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갱신(敎會更新)운동은 복음주의적 신교 교회들에서 일어난 네 가지 조류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세 가지는 개인전도운동,교회성장운동,카리스마(은사)운동이다. 교회갱신운동은 교회가 성경적 코이노니아(koinonia) 혹은 유기체적 친교(親交)에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 운동은 공동체적 삶을 위한 구조로서 소집단 구조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물론 최종적 목표가 교회갱신과 공동체 자체가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는 교회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해를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소그룹을 사용하여 교회갱신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그 소그룹은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나,그 성원들은 대개 교회의 영적 유산이 담겨진 책을 통해 신앙이 성숙하였고, 무기력해지고 제도화된 교회의 문제점을 식별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영적 각성자들을 사용하셨고,그 촉매로써 책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우리는 그 실례를 교회사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도적 전통에 서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영적 유산으로서의 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1) 독서는 생활이다
1993년은 '책의 해'였다. "책을 열자,미래를 열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다채로운 기념 행사들이 있었다. 책을 읽지 않는 국민이란 오명을 벗고 새로운 독서풍토를 조성하려고 도서관과 출판사와 독서운동가들이 힘을 모았다. 기독교계 일각에서도 독서운동에 참여하는 단체와 개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결과 독서에 대한 다소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서운동은 결코 한 차례의 바람으로 지나가는 운동이 되어서는 안된다.
연간 독서량을 교양서 기준으로 볼 때,일본은 12.7권이고 미국은 10.8권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 나라의 독서량은 그동안 이에 크게 못미치는 것이 사실이었으나,지난 해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들의 독서량이 크게 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수의 성인들이 만화 중독증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베스트셀러들을 보면 독자들의 도서선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광고선전 전략의 결과이다. 광고 메시지의 조작에 따라 독자는 소위 베스트셀러를 선택한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현대의 광고 선전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결국 성취하곤 한다. 어떤 책이 조작된 선전에 의해 유명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독서 경향도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소위 읽히는 책들이 다양하지 않다. 여러 날 붙들고 씨름할 만한 내용의 책들을 읽는 것이 아니라,쉽게 읽히는 쪽을 선호하고 있고, 주로 일정한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이 오늘의 독서 현실이다.
그 사람은 곧 그가 읽은 책이다. 한국교회 평신도의 질을 높이려면,그들이 읽을 책을 선정해주고 지도해 주어야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모두 독서계획을 세워야 한다. 특히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따라서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독서모임이나 연구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다.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다양한 전략이 수립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평신도들만 양산한다면 조국교회의 앞날은 어둡다. 이제는 평신도들도 홀로 설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만능 목사가 교회를 인도하던 시대는 지났다. 평신도의 은사를 계발해야 한다. 독서운동을 통해 미래를 책임질 젊은 평신도들을 깨워야 한다.
(2) 교회갱신의 필요성
스나이더가 말한 바와 같이,'포도주'는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것이요,가죽부대'는 이차적이나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다(눅 5:37,38). 부대(wineskin)는 복음을 둘러싸고 형성된 전통과 교회구조 그리고 행동양식을 포함한다. 교회사를 볼 때,시간이 갈수록 낡은 가죽부대는 복음을 구속하기 시작한다. 낡은 부대는 터져야 하고 복음은 갱신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부대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대도 변해야 한다. 교회사에서는 여러 차례 이런 혁신과 개혁이 있어 왔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은 무엇인가? 제도화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성경적 교회가 필요하다. 오늘의 교회는 대변혁을 요구한다. 무엇인가 새로와져야 한다. 우선적으로 '제도 존중주의'가 개혁되어야 한다.
현대는 현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도시는 독특하다. 따라서 보다 더 적절한 교회 구조가 필요하다다. 이런 이유에서 새로운 교회론이 요청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서는 소그룹이 매우 중요하다. 하워드 스나이더에 의하면,가정에서 비공식적으로 회합을 가지는 8-12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은 현대 세속 도시사회 속에서 복음의 교제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구조이다. 방법론적으로 말하면,소그룹은 교회의 갱신을 위한 은사의 발견과 사용에 대한 희망을 최대한으로 제공해 준다. 소그룹은 주후 2세기까지 교회 생활의 기본 단위였다.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중요한 성령운동에 있어서 소그룹을 사용하셨다. 16세기 종교개혁을 깊이 연구한 W.스탠포드 리드에 의하면,소그룹 성경연구반이 종교개혁 추진을 크게 도와 주었다.
오늘날 교회갱신의 목소리는 높다. 젊은 목회자들은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교회관과 목회 방식을 찾고 있다. 아직 그 파급 효과는 미지수이지만, 이미 공동체성 회복에 관심을 가지고 작은 교회나 공동체 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도 있다. 20세기의 미국교회가 경험한 것을 한국교회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유사한 상황이다. 교회는 결코 장소(plac)가 아니라 사람(people)이며,결코 건물이 아니라 믿음의 모임(a believing assembly)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교회관,목회관,평신도관이 새로와져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과 그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뿌리부터 새로와져야 한다. 인간은 보수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하나님의 본성은 새롭게 하는 것이다.
(3) 독서운동을 통한 교회갱신
독서운동을 통한 교회갱신은 가능한가? 독서운동이 교회갱신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나 대안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전략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교회의 본질을 바르게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식별(識別)할 수 있어야 한다. 식별이란 '알아서 구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식별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사도신경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이요,교회공동체의 독특한 특징과 표지이기때문이다.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공동체도,기독교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스 큉의 통찰은 도움이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생각을 분명히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이라함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인간적인 무엇이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진정한 확신과 성실한 믿음과 선량한 의지를 가진 인간 누구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라 함은 어떤 명상 또는 활동의 모임이나를,구원을 위하여 건전한 삶을 추구하는 어떤 인간 공동체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크든 작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결정적 구실을 하고 있는 인간 공동체들이 그리스도 교회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한스 큉에 의하면,이상의 정의들은 그리스도교의 식별을 위하여 익혀 둘 공식(公式)이다(왜 그리스도인인가? 68쪽).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만이 교회공동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아는가 하는 것은 진지하게 숙고할 문제이다. 필자는 에큐메니칼 신경들(즉,사도신경,아다나시우스신경,니케아신경)을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이며,동시에 <로잔언약>과 그에 준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선언이나 언표(言表)들을 존중히 여긴다.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고백이 있을 때 참된 교회는 정초(定礎)를 놓을 수 있으며,그 정초 위에서 교회공동체의 본질과 내용을 세워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독서운동은 교회갱신을 위해 몇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교회의 본질을 알기 위해 독서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알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유감스럽게도 신학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성경을 볼 때 자기가 보고자하는 것만을 볼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한 흑인 신학자는 그의 저서 <눌린 자의 하나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의 신학적 한계와 내가 흑인들의 사회적 조건에 밀착돼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고백이다.
최소한 신약교회는 2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각 시대마다 나라마다 교회의 외적 표현은 다양했다. 그러한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는 성경 진리의 조명 아래서 역사에 나타난 현실 교회들을 식별해야 한다. 성경연구를 위해서 많은 책을 읽고 묵상해야 하듯이,역사상의 교회의 본질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도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보고자 해도 볼 수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보아야 한다. 선각자의 통찰을 배워야 한다.
둘째, 교회갱신의 비젼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독서해야 한다. 독일 경건주의의 사도 스페너는 대학 시절 루터의 글을 읽고 영적 침체 상태의 독일교회 개혁을 열망했다. 그는 구체적 방안을 <경건한 소원/피아 데시데리아>에서 제시했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건강한 비판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그 첫 출발은 바른 지식과 식별력을 갖기 위한 자발적이고 체계적인 독서이다.
세째, 독서하고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한스 큉도 지적했듯이 한 지역에서 한 목회자의 행동은 큰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한 지역에서 5명의 교역자가 목소리를 합치면 주목을 끌게 된다. 50명이 참여하면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된다. 토론과 문제 제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갱신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자주 '실감나게'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희망은 있다. 희망이 있는 곳에는 행동도 있다. 언제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은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말고 침착 단순하게 행동할 일이요,그리스도의 복음에 더 충실하게 따라서 더 개방되고 더 사람을 섬기며 더 믿음직한...더 그리스도인다운 교회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일"이다(한스 큉).
이제 한국교회는 책을 읽는 신자를 키워야 한다. 가능하면 매년의 독서계획을 제시하고, 매월 양서를 소개해 줌이 좋다. 교회 형편에 따라서 작은 도서관도 운영하고,교회 안에 독서모임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