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을 묻다
-진란
길 위에 서 있을 때, 나 또 하나의 길이었다
꽃을 바라보고 그를 불러줄 때, 나 또한 꽃이었다
바람 밖으로 가열찬 마음 밀어낼 때에도 난 바람이었다
햇살 받쳐주던 푸른 잎새들이 내 머리에 머물 때
그 잎새 밖으로 난 길을 따라올라 구름으로 가벼워지고
먹장구름 기대어 무거워질 때에는
함께 둥둥거리며 뜨거운 불볕, 그 하늘에서 시렁거렸다
한낮 반짝, 한번씩 소나기로 쏟아지기도 했다
비워지고 가벼워지고 길 위에 다시 서 있으면
어김없이 꽃들은 꽃 속으로 나를 숨어있게도 하였다
치렁거리는 이 기억이 한때는 설레임이었고
구석으로 우우우 몰리던 때 이른 나뭇잎들은
꽃잎과 함께 바스락거리며 길 위의 바퀴처럼 눈부시다
어쩌다 나는 길이 되어 있는지, 다시 누군가의
길과 맞닿아야 하는 수레의 흔적을 굴러가는지
길 위에서 길을 꿈꾸는 길치, 그 부림의 날을 바라노니
가멸한 마음으로 길을 가고 또 오고 또 가겠구나
-시집 '혼자 노는 숲(2011.진란)'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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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자 논다. 혼자 놀수 있을 뿐 아니라, 혼자 놀 수밖에 없고, 누구든 그렇다.
우리의 뇌리에는 그렇게 논 기억이 남아있고 그 시간의 세세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
설레임과 피의 온도,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던 사무침과 애련이 곁들여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이 기록을 통해 타인에게 전해질 때 감정은 소멸되고 정보만이 남는다.
'치렁거리는 이 기억이 한때는 설레임'이었던 기억은 기록이고 흔적이다.
기록은 건조하고 정보는 또한 건조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적어도 그 기록을 뇌세김한 이에게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기록과 감정의 차이... 그것은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 살아낸 삶의 기록, 그 글을 읽으며 그가 살아낸 감정 또는 삶속에 녹아있는
화자의 느낌을 공감할 수 있을까. 없다.
'길 위에 서 있을 때, 길이었던 나의 시간. 꽃을 바라보고, 나 또한 꽃이었던 시간.
바람에 밀리고 밀어낼 때, 나 또한 바람이었던 시간...
그러한 시간의 기억이 내 영혼에 남긴 흔적은 오롯이 나 자신의 감정의 문제일 뿐이고
나의 내면에서만 살아숨쉬는 설레임일 뿐이다.
기억이 가지는 이 눈부신 감정, 길 위의 바퀴처럼 눈부신,
드라이풀라워의 꽃잎처럼 바스락거리며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삶,
가멸한 마음으로 길을 가고 또 오고 또 가는 모습들........
진란의 시를 읽으며 무위의 시간위에서 소멸되어 가는, 건조한 기억으로 기록되는 삶을 다시 추스린다.
내 기억은 오로지 나에게 있어서만 감정의 문제다.
하지만 진란의 시는 그 건조함 위에 촉촉한 수분을 얹는다.
그로 인해 어느날 설레임이었을 시인의 기억은
누군가의 기록을 다시 감정의 문제로 바꾸어놓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