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하고 냉정한 문체로 전쟁의 잔혹성과, 특히 전쟁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고발한 책이 나왔다.
'베를린의 한 여인'(해토刊)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4월부터6월에 이르기까지 당시 베를린에 거주하던 익명의 여인이 세 권의 노트에 쓴 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 출판사에서 편집자,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러시아어를 비롯한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었다. 베를린에서처음 전투가 벌어지던 날 시작되는 그녀의 일기에는 전쟁이 베를린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몰고 온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 담담하게 기록돼 있다.
책은 계속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과 그 안에서 하루하루 굶주림과 폭격을 견뎌내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냉철한 시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차별적인 폭격에서 살아남은 저자는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베를린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에는 러시아 점령군의 상습적인 성폭력에 희생된다.
몇 차례 강간을 당한 저자는 '다른 늑대들이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해줄 힘센 늑대'를 찾아 관계를 맺는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고 식량을 얻으며 연명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용납하지 못해 갈등한다.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부분은 이제 나 자신을 창녀로 여겨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나는 실제로 내 몸을 팔아 살아가고, 그에게 몸을 내주고 먹을 것을 얻기 때문이다." 비참한 생활을 이겨낸 저자는 1959년 스위스의 어느 출판사에서 자신의 일기를 책으로 냈으나 책을 읽은 애인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당시 독일인들은 그녀가 독일 여성의 명예를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처음 출간된 이래 15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이 책은 결국 저자가 타계한 후에야 새로운 판본을 찍을 수 있었다. 2003년 한 해 독일 전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이책은 저자의 희망에 따라 익명으로 출간돼 일기의 진위 여부를 두고도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져왔다. 염정용 옮김. 422쪽. 1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