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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세요. 나의 아이……. ]
아름답고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내 귀에 맴돌았다. 누구일까,
[ 나의 아이 아를레아. 바람의 기사. 고귀한 나이트 엘프(knight elfe)……. ]
바람의 기사. 아를레아…….
[ 그게 너의 이름이니라, 나의 아이여……. ]
나의 이름…….
[ 나의 아이여……. 어두운 운명에 싸워 이기길 바란다.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나의 간절한 기도뿐이구나……. 부디, 타락만은 하지 말거라 나이 아이여. ]
여긴 어딜까…….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촉감’이 느껴진다는 것과 여태까지 느껴왔던 공기보다 상쾌한 공기가 느껴진다는 것. 너무나도 맑은 공기였다. 나는 부스스 두 눈을 떴다. 흐릿한 영상과 함께 내 눈앞에는 나무로 된 천장이 보였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팔도 마찬가지였다. 왜지? 분명 나는 ……. 나,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누구였지?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그래, 맞아 나는 축구선수였어. 축구? 그게 뭐지? 나는 축구가 무엇인지 대해 떠올리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내 축구가 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을 이용해 하는 스포츠, 운동. 하지만 제대로 떠오르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깨진 유리처럼 조각나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누군가의 형체가 그려지기는 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힘겹게 주변에 있는 잡을 것을 이용해 몸을 일으키던 도중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남자, 그건 나의 성이었다. 하지만 나의 눈앞으로 보이는 초록빛 긴 머리카락과 멀리 보이는 약간 흐릿한 거울에 나의 모습은 여성이었다. 그것도 약간의 성숙미가 있긴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녀…….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나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고통스럽다.
“ 아으아……. ”
맑은 목소리, 하지만 나오는 말은 어린아이의 옹알이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순간 나의 조각난 기억 속에는 분명 언어를 배운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혀가 굳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긴 어디며, 나는 누구인가. 두렵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 있다니!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순간 덜컥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히이! ”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이내 그 소리의 주범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창문이 열린 것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따뜻했던 방 안의 공기는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벌벌 떨면서 바닥을 기어 창문으로 향했다. 지금 나의 목표는 단 하나, 창문을 닫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표는 쉽사리 이루기 어려운 목표였다. 몸도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데 내 눈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창문을 닫기가 쉽겠는가? 힘겹게 창가 쪽으로 간 나는 엄청난 높이에 위치해(물론 일어설 수 있다면 바로 코앞이겠지만)있는 창문에 좌절해야 했다.
“ 하으으……. ”
춥다. 나는 얇디얇은 순백의 원피스차림이었다. 그러니 추운 것이 당연했다. 나는 최대한 체온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차가운 바람은 얇은 원피스를 뚫고 와 내 살에 파고들었다. 춥다. 추워 죽을 것 같았다. 어느새 눈에서는 눈물이 뚝 - 하고 흘러내렸다. 왜 난 이런 시련을 당해야 하는 걸까!
그 순간이었다. 덜컥 -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붉은색 거칠게 정돈한 머리칼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당황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는 황급히 나에게 달려와 나의 상태를 살폈다.
“ 라 레프네벨나? ”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언어였다. 나는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그는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단숨에 나를 앉아 들었다.
“ 으아 - ! ”
내가 소리치자 그는 안심하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침대에 나를 눕혔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치 자신의 여동생에게 행동하는 것처럼……. 나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다가 그의 귀가 뾰족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엘프처럼, 엘프? 그래, 숲 속의 지배자이자 조화와 정직의 종족……. 하지만 내가 알기엔 그들은 신화(神話) 속의 존재이자 전설의 존재, 허구의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니……. 그는 나의 머리에 손을 가져가더니 이내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의 머릿속으로 고대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고대문자는 바로 ‘엘프’들의 언어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 내가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 그래, 무리하게 말하려고 하지 마, 어차피 이틀 동안은 몸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너는 100일 동안 수면 중이었거든. ”
100일? 나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100일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잠만 자고 있었단 말인가?
“ 내 이름은 페로나슈. 정령의 나무, 로그네인의 불의 기사지. ”
불의 기사라는 말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불의 기사.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지만 낯설지가 않았다.
“ 편히 쉬는 것이 좋을 거야, 슬립(sleep) ”
페로나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밀려오는 졸음에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페로나슈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로그네인의 주변 마을 중 하나인 물의 정령왕의 엘프, 로그네인 남쪽에 있는 블루 엘프의 마을인 ‘타라네스’의 장로인 레세페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차를 즐기고 있었다. 레세페는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과거 인간들에게 노예로 팔려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한 끝에 시력을 잃었지만, 동료 엘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탈출하며 로그네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력을 잃은 것은 그녀에게 치명적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상관없었다. 지옥 같은 인간 세상에서 탈출한 것만으로도 감사하였기 때문이었다.
“ 벌써 겨울이군요. ”
그러자 레세페는 약간 아쉽다는 어조로 말했다.
“ 네, 지금은 안보이지만, 예전에는 눈이 떨어지는 것을 감상했는데 말이죠. ”
시력을 잃은 그녀로서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페로나슈는 그녀의 씁쓸한 말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인간들의 세상에 나가서 시력이나 청각 혹은 팔 하나를 잃고 오는 엘프들이 많았다. 더한 경우, 인간의 노예로 전락해서 하프 엘프(half elfe)의 어머니가 되는 일도 있었다. 레세페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례였다. 말없이 차를 마시던 페로나슈는 도중 알 수 없는 마나를 감지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페세는 갑자기 페로나슈가 움직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왜 그래요? ”
“ 로그네인에서 알 수 없는 마나가 느껴졌습니다.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오세요. ”
그렇게 말하면서 페로나슈는 바로 달려나갔다. 레세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나? 시력을 잃은 대신 고도의 집중력과 청각 능력, 그리고 마나 감지능력을 단련한 그녀는 아직 아무런 마나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페로나슈가 움직인 것을 보와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은 분명했다.
페로나슈는 놀라운 속도로 달려가 로그네인 앞에 도착했다. 거대한 고목에 있는 긴 계단은 고목 위에 놓인 나무집까지 이어져 있었다. 페로나슈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며칠 전, 로그네인의 심장과도 같은 생명의 구슬의 주변에 거대한 초록빛 크리스털이 생겼다. 기사들이 탄생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인간의 태아처럼 자라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페로나슈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는 초록색 머리칼에 귀엽게 생긴 소녀가 추위에 벌벌 떨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페로나슈는 황급히 소녀에게 달려가 소녀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 괘, 괜찮니? ”
하지만 소녀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제야 페로나슈는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소녀도 자산과 마찬가지로, 로그네인을 수호하는 나이트 엘프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100일 동안의 수면 끝에 깨어났기 때문에 언어도, 신체능력도 미달인 것이 분명했다. 일단 소녀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페로나슈는 소녀를 앉아 들었다.
“ 으아 - ! ”
소녀가 소리치자 페로나슈는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페로나슈의 미소에 소녀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페로나슈는 소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정성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가며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언어를 모르는 소녀에게 메모리(memory) 마법을 걸 생각이었다. 소녀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페로나슈를 쳐다봤다.
“ 내가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 ”
페로나슈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페로나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그래, 무리하게 말하려고 하지 마, 어차피 이틀 동안은 몸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너는 100일 동안 수면 중이었거든. ”
소녀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페로나슈는 소녀의 표정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 내 이름은 페로나슈. 지혜와 용기의 나무, 로그네인의 불의 기사지. ”
페로나슈는 말없이 소녀를 쳐다봤다. 입을 쩍 벌린 채로 멍한 표정을 짓는 소녀는 페로나슈에게 재미있는 볼거리이었다. 하지만 페로나슈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녀에게 마법을 걸을 준비를 하였다. 소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수면이었다.
“ 편히 쉬는 것이 좋을 거야, 슬립(sleep) ”
밀려오는 졸음에 소녀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소녀가 잠에 빠짐과 동시에 레세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무슨 일이지요. ”
문을 열고 들어온 레세페는 말없이 주변 감각으로만 이용해 페로나슈에게 걸어갔다.
“ 바람의 기사가 탄생했습니다. ”
“ 바람의 기사라고요? ”
바람의 기사……. 1000년 전에 죽은 직후, 여지까지 한 번도 탄생한 적이 없었다. 그건 불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기사가 죽을 때에 로그네인이 어둠 속에 쌓였다는 것 뿐……. 페로나슈는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여지까지 기사들이 모두 의문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은 최대한 로그네인 주변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아직 별다른 위험이 없었지만……. 레세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 걱정이군요. ”
“ 네, 아무래도 이 소녀 또한 전 기사들처럼 의문의 공격을 받을까 염려스럽습니다. ”
페로나슈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둡고 습기가 가득한 방안. 지나가는 쥐들과 쥐들을 피하는 바퀴벌레들이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쥐를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며 한 인영이 낡아빠진 의자에 앉아서 고서를 읽고 있었다.
“ 크크..큭.. 로그네인, 재미있어. ”
그는 광기가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서를 덮었다.
“ 그래, 내가 걸었던 저주가 풀렸으니 그와 동시에 기사를 창조하다니, 고맙군. 로그네인……. 나의 계획대로 해주는군. ”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는 반쪽이 날아간 가면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 녀석에게 당한 부상이 너무 커……. 하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그 녀석에게 복수하는 것과 동시에 나의 충실한 종 하나를 만들 수 있을 테니,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어이, 언제까지 잘 거야? ”
들려오는 목소리, 어제 나를 침대로 옮겨준 고마운 페로나슈가 아니었다. 페로나슈의 목소리보다 더 탁하고 저음의 목소리,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 흠, 일어났군. ”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창가에 앉아있는 긴 녹색 머리칼의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흔히 ‘건방진 청소년’의 모범 사례인 모습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하나, 하나 조합해서 소년에게 말했다. 말하기 한 번 힘드네!
“ 누구야 넌? ”
“ 나? 그린 엘프 로딘네게르. ”
로딘네게르? 나는 말없이 그 소년을 쳐다봤다. 순간 멀리서 근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끼! 로딘 기사님에게 무슨 막말이냐! ”
멀리서 걸어오는 흰색 수염을 가슴 아래까지 기른 늙은 노인, 그도 엘프였다. 잘 정돈된 머리칼과 노년의 날카로운 인상이 그를 더욱더 카리스마 넘치게 하여주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장로 후보생답지 않게 이 아이가 너무 건방져서 말이지요. ”
“ 뭐, 실력이 있으니까 되는 거죠! ”
“ 시끄럽다. ”
그렇게 말하면서 로딘네게르의 머리에 딱밤을 쥐어박는 그 노인, 쌤통이다. 그거,
“ 저는 그린 엘프들의 장로 중 한 명인 페레네세입니다. 기사이시여. ”
“ 네, 반가워요. ”
페레네세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로딘네게르의 팔을 콱 쥐여 잡았다. 마치 도망을 못 가도록 하려는 듯이, 로딘네게르는 우거지상이 되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건방진 엘프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 아침부터 실례를 끼쳤군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
페레네세는 그렇게 말하며 로딘네게르를 질질 끌고 나갔다. 나는 말없이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내 나는 심한 고민에 잠겼다. 조각난 기억 중에서도 정상적인 기억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누구였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건 나에게 심한 고통이었다. 차라리 이 기억들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일단 여기가 어딘가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어제 페로나슈의 말로는 이곳이 로그네인이라고 하였다. 로그네인은 나무, 그렇다면 난 지금 나무 위에 혹은 주변에 있는 건가? 그리고 여기는 어디일까, 엘프들이 있는 것을 보와 여기는 엘프 마을이 분명했다.
문득 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쳐다봤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는 ‘잠시만, 나는 남자였잖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을 거의 잃어버렸다고 해도, 나의 성은 알고 있었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뜨고 손으로 나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사실적인 감촉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여자? 에이, 이건 아니지 나는 꿈이겠지 하며 손을 볼에 가져가 쭈욱 당겼다.
“ 아야야야 -! ”
아프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럼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거? 아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남자였다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하아, 머릿속에 복잡하다. 그냥 잠이나 자야지.
그렇다고 해서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꽉 감고 있는데도 한참 동안 수면을 취해서 그런 건지, 쉽사리 잠이 오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제보다는 괜찮지만, 아직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덜컥 -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어제 봤던 페로나슈가 들어왔다. 페로나슈는 나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나에게 걸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바구니에는 싱싱해 보이는 과일들과 빵이 담겨 있었다.
“ 일어날 수 있겠어?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발을 딛는 순간 휘청했고, 페로나슈가 황급히 잡아주지 않았으면 나는 넘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아서 의자에 앉았다.
“ 배고프지? ”
그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천천히 걸어가 부엌 비슷 무리한 곳에서 나무그릇 몇 개를 가져와서 빵과 과일들을 접시에 담았다.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갓 구운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살살 녹은 빵…….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맛있나 봐, 하긴 슈르베넨 마을에서 나오는 빵은 거의 맛이 좋은 편이지. ”
페로나슈는 나를 쳐다보며 싱긋 웃으면서 사과를 하나 집어 들었다.
“ 여긴 어디예요? ”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페로나슈는 ‘그것도 모릅니까?’라는 표정을 지었다.
“ 정말 몰라? 로그네인의 위에 있는 집이지. ”
지혜와 용기의 나무, 로그네인? 처음 들어보는 나무다. 페로나슈는 내가 멍한 표정을 짓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이상하군, 기사로 탄생했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텐데. ”
기사로 환생?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기사라니.
“ 정말 모르는 거야?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표정은 확 굳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페로나슈는 한참 동안 고민하던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 넌 엘프야. 그건 알지? ”
당연히 그건 알고 있다. 나의 끄덕임에 페로나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넌 로그네인의 바람의 기사야. 바람의 정령왕의 수호를 받는. ”
“ 바람의 기사? ”
“ 그래, 로그네인은 대륙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지. 왜냐하면, 4대 정령의 기운을 품고 있으니까. 만약 로그네인이 사라진다면 엘프든 드래곤이든 인간이든 큰 혼란에 빠질 거야. 그래서 로그네인을 지키기 위한 4명의 기사가 존재하지. 그게 너와 나야. ”
단 두 명뿐? 다른 두 명은 어디 있는 거지? 페로나슈는 나의 궁금증을 바로 짚어서 말했다.
“ 다른 기사들은 아직 없어. 네가 태어났으니 곧 태어나겠지? ”
그렇구나. 나는 빵을 먹는 데에 집중했다. 일단 먹는 것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일단 페로나슈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바람의 기사. 즉 바람의 정령왕의 수호를 받는 기사다. 그리고 나는 엘프, 인간이 아니다. 나의 임무는 로그네인을 수호하는 것.
식사가 끝나가 페로나슈는 다시 나를 침대로 친절하게 부축해주고 빠르게 그릇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손에 루비가 박힌 팔찌를 차고 활과 화살 통을 챙겨 들었다. 어디를 갈려는 것일까?
“ 슬슬 겨울이 올 때가 되었거든. 그러니까 사냥 좀 해둬야 하지. ”
사냥이라, 겨울이 되면 수렵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그가 차고 있는 팔찌는 무엇일까?
“ 그 팔찌……. ”
“ 아, 이거? 파이어 서포트(Fire support) 나의 무기지. ”
무기? 팔찌가 무기가 될 수 있나? 팔찌는 액세서리, 즉 장식구. 그런데 그게 무기가 되다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페로나슈는 싱긋 웃더니 소리쳤다.
“ 카샤! ”
그와 동시에 팔찌에서 붉은색의 새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정령이야, 엘프들이나 드래곤들만 볼 수 있지. 하지만 엘프가 소환할 수 있는 카샤의 수는 10마리, 즉 제한적이야. 왜냐하면, 자신의 마나와 정신력, 그리고 체력을 소모하거든. 드래곤이 아닌 이상 10마리 정도가 한계지, 하지만 이 팔찌가 있으면 50마리도 가능하지. 아니, 그 이상도 가능해. ”
정령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페로나슈의 말에 따르면 이미 페로나슈는 엘프 한 명이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의 수를 초과했다는 것이다.
“ 아참, 정령에 대해서 모르겠지? 정령은 4대 원소를 다스리는 존재야. 물, 불, 바람, 대지. 또 부가적으로 얼음, 빛, 어둠, 전격 등의 정령이 있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4대 원소지 만약 4대 원소가 없다면 생명체가 살 수 없으니까 말이야. ”
그 정도는 나도 안다. 페로나슈는 나에게 걸어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 오늘까지는 그냥 푹 자둬, 어차피 몸이나 언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내일쯤 일 테니까. ”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졸음이 밀려왔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나는 페로나슈를 꾸벅꾸벅 졸면서 쳐다보다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은 한참 후, 아무래도 다음날인 듯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몸은 한결 개운했다.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나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돈 후 창문 밖을 쳐다봤다. 펑펑 내려오는 함박눈과 눈 사이를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과 그 모습을 말없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어른들, 인간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 어, 일어났어? ”
문을 열고 들어오는 페로나슈, 나는 반갑게 그를 미소로 맞이했다. 그의 손에는 꽤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듯한 로브와 원피스가 들려있었다.
“ 자, 마을에서 구해온 옷이야. ”
나는 옷을 받아들었다. 내가 무심코 옷을 벗으려고 하자 페로나슈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자, 잠시만! ”
“ 응? 왜요? ”
“ 저기 들어가서 갈아입어! 속옷은 저 안에 있을 거야! ”
페로나슈는 황급히 나에게 소리쳤다. 아 맞다. 난 여자였지, 그러니 남자인 페로나슈의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옷을 챙겨 들고 페로나슈가 가리킨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여러 옷들이 가지런히 개여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나에게 맞는 속옷과 페로나슈가 건네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페로나슈는 나의 모습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페로나슈는 어제와 똑같이 바구니에 사과와 빵을 가져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약간의 고기와 꽤 푸짐한 샐러드를 덤으로 가져왔다는 것? 그는 음식들을 식탁 위에 올려 차려놓고 포크를 가져왔다. 나는 음식을 먹는 데에 열중하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고기를 먹을 때에 맛보다는 약간의 슬픔이 느껴졌다는 점, 조화와 생명을 사랑하는 엘프의 특성인가…….
식사가 끝나가 페로나슈는 빠르게 정리를 하고 거대한 방안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책들이 꽂혀있는 서고에서 책 두 권을 꺼내왔다.
책들의 제목은 [ 엘프들의 기본 지식 ] , [ 대륙의 역사 ] 보기에도 배움이 가득해 보이는 책들, 페로나슈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 오늘 배워야 할 것들. 뭐 이 정도는 거뜬하겠지? ”
거뜬하다니, 잠시만 기사면 기사답게 무예를 배워야지!
“ 기사면……. 검술이나 창술 등을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물론 그게 정상이겠지만, 너에게는 ‘기사’로 탄생했을 때에 주어지는 기억이 없어. 고대어라든지, 고대 엘프의 마법이라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야. 그러니까 그걸 먼저 배워야 해. ”
“ 먼저 배우는 건……. ”
“ 안 돼. ”
페로나슈의 단호한 말에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책상에 놓인 두 권의 책을 쳐다봤다.
그래, 너희를 오늘 안에 정복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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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교차되는 시점이 있기 때문에 퓨전판타지로 했습니다.
댓글을 바라는 건 사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