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하느님 뜻과의 조화 (6)
하느님 원하시는대로 형성해 나가자 세상 만물 속에서 내적·영적 의미 찾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형성의 신비’ 구현해야
- 도피자(逃避者) : 도망하여 몸을 피하는 사람. - 이방인(異邦人) :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단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 출세, 금전적 성공을 꿈꾸며 살아간다면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도피자이자 이방인이다. 왜 그럴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영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영적인 차원을 구현해 낼 수 있도록 창조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다. 이것이 형성의 신비다. 그럼에도 만약 눈앞에 보이는 이권만 좇아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도피자다. 해야 할 것에서 도망해 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이 아닌 불공명의 연주자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이는 조화에 대해 탁월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우주에는 공명의 힘찬 합주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조화의 합주를 연주해낼 능력을 안고 태어났다. 하지만 부조화를 연주해내는 이들이 많다. 미지의 궁극적인 것에 둔감해져 있거나, 아예 눈을 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조화가 아닌 부조화를 가져온다. 겸손 혹은 감사와는 거리가 먼 이기적 삶을 살기에 이웃을 혼란시키고 자존심 상하게 한다. 본인도 그렇지만 이웃과 세상을 비뚤어지게 한다.
도피자가 아닌 함께하는 자로, 이방인이 아닌 선택받은 민족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애인이 되어야 한다.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공명은 형태와 형성의 광채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우주 전체와 모든 창조물에는 신묘하게도 ‘폼’(form)이 있다. 형태가 있고, 꼴이 있고, 모양이 있다. 개구리는 개구리의 꼴, 복숭아는 복숭아의 꼴이 있다.
이 폼(꼴, 모양, 형태)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잘 만들어 가는 것이 형성(포메이션, formation)이다. 폼이 하느님께서 당초 창조하신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형성이고, 창조하신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반형성이다. 모든 창조물과 인간 각자가 주어진 자리에서 ‘형성의 신비’를 구현하는 것, 각자 주어진 꼴을 하느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다. 이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이고, 하느님 섭리의 결정체다.
우리 각자가 갓 태어났을 때의 폼은 어떠했는가. 초등학교 때의 폼은 어떠했고, 지금 나의 폼은 어떠한가. 또 앞으로 20년 후의 폼은 어떠할 것인가.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폼, 나의 꼴을 잘 만들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른다고 해서 폼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서 폼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폼은 그런 폼이 아니다. 예쁜 얼굴을 보고 폼이 좋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외면도 예뻐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을 가꾸어야 한다. 껍데기 폼도 가꾸어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내면의 폼을 가꾸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폼을 가꾸는 것, 즉 형성(포메이션, formation)하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다. 포메이션을 위해 인포메이션(information, 정보, 지식, 재료)을 묵상해 보자.
인포메이션 중에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인포메이션 안에는 내적인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꽃이 피어나는 인포메이션에서 하느님 형성(포메이션)의 신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 인포메이션을 접할 때 우리는 우산을 챙길 수도 있지만, 만물을 생성시키는 하느님 은총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다. 우산을 챙기는 것은 인포메이션을 외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세상에 있는 모든 이름과 인포메이션에 영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다. ‘개똥이’라는 아이에 대한 인포메이션을 접하고, 그 개똥이의 영적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것이 기도다.
세상 만물에 붙여진 이름 각자의 고유한 광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예수님으로부터 내면적으로 해석해내는 힘을 받은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인포메이션(지식, 정보)에서 포메이션(형성)의 내적·영적인 의미를 읽어 내야 한다. 그럴 때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구원과 하느님과의 합치를 갈망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희망하고 또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같은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43) 하느님 뜻과의 조화 (7)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광채 자신의 폼 안에서 형성의 신비 완성시켜 나가며 하느님이 주신 능력대로 각자의 광채 드러내야
광채가 나야 한다. 으리으리한 광채가 나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빛의 씨앗을 주셨다. 그 빛을 드러내야 한다. 내적으로 드러낼 것이 없으면 광채도 드러나지 않는다.
성당을 아무리 잘 지어도, 신앙인들이 그 성당 안에서 대충대충 산다면 그 성당에는 광채가 나지 않는다. 광채가 나지 않는 성당은 의미가 없다. 성당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당에서 신심생활을 잘 닦아서 광채가 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전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예술품으로 장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인들을 하느님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성당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하느님의 광채는 그 광채를 받는 인간 개개인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문제는 ‘나’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광채 나는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해보다 더 빛나고 달보다 더 은은하다. 해와 달, 하늘과 바다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게 나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중심이 잘 잡혀 있어야 한다. 이곳 힐끗, 저곳 힐끗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한곳만 바라보면 된다.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그분의 광채는 눈이 부시다. 그 광채를 받아 나의 광채를 다듬어야 한다.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선 훌륭한 코치를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진짜 코치에게 착 달라붙어 매달린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성 선수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가짜 코치가 아니다. 진짜 코치다. 오리지널 코치다.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광채를 우리 각자 안에서 구현해 내야 한다.
하느님은 나의 폼(꼴과 모양, 형태)이 광채 나길 원하신다. 또 포메이션(형성)의 광채 나는 삶을 간절히 원하신다. 우리에게 세상 만물을 통해서 끊임없이 은총을 주시는 이유다.
확실한 계시도 있다. 세상을 보라.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세상 만물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채를 내고 있는가. 이는 모든 인간이 세상 만물을 통해 하느님의 광채를 드러내라는 간절한 계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광채를 비추어 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인간 각자에게 주시는 능력은 모두 다르다. 시력, 입맛도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멀리 볼 수 있고, 어떤 이는 가까운 곳을 잘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단맛과 쓴맛에 민감하고, 어떤 이는 신맛에 민감할 수 있다. 폼(형태, 외양, 꼴)이 다른 만큼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도 다르다.
모든 사람이 법대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축구선수가 되고, 어떤 이는 디자이너가 된다. 폼이 다른 만큼 포메이션(형성)도 달라진다.
우리는 각자 주어진 형태와 형성을 가지고 광채를 내야 한다. 선생님이 되는 방향으로 형성을 했으면 그 형성 안에서 광채를 내야 한다. 군인이 되는 방향으로 형성했다면 진정한 군인의 광채를 내야 한다. 예술인은 예술인의 광채를 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각자의 주어진 직업 혹은 섭리에 충실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드러내야 하는 광채는 하느님의 광채다. 선생님의 폼 안에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형성해야 하고, 군인의 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현시켜야 한다.
출세도 하느님께서 원하는 형태로, 성공도 하느님께서 원하는 형태를 가지고 형성해 나가야 한다.
본당 공동체 이야기를 해 보자. 본당 신부는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폼(형태, 꼴) 중 하나일 뿐이다. 평신도와 마찬가지고 자신의 폼 안에서 포메이션(형성)의 신비를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밥하는 능력, 치열한 직장생활을 버텨내는 능력이 없다. 우주선을 발사할 능력도, 마당에 채소와 꽃을 잘 가꾸는 능력도 없다. 받은 능력보다는 못 받은 능력이 더 많다.
하느님이 나에게 사제직을 주었기 때문에 이것만 하는 것이다.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 주어진 폼으로 하느님을 향해 형성의 신비를 완성해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높낮이를 잘못 따지다 보면, 첫째가 꼴찌 된다.
역설과 모순의 법칙이 하느님 안에서 통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가 아닌, 진리의 이치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높낮이를 따져서 뭐하겠는가. 하느님이 나에게 형태와 형성을 주신 것만 해도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니다. 아니,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신비고 감사다.
하느님께서 주지 않은 것을 나는 할 수 없다. 그저 타인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 찬미 안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나의 일을 감사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를 위해선 ‘용기’와 ‘결단’이 요청된다. 진리를 깨닫고 주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가진 능력대로, 주신 능력대로 광채를 내겠다는 용기와 결단을 보이는 사람이다.
(44) 하느님 뜻과의 조화 (8)
관상적 차원으로 세상보기 논리적·분석적 판단한다고 착각하기 쉬운 현대인들 욕심 없애는 노력으로 주님 뜻에 부합된 삶 살아야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폼(형태, 꼴)은 아름답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라. 얼마나 폼 나는가. 우리의 폼은 광채 그 자체이신 분을 반영하기 때문에 광채가 난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폼에 대한 관상을 흐려놓는 것들이 많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돈, 명예, 권력, 이기심, 욕심 등이 그것이다. 사회적 차원으로는 인권 상실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인권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공기와 같아서 참으로 소중하지만 일상적으로는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권이 없어질 때 우리는 엄청난 존재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인권의 위기, 정의의 위기, 환경의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관상을 하기 힘들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당장 살 집에서 쫓겨나는데 어떻게 관상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관상을 위해선 나 자신의 명예욕, 권력욕 등 욕심을 없애는 정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도 정화시켜야 한다.
만약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공명 상실의 결과’ 즉,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렇게 될 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우선 기도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 진다.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 상태를 만들지 못하면 기도도 할 수 없고, 사랑도 할 수 없다.
자살하는 청소년들, 극심한 조울증을 겪는 현대인들이 그 예다. 공명을 상실하면 기도와 사랑이 끼어들 틈이 없어진다.
우리는 삶 안에서 수많은 지식과 정보(인포메이션)를 받아들인다. 주변 상황을 통해서, 그리고 신문과 잡지, 컴퓨터, 텔레비전, 이웃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이 모든 정보들이 공명을 이뤄야 한다.
이 모든 세상의 정보들이 하느님 뜻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대부분 지식적 차원에서 ‘아는 것’에서 멈춘다. 이성에서 마음으로 옮아가지 않고 지적인 차원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정보가 부족해서 하느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사는가.
세상을 보고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즉 인포메이션은 포메이션(형성)의 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정보와 지식을 하느님 뜻 안에서 나 자신의 형성과 이웃의 형성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럴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인포메이션(지식, 정보)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면 포메이션(형성)이 잘 된다. 눈의 형성이 잘 되고, 코의 형성이 잘 되고, 입의 형성이 잘 된다.
세상의 좋은 지식과 정보를 이웃에게 전하면 눈이 예뻐지고, 입이 예뻐진다. 그 예쁜 입과 눈이 나와 함께 이웃도 예쁘게 만든다. 예쁘게 형성시킨다.
이웃이 아닌 나만을 위해 이기적이거나 경쟁적으로 인포메이션을 사용하면 잘난 척하게 되고, 똑똑한 척, 아는 척 하게 된다. 가진 것이 없는데도 나 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하게 된다. 그러면 반형성이 된다.
잘생겼던 얼굴 모양도 일그러지고, 눈도 매서워지고, 입도 비뚤어진다.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어서…”라는 변명이 필요 없다. 이런 얼굴과 눈과 입에는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써도 소용없다.
사회는 지금 아름다운 형성이 아닌, 추악한 반형성이 만연해 있다. 학연 지연이 그렇고, 끼리끼리 문화, 왕따가 그렇다. 억울한 사람을 양산하는 냉혈한 직장 문화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 사회는 똘똘 뭉친 것이 아니라, 거친 돌들이 제각기 어설프게 뭉쳐있다. 언제 흩어지고 언제 돌팔매로 변할지 모른다. 각 공동체들은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시켜 다른 공동체를 키워주어야 하는데, 끼리끼리 자신들의 파워만 키우기에 급급해 하고 있다.
본당에서도 우리는 나만의 신심단체, 나만의 활동단체를 많이 볼 수 있다. 내 것을 넘어야 한다. 하느님 뜻과의 조화, 즉 공명을 향해서 초월해 가야 한다.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전체를 지향해야 한다.
사실 인간은, 특히 현대인들은 높은 교육의 성취 때문에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기 쉽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판단을 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이래서는 진정한 형성과 공명의 신비를 성취해 낼 수 없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것에서 관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설프게 논리적이고 어설프게 분석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논리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 논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신비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논리적 차원이 아닌 관상적 차원으로 보도록 해야 한다. 세상에 논리적인 것이 다라면 그 세상에는 분열과 갈등, 마찰만 있을 것이다.
세상을 관상적 차원으로 보기! 이를 위해선 진정한 ‘경외’가 필요하다.
(45) 하느님 뜻과의 조화 (9)
하느님 뜻과 통합된 삶 살자 과거 되돌아보며 자신을 세밀하게 점검하고 하느님 힘 믿으며 스스로를 재형성해 나가야
얼마 전 맹자(孟子)를 읽다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그리스도교 영성적 용어를 발견했다. ‘존심양성’ (存心養性)이 그것이다. “하느님이 태어날 때부터 심어주신 본래의 마음을 잘 보존하고, 하느님이 그 마음속에 심어 주신 본성을 잘 키워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삶을 나는 ‘통합된 삶’이라고 부른다. 오늘은 통합된 삶에 대해 묵상해 보자.
통합된 삶의 반대말은 단편화된 삶, 파편화된 삶이다. 주어진 삶의 상황과 매일 만나는 이웃 안에서 우리의 말과 행위들이 의미 없이 흩어질 때 통합된 삶은 불가능하다.
세계와 인간, 그리고 그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통합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편적 삶을 이어간다. 나와 만나는 몇몇 사람들, 주어진 몇 가지 상황에 매여 전전긍긍하며 산다. 어린 시절을 기억해 보자. 아기 때 우리는 배가 고프면 울었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소유하지 못했을 때 부모님께 떼를 썼다. 참으로 자신밖에 모르는 욕심 가득한 삶이었다. 이것이 바로 파편화된 삶이고, 단편적인 삶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배가 고파도 빵 한 덩이를 떼어 이웃에게 나눠줄 관용과 배려,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의 통합적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은 교회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반모임, 지역모임은 물론이고 각 교회 내 단체에서 ‘내 맘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느님이 엄연히 계시고, 그 하느님이 모든 것을 연결해 주시는데 많은 이들이 ‘내 뜻대로’만 하려고 한다. ‘내 탓이오’만 외치지 말고, ‘하느님 뜻대로’를 외쳐야 한다. 파편화된 삶을 이웃과의 만남과, 주어진 상황에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나 자신을 세밀하게 점검해서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재통합이고, 재형성 나아가 초월적 형성이다.
과거의 삶의 상황과 사건들을 재해석하면서 현재의 나의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을 재통합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도 학교 안에서도 직장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단편화된 삶을 살아왔기에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공명적 삶을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하느님의 뜻과 조화된 삶, 이것이 바로 관상적 삶이고, 통합된 삶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지식적, 논리적, 이성적 차원에서 관상과 통합에 접근하려는 모습을 종종 본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 마음으로 되어 있는데, 많은 이들이 정신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한다.
물론 정신적 차원의 노력도 훌륭하지만, 신앙인인 우리는 영적 차원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 안에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 이는 지식적 차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달라야 한다. 일반인들도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도 삶을 위해 노력하고 매순간 스스로의 삶을 재점검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궁극적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인간적 노력은 한계가 있다. 하느님의 힘을 믿고 받아들여야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재형성시켜 나갈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쉽게 좌절한다. 그리고 과거의 나쁜 습관으로 쉽게 돌아가 버린다. 취미생활, 스포츠 동아리 활동 등은 몸과 정신적인 차원이다. 물론 이 같은 사회적 모임을 통해서도 나 자신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영적인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통합이다. 파편화된 삶이 아닌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통합된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육신적 정신적 차원에서 은총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통합의 은총이다. 통합적 삶을 깨달으면, 통합적 삶을 위해 노력하면 은총이 더 크게 충만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관상을 삶 안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종종 관상적 현존을 소홀히 하도록 유혹받는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 것이 통합이다. 그런데 이를 논리적이나 기술적으로 한다는 것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
나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점검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더 높은 가치를 구현해 내야 한다. 신앙인들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영적인 차원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46) 하느님 뜻과의 조화 (10)
내 안에 감춰진 씨앗 발견하자 잘하든 못하든 항상 은총 주시는 하느님 뜻 깨닫고 마음속 아름다운 성전 지으며 영성적인 삶 살아야
벽돌 하나가 여기 있다. 색깔은 붉은색이다. 아주 잘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벽돌은 그 자체로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벽돌은 모여 쌓일 때, 그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성당을 예로 들어보자. 하나의 성당은 수많은 벽돌로 구성된다. 작은 벽돌들이 모여 성당을 이룬다. 그런데 그 모이는 방식이 정교해야 한다. 벽돌을 아무렇게 쌓는다고 해서 저절로 성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실력을 갖춘 기술자가 정성을 기울여 쌓아야 한다.
특히 모서리 등은 정교하게 잘라서 끼워 넣어야 한다. 그럴 때 벽돌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벽돌을 아무렇게나 쌓는다면 그 건물은 쉽게 무너진다.
영성적 삶을 성취해 나가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는 과거에 수많은 경험과 기억, 체험의 조각과 파편들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바로 벽돌들이다. 이러한 각자 과거의 사건들과 경험, 체험들을 어떻게 주님의 뜻에 맞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야 ‘나의 아름다운 성전’이 완성된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중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시절,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체험들을 떠올려 보자.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을 가지고 있다. 상처도 입었을 것이고, 큰 좌절을 맛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 안에는 감추어져 있는 씨앗이 있다. 여기서 씨앗은 새롭게 싹 틔울 가능성을 가진 영성적 깨달음을 말한다. 하느님의 은총은 무한대다.
우리가 하느님 뜻에 맞는 행동을 했을 때도 나름대로 많은 은총을 주시지만, 잘못을 했을 때도 수많은 은총의 비를 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통해서도 더 큰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그 안에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감추어져 있는 씨앗을 보지 못한다. 잘못을 잘못으로만 생각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 살 때조차도 그 안에 당신의 빛을 볼 수 있는 씨앗을 숨겨 놓으셨다.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생활은 단순히 하느님을 따르지 않은 잘못에 대한 징벌이 아니다. 노예생활의 고통 자체에도 하느님께서 감춘 씨앗이 있다.
유대인들이 그 씨앗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집트 탈출이라는 해방의 의미를 발견해 내지 못했고, 결국 나라가 갈라지고, 바빌론 유배를 당하는 비련을 경험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조금씩 씨앗을 발견해 내곤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씨앗은 묻히게 됐고, 결국에는 예수님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다. 감추어진 공명(하느님 뜻과의 조화)의 씨앗을 발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인간에게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다. 잘못과 실수를 하고 혹은 죄를 지어도 그 안에 하느님 은총이 넘친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죄의식을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감추어져 있는 은총의 신비를 발견하고 만끽하라는 의미다.
신앙생활, 영성생활은 나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공명의 씨앗을 발견하는 생활이다. 이것을 찾아야 나를 세우고, 이웃을 세우고, 하느님 뜻을 구현할 수 있다.
여기서 좀 더 묵상해 볼 것은, 단순히 나 편하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는 신앙생활의 3순위, 4순위 목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씨앗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느님 뜻과 조화되지 않은, 통합적이지 못한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이 분리된 벽돌들을 다시 정립하고, 쌓아야 한다.
그래서 진정 아름다운 성전을 만들어야 한다. 일반 건물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성당? 200년만 지나도 아마 헐고 다시 지어야 할 것이다. 또 지진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몸 안에 벽돌을 아름답게 쌓아 만든 내적 성전은 영원이 없어지지 않는다. 진정 완전한 성전은 예수님이고, 진정 아름다운 성전은 인간이다.
이렇게 나의 성전과 이웃의 성전, 사회와 세상과 역사의 성전을 세우는 일, 그것이 바로 영성생활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다. 그래서 지난 삶 속에서 감추어진 빛과 감추어져 있는 씨앗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참 애매하고 모호한 분이다. 그 씨앗을 한꺼번에 활짝 꽃피게 하지 않으신다. 그럼 어떻게 하시는가? 내가 살살 잘 가꿔 가도록 하신다.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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