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1630(인조 14년)~1692(숙종 18년)>
<생애>
예학으로 유명한 거물 유학자 김장생의 손자이던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병자호란 이듬해)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자결)한 탓에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전쟁 통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어머니 해평 윤씨에게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는데, 어머니 윤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린 김만중이 집안 살림을 걱정해 보고 싶은 책을 사지 않자, 회초리를 치면서 자기가 하루종일 짠 옷감 절반을 뚝 잘라 줬을 정도였다. 자신이 직접 서책을 빌려와서 교본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만중은 대단한 효자였는데 그의 소설 《구운몽》이 홀로 된 어머니의 여흥을 위해 읽기 쉬운 한글로 지어진 소설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형 김만기는 숙종의 장인으로, 현종 말엽부터 숙종 초엽까지 막강한 권세를 행사했던 인물이었으며 숙종의 환국 정치에도 적극 관여하여 남인들을 박살내는데 큰 몫을 한 인물이었다. 당파적으로 김만기와 김만중은 모두 서인에 속했고 김만기, 김만중 형제 모두 송시열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게, 김만중 형제의 증조부가 다름아닌 이이의 학통을 이어 조선 중기 서인의 사상적 흐름을 주도한 김장생이었고 송시열이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입장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아버지 김익겸의 묘비명을 써주기도 했다. (김반·김익겸의 묘)
이러한 어머니의 정성과 김만중 본인의 노력으로 1665년에 과거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시찰했고 1672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비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 맛을 보게 된다.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687년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로 유배되었다. 어머니 윤씨는 아들을 걱정하다가 사망했으며, 김만중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채 1692년 유배지인 남해에서 끝내 사망했다. 알려지기로는 남해에서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사씨남정기》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 주인공의 모델부터가 대놓고 숙종이며, 실제로 숙종은 《사씨남정기》를 보다가 주인공의 처사에 분노해 책을 집어던졌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기타>
여하튼 이로 인해 김만중은 한글로 쓴 것이 국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인정받는다. 당시 조선 사회의 상류층들이 한글을 '언문(諺文)', 심하게 얘기하자면 '암클'(여자들이 쓰는 글), '중글'(승려들이 쓰는 글), '아햇글'(아이들이 쓰는 글), '상말글'(상민들이 쓰는 글)이라고 푸대접했던 데 비해 김만중은 한글을 국서(國書)라고 칭할 정도로 한글을 높이 평가했다.
* 구운몽 : 인간의 부귀영화와 공명이 한낱 헛된 꿈이었다는 내용의 인생무상의 불교적 인생관을 주제(깨어나 보니 꿈이였더라.)
* 사씨남정기 : 인현황후를 폐하고 희빈 장씨(장옥정)를 왕비로 맞이한 숙종의 마음을 바로잡아 보려는 의도로 작성
* 장희빈(장옥정) 1659년~1701년(향년 42세), 왕비(숙종 15년~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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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
태공 엄행렬
서럽게도 부친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나서
포효는 잠시 접고 모친 뜻을 따랐다
김매는 농부 같은 고됨을 이겨내고
만각晩覺을 뛰어넘는 학문에 열중하며
중도中道에 머물다 보니
생生 마감은 귀양처라
* 만각 : 뒤늦게 께달음
* 중도 :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
-20240723-
첫댓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꼭 대우를 받아야 되시는 분임에도
불리한 경우가 많았다 생각합니다
생의 마지막이 귀양처였으니
마음 서럽습니다
태공 시인님
며칠 여행 후
이제사 컴 접속했습니다
한 주간도 승리하십시오
여름 휴가차 다녀오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런 낙이라도 있어야지요.
수도권에 오늘 소나기 소식 있던데
아직은 조짐이 안 보입니다.
밤에 내리려나~~~~?
곧 볼 태풍!
올해는 어떤 기세로 설쳐댈지.....
모쪼록 늘 건안 비옵니다.
베베 시인님!~~~^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