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소개팅을 한다고 했다. 친구는 소개팅을 하기로 한 여자가 수지를 닮았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고
들뜬 기분으로 완벽한 소개팅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소개팅이 끝난 후 친구에게 남은건 좌절감과 술집 카드영수증.
그리고 과한 의욕이 불러온 미용으로 인한 오랑캐라는 오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후.
그 소개팅을 계기로 친구는 발동이 걸렸는지 주말이면 소개팅이다 미팅이다 미친듯이 여자를 만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들과 모이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가끔 단톡방에서 생사여부를 확인할 뿐이었다. 어느새 얼굴을 못 보고 지낸지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어느 주말 나와 친구들은 그날도 그녀석 없이 우리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날 대화의 주제는 그녀석이었다.
우리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녀석이 요즘 너무 여자에 빠진거 같다며 이러다 혹시 사고라도 치는건 아닌지.
괜히 이상한 여자를 만나서 고생하고 있는건 아닌지. 설마 그럴일은 없겠지만 정말 괜찮은 여자를 만나서 덜컥 여자친구라도 만들어
버리는건 아닌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사실 녀석이 사고를 치던 꽃뱀을 만나서 집문서를 날리던
별 상관 없었지만 우리 몰래 참한 여자친구를 만들거란 생각을 하니 생각만해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친구의 현재상태를 파악하는게 중요했다.
우리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친구의 지금 상태는 '그놈은 지금 발정이났다.' 였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뒤늦게 발정기가 찾아온 친구가 나쁜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기 위해선 뭘 해야 할까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면서 만취상태에 도달할때 쯤 모아진 의견은
발정난 친구를 위해 우리가 십시일반 돈이라도 모아서 중성화수술이라도 시켜주는게 친구된 도리가 아닐까? 였다.
좋은 생각이었다. 모든 화의 근원을 애초에 제거한다면 친구에게도 행복이 찾아올게 분명했다.
그 녀석이 술에 취하면 하는 행동이 견공과 진배없기 때문에 근처에 괜찮은 동물병원에서 시술을 시켜주기로 마음먹었다.
만에 하나 거절할 경우에는 우리가 직접 로우블로우 시술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친구를 위하는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애틋하고 따뜻했다.
다음날 숙취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녀석이었다. 다음주엔 약속이 없다며 오랜만에 다같이 얼굴이나 보자는 전화였다.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에 석달전에 봤던 녀석의 상태가 생각나 물었다. 머리는 많이 길렀냐고. 친구는 이제 많이 길렀다며
전과는 달라졌다고 했다. 그 말에 내심 안심이 됐다.
그주 주말 나는 친구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친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쥐꼬리만큼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친구의 얼굴을 확인하고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반갑다는 인사대신 이 말이 튀어나왔다.
"이 X발X끼가!"
친구의 모습은 확실히 석 달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석 달 전엔 옆은 짧고 윗머리만 풍성한 오랑캐 스타일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진화한 모습이었다. 혹시 내가 트렌드에 뒤쳐지나? 요즘은 저런게 유행인가? 라고 고심해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었다.
옆머리는 전과 같이 바짝 올려쳐 짧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윗부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리면 거의 귀밑까지 올 정도로 머리를
길렀고 거기다 파마를 해서 뽀글뽀글한 머리를 한쪽으로 쏠려서 넘긴 머리였다. 내 시선엔 가히 파격적이었다.
대충 이런 모습이었다.
"뭐야 왜 보자마자 욕질이야?"
"... 뭐냐 그 머리는? "
"뭐긴.. 투블럭 컷이잖아."
"지랄마.. 두블럭은 떨어져 걷고 싶은 컷이겠지. 넌 뭔 잔디 인형이냐? 왜 뚜껑에만 머리가 자라는건데."
개성이 넘쳐 흐르다 못해 진짜 개 같았다. 오랜만에 상종도 하기 싫은 인간을 만난 기분이었다.
최대한 일행이 아닌 척하며 우리는 술집으로 향했다. 테이블도 따로 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수는 없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며 그간 서로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친구는 그동안 이런저런 여자들을 소개받아봤지만
별 다른 진척은 없었다고 했다. 얘기도 잘 맞고 분위기도 좋았는데 왜 그런건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간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술집 입구에 다른 친구가 들어서는게 보였다. 친구는 우리를 찾아 테이블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미리 녀석이 머리에다 미친짓을 했다고 언질을 해 줬기때문에 수 틀리면 그냥 일행이 아닌척 하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듯한 동작이었다. 마침내 우리를 발견하고 테이블로 다가온 친구는 녀석을 보고 말했다.
"오랜만이다. 뭐야. 머리 깔끔하.. 이런 미친새끼가!"
옆만 보고 있다가 친구의 말에 고개를 돌린 녀석을 보고 친구가 외쳤다.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짧은 머리에서 순식간에 치렁치렁한 파마머리로 변신하는 마술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니가 무슨 아수라백작이냐 이새끼야? 왜 한 얼굴에 남녀스타일이 같이 있는건데.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말로.."
친구는 자리에 앉을까 아님 그대로 돌아갈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자리에 앉았다.
왠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다 우리테이블만 보고있는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는 한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녀석은 우리와는 다른 친구의 반응에 흡족한
모습이었다. 친구라면 모름지기 이래야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웃으며 자리에 앉은 친구가 입을 열었다.
"헬로. 하우 아 유? 웰컴투 코리아. 두유 노우 김치?"
녀석이 당황해서 물었다.
"뭔소리야 갑자기."
"뭐야? 너였어? 난 또 케니G가 내한한 줄 알았지 이 또라이새끼야. 대가리 꼴이 그게 뭐냐."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다 같이 한자리에 모였고 녀석을 제외한 우리 셋은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저 머리꼴로 여자를 사귀는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술자리가 끝난 후 며칠 뒤 우리는 비보를 전해들었다.
녀석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었다. 그것도 괜찮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신념이 한순간에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다음날이 출근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술잔을 기울였고 우리도 파마를 해야할까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미용실 앞을 서성거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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