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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26代 [高宗 00년]
대왕대비 조씨 56세
왕대비 홍씨 33세
대비 김씨 27세
고종 12세 (前 익성군) → 흥선대원군(前 흥선군)의 제 2왕자
(부대부인 민씨 소생)
은신군(思悼(莊獻)世子의 제 4왕자)의 8대손
실제 인평대군(仁祖의 제 3왕자)의 9대손
1864년 26代 [高宗 01년]
대왕대비 조씨 57세
왕대비 홍씨 34세
대비 김씨 28세
고종 13세
1865년 26代 [高宗 02년]
대왕대비 조씨 58세
왕대비 홍씨 35세
대비 김씨 29세
고종 14세
1866년 26代 [高宗 03년]
대왕대비 조씨 59세
왕대비 홍씨 36세
대비 김씨 30세
고종 15세
명성황후 16세
1867년 26代 [高宗 04년]
대왕대비 조씨 60세
왕대비 홍씨 37세
대비 김씨 31세
고종 16세
명성황후 17세
1868년 26代 [高宗 05년]
대왕대비 조씨 61세
왕대비 홍씨 38세
대비 김씨 32세
고종 17세
명성황후 18세
1869년 26代 [高宗 06년]
대왕대비 조씨 62세
왕대비 홍씨 39세
대비 김씨 33세
고종 18세
명성황후 19세
1870년 26代 [高宗 07년]
대왕대비 조씨 63세
왕대비 홍씨 40세
대비 김씨 34세
고종 19세
명성황후 20세
1871년 26代 [高宗 08년]
대왕대비 조씨 64세
왕대비 홍씨 41세
대비 김씨 35세
고종 20세
명성황후 21세
원자 ( ) → 쇄항으로 일찍죽음
1872년 26代 [高宗 09년]
대왕대비 조씨 65세
왕대비 홍씨 42세
대비 김씨 36세
고종 21세
명성황후 22세
1873년 26代 [高宗 10년]
대왕대비 조씨 66세
왕대비 홍씨 43세
대비 김씨 37세
고종 22세
명성황후 23세
공주 → 몇일살다 죽음
1874년 26代 [高宗 11년]
대왕대비 조씨 67세
왕대비 홍씨 44세
대비 김씨 38세
고종 23세
명성황후 24세
원자 척 01세
1875년 26代 [高宗 12년]
대왕대비 조씨 68세
왕대비 홍씨 45세
대비 김씨 39세
고종 24세
명성황후 25세
왕세자 척 02세
1876년 26代 [高宗 13년]
대왕대비 조씨 69세
왕대비 홍씨 46세
대비 김씨 40세
고종 25세
명성황후 26세
왕세자 척 03세
왕자 ( ) → 일찍죽음
1877년 26代 [高宗 14년]
대왕대비 조씨 70세
왕대비 홍씨 47세
대비 김씨 41세
고종 26세
명성황후 27세
왕세자 척 04세
1878년 26代 [高宗 15년]
대왕대비 조씨 71세
왕대비 홍씨 48세
대비 김씨 42세 → (哲仁王后) 42세의 나이로 승하함
고종 27세
명성황후 28세
왕세자 척 05세
왕자 ( ) → 일찍죽음
1879년 26代 [高宗 16년]
대왕대비 조씨 72세
왕대비 홍씨 49세
고종 28세
명성황후 29세
왕세자 척 06세
1880년 26代 [高宗 17년]
대왕대비 조씨 73세
왕대비 홍씨 50세
고종 29세
명성황후 30세
왕세자 척 07세
1881년 26代 [高宗 18년]
대왕대비 조씨 74세
왕대비 홍씨 51세
고종 30세
명성황후 31세
왕세자 척 08세
1882년 26代 [高宗 19년]
대왕대비 조씨 75세
왕대비 홍씨 52세
고종 31세
명성황후 32세
왕세자 척 09세
왕세자빈 민씨 11세
1883년 26代 [高宗 20년]
대왕대비 조씨 76세
왕대비 홍씨 53세
고종 32세
명성황후 33세
왕세자 척 10세
왕세자빈 민씨 12세
1884년 26代 [高宗 21년]
대왕대비 조씨 77세
왕대비 홍씨 54세
고종 33세
명성황후 34세
왕세자 척 11세
왕세자빈 민씨 13세
1885년 26代 [高宗 22년]
대왕대비 조씨 78세
왕대비 홍씨 55세
고종 34세
명성황후 35세
왕세자 척 12세
왕세자빈 민씨 14세
1886년 26代 [高宗 23년]
대왕대비 조씨 79세
왕대비 홍씨 56세
고종 35세
명성황후 36세
왕세자 척 13세
왕세자빈 민씨 15세
1887년 26代 [高宗 24년]
대왕대비 조씨 80세
왕대비 홍씨 57세
고종 36세
명성황후 37세
왕세자 척 14세
왕세자빈 민씨 16세
1888년 26代 [高宗 25년]
대왕대비 조씨 81세
왕대비 홍씨 58세
고종 37세
명성황후 38세
왕세자 척 15세
왕세자빈 민씨 17세
1889년 26代 [高宗 26년]
대왕대비 조씨 82세
왕대비 홍씨 59세
고종 38세
명성황후 39세
왕세자 척 16세
왕세자빈 민씨 18세
1890년 26代 [高宗 27년]
대왕대비 조씨 83세 → (神貞王后) 83세의 나이로 승하함
왕대비 홍씨 60세
고종 39세
명성황후 40세
왕세자 척 17세
왕세자빈 민씨 19세
1891년 26代 [高宗 28년]
왕대비 홍씨 61세
고종 40세
명성황후 41세
왕세자 척 18세
왕세자빈 민씨 20세
1892년 26代 [高宗 29년]
왕대비 홍씨 62세
고종 41세
명성황후 42세
왕세자 척 19세
왕세자빈 민씨 21세
1893년 26代 [高宗 30년]
왕대비 홍씨 63세
고종 42세
명성황후 43세
왕세자 척 20세
왕세자빈 민씨 22세
1894년 26代 [高宗 31년]
왕대비 홍씨 64세
고종 43세
명성황후 44세
왕세자 척 21세
왕세자빈 민씨 23세
1895년 26代 [高宗 32년]
왕대비 홍씨 65세
고종 44세
명성황후 45세 → (明成皇后) 옥호루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됨
왕세자 척 22세
왕세자빈 민씨 24세
1896년 26代 [高宗 33년]
왕대비 홍씨 66세
고종 45세
왕세자 척 23세
왕세자빈 민씨 25세
1897년 26代 [高宗] → [光武 34년] 연호가 바뀜
왕대비 홍씨 67세
고종 46세 → 황제가 됨
왕세자 척 24세 → 황태자가 됨
왕세자빈 민씨 26세 → 황태자빈이 됨
왕자 은 01세 (귀인 엄씨의 소생)
1898년 26代 [光武 35년]
왕대비 홍씨 68세
고종황제 47세
황태자 척 25세
황태자빈 민씨 27세
왕자 은 02세 (귀인 엄씨의 소생)
1899년 26代 [光武36년]
왕대비 홍씨 69세
고종황제 48세
황태자 척 26세
황태자빈 민씨 28세
왕자 은 03세 (귀인 엄씨의 소생)
1900년 26代 [光武 37년]
왕대비 홍씨 70세
고종황제 49세
황태자 척 27세
황태자빈 민씨 30세
영친왕 04세 (순빈 엄씨의 소생)
1901년 26代 [光武 38년]
왕대비 홍씨 71세
고종황제 50세
순헌황귀비 48세 (前 순빈 엄씨)
황태자 척 28세
황태자빈 민씨 30세
영친왕 05세 (순헌황귀비의 소생)
1902년 26代 [光武 39년]
왕대비 홍씨 72세
고종황제 51세
순헌황귀비 49세
황태자 척 29세
황태자빈 민씨 31세
영친왕 06세 (순헌황귀비의 소생)
1903년 26代 [光武 40년]
왕대비 홍씨 73세 → (孝定王后) 73세의 나이로 승하함
고종황제 52세
순헌황귀비 50세
황태자 척 30세
황태자빈 민씨 32세
영친왕 07세 (순헌황귀비의 소생)
1904년 26代 [光武 41년]
고종황제 53세
순헌황귀비 51세
황태자 척 31세
황태자빈 민씨 33세 → (純明孝皇后) 33세의 나이로 승하함
영친왕 08세 (순헌황귀비의 소생)
1905년 26代 [光武 42년]
고종황제 54세
순헌황귀비 52세
황태자 척 32세
영친왕 09세 (순헌황귀비의 소생)
1906년 26代 [光武 43년]
고종황제 55세
순헌황귀비 53세
황태자 척 33세
황태자빈 윤씨 13세
영친왕 10세 (순헌황귀비의 소생)
1907년 26代 [光武 44년]
고종황제 56세 →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함
순헌황귀비 54세
황태자 척 34세
황태자빈 윤씨 14세
영친왕 11세 (순헌황귀비의 소생) → 황태자에 책봉
- 고종시대 -
1863년 12월 8일 : 철종 33세의 나이로 승하함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흥선군과 2년동안
결탁하며 둘째아들 재황(명복)을 익종대왕의 양자로 삼
고, 제 26대 왕으로 선포함
대왕대비 조씨, 재황(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함
1863년 12월 13일 : 익성군, 창덕궁에서 즉위함 (12세) 이름을 "형"이라
고침
대왕대비 조씨,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여흥부대부인으로 봉함
대왕대비 조씨, 수렴청정을 시작함
1864년 1월 26일 : 대원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어남
1864년 3월 : 동학교주 최제우, 대구에서 처형당함
1864년 4월 : 서원, 향현사 등에 토지와 재산을 보고하도록 명령함
→ 본격적인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가 시작됨
1865년 4월 :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을 지시함
1866년 1월 : 병인박해가 일어남. 남종삼 등 천주교 신자 몇 천명과
프랑스인 베르네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를 처형하고 천주교
서적과 판목을 불태움
1866년 3월 : 고종의 비를 민치록의 여식을 정함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 광주부 유수로 좌천됨
이 밖에 김홍근이 병을 핑계로 물러나고 안동 김씨 세력의
추종자인 심의면, 이유원 등이 실각함
1866년 3월 20일 : 고종, 민치록의 여식과 가례를 올림 (後 명성황후)
1866년 4월 : 영의정 김좌근이 사직함
1866년 7월 ~8월 :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이 일어남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
하다 무력충돌이 일어난 사건)
1866년 9월 : 병인양요가 일어남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함)
1868년 3월 : 상궁 이씨(後 영보당 귀인), 완화군을 출산함
귀인에 봉해짐
1868년 4월 19일 :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도굴사건이 일어남
(독일 상인 오페르트, 중국에서 리델, 페롱, 깔레
신부를
만나 그들과 조선 선교에 관해 깊은 얘기를 나눈 끝에
조선으로 와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함)
1868년 7월 2일 : 고종 및 왕실 가족들 경복궁으로 이어함
1871년 : 신미양요가 일어남 (미국에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으로 침략한 사건)
1871년 11월 8일 : 명성황후, 첫 원자를 낳음
1871년 11월 11일 : 원자, 쇄항증으로 죽음
1873년 : 명성황후, 공주 출산함 (수일 지나고 죽음)
1873년 9월 : 명성황후, 고종과의 강력한 왕권과 친정의지를 간파하고
병조참판인 오빠 민승호와 논의하여 흥인군과 논의 끝에
박정양을 즉시 부산에 파견하여 일본 외무관을 만나, 박정양.
대원군에게 상소롤 올림
명성황후, 평소 대원군에게 불만이 많았던 이항노의 제자인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명하고 민승호로 하여금 조영하와
결탁함,
최익현 조영하로 하여금 대원군의 탄핵 상소를 올림
1873년 10월 26일 : 흥선대원군, 권력의 위기를 느끼고 심복 삼인방에게
서둘러 대책을 지시함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으로 하여금 국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최익현을 처벌하도록 함
but : 그러나 고종은 그들 말을 한마디로 일축하며 최익현을
보호함
1873년 10월 27일 : 대원군의 심복, 사간원과 사헌부로 달려감
사간원과 사헌부 관리들이 연명으로 최익현의 상소를
반박하는 글을 올리고 고종에게 최익현을
처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함
1873년 10월 29일 : 장령 홍시형, 최익현의 상소문에 입을 맞춘 듯 또 다른
글을 잇달아 올림
고종, 홍시형을 즉가 부수찬에 임명하는 한편 교령을
내려 원납전과 결전의 즉각적인 철폐를 지시함
대원군, 반대 세력의 작적이 너무 급진적으로 이루어져
미쳐 손쓸 틈이 없었음
1873년 11월 3일 : 최익현, 격렬한 두 번째 상소문을 올림
고종, 최익현을 반대파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주도로
유배 보냄
1873년 11월 5일 : 고종, 대신들 앞에서 친정을 선포함 (22세)
국왕의 친정선포를 조보(승정원의 일을 아침에 반포함)
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짐
고종, 경복궁으로 가다가 운현궁으로 입조(대궐의
아침회의에 들어가는 것)하는 것을 어명으로 제지되
었고, 그가 대궐에 드나들던 전용문을 폐쇄함
1873년 11월 6일 : 고종과 명성황후, 최익현의 처벌을 주장한 홍순목. 강노.
한계원은 파직되고, 국왕체제의 영의정에는
이유원, 좌의정에 박규수, 우의정에 흥인군으로
대대적인 인사 개혁이 이루어짐
원로 조두순을 발탁하고 조영하가 도총사로 임명되고
김병국이 등용됨
대원군 집권 초기에 강력하게 철폐했던 만동묘가
복원되고 서원들이 되살아남
1874년 2월 8일 : 명성황후, 창덕궁 관물헌에서 원자 척을 출산함
1874년 11월 28일 : 민승호, 한창부부인 이씨. 대원군의 심복이 보낸
폭탄으로 죽음
1875년 2월 : 원자 척, 왕세자에 책봉됨
1875년 4월 : 일본, 운양호를 비롯한 군함 다섯 척 동해한 영흥만까지
북상했다가 사라짐
1875년 8월 21일 : 일본 운양호, 강화도 근처에 입항해 이노우에 가오루 등
수십여 명의 일본군이 소형배로 갈아타고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하자 조선 포병이 포격을 가함
1875년 8월 22일 : 일본 함대,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여 조선 초지진 포대를
완파하고 다시 영종도에 맹포격을 가한 후, 육군 전투
부대를 상륙시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돌아감
→ 일본으로 되돌아간 운양호가 일본 내각에 조선이 일본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는 보고를 올리고 후에 조선에
대한 무력침공을 건의함 (이른바 운양호 사건)
1875년 11월 20일 : 일본 외무경 데라시마, 주청 공사로 부임하는 모리를
통해 조선의 강화도 사건을 설명하고 조선에 대한
청국의 권한을 따지면서 청국과 조선의 종속 문제를
논박함
1876년 1월 : 일본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다카 전권대신과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전권대신으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함
1876년 2월 3일 : 강화도에서 조선, 일본과 조약을 맺음 (일명 강화도조약)
→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조선은 국제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됨
1876년 4월 4일 : 고종,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함 ; 김기수를 단장으로 76
명이 일본의 관청과 공장을 비롯한 문물을 사찰함
1876년 : 명성황후, 대군을 출산함 (몇일을 넘기고 죽음)
1877년 : 귀인 장씨, 사가에서 의화군을 출산함
1878년 : 명성황후, 대군을 출산함 (백일을 넘기고 죽음)
1878년 5월 12일 : 대비 김씨(철인왕후),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의 나이로
승하함
1879년 12월 : 지석영이 충주 덕산에서 처음으로 40여 명에게 종두법을
실시함
1880년 : 고종의 서장자 완화군 13세의 나이로 죽음
1880년 8월 28일 : 김홍집, 청의 황준헌이 저술한 [사의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바침
→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책을 보면서 개화의 의지를
더욱더 확고히 함
1880년 12월 17일 : 유생 허원식이 <조선책략>중 미국과 연대한다는 말을
극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림
1881년 : 고종, 2단계 개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
대왕대비 조씨의 친족 조영하, 왕비의 조카 민영익, 김보현,
민겸호, 박정양, 심순택, 민태호 등 신진 개혁세력을 대거 요직에
등용함
여름에 경상도지방에 내린 폭우로 133명의 인명피해와 1,500여
채의 가옥이 유실됨
1881년 9월 ~ 10월 : 안기영,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종을 폐위시키고 명성황후와 척신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주살하려 한 사건 (이른바 안기영 역모 사건)
→ 이 사건으로 안기영을 비롯한 권정호, 채동술을
체포하고 이재선은 의금부에 스스로 자수함
이들을 유배보낸뒤 사사함
1881년 12월 25일 : 안기영 역모사건의 주인공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제주도로 유배보낸뒤 사사함
1882년 2월 19일 : 왕세자 척, 민태호의 11살의 여식과 책빈례를 올림
1882년 4월 26일 : 조선, 조미수호통상조약 맺음
1882년 5월 15일 : 조선, 독일과 수호조약을 맺음
1882년 6월 5일 :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의 군인들, 밀린 군료와 쌀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대궐에서 소란을 피움
1882년 6월 6일 : 조선, 영국과 수호조약을 맺음
1882년 6월 9일 : 임오군란이 일어남
하나부사, 이런 사실들을 알고 공사관에 일부러 불을 지름
고종, 모든 정권을 대원군에게 넘기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해놓은 개화정책들을 다시 쇄국정책으로 바꿔놓고
민씨척족들을 내쫓음
1882년 6월 10일 : 대원군, 폭도들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명성황후가 승하
했다고 발표함
명성황후, 홍계훈과 함께 장호원으로 피난감
1882년 6월 11일 : 왕비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돔
1882년 6월 15일 : 하나부사, 일본 외무경에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에
대한 보고를 올림
1882년 6월 17일 : 청, 조선의 군란 사건을 알게 됨
일본 군함, 조선에 출동시킴
1882년 6월 22일 : 청 여서창,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고 외무경 대리
요시다를 만나 청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고 말함
1882년 6월 24일 : 일본, 청의 그 같은 조치에 긴급 각의를 소집함
1882년 7월 5일 : 오장경, 김윤식을 대동하고 남양 앞바다에 상륙함
1882년 7월 7일 : 고종, 심상훈을 은밀히 충주에 내려보내 명성황후에게
왕궁의 형편과 국내정세를 알림
명성황후, 청국군과 일본군의 국내출병과 대치상황을
알게 됨
하나부사, 다카시마와 진레이 등 호위병을 이끌고 창덕궁
중희당에 나타나 국왕의 알현을 요청함
일본군 1,500여 명의 병력이 창덕궁 돈화문 앞 광장에
집결함
1882년 7월 : 김윤식, 윤태준이 고종의 친필 편지를 가지고 명성황후의
거처에 감
1882년 7월 17일 : 조선,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음
1882년 7월 18일 : 고종, 백성들에게 친서를 발표함
1882년 7월말 : 청,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으로 압송함
1882년 8월 1일 : 명성황후, 대궐로 환궁
1884년 : 조선, 러시아와 수교를 맺음
1884년 5월 9일 : 민영익, 전권대사로 구미 제국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함
1884년 9월 24일 : 일본,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함
1884년 10월 17일 : 갑신정변이 시작됨 (개화파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일본과 손을 잡고 수구파의
대표적인 인물 민영익을 제거하고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옮긴 후 대궐을 장악함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등 수구파들 개화파에 의해
살해됨
또한 이들은 고종의 환관 유재현도 살해함
1884년 10월 19일 : 청의 장교 주득무가 대궐에서 고종의 알현을
요청했지만 김옥균이 거부함
1884년 10월 24일 :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갑신정변 주모자들이
일본으로 망명함
1885년 3월 1일 : 영국, 거문도를 점령함
1885년 : 명성황후, 조카 민영익을 구해준 묄렌도르프를 전격적으로 지지함
미국인 전기 기사 매케이가 초빙되어 궁중에 발전소를 만들어
경복궁에 전등이 생김
명성황후, 알렌 부인에게 정 2품 참판으로 승격시킴
1885년 6월 14일 : 이노우에 가오루, 청국 주재 일본 공사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통해 이홍장에게 조선변법 8개 조항에 관한
전보를 보냄
1885년 8월 27일 : 대원군, 원세개와 함께 조선에 귀국함
1885년 10월 11일 : 이홍장, 원세개에게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지위를 높여 임명함
1886년 : 조선, 프랑스와 수교를 맺음
1886년 6월 28일 : 명성황후,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함
→ 이화학당이 설립됨
1888년 4월 : 고종과 명성황후, 군제를 개편하고 미국의 퇴역 육군 소장
윌리엄 맥이다이 등 네 명의 미군을 군사훈련 교관으로
초빙함
다이 장군에게 병조 참판, 닌스테드에게 병조참의를 내림
1890년 :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83세를 일기로 승하함
1893년 2월 12일 : 동학교도들, 대궐 앞에서 최제우의 억울한 죄명을
벗겨주고
사당을 짓게 해주며 서양과 일본인들을 들이지 말라는
상소를 올림
1894년 : 김옥균, 청에서 조선에서 자객을 보낸 홍종우에게 살해당함
1894년 5월 2일 : 청, 해군제독 정여창이 군함 2척을 이끌고 인천에 도착함
1894년 5월 5일 : 직례제독 섭지초의 총병력 2,400여 명이 충청도 아산에
도착함
1894년 5월 6일 : 일본 공사 오토리가 군함 야에야마와 함께 인천에 도착함
→ 이로 인해 조선 해역에선 청국군과 일본군이 대치상태에
들어감
1894년 6월 21일 : 일본군, 야음을 틈타 경복궁 습격에 나섬
1894년 6월 23일 : 청일전쟁이 일어남
1894년 6월 25일 : 갑오개혁이 일어남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함
일본,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감금한다음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 개화파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 개혁을 단행함
1894년 6월 ~ 7월 : 농민군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을 실시함
1894년 7월 15일 : 흥선대원군의 섭정시 시작됨
→ 제 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됨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1894년 9월 13일 : 농민군의 2차 봉기가 일어남
1894년 10월 12일 : 동학군의 전봉준, 공주를 습격하고 서울 탈환을 위해
논산에서 군세를 정돈함
1894년 11월 28일 : 전봉준,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됨
1895년 1월 7일 : 고종, 종묘에서 홍범 14조를 발표함
(이노우에는 이 이후로 중전 민씨의 정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함)
1895년 2월 : 조용승, 박영효와 서광범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당함
→ 이 배후로 대원군의 심복들이 이준용 음모 사실을 자백함
1895년 3월 29일 : 전봉준, 참수당함
1895년 4월 1일 : 유길준, [서유견문록]을 간행함
1895년 4월 17일 : 일본, 청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음
랴오둥 반도를 차지함
러시아,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청에게 랴
오동 반도를 돌려줄 것을 협박함
1895년 6월 : 명성황후, 내무대신 박영효와 법무대신 서광범을 불러
역모죄를 모의한 이준용을 철저히 조사하여 처벌하도록
엄명을 내림
고종과 명성황후, 친일파인 박영효, 서광범 등 국사범을
사면하고 복권시킨 후에 그들을 정치적잉 지렛대로 적절히
이용함
박영효, 이준용을 구속함
부대부인 민씨의 부탁으로 고종, 이준용을 감면함
1895년 6월 28일 : 고종, 친일세력을 모조리 제거하고 새 내각을 단행함
총리대신 박정양 등 친일세력의 내각을 모조리 제거함
궁내부 특진관에 민영환, 민영소, 심상훈, 민영달 등
명성황후의 측근세력들이 대거 등장.
고종, 완벽한 친정체제를 갖춤
고종, 홍범 14조를 휴지로 만들어 버림
명성황후도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었음
1895년 8월 1일 : 박영효, 직원을 이용하여 왕실 수비병을 자기 직계
훈련대로 교체해버림
총리대신 박정양, 박영효의 행동에 사표를 제출하고
등청을 거부함
1895년 8월 : 심상훈,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박영효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려
한다는 말을 함
고종, 박영효를 구속하라고 발표함
박영효,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름
1895년 8월 31일 : 미우라, 조선 공사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옴
미우라, 시바 시로. 다케다. 스키나리 등도 같이 옴
1895년 9월 4일 : 이노우에, 야마가타와 모종의 타협을 이루고 심각한 숙고
끝에 미우라의 조선 공사 취임을 결정함
1895년 9월 16일 : 이노우에, 미우라와 명성황후 시해작전에 대해 세부적인
계획을 알려주며 일본으로 떠남
1895년 9월 19일 : 미우라, 명성황후 시해작전을 위한 계획에 들어감
1895년 9월 28일 : 조선왕실, 학무대신 이윤용으로 하여금 조선군 훈련대를
해산시킬 계책으로 순검들과 훈련대 병사들과의 충돌을
유도함
서울에서 순검들과 훈련대 병사들간의 싸움이 일어남
1895년 10월 2일 : 미우라, 아다치 겐조를 공사관에 초대하고 자신의
조선정책을 설명하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 조직을
부탁하면서 거사자금 6천 원을 건냄
1895년 10월 4일 : 일본 공사관, 명성황후 시해를 위한 고위 특별회의가
열림
→ 스기무라, 오카모토 등이 회의를 주재함
1895년 10월 7일 : 고종과 명성황후, 조선군 훈련대를 해산시킴
경복궁에서 민영준의 정계복귀를 축하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베풀어짐
진고개에서는 구니토모와 야마다의 지휘를 받는 일본의
낭인들이 파성관을 모두 독차지하고 화려한 파티를
벌임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이 일어남 (러시아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가
청의 요동반도를 돌려줄 것을 협박하자 일본은 할 수
없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게 넘겨주며 러시아는
계속해서 일본을 압박해 들어감,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노우에가 짜 놓은 친일파
대신들을 모조리 갈아치우고 친러파와 민씨일파로
정권을 대거 단행함과 동시에 일본이 해놓은 법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함과 동시에 친일파를 대거 숙청함,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더 배척해
나감으로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이뤄가자 조선에서의
입지가 약해져 일본으로 건너가게 생기자 러시아와
손을 잡는 우두머리인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돌입작전에 들어감
일본 정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이노우에가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한 계책을 구상하고 미우라가
조선의 전임공사로 내정되면서 조선으로 와
이노우에와 세부적인 계획을 짜고 이노우에는
일본으로 건나가고 미우라는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 해외유학파 시바시로, 신문기자
기쿠치 겐조, 오카모토 등 56명의 일본 각계인사, 일본
경찰들을 확보하고 10월 7일 새벽 1시에 흥선대원군
처소인 아소정을 점령하여 대원군을 강제로 가마에
싫고 새벽 3시에 그들의 목적지인 경복궁을 향하고
새벽 5시쯤 광화문에서 10여 분만에 진압하고 건청궁
근처에 고종과 왕세자 척을 칼로 위협하고 옥호루
처소에서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홑이불에
시신을 싸서 불태우기 전에 능욕을 저지른 다음
시신을 불에 태움
1895년 10월 9일 : 미우라,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으로 앉히고 친일파 내각을
발표함
고종에게 강요하여 중전 민씨를 폐위 조치를 내림
→ “그간 중전 민씨가 국정을 어지럽히고 종묘사직을
위기에 처하게 했다. 변란이 일어나자 중전은 지난번
임오군란 때처럼 달아나 종적을 감추었으니 중전의
자격을 박탈하고 서민으로 쫓아낸다.”라는 내용
1895년 10월 10일 : 고바야가와 히데오, “대원군 입궐”이라는 제목으로
을미사변”의 원을 왕실의 실정과 훈련대의 불만세력과
대원군의 야심으로 돌리는 내용을 신문에 게재함
미국의 <뉴욕 헤럴드>특파원 코커릴이 사건을
취재하여 미국 본사에 전보를 쳤으나 일본측이 기사
송고를 강제로 중단시킴
미우라, 왕비 시해 사실을 막기 위해 외국 통신
기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전보발신을 막음
미우라,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왕비 시해 진상을 알고
싶다며 일본 공사관에게 진상보고서를 보내달라며
뻔뻔한 조회문을 보냄
일본, 긴급 각의를 거쳐 사이온지로 하여금 주일
러시아 공사를 방문하게 하여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고 협조할 것을 지시함
미우라를 비롯한 오카모토 등 48명을 히로시마 감옥
미결감에 수감됨
1895년 10월 12일 :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등 구미파 중진들이
왕실측근인 시종원경 이재순 등 일부 서양인들과 모의
하여 친위대 장병의 호응을 받아 밤중에 춘생문으로
습격하여 고종을 탈출시킬 거사를 일으킴
→ 이른바 춘생문 사건… 하지만 실패로 돌아감
1895년 11월 13일 : 김홍집, 이주회. 박선. 윤석우 등 세 사람을 왕비의
시해범으로 몰아 고등재판소에 넘겨 모반죄로
교수형에 처하게 함
1895년 11월 15일 : 일본, 단발령을 내림 (고종, 스스로 머리를 자름)
1896년 1월 :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남
1896년 1월 21일 : 일본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예비 판사 요시오카
오시히데는 미우라 일행을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석방함
1896년 2월 11일 : 새벽 6시쯤 경복궁에서 상궁 엄씨의 친밀한 주도아래
고종, 왕세자 척, 왕세자빈 민씨, 왕대비 홍씨 등 왕실
가족들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함
→ 아관파천을 단행함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 곧 독단적인 개각에
착수함
총리대신에 윤병시, 외무대신에 이용익을 임명함
고종, 경무관 안환으로 하여금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 다섯 명의 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 명령을 내림
김홍집, 정병하 순검들과 백성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함
탁지부대신 어윤중, 서울을 탈출하여 용인에서 지방
주민들에 의해 살해됨
외무대신 김윤식, 제주도 종신 유배길에 오름
우범선, 後 일본에서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됨
1896년 : 일본, 고종 등 왕실 가족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허탈해하면서 고종에 의해 친일정권이 완전히 몰락함
1896년 4월 27일 : 서재필, 독립신문 간행함
1896년 5월 28일 : <독립신문>은 국왕의 환궁 문제를 다루면서 ‘조선
대군주폐하께서 외국 공관에 계시는 것은 좋지 않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는 논설을 실음
1896년 10월 24일 : 인천에 일본 군함이 도착함, 이 군함에는 육군 대장
고마스노미야 아기히토 친왕이 경운궁에서 고종과
환궁문제에 대해 면담을 함
1897년 2월 20일 : 고종, 아관파천을 단행한지 1년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함
1897년 : 상궁 엄씨, 영화군 출산함, 상궁 엄씨를 귀인에 봉함
1897년 8월 14일 : 연호를 광무로 고침
1897년 10월 12일 : 고종, 독립협회의 강력한 진언을 받아들여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
고종,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독립제국임을
세계 만방에 선포함
고종, 명성왕후를 황후로 추존함
1897년 11월 21일 : 고종,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함
1897년 12월 24일 : 손병희, 동학 제 3대 교주가 됨
1898년 1월 : 부대부인 민씨 81세의 나이로 죽음
1898년 2월 22일 : 흥선대원군 79세의 나이로 죽음
1898년 3월 10일 : 독립협회, 서울 종로에서 대중정치 집회인 만민
공동회를 개최함 : 열강의 이권침탈 철회를 주장함
1898년 : 일본, 고종과 황태자 척을 독살하려 커피에 아편을 넣는 사건이
일어남 (고종은 한모금 먹다 뱉었으나 황태자는 다 마셔버림)
1898년 10월 29일 :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 “헌의 6조”를 올림
1898년 11월 4일 : 고종, 독립협회의 해산과 주요 인물 검거를 명령함
1898년 12월 4일 : 독립신문, 폐간함
1898년 12월 25일 : 고종,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함
1901년 : 귀인 엄씨를 순헌황귀비에 봉함
1901년 5월 28일 : 제주도 대정군에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남
1903년 5월 25일 : 용암포 사건이 일어남
1903년 11월 15일 : 왕대비 홍씨(효정왕후), 73세를 일기로 승하함
1904년 2월 23일 : 한.일 의정서를 체결함
1904년 9월 : 송병준의 일진회화 이용구의 진보회가 일진회로 통합됨
1904년 9월 28일 : 황태자빈 민씨, 경운궁 강태실에서 33세의 나이로
승하함
(순종이 즉위하면서 “순명효황후”로 추존됨)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강화 조약
1905년 11월 17일 : 을사5적에 의해 일본의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됨
사실상 나라가 일본에 넘어감
1905년 11월 20일 :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함
1905년 11월 30일 :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조약을 맺으며 나라가
빼앗긴것에 슬퍼하며 유서를 남기고 자결함
1906년 2월 1일 : 일본에 의한 통감부가 설치됨
1906년 12월 : 순종,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과 가례를 올림
1907년 1월 29일 :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남
1907년 4월 : 고종, 이준 등 열사 3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 파견함
1907년 7월 16일 : 이완용, 송병준이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함, 결국 고종 퇴위함
특징 : 고종, 역대 국왕중에 서열이 가장 낮음 (인평대군의 9대손, 은신군의
8대손)
고종, 철종과 함께 가장 늦은 나이에 친정을 시작함 (22세)
친정을 한 것도 본인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왕비의 도움으로 친정이
시작됨
흥선대원군, 역대 대원군 중 정치적 식견이 가장 뛰어남
또한 왕의 아버지가 살아있는 유일한 아버지임
명성황후, 역대 왕비 중 가장 많은 아이를 잃음
순종, 사도세자와 함께 역대 최연소 나이에 왕세자에 책봉됨
순종, 효장세자, 경종과 함께 역대 최연소 나이에 가례를 올림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남
명성황후, 역대 왕비 중 정치적인 식견이 남다르고 미래를 내다볼줄
아는 예지를 가짐
조선, 1800년 순조시대 이후 급격한 인구 하락과 동시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싸움이 극에 달함과 동시에 잦은 민란과
탐관오리 들과 대신들의 부정부패가 심하여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짐
고종, 역대 국왕 중에 치적보다는 매 해 년마다 각종 사건과 민란,
정변에 시달림
고종, 역대 국왕 중에 다른 나라 공사관에 1년동안 머무르며 정사를
봄
고종과 명성황후, 최초의 황제와 황후가 됨
청,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등 각국 나라들이 조선에서의 이권
다툼을 벌임
고종, 역대 국왕 중에 강제로 퇴위당함
을사조약으로 사실상 나라가 일본에 넘어감
대원군, 청과 일본에 이용만 당함
명성황후 시해범은 낭인이 아니라 일본 최고의 엘리트 들임
명성황후가 아직도 민비, 악녀로 불리고 있는 것은 일본 전체와
기쿠치 겐조라는 인물이 한 몫을 함
정식칭호 : 잘 알려지지 않음
자녀 : 9남 4녀
카페매니저 崔洙辰
역시..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화려하네요..-_-!!! 어느때보다 치열했던
시대임을 확인할수있네요... 세종-소헌왕후 이후로 왕실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탄생하는건.. 처음인듯.
첫댓글 시호 :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강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 태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