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작가로서 꿈을 이룰 수 없는 걸까?
예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작업을 하는 창작인들의 고민이 다들 그렇듯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수평을 유지할 뿐 어느 한 지점에서 보기 좋게 수직을 이루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남편 없이 세 남매를 키운 어머니와 못난 형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한 동생, 그리고 22살 어린 여동생은 대학을 졸업하는 대신
어머니의 생선가게 일을 돕고 싶어 한다.
8년간 묵묵히 한 남자만 바라본 바보같은 여자는 서른이 되기 전에 꼭 결혼하고 싶다던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지
오래였다.
수혁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소원함은 대부분 돈이 원인이란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부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 모든게 자본주의의 대표산물 그 놈의 돈 때문이야..돈.돈 ’
수혁은 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신호가 몇 번 울리기전에 응답이 있었다.
- 응. 수혁씨. 어젠 미안했어 ? -
핸드폰에 표시된 발신자명으로 자신임을 확인했을 터지만 그럴듯한 설명이든 핑계든 어제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아침부터
먼저 전화를 걸어 들어야 한다는 것에 수혁은 그다지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 어제 어떻게 된거야? -
- 그게.......-
지은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 내게 말 못할 이유라도 있는거야? -
분명 윤명원이 옆에 있었다. 수혁은 잠시나마 불쾌한 상상을 했다.
잠시 뜸을 드리던 지은은 수혁의 불쾌한 상상을 여지없이 깨 주었다.
- 엄마가...엄마가 입원하셨어 -
- 그래? 어머님이 왜? -
- 원래 몸이 약하신 분이잖아. 요즘 여러 가지 신경쓰시느라 무리 하셨나봐 -
- 그랬구나. 어느 병원이지? -
- ㅇㅇ병원에 계셔. 어떻게든 수혁씨에게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당한 일이라 내가 경황이 없었어.
아마 당분간은 퇴근하면 곧장 병원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
- 그래. 너무 걱정 하지마. 대신 전화나 자주 하자 -
- 그렇게 해 -
수혁은 전화를 끊고서도 한동안 말없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채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생활하는 직장인들과 달리 실직자란 말 대신 허울 좋은 ‘ 프리랜서 ’로 포장된 자신과 같은 무명 작가들은 일어나는 시간이 곧 아침이요. 잠을 자는 시간이 곧 저녁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창작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시켜줄 지은과의 데이트는 당분간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려 8년을 기다리게 했다. 사랑의 결정체인 결혼을 미루는 원인도 결국 돈 때문이었다.
지은은 이해한다고 했지만 결혼하게 되면 어차피 지은의 월급으로 살아가게 될게 뻔했다.
어머니의 생선가게 수입으론 서울의 미친 물가 상황속에서 두 동생들과 살아가기도 벅찬 현실이라 자신의 결혼문제는 늘 다음 해에는 꼭 지키리라 약속만 하는 빈 공약이 되고 말았다.
‘ 수철이 말대로 포장마차든 뭐든 장사나 해 볼까 ’
서른의 길목에 접어든 지금 수혁은 언제가 될 지 모를 자신의 해뜰날을 마냥 기다릴 수 없는 현실의 냉혹함에 치를 떨었다.
그렇게 성공한 작가의 꿈은 버려야 하나
며칠동안 현실의 문제와 싸우면서도 의뢰받은 대진그룹 박회장의 자서전을 끝맺었다.
수혁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재법 더 걸렸다.
덕분에 지은과의 데이트는 핸드폰으로 전달되는 음성으로만 할 뿐 그녀의 채취를 느껴본지가 좀 오래다.
수혁은 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형. 나야. 최수혁 -
- 다신 얼굴 안 본다더니 왠일이냐? -
수혁의 예상대로 기분 좋은 응대는 아니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지난번에 말했던거 아직 유효한거지? -
- 공동집필? -
- 응 -
- 물론이지. -
- 형이 그 쪽 출판사와 약속 좀 잡아봐. 그럼 내가 나머지 원고 가지고 갈게 -
- 알았어 -
- 그런데 내가 지금 돈이 좀 급한데 원고료를 선불로 좀 받으면 안 될까? -
- 그 쪽에다 한 번 물어나 볼게 -
- 고마워. 형 -
창작을 위한 고뇌와 인내와 싸운 결과물인 수혁의 원고는 엿장수와 흥정하듯 헐값에 매겨져 다른 주인을 찾아 가고 있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담당의사를 찾아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내과과장 아무개의 이름이 적힌 방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안에 인기척을 하고 곧 들어오라는 소리가 지은에게도 들려왔다.
- 선생님. 이경선씨 보호자분 오셨습니다 -
간호사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앉으십시오 -
지은에게 의사는 별 감정없이 한마디만 던지고는 하던일을 계속 했다.
두꺼운 안경의 각을 조금씩 조절해 가며 사진에 나타난 결과물들을 하나라도 놓칠까봐 표정 또한 심각해 보였다.
지은은 괜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지은의 어머니를 검사한 사진들일게 뻔한 그것들을 두세번 반복해서 확인한 의사는 최종 결론을 내린 듯 지은과 자신의 시선을
맞추었다.
- 생각보다 검사 결과과 안 좋게 나왔습니다. -
- 그래요? 어디가 얼마나 안 좋은데요?-
- 이경선씨의 위에서 꽤 큰 종양 조직이 발견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암이란 얘기입니다 -
지은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 않았다.
- 치료방법이 없나요? -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오히려 더 강해진다고 했던가. 의사에게서 어머니의 병명을 듣고도 오히려 더 침착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 다행히 말기는 아니라 수술과 항암치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현재 환자의 몸 상태가 워낙 쇠약해서 저희도 약간
조심스럽습니다 -
- 어떻게든 어머니를 좀 살려주세요. 지금까지 고생만 하신 분인데... -
-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다른 가족분들은 안 계신가요? 늘 따님만 어머니 병실을 지키시는 것 같던데 -
- 가족은 어머니와 저 둘뿐이에요 -
가족. 가족을 소개할 땐 언제나 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야만 했다. 남편의 사랑 한 번 못 받아본 가련한 여인.
병실을 찾았을땐 어머닌 약 기운을 빌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얼굴 곳곳에 깊게 팬 주름이 지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엄마. 몸이 그렇게 아프도록 왜 말을 안 했어 ? ’
지은은 희생만을 알고 살아온 자신의 어머니가 원망스럽기 까지 했다.
크리스마스를 즐기기가 무섭게 이젠 가는 해와 오는 해를 맞는 시점에 접어들어 도심은 또다시 사람들로 부쩍인다.
아무것도 없어도 마냥 행복한 사람들. 수혁이 박회장 자서전의 원고를 들고 대진그룹을 방문했을땐 이미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번엔 수혁이 생각하기에도 별로 꾸밀 내용이 없었다. 물론 김실장이 건네준 자료가 대부분일 테지만 다른 대기업 회장에 비하면 나름대로 깨끗한 축에 들어가는 인물인 것 같았다.
그래야 특별히 큰 차이점이 없는 부류들일테지만....
선약을 하고 왔음에도 손님이 있다는 얘기에 할 수없이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미국에서 건너왔다는 나름대로 이름값을
하는 곳이었다.
‘ 이렇게 비싼걸 뭐하러 마실까 ’
웬만한 식당의 한끼 식사값과 비슷한 커피값에 수혁은 역시 그들만의 문화에 낄 수 없음을 확인한다.
김실장이 지은을 회장실로 안내했다. 지은과 걸어가면서도 주변인들 시선의 동태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 회장님. 박지은씨가 오셨습니다 -
- 누구? 지은이가 ? -
- 안녕하셨어요. 회장님 -
세 사람은 서로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직원들을 의식해 호칭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김실장이 회장실 문을 닫고 나갔다.
- 왠일이냐? 더 이상 애비 얼굴 안 본다고 그러더니 -
박회장은 창밖을 보며 말하며 지은과의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 저도 죽기보다 아버지 얼굴 보기가 싫었어요 -
- 그런데 왜 날 찾아 왔니? -
그제서야 박회장이 몸을 돌려 지은을 잔뜩 화가난 얼굴로 바라 봤다.
- 어머니가 아프세요. ㅇㅇ병원에 입원중이에요 -
지은 역시 어머니 얘길 하면서는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 경선이가 ? -
박회장은 늘 남의 시선을 피해 전화를 하고 몰래 만나야 하는 습관 때문에 ‘ 아내와 너의 엄마 ’ 란 호칭은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달래서 이렇게 찾아 왔어요 -
- 결국 돈 때문이냐? -
- 잘 아시네요 -
- 넌 돈 얘기 아니면 애비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 녀석이잖냐 -
박회장은 특유의 낮은 톤으로 지은에게 말했다.
- 아버진 한 번도 어머니와 절 떳떳하게 가족이라고 생각 안 하셨잖아요. 오히려 김실장님 통해서 생활비 몇 푼 보내주는 걸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 건 아버지 아니셨나요?
지은은 약간 격앙되어 있었다.
- 그런 돈도 아니였으면 네가 대학을 나오고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을것 같으냐? -
박회장의 어조도 빨라짐과 동시에 자신의 딸에 대한 노여움이 함께 녹아 있었다.
- 어쨌든 이번엔 돈이 좀 많이 필요해요 -
- 많이 아픈게냐? -
- 위암이에요. 의사말론 말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살리기 위해선 수술이든 뭐든 해야 된데요 -
- 암이라....... -
박회장은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 보았다.
- 그리고 한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병원에 오셔서 어머니 손을 한 번 잡아 주세요 -
-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니 -
- 언제까지 그렇게 책임을 회피 하실거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나 찾아 오실건가요? -
- 김실장편에 돈 보내마. 그만 나가 봐라 -
박회장은 냉정했다.
박회장은 계속 창밖만 바라보았고 그런 그를향해 지은은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며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은이 발검음을 돌려 회장실 문을 나가려 할때 박회장이 급히 지은을 불러 세웠다.
- 병원이 어디라고 했니 ? -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된다 싶어 수혁은 커피숍을 나와 대진그룹 1층을 향해 걸었다.
회전식 출입문의 한 자리에 서서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반대편에서 익숙한 채취의 한 여인이 나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수혁과 지은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가던 방향으로 발검음을 재촉했다.
지난번 원고의뢰를 받았을때완 달리 박회장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회장은 수혁이 내민 원고도 대충 형식적으로 몇 장 넘기다가 그냥 덮어 버렸다.
- 제가 고생하신 작가님께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지금 그럴 겨를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바쁘실텐데. 그냥 김실장님께 원고 전해 드리고 가려다가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
- 다음에 좋은 기회가 되면 그 때 같이 식사하기로 하십시다. -
- 네. 그러죠 -
회장의 말은 수혁에게 늘 업무적으로 들렸지만 젊은 무명작가에 대한 공손함만은 잊지 않았다.
- 김 실장 차 좀 대기시켜 -
수혁이 회장실을 나서려 할때 박회장이 김실장을 불렀다.
- 가시려는 곳이 어디신지요 ? -
- ㅇㅇ병원에 좀 가 봐야 겠어 -
- 꼭 가셔야 겠습니까 ? 두 아드님을 비롯한 다른 가족분들이 알면 일이 복잡해 질텐데요 -
- 경선이가 아프다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 가겠나? 아마도 그렇게 아프기 까진 나도 한 원인을 제공 했을테지 -
회장은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밀려오자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가지지 못한 행복.
자정이 얼마 남지않은 시각.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중년의 한 남자가 중절모를 깊게 눌러 쓴채 병실번호를 차례로 확인하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 김실장이 611호라 그랬는데...........음. 여기군 -
환자명 이경선을 확실히 확인한 남자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병실안으로 들어섰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일부러 켜지도 않았다.
그곳에 묵묵히 지켜왔던 사랑을 타의에 의해 깰 수 밖에 없었던 한 여인이 쓸쓸히 누워 있었다.
남자는 중절모를 벗고 환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여인은 인기척을 못 느낀듯 했다.
- 미안하다. 경선아. 내 욕심이 너무 과했어 -
여전히 여자는 눈을 감은채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여자가 누운 침대 앞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으로 여인의 한쪽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누가 봐도 남자의 손은 여자의 손에 비해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 하고는 여인의 손을 원래 위치에 내려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많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병실문을 열기위해 몇 걸음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몇 초간의 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흘려보내곤
다시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 병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