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칼춤사위’ 세계 예술문화의 중심 속으로운심검무축제 ‘칼춤’의 향기 피어오르다
기사입력 2019-11-1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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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상동면 신안마을에서 ‘제5회 신안마을 운심검무축제’가 기관단체장, 지역주민, 관광객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펼쳐져 참석자를 매료시켰다.
운심 추모 제례식을 시작으로 마을주민의 운심검무공연, 법흥상원놀이, 상동초등학교 학생들의 태권도 공연이 식전공연으로 펼쳐지면서 축제의 열기는 뜨거워져갔다.
게임존 체험, 포토존 체험, 캘리그라피, 사행시 짓기, 스탬프체험 등 다채로운 체험 행사가 함께 열려 축제장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날 제16회 밀양검무 정기공연이 펼쳐지면서 칼의 춤사위에 빠져들었다.
조선의 칼춤을 평정했던 밀양검무의 빛은 이대로 머물 것인가 하는 아쉬움에 그 춤사위의 역사 속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밀양의 명기
밀양 교방에 특별히 눈에 띄는 기생이 한 명 있었다.
노래며 춤이며 악기며 문장이며 모든 것을 두루 갖추어야하는 것은 기생의 기본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남달리 진검(진짜 칼)을 쓰는 기생이었던 것이다.
더러는 몰락한 양반가의 어린여식을 교방에서 거두어 키웠다고도 하고, 더러는 그 어머니가 기생이었다고도 하는 등 추측이 분분하지만 정확한 출생의 비밀은 찾지 못했다.
검무창시의 시작이 검술을 익혀 춤에 적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
그녀가 밀양의 관원 한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은, 2000년 초 밀양의 김춘복 소설가가 찾은 지금의 신안마을 꿀벵이에 위치한 그녀의 묘에 얽힌 사연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만큼 밀양은 운심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20세가 되어 지방에서 뽑아 보내는 기녀(선상기)로 한양으로 진출했다.
운심에 관하여 두 편의 소설책이 발간되어 있다.
하나는 박학진 소설가의 ‘칼의 춤’이고, 하나는 김춘복 소설가의 ‘칼춤’이다.
⊙운심(雲心)
아름다운 자태와 뛰어난 검무로 조선 세도가의 자제는 물론 숱한 문장가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여인.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터라 수많은 이들의 가슴만 까맣게 태웠던 도도하고 당당했던 여인.
권력가 앞에서도 함부로 춤판을 펼치지 않았던 그녀가 재물도 권력도 없는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의인으로 평판을 듣는 거지왕초 광문 앞에 홀연히 옷을 갈아입고 칼을 잡았을 만큼 재물이나 권력에 빌붙는 속물성이나 천박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여인.
명필가 백하 윤순 앞에 비단치마를 벗어 펼쳐 귀거래사의 글귀를 받으며 당대 최고 명필가와 최고 무용가로서의 교감을 가질 만큼 품격을 가진 여인.
그 여인이 바로 밀양출신의 명기 운심(雲心)이었다.
문장으로 유명한 기생에 대한 자료는 많지만 영상기록이 불가능했던 그 당시 춤에 대한 자료를 남길 수 없었던 탓에 18세기 조선의 칼춤을 평정하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운심은 당대 최고의 명성만을 안은 채 그렇게 묻혀갔다.
그러나 쉽지 않았겠지만 연암 박지원, 정유 박제가 등이 당대 최고의 춤꾼에 대한 기록을 어렵게 남겼다.
⊙밀양검무
30여 년 전부터 박제가의 검무기에 기록된 춤사위를 연구하며 그 예술성과 미학적 가치를 규명하고 이론적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 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밀양검무 춤사위 연구와 무보 기본틀 연구’란 석사논문을 발표한 밀양의 춤꾼 김은희 밀양검무보존회 회장이다. 김 회장은 현재 (사)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이며 우리춤 움직임원리 연구회 회장이다.
또 국가무형무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이기도 하다.
김은희 회장은 관원을 그리워한 나머지 역원 근처 길가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신안의 역로가에 있었던 꿀벵이 위에 안장된 운심의 묘를 찾던 해부터 음력 9월9일 그 묘를 찾아 고유제를 올리고 그곳에서 칼춤을 췄다.
그리고 제24회 밀양예술제가 전개되던 2005년 10월 22일 밤 문화체육회관에서 제1회 밀양검무정기공연을 펼쳤다.
이후 서울, 성남, 대구, 밀양 등 전국을 누비며 밀양검무로 수많은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지난 2일 상동면 신안마을 운심검무축제장에서 ‘제16회 밀양검무 정기공연’을 펼친 것이다.
⊙밀양의 새로운 ‘빛’
밀양검무가 꽃봉오리 되어 개화의 향기를 피우고 있다.
많은 제자들에 대한 올바른 전승과 대중화 그리고 세계 예술문화의 빛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아리랑과 밀양검무가 어우러진 밀양.
밀양아리랑과 밀양검무가 세계 예술문화의 중심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밀양아리랑의 성장과 밀양검무의 도약에 대하여 내용적, 환경적 연구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먼저 밀양검무가 밀양의 중심에서 상설공연이나 정기공연을 통해 관아와 영남루와 어우러져 새로운 관광의 명품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밀양검무보존회 김은희 회장을 현장에서 만나 밀양검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들어 보기로 했다.
1. 운심과의 만남에 대한 시작과 의미는?
-1987년 밀양문화원에서 발간한 『密陽誌』 에 운심묘에 관한 일화가 실린 것을 보고 처음 운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운심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기에 200여년이 지나도록 시골마을 산기슭에 있는 묘가 보존되고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박제가의 『정유문집』에 실린 <검무기> 원문을 찾아 읽어봤을 때 조선시대 검무는 매우 역동적이고 현란한 춤사위로 살벌한 기운까지 뿜어진다는 점에서 운심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그리고 밀양검무를 복원하는 것은 밀양출신 무용가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내 평생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밀양검무를 복원한지 30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운심이 추는 검무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며 끊임없이 연구하였다. 박제가가 운심의 제자가 춘 검무를 보고 춤사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묘사한 표현한 글만 봐도 수준 높은 실력의 공연을 보았다고 생각되는데, 그마저도 검무의 극치가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운심의 실력은 가히 당대 최고의 검무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어릴 적 배웠던 검무와 <검무기>에 묘사된 춤사위가 비슷한 것이 많아 복원하기가 수월하였는데 이 춤을 출 때 운심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추었을까? 라는 생각의 해답은 얻지 못하고 있던 차에 재야국학자 이운성 선생과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의 글을 통해 운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광문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던지, 백하 윤순이 운심의 검무로 초서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던 일화, 운심이 늙어서 최고의 명산 약산동대에서 최고의 명기인 자신이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죽어도 만족한다고 했던 일화에서 운심의 성품과 기개를 알 수 있었는데, 어쩐지 나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욱 운심을 사랑하게 되었고 밀양검무 복원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다.
2. 밀양검무보존회의 탄생과 발걸음은?
-밀양검무보존회는 밀양검무의 올바른 보존과 계승을 목적으로 1988년에 설립하였다. 현재 임원 및 회원 3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연 및 방송활동, 학술연구 활동, 검무 교육 연수활동을 해오고 있다.
제8회 정기공연은 서울에서 4쌍의 밀양검무를 한 무대에 올리고, 전통무예인들의 쌍검교전, 해주검무, 호남검무, 창작검무 등 검무의 역사를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검무시리즈’ 공연을 한국무용계에서 처음으로 기획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공연 이후로 검무를 주제로 한 공연이 다양하게 기획되어 밀양검무가 자주 초청받고 있다.
해외 공연활동으로는 2005년 독일 뮌헨 박람회 초청공연, 2006년 한·불 수교 20주년기념 정부공식초청 프랑스 파리공연, 2017년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 한국국립중앙박물관 공동특별전 ‘조선의 문화와 예술’ 초청공연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국내외 기획 공연에 초청받아 현재까지 100여회의 공연을 통해 밀양검무의 예술성과 독창성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방송촬영은 2009년 일본 NHK방송에서 조선통신사의 역사, 2010년 EBS 한국기행 밀양편 촬영, 2011년 EBS ‘다큐 프라임-한양의 뒷골목’ 운심이야기 촬영, 2014년 MBC문화사색 전통의 재발견 검무 공연 소개 촬영, 2018년 YTN사이언스 ‘한국사과학탐’ 촬영, 2019년 ABN아름방송 ‘맥, 미래를 이끌다’ 공연녹화를 하였다. 모두 운심과 밀양검무를 소개하는 내용을 촬영하였다.
학술연구 활동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되어 석·박사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밀양검무에 관한 최초의 연구논문은 밀양검무보존회 부회장 노한나의 2006년 성균관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현행 밀양검무와 18세기 검무의 관계성 연구」 이다. 이 논문은 18세기에 사대부들이 검무를 보고 남긴 시(詩)와 풍속화 및 궁중의궤 사료분석을 통해 현행 밀양검무가 검의 길이, 무복, 춤사위 등 조선 후기 검무의 원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규명하였다.
이 후 노한나는 2014년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으로 「밀양검무의 춤사위분석에 따른 미학적 성격 연구」를 발표하여 밀양검무의 조형미 속에 담긴 미학적 성격은 ‘화(和)’의 정신으로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춤이라는 것을 규명하였다.
또한 박미향 회원이 2016년 신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밀양검무의 춤사위에 나타난 무예적 표현에 관한 연구」에서 밀양검무의 칼춤 부분을 중심으로 『무예도보통지』의 <쌍검보> 동작이 밀양검무 안에서 어떻게 무예적 표현과 예술적 춤사위로 나타나는지 분석하여 여타의 지역검무와 차별화된 밀양검무만의 독창적 표현성을 규명하였다.
밀양검무에 관한 이론적 연구는 보다 더 다양한 과제로 지속하여 학술적 기반을 탄탄하게 뒷받침해나갈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검무교육 연수활동은 밀양검무보존회원들의 기량강화와 올바른 전승을 위해 매주 정기연습 및 년1~2회 합숙연습을 하고 있다. 또한 칼춤사위의 기본이 되는 『무예도보통지』의 쌍검보 동작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무예전문가를 초빙하여 검수련을 하고 있다.
3. 밀양검무의 미래 비전은?
-조선 영조시기에 운심이 활동하고 그 제자들에 의해 정조시기까지 18세기를 주름잡았던 밀양검무는 200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운심은 어린 시절 밀양 응천교방에서 검무를 익혀 스무살에 선상기로 뽑혀 한양에 진출하였다. 교방은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시기까지 기녀들을 중심으로 악가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즉, 악가무를 교육하고 연회가 있으면 나가서 공연을 하는 곳이다. 밀양교방은 밀양의 옛지명인 응천교방이 있었다는 것이 태을암 신국빈(太乙庵 申國賓, 1724~1799)의 <응천교방죽지사(凝川敎坊竹枝詞)>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죽지사에는 운심의 칼춤과 옥랑의 거문고가 한 시대에 명성을 독차지 했으며, 스무살에 장안에 들어가 검무를 추면 많은 이들의 눈이 서늘해졌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것을 보고 운심은 당대에 밀양의 자랑스러운 춤꾼이었고, 운심이 검무를 배운 응천교방은 어떤 곳이었는지 교방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응천교방에 관한 사료로 1719년에 신유한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쓴 『해유록(海遊錄)』 에 의하면 부산에 도착하여 밀양기생의 풍악과 춤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밀양의 교방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교방 중의 하나로 뛰어난 실력의 기녀들을 양성하고 공연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앞으로 밀양의 응천교방을 부활시켜 이 곳에서 운심과 같은 춤꾼을 양성하고 싶다.
교방은 본래 악가무를 모두 교육하는 기관이기에 춤 뿐만 아니라 국악과 소리도 교육하여 밀양의 훌륭한 예술인재를 양성하고 옛 교방의 문화가 밀양의 새로운 문화콘텐츠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밀양시와 밀양의 예술인들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 근거와 예술적 독창성, 춤에 담긴 철학이 분명한 밀양검무는 무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운심의 시대처럼 전국적으로 밀양검무가 성행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최근 밀양은 문화관광의 도시로 거듭나며 밀양아리랑과 밀양백중놀이를 비롯하여 많은 민속예술이 보존 계승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 밀양검무가 밀양을 대표하는 춤으로 자리매김하여 밀양을 알리고 밀양 예술의 역사와 우수성, 독창성을 알리는 데에 일조하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박영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