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平(강성)文氏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 1720년 무렵 - 문정호 입향
본관: 남평-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입향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 문죽리 수문마을( 문죽로 287-10)
세거집 성지 : 모당재 (慕堂齋)-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 문죽리 수문마을
성씨시조: 문다성(文多省)
입향시조 : 문정호(文貞好)
(정의)
문다성을 시조로 하고, 문정호를 입향조로 하는 울산광역시 세거 성씨.
[연원]
남평 문씨 (南平文氏)의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이다. 472년 (자비왕 15) 2월 남평현(南平縣)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동쪽 장자지(長者池)에서 자색(姿色)의 서기(瑞氣)가 있어 왕이 현주(縣主)를 시켜 가 보게 했더니 큰 바위 위에 석함(石函)이 있고 그 속에 아이가 있었는데, 함면(函面)에 '문(文)'자가 씌어 있어서 '문씨(文氏)'라는 성을 내렸다고 한다.
또 다른 설(說)에 의하면,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왕이 거두어 기르니 나이 5세에 문사(文思)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姓)을 '문(文)'으로,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삼중대광보국벽상공신(三重大匡輔國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본관으로 이어왔다. 남평(南平)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입향 경위]
남평문씨의 울산 입향조는 시조의 38세손 모당(慕堂) 문정호(文貞好)이다.
이거(移居)해 온 경위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문정호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인 1720년 무렵 경상북도 청도에서 문죽리 수문(水門)마을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 문죽로 287-10]로 이주하였다.
[현황]
2015년 통계청이 실시한 '인구주택총조사'에는 남평문씨가 울산에 총 7,882명[남 4,049명, 여 3,83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 문죽리 수문마을에 남평 문씨 의안공파(毅安公派)의 울산 문중 후손들이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남평문씨 후손들 2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10여 가구가 집성 ·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울산 지역에서 남평문씨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은 모당재(慕堂齋)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 문죽리 수문마을의 마을 회관 북쪽에 있는 모당재[1976년 건립]는 문중 재실인데, 매년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에는 남평문씨 입향조를 기리는 제를 지내고 있다.
[입향조 호적부 조사]
1720년 울산호적부 문정호 조부까지 기록이 있고 아들 2명이 있고 주변 일가 40여호가 번성하였고, 문씨 할매와 겸익 할배의 혼사가 1592~1605년 추정으로 볼 때 증조부 때로 추증 남평문씨 대동보 확인 절차가 필요하고 문씨 종파는 울산 세거 흔적이 없음
수문마을(殊門)은 문수산(文殊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문수'를 뒤집어 '수문'이라 이름하였다고도 전한다.
[형성 및 변천]
문죽리(文竹里) 수문마을의 남평문씨(南平文氏) 입향조는 시조 문다성(文多省)의 38세손 모당(慕堂) 문정호(文貞好) [의안공파(毅安公派)]이다.
약 300년 전인 1720년께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이거하여 정착한 후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한때는 울산 지역 최대 집성촌으로, 역대 마을 이장의 70% 이상을 남평 문씨가 역임할 만큼 많이 살았으며, 전국적으로 300여 가구가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자연환경]
문죽리 수문마을은 문수산의 동쪽으로 흘러내린 능선들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에 위치한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지류가 청량천에 유입되어 외황강에 합수된 후 동해로 흘러 내려간다.
[현황]
문죽리 수문마을 남평문씨 세거지에는 한때 남평 문씨 20여 가구가 살았으나 2018년 1월 현재는 10여 가구만 살고 있다. 문죽리 수문마을에 있는 재실 모당재 (慕堂齋) [1976년 건립]에서 매년 음력 10월 둘째 주 입향조 문정호를 기리고 있다.
현재 거주 후손 연락처: 문상준(56년생 전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