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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14 말씀
접속과 결속
<본문>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라디아서 6:2)
MBN <특종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기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궁금증을 풀어보는 일종의 다큐멘터리이다. 인상 깊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먼저 영등포구 당산동에 산다는 수십억대 갑부 할아버지 얘기다. 그는 당산동에서도 금싸라기 땅이라는 곳에 대지 130여 평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생활하는 주택은 거의 허물어져 가는 폐가다. 쥐와 벌레들이 들끓어 컵라면 같은 음식을 비닐에 똘똘 싸서 대문에 걸어두고 있다. 영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본인 말로는 수도도 전기도 끊어진 집에서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잔단다. 새벽같이 일어나 목발을 들고는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다. 따라가 보니 하루 종일 이 교회 저 교회 몇백 원씩 받아 챙기며,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다가 동네 사람들의 눈이 뜸한 한밤중에나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수십억대 갑부가 이렇게 산다는 게 너무나도 기이하다고 생각한 PD가 그 이유를 물어본다. 할아버지 말은 이 땅이 원래 자기 땅이어야 맞지만, 팔자가 더러워 자기 명의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거지같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의 말은 다르다. 그게 다 할아버지 재산이며 큰 부자였던 부모님께 상속받은 땅이 거기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청에서 확인해 보니 할아버지 재산이 맞고 분명 그의 명의로 되어 있다. 사정은 이렇다. 그를 보살피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누나들과 재산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반응이 너무 날카로워 누나들은 재산을 포기하고 동생을 걱정해서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런 사건이 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의식을 남겼다. 2대 독자인 그는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키워졌으며 보살핌이 지나쳐 그는 거의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형성하지 못한 채 성장해서 부모님의 죽음을 맞았다. 이제 믿을 피붙이는 누나들밖에 없었지만 모두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이민간 상태였으며 심지어 재산분할소송까지 겪어야 했다. 그는 피해의식과 자기보호본능에 따라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동네 친구가 그의 재산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모든 서류를 떼어 그에게 보여주려 해도 공격적인 반응만 보인다. 그는 그의 말대로 “팔자가 더러운 삶” 속으로 자신을 유폐하여 그곳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산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70대 할머니다. 할머니가 벽돌로 지었다는 움막은 너무 허술해서 한겨울에 촬영하던 PD는 집안이나 밖이나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없다고 할 정도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야 하고 꽁꽁 언 계곡물을 있는 힘껏 돌을 들어 내리쳐야 물을 얻을 수 있다. “힘들어, 힘들어” 하면서도 가끔 가곡을 부르는데 젊었을 때 성악을 한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목소리가 낭랑하고 곱다. 매주 금요일은 곱게 단장하고 읍내로 나가 PC방에서 10시간 넘게 게임을 하기도 하고, 기차 대합실에서 TV 뉴스를 보고 돌아오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과 거의 교류가 없지만 소문은 그 할머니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확인하기 위해 PD는 서울대를 찾아간다. 과연 그녀는 서울대 문리대 지리학과 64학번이다. 동창들 얘기는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생활하다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불행히 이혼해서 5살짜리 아들을 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부끄럽다고 생각한 그녀는 모든 관계를 끊고 생활하다가 그동안 모은 전 재산을 털어 그 골짜기 땅을 사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노후 준비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인’ 생활 10년 사이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땅은 경매에 넘어가 이미 다른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임야가 자신의 땅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사실은 재산이 넘어가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절망적인 현실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산속에서 생활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그녀의 모든 짐은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당장 이사갈 것처럼 싸여있었다. 아들이 자기를 데려간다고 해서 언제라고 옮길 수 있게 해두었다는 것이다. 5살 때 헤어져 지난 40년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들이 연락하느냐고 물으니, 아들과 텔레파시로 대화하고 있단다. 그녀의 상처는 얼마나 깊은 것이며, 그녀는 자신이 구성한 현실에 얼마나 깊이 숨어 들어가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의 기이한 삶을 보며 인간에게 세계는 무엇이며 또 현실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만의 현실을 구성하여 그 속에 움츠러들어 있었다. 고립된 상태에서 철저하게 주관적으로만 구성된 세계는 병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정한 교류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적 세계상과는 다른 것이다. 둘 다 객관적으로는 병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고립을 통해 구성되는 세계는 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는 점에서 병적 망상이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주체적으로 구성된 세계는 창조적이며 적극적인 환상이다.
문제는 이런 병적 망상이 오늘날 앞의 두 사람처럼 기구하거나 더러운 팔자가 아니더라도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호학적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세계가 디지털 미디어 테크놀로지로 전환된 이후 개인 주체에게 쏟아지는 정보의 양이 폭증하여, 주체는 더 이상 타자나 외부 세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제대로 된 관심을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이상 매체 변화에 관한 인간 주체의 정신 병리에 관한 내용은 프랑코 베라르디의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정유리 옮김, 난장 2013]를 참조하고 있다.) 의식의 정보 수용량은 한계가 있으며, 이를 늘리기 위해서는 지난한 훈련이 필요하고 그럴 시간이 없는 대개의 경우에는 약물에 의존해야 한다. 디지털화를 통해 자본의 순환은 가속화되지만 인간 의식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에서 인간 주체는 자극에 반응하기에도 벅찬 일차원적 존재, 병리적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주체의 소진, 피동성을 지난 세기말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적인 장기불황의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과연 오늘날의 인류는 기후 위기와 같이 임박한 파국에도 어떤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과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 “접속과 결속”은 이런 상황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대응을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조밀하게 구성된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인해 인간들의 접속(connection)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역설적으로 결속(unity, solidarity, conjunction)은 거의 해체되고 있다. “접속을 뜻하는 라틴어 connexio는 서로 연결된 물질들의 기능성, 그 물질들이 상호작용 하에 만드는 기능적 모형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반면 결속은 둥글고 불규칙한 형태들의 만남과 융합으로서, 그 융합은 부정확하고 일회적이며 불완전하고 연속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매우 개념적인 이 말들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 보자. 접속에서는 숱한 만남이 있지만 이 만남이 주체의 정체를 점점 더 강화하며, 각자 구성한 정체성의 장벽을 더욱 두껍게 만든다고. 결국 주체들은 개인으로 흩어지며 그 과정에서 자기애는 점점 더 강화된다. 그는 자기 속으로 폐쇄된다. 오늘날의 디지털 주체들이 실제의 만남에서보다 온라인 만남에서 더 크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버린 자아는 쉽게 터져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연약한 주체는 자폐로 자기를 보호한다. 또한 접속에서 만남은 무수히 이루어지지만 주체가 열려 다른 존재로 이행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속’은 어떤 것일까? 오늘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을 결속의 의미와 관련해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사는 주체들은 접속을 통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인지적·동작적·운동적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 반면 신경 자극에 반응할 수 있는 시간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것이 공감 능력이 줄어든 이유일 것이다····인간들 사이의 상징적 교환은 아무 공감 없이 정교화되고 있다.” 줄어든 것은 공감 능력 뿐이 아닐 것이다. 타자와 외부 세계를 향해 나 있는 촉수 자체가 메말라가고 있다. 모두 제 앞가림 하기도 힘들다고 느끼며 그럴수록 내향성, 자폐성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진 짐도 힘겨워 견딜 수 없는 허약한 주체의 시대에 남의 짐을 져주라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난감하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 요구하는 초자아의 명령이 아닐까? 바울은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는 권고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법이란 금지하는 율법이 아닌 자유와 해방의 복음이 아닌가? 이 말씀을 초자아의 외설적인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매인 주체를 자유를 향해 해방시키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을까? 이 말씀을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예수의 말씀과 함께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또 이런 말씀은 어떨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16:24).”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 멍에” 혹은 “제 십자가”를 지도록 권면한다. 그것은 편하고 가벼울 뿐만 아니라 쉼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멍에는 힘겨운 짐이 아니라 기꺼이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가벼워지고 쉼을 넘어 창조적인 기쁨을 가져다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결속”, 즉 공동체적인 교류의 삶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접속이 인간을 고립시키고 자폐 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주체를 점점 더 허약하게 만든다면, 결속은 주체를 개방하여 점점 더 강화시키며 더욱 더 창조적인 기쁨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해방으로 데려가는 예수의 짐은 결국 예수가 명한 예수 공동체의 삶, 즉 교회의 삶, 바울의 말로는 “예수 안에서” 사는 삶으로서 결속의 삶이 아닐까? 우리는 교회를 “사건으로서의 주체들의 사건으로서의 결속”이라고 다시 정의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는 성서를 따라 결속을 통해서 “‘예수의 짐’을 ‘자기의 짐’으로 여기는 주체를 강화하는 공동체” 또는 “서로 남의 짐을 져주는” 공동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2024년, 우리 이웃교회는 바로 이런 결속의 장소가 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자. 예수의 짐을 짐으로써 해방의 기쁨을 누리며, 각자는 더욱 고유한 주체가 됨으로써 충만해지고, 이 창조적인 힘을 통해 고립 속에서 피해의식에 찌들어 가는 남의 짐을 넉근히 짊어질 수 있는 기쁨과 창조의 공동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