자들에게는 세 개의 날짜가 있겠다. 오늘, 안식일, 그리고 그날.
성경은 준비된 자들만 결혼식에 갔다고 말한다. “…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 25:10). 문이 닫힌 후에는 너무 늦다. 준비는 신랑이 오시기 전에 해야 한다.
“진리에 순종함으로 그대의 영을 성화시키지 않은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를 준비시켜주시기를 기대하는가? 그때는 죄의 흠을 씻을 속죄할 피가 없을 것이다. 오늘 부르심을 받을 때, 그대가 바라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격노의 날과 같이 그대의 마음을 강퍅케 하지 않을 수 있다. 오늘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오늘 다정한 자비의 음성은 그대의 귀에 들린다. 오늘 하늘의 초청이 그대에게 온다. 오늘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오라고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리뷰 앤 헤랄드, 1869년 8월 17일.
마지막 이야기 하나
한 남자 청년이 런던에서 목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다. 그는 다년간 주님께 봉사한 한 은퇴한 연로한 목사님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젊은 설교자는 그 나이든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다. “제가 목사로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 조언을 좀 부탁드립니다.”
나이든 설교자는 대답했다. “그럼요. 조언을 하나 드리죠. 아시다시피 영국의 모든 도시에는 얼마나 작던지, 얼마나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지, 모든 마을에는 모든 농가에서 조차도 따라가면 런던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당신이 읽고, 연구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거나 권면하는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길을 찾고 따라가세요.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이것이 새 목회를 시작하려는 당신이에게 주는 저의 조언입니다.”[3]
우리 모두 이 나이든 설교자의 조언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이 성경에서 읽는 모든 말씀이 반드시 예수님으로 마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과 사명의 오메가가 되게 해야 한다(계 22:13). 여러분의 삶에서 모든 사건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갈수 있는지에 반드시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당신의 존재의 삶의 길, 진리, 그리고 생명이 되게 해야 한다(요 14:6).
어떻게 해서든 만나는 모든 사람과 세 천사의 기별을 나눠야 하는 임무를 받은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 4:16).
“우리는 셋째 천사의 영광스러운 사업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의 그릇은 하늘의 이슬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는 마음에 허물과 죄가 있는가? 그렇다면, 성령의 전을 정결케 하고 늦은비의 부어주심을 위해 준비하자. 주님의 임재로 새롭게 되는 것은 불순함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절대 올 수 없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서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안에 거하시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리뷰 앤 헤랄드, 1891년 4월 21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4).
축복되는 새해가 되시고 그분의 오심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출 저
[1] George Plimpton (2003). Ernest Shackleton. NY: DK Publishing Inc.
[2] Matthew Henry (1721; undated reprint). Matthew Henry’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5. McLean, VA: MacDonald Publishing Company, p. 364.
[3] Walter B. Knight (1956). Knight’s Master Book of New Illustration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p.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