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프린테이라 연예일보 및 공화국 내 모든 일간지와 연예지에서 에이델라 리비도의 스캔들을 찍어내기 시작했을 때 에이델라의 매니저인 디코 신은 마침 지방 순회공연에 대한 건으로 기획사의 간부와 상의하기 위해 제도에 있었다. 여느 때의 아침과 같이 모닝 커피 한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탁자 위에 놓여진 조간 신문에 눈길을 던지던 그는 찻잔을 그대로 내던지고는 미친 듯이 말을 달려 바찌로 향했다. 그는 3마리의 말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고 아마 제도-바찌간 이동 최단 기록이 될 만한 2일이라는 시간만에 바찌에 있는 에이델라 리비도의 숙소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바찌라는 작은 도시에 이토록 인구가 많다는 것에 놀랐고 잠시 후 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에이델라 리비도를, 정확히 그녀의 스캔들을 취재하기 위해 외지에서 온 기자들이라는 사실에 다시 현기증을 느꼈다. 거의 도시 거주인 보다도 많은 수의 기자들이 와 있었으므로 그는 겨우겨우 숙소 앞에 구름처럼 몰려있는 기자들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가 에이델라가 묵고 있는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야 이 녀석! 당장 문 열어!”
그러자 문 너머에서 작은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는~누구신가요~이른 아침부터 이토록 무례한 당신은~누구신가요~♪”
디코는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화가 났다.
“에이델라!”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고 그 틈으로 에이델라의 큰 눈이 보였다. 디코는 문을 벌컥 열어 제꼈지만 안전고리가 걸려있어서 더 이상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에이델라는 분노로 인해 얼굴색이 푸르스름하게 변해 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화낼 거죠?”
디코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얼굴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는 푸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아니이.”
에이델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화났는데?”
“으흐. 으흐흐. 화는 무슨. 그러니까 이 문 어서 열지 않으련?”
“흐응~?”
“내가 얼마나 에이델라가 걱정됐으면 제도에서 바찌까지 이틀만에 달려왔겠니? 오는 내내 네 걱정뿐이었단다. 이렇게 기자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서 무서웠지? 이제 괜찮다구.”
“오는 내내 ‘이 계집애 내 이번엔 반드시 잡아 족치고 말겠다’라고 생각한 게 아니구요?”
“아니! 어디서 그런 무서운 말을 배웠어? 아유. 귀엽지 우리 에이델라? 디코 아저씨는 절대로 착한 에이델라에게 화를 내지 않는단다. 그러니깐 어서 문이나 좀 열려무나.”
“......느끼해.”
진실로 이 계집애는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디코는 기획사에 취직하기 전 용병으로 일하며 미친 듯이 적들을 도륙하던 ‘쌍검의 디코’로서의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그리고 한달 후 출시될 새 앨범 따위보다 ‘에이델라 리비도 특강. 사람 열 받게 만드는 법’이라는 책을 출판하는 것이 훨씬 장사가 잘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순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의 안전고리가 풀렸고 디코는 잽싸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미친 듯이 에이델라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 생각 없는 것아!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대형사고를 친 거냐! 네가 날, 정말로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거냐! 말해! 당장 말해! 네가 가수가 된 것은 이 디코 신이라는 놈을 말려 죽여버리기 위해 그런 거였다고! 에이델라 리비도는 디코 신을 말려 죽이려고 가수가 됐어요, 하고 말해! 뭐가 대륙의 연인이냐! 이 대륙의 꼴통아!”
에이델라는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와와아, 화, 화화 안나따면서 또 거거짓말했다아아.”
“아악! 시끄러 이것아! 자, 사실대로 불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모조리 빼 놓지 말고 어떻게 된 건지 말야!”
디코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에이델라는 켁켁 기침을 몇 번 해대곤 침대로 가 걸터앉았다.
“그러니까......”
디코는 에이델라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두 잔의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후 한참동안 말없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니 머리가 터져 나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용병시절 달랑 검 두 자루를 들고 다 죽어 가는 동료와 함께 그란츠의 적병 열댓 명을 눈앞에 뒀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아아. 정말 이런 기분은 용병생활 접으면서 다시 느낄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한낱 소녀 가수의 매니저 일을 하며 이토록 명줄 짧아지는 기분을 다시 맛봐야 하는 거지?
그는 올백으로 넘겨 묶은 머리끈을 풀었다. 적당한 길이의 흑발이 어깨를 스치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그는 마구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회견을 열고 어떤 식으로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에이델라는 그에게 다가와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며 장난을 걸었고 디코는 그럴 때마다 캭 소리를 내며 파리를 쫓아내듯 손을 휘둘렀다.
장난을 걸어도 별 반응이 없으니 에이델라는 재미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손질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작업이었음에도 그녀가 다시 디코가 있는 거실로 나왔을 때 그는 아까 전과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디코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말끔히 옷을 갈아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어디 갈라구?”
무의식적으로 뱉은 디코의 말에 에이델라는 히죽 웃었다.
“남편 보러 갈라구.”
“......”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지만 디코의 얼굴색이 파랗게 변해 가는 것을 본 에이델라는 조금 뜨끔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헤밀즈 라이본 보러 갈라구.”
“시끄러! 당장 이리 와서 앉아!”
에이델라는 볼을 부풀리며 디코를 바라보았지만 곧 그의 곁으로 와 앉았다. 디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의 하녀를 불러 자신의 몫으로 커피를, 에이델라의 몫으로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주문했다.
“그거, 벌써 세 잔 째예요.”
디코는 에이델라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됐어. 그런 것 보다, 어쩔 생각이야? 진심으로 그 남자랑 결혼하겠다는 건 아닐 거 아냐?”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디코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에이델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요즘 너 이상해 진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냐. 어차피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조속히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너. 인정하라고. 이건 네가 실수한 거야.”
에이델라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때마침 하녀가 두 개의 찻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는 하녀의 손길은 마구 떨리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에이델라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잠시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에이델라의 모습을 디코는 놓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찻잔을 세팅한 하녀가 쟁반을 가슴에 끌어안고 무언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자 에이델라는 싱긋 웃으며 방 한구석으로 가 가방을 뒤적거리곤 그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하녀에게 건네 주었다.
“이거, 저 때문에 수고해주시는 것에 대한 답례예요. 필요하실 지 모르겠지만. 제 사인을 넣은 두 번째 앨범인데 받아 주실래요?”
“아,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엄청난 보물이라도 손에 쥔 양 작은 상자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는 연거푸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에이델라는 닫혀진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찻잔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디코씨.”
디코는 에이델라의 부름에 황망히 대답했다.
“으응?”
“헤밀즈 라이본이라는 남자.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
디코는 대답하지 않았고 에이델라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우유를 한 모금 마신 뒤 피식 웃었다.
“그 사람. 날 보고 망할 계집애라던데요? 난 세상에 디코씨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나한테 그런 말하는 사람이.”
디코는 머리를 긁적이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에이델라가 바퀴벌레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담배연기라는 것을 생각해내곤 어정쩡하게 다시 손을 꺼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망할 계집애라고 부르는 것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라는 추론을 할 수 있는 거지, 대체.”
에이델라는 킥킥대며 웃었다.
“아~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소녀를 꼬셔내서 이렇게 만들어버리다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 대륙의 연인이며 여신의 목소리라는 거야.”
디코는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용병생활을 슬슬 그만 둘까 생각하던 몇 해 전의 여름. 여행 중에 들른 자그마한 마을의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에이델라의 모습과 날이 저물어 버린 것도 모르고 그녀의 노래에 매료되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제도로 향한 뒤 한 달만에 다시 그 마을을 찾았을 때 그는 용병이 아니라 기획사의 매니저가 되어있었다.
마을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작은 소녀는 3년 만에 대륙의 모든 이에게 사랑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결정이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정말로 좋은 일이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 이제 슬슬 그만둘까 봐요. 그런데 어떻게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어. 시작은 그렇게 쉬웠는데 어째서 그만두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거죠? 아니, 그만둘 수나 있을까?”
디코는 못내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에이델라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혔지만 디코는 그런 그녀를 무시했다.
“언제라도 그만 둘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해 줄게.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아니야. 게다가 이런 방식이라니. 안 좋아. 이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일만 벌려놓는 것 아냐. 이런 걸로는 도망칠 수 없어.”
“쳇. 겨우 열 여덟 살 먹은 여자애한테 바라는 것도 많으셔라.”
“난 네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어. 오랜 세월 칼밥을 먹고 살아온 나 같은 놈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거기에 대해 후회는 없어. 네 노래를 들은 그 수많은 사람들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거야.”
디코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너의 노래가 정작 너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면. 너 언제라도 그만 둘 수 있어. 그만 둬야해. 하지만 조금만 참아 줘. 지금 넌 그런 게 아냐.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지. 너무 스트레이트하게 달려온 것 같다. 그건 내 실수야. 인정하지. 스케쥴 몇 개를 조정할게. 그리고 여기 바찌에서의 공연도 보름 뒤로 미룬다. 기획사와의 트러블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아무 생각도 하지말고 푹 쉬어.”
디코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기자들을 만나서 급한 불은 꺼야겠지. 에이델라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디코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건 알아. 그렇지만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리고 너. 헤밀즈 라이본이라는 사람과의 일은 네가 직접 해결해. 지금 그 사람한테도 여기 못지 않게 기자들이 몰려있겠지? 그 사람은 일반인이야. 그런 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한 때의 기분으로 터무니없는 상황을 타인에게 떠맡긴 셈이지.”
에이델라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뭐......어떤 면에서는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디코는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문득 되물었다.
“뭐?”
“응? 뭐라구?! 그 계집애가 내 어떤 면에 반한 것 같냐고? 아하~그게 궁금하시구만? 바로 이거다 자식아!”
헤밀즈는 기자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달려드는 기자들의 거의 모든 질문에 주먹으로 답하는 그의 곁에서는 포우던 라이본이 역시 달려드는 기자들에게 호쾌한 주먹질을 선보이고 있었다.
“아이고! 시아버지 된 기분이 어떠시냐고?! 이렇소이다!”
몇 명을 길바닥에 눕혀 버리자 기자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헤밀즈와 포우던의 주위를 빙 둘러싼 기자들 중 용기 있는 한 명의 기자가 그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기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이 사실이었군! 대체 이 무슨 행패란 말이오! 대륙 모든 이들의 알 권리를 위해 저 멀리 제도에서부터 달려온 기자들에게 성실히 답변해 주지는 못할망정 주먹질이라니! 에이델라 리비도양이 당신 같은 무뢰한과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오?”
“그 망할 계집애에게 물어봐!”
방금 나선 기자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다른 기자가 퉁명스레 대꾸하는 헤밀즈에게 소리쳤다.
“흥! 기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다니. 이제 정말 대륙에 저널리즘이란 개념은 땅에 떨어진 것인가! 이봐 당신들! 실수한 거야!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걸......어어? 이봐!”
헤밀즈는 성큼성큼 그 기자에게 다가갔다.
“네놈에게 알 권리가 있다면 나에겐 주먹질을 할 권리가 있다! 지금 그걸 행사하겠다!”
대답도 듣지 않고 후려친 주먹에 기자는 찍소리도 못하고 누워버렸다. 그러자 남은 기자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누군가가 소리질렀다.
“좋다! 내일 조간 일면 기사는 ‘대륙의 연인 깡패와 결혼하다‘로 간다! 두고보라고 이 깡패 부자야!”
“그거 좋군! 우리 조간 일면은 ‘대륙의 연인 동네 건달과 사랑에 빠지다’올시다!”
“저 자식들이......”
헤밀즈는 분에 겨워 펄쩍펄쩍 뛰었다. 그런 그에게 포우던이 일갈했다.
“야 이놈아! 이게 무슨 꼴이냐 대체! 집 앞에도 저놈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고 뭐 이건 어딜 가든 따라붙으니 대관절 뭘 할 수가 없잖냐!”
“아니 이런 망할, 그게 저 때문입니까? 저도 완전히 말렸다구요! 기니스 꽃집의 세브레 누님한테도 벌써 3일째 못 가고 있는데! 내 이 망할 계집애를 찾아내서 아주 그냥......”
포우던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런데 진짜 그거 뭐 하는 계집앤데 이렇게 기자라는 인간들이 몰려오는 거냐?”
“아 참. 그거야 제 알 바 아니죠. 뭐? 대륙의 연인 어쩌구 하던데. 뭐야 그게? 난 그럼 대륙의 연인의 연인이냐? 아 25년 인생 모나지 않게 굴러가다가 갑자기 꼬이누나!”
포우던은 아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혀를 찼다.
“내가 이놈 이거 언젠가 여자 때문에 경을 칠 줄은 알았다만 18살 솜털도 안 가신 계집애 때문에 이지랄 할 줄은 몰랐다. 꼬시다 이놈아!”
헤밀즈는 입맛을 다셨다. 정말 이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일일까. 나는 단지 기분 좋은 일요일 아침 빵 사러 가던 길에 웬 어린 계집애를 만났을 뿐인데. 뭐 그 와중에 입술이 살짝 스쳤던 일이 있긴 했지만. 또 생각해 보면 이상한 사내들을 상대로 어쩔 수 없이 몇 번 주먹질을 했을 뿐인데 갈빗대가 두 대나 부러졌다. 정말 심신의 컨디션이 바닥을 기는 상태로 병원을 찾아가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세브레 누님과의 데이트 비용으로 꼬불쳐 놓은 돈이었다!-마법적인 치료를 받은 헤밀즈는 그 와중에도 파리떼 꼬이듯 모여드는 기자들에게 결국 분노를 터트리게 되었다.
헤밀즈는 욕설을 내뱉으며 무심코 담배를 꼬나 물었다. 막 붙을 붙이고 기분 좋게 한 모금 깊숙이 빠는 순간 뒤통수에서 불이 났다.
“이 미친놈아! 아버지랑 맞담배질 하자고?”
사비토는 셔츠 소매에 커프스링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상반신에 피트되는 검은 수트를 걸친 후 마무리로 순금으로 세공된 코걸이 안경을 슬쩍 콧잔등에 얹어놓았다. 흔히들 공화국의 검성, 보기 드문 검기(劍技)의 기재 등등 그를 수식하는 패도적인 문장으로 인해 사비토 그레이를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로 오해하곤 하지만 사실 사비토는 아름다운 그의 누이 옥사나 그레이를 쏙 빼 닮은 미남자였다. 근육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과도할 정도로 발달된 근육질의 몸은 아니었고 단지 적당히 보기 좋게 발달한 몸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 기사작위를 받고 프린테이라 제3 기사단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을 때 성질 안 좋은 거대한 몸의 기사가 실실 웃으며 다가와 어찌하면 그런 팔로 검을 들고 사람을 벨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사비토는 역시 실실 웃어주며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들썩여주었다. 잠시 후 목 언저리가 가려워진 그 기사는 목에 손을 대어보았고 어느새 사비토가 자신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을 그어놓은 것을 깨닫고는 할 말을 잊어버리자 그때서야 사비토는 입을 열었다.
‘기합과 근성이다.‘
사비토 그레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누이 옥사나 그레이와 상반되는 성격을 지녔지만 단 한가지, 누이와 같은 취미는 자신을 패셔너블하게 꾸미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외면이든 내면이든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만들어간다는 것. 그것이 그레이 남매의 좌우명이자 그레이 가문의 가풍이었다.
그레이가의 충직한 하인 분스가 광택을 잘 내어놓은 구두를 신은 사비토는 방 한구석의 진열대에서 프릴리스를 꺼내어 옆구리에 끼었다. 온통 검은 색 일색인 복장에 타이를 매지 않고 앞섶을 풀어헤친 셔츠. 그리고 버클에 끼운 것이 아니라 대충 옆구리에 끼어놓은 명검 프릴리스는 확실히 그가 의도하는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그레이가(家) 하녀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는 저녁에 왕이 직접 초대한 디너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자인테라의 소탕에 대한 포상은 질리도록 받았지만 오늘의 약속은 왕을 비롯해 몇 명의 측근들만이 참석하는, 자그마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물론 그는 지금쯤 바찌로 향하고 있을 가디언의 회원들과 메지스 진트의 행보에 온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에 왕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 따위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 모임에 프린테이라 왕실 직속 전투마법사 집단인 10인의 사도 중 몇 명이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10인의 사도 중에는 그의 누이 옥사나 그레이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비토 그레이 자신이야 워낙에 왕실에 들락거리는 귀족들에게 개차반으로 알려져 있고 그 또한 귀족들이 자신을 어찌 평가하는지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누이가 자신 때문에 정적들에게 공격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자신의 누이 옥사나에게 있어서는 착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리 되고 싶었다.
“누님!”
궁 안으로 들어가 누이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사비토는 작은 정원의 분수대 곁에 앉아 책을 읽고있는 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왔구나.”
옥사나는 동생을 보곤 역시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역시 단출한 검은색 투피스와 속에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상하의의 옷감이 다른 세퍼릿(separate)이었고 그녀의 목에 걸린 10인의 사도의 증표인 육망성은 블라우스 밖으로 꺼내져 있었다. 증표는 그녀의 몸과 복장에 비해서 꽤 컸지만 그런 언밸런스함이 오히려 색다른 매력이었다.
옥사나는 동생에게 다가가 그의 옷깃을 다듬어주었다.
“우리 동생 멋있구나. 폐하께서도 오늘 저녁을 상당히 기대하고 계신단다.”
“흠......그래? 뭐 그 분이야 이상하게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말야.”
확실히 프린테이라 공화국의 국왕 루블란셰는 사비토를 편애하는 축에 속했다. 아무리 귀족들이 자신의 옆에 붙어서 사비토의 험담을 해 대어도 국왕은 언제나 들은 척도 안하고 마치 자식을 대하듯 그가 원하는 일이라면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건 사비토 그레이라는 기사가 가지고 있는 내외적인 힘에 기인한 전략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그저 강한 한 명의 남자에 대한 동경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흠. 뭐 오늘은 나도 폐하께 할 이야기도 있고 하니 상관없겠지. 단지 폐하의 옆에서 촐랑대는 늙은이들이 꼴 보기 싫다고.”
“우리 동생이 폐하께 할 말이? 무슨 이야기일까?”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얼마간 여행을 떠나볼까 싶어서.“
사비토는 오른손 중지 위에 프릴리스를 얹어놓고 슬슬 돌렸다.
“그래? 하긴......요 일년간 쉴 새 없이 달려오긴 했지만......그런데 처음이구나. 네가 휴가를 신청하는 건.”
옥사나와 사비토는 궁 안의 알현실로 향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호위 기사가 아닌 이상 궁 안에 무기를 소지할 수는 없는 법이었지만 국왕은 이미 오래 전에 공화국에서 단 한 명 사비토 그레이에게만은 궁 안을 방문하는 방문자들에게 적용시키는 모든 법에서 예외를 두었기 때문에 프릴리스를 들고 손장난을 하는 사비토를 제지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려고?”
“그냥 뭐. 큰 도시보다는 작은 도시를 둘러볼 생각이야.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도 아니고. 아예 안 갈 수도 있다고.”
“어쨌든 가게 된다면 폐하께서도 흔쾌히 윤허해 주실 거야.”
“물론.”
사비토의 손가락 위에서 놀고 있던 프릴리스는 어느 새 사비토의 손에 쥐어져 조용한 왕궁의 공기를 갈랐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 변방의 소린 백작의 셋째 아들과 리들리 후작의 막내딸이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백작과 후작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결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얼마나 지났을까. 사비토는 벌써 지루해졌다. 대체 다른 사람 결혼이야기가 재미있는 화제 거리일 턱이 없지. 그는 슬슬 바찌에 거의 도착해 있을 메지스 진트가 이끄는 진상조사위원회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에이델라 리비도가 정말로 그 헤밀즈 라이본이라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터무니없는 소리다. 여신의 목소리, 대륙의 연인에게는 그에 걸맞는 수준의 남자가 함께 해야 한다. 적어도 나 같은.
확실히 사비토는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공화국의 검성, 드래곤 슬레이어 사비토 그레이조차 감당할 수 없는 여자란 세상에 없을 테니까. 사비토는 코걸이 안경을 벗어 수트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레이 경?”
“네?”
사비토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들 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른 듯 조금 불쾌한 기색의 저 중년남자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실례했습니다, 기르헨 후작.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비토는 이번 디너가 있기 며칠 전 누이가 알려준 수많은 궁 안 귀족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기억을 재빨리 더듬었다. 기르헨, 기르헨, 기르헨. 그리고 사비토는 곧 기르헨 후작이라는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르헨 후작. 후작이라는 작위보다는 그의 뒤에 있는 새무얼 달튼이라는 남자에 대해 신경 써야한다. 새무얼 달튼. 10인의 사도 중 혈우(血雨)의 사도. 거지같은 칭호에 어울리는 거지같은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사람을 죽일 때 곱게 죽이는 법이 없으며 꼭 핏덩어리를 만들어 놓기 때문에 얻은 칭호가 혈우의 사도. 게다가 물욕이 많은 놈이다. 마법사는 물질적인 것에 욕심낼 시간과 여유가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10인의 사도 중 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재능은 있는 놈이라는 것. 그렇다면 새무얼 달튼이 자신을 물심 양면으로 후원하고 있는 기르헨 후작의 입을 빌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경이 자인테라를 죽이고 그의 레어에서 가져온 전리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
‘빙고.’
사비토는 얼굴에 은근히 웃음을 띄우며 깍지를 꼈다. 그리고 아주 잠시 동안 테이블 건너편 멀리 자리잡은 새무얼 달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 그의 행동에 기르헨 후작은 입맛을 다시며 따뜻하게 데워진 물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옛 고대 왕국의 금화나 보석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 그......몇 가지 특이한 물건도 있지 않습니까. 드래곤의 레어라는 곳에는.”
후작은 잠시 동의를 구하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루블란셰는 아직 후작의 이야기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 듯 디저트를 먹으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디너에 참가한 10인의 사도 중 3명만이 후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혈우의 사도 새무얼 달튼, 유성의 사도 옥사나 그레이, 진홍의 사도 랜드 윌스톤이었다. 후작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인테라가 수백 혹은 그보다 몇 배나 되는 오래된 과거에서부터 모아온 물건들이라 지금 마법협회나 고대 왕국을 연구하는 몇 개의 왕실 직속 단체에서도 흥미를 보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사비토는 말허리를 잘랐다.
“검 두 자루와 스크롤 네 개. 그리고 광물 원석 두 상자.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조각상 다섯 점. 기타 마법을 포함하고 있는 아티팩트 십여 개.”
사비토는 잠시 미소를 짓곤 다시 말했다.
“이미 원정대가 자인테라의 레어에서 금은보화를 제외한 마법적인 물품의 종류와 수량에 대해 자체조사를 해 놓았었습니다. 별로 없더군요. 뭐......그게 전부였으니까요.”
“말도 안 돼.”
새무얼 달튼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에 찬 음성을 흘렸지만 국왕의 면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기르헨 후작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새무얼을 바라보았지만 새무얼 역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는 진홍의 사도 랜드 윌스톤이 미소를 지으며 품질 좋은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병신들. 실수한 거지. 그레이 경이 무식하다고 생각해 온 네놈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 그레이 경은 단지 왕궁 내의 일에 무관심할 뿐이다. 뭐 애초에 정말 그레이 경이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랜드는 사비토를 힐끔 바라보았다.
‘가디언의 회장 자리는 꿈도 못 꾸지.’
사비토는 루블란셰에게 말했다.
“폐하. 기르헨 후작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흉포한 블랙 드래곤 자인테라를 처단한 사실이 또 한가지 우리 프린테이라 공화국에 복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기대에는 못 미치는 양이었지만 저는 자인테라의 레어에서 나온 몇 가지 마법적인 물건들을 그것들을 원하는 단체에 헌납할 예정이오니 윤허를 부탁드리는 바이옵니다. 제 생각으로는 여기 계신 혈우의 사도 새무얼 달튼 경께서 자신의 연구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듯 싶으니 달튼 경에게 내려주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개인의 연구가 아니라 10인의 사도라는 이름 아래 연구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말을 마친 사비토는 싱긋 웃었고 그의 환한 미소에 국왕은 단지 미소지을 뿐이었다.
“짐의 마음으로는 경이 애써서 처단한 드래곤의 비보이니 경에게 모두 하사하고 싶지만 또 그렇게 말한다면. 뭐 그레이 경이 알아서 하게.”
사비토는 웃으며 국왕을 향해 와인 잔을 들었다.
“사비토. 이제 보니 너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구나?”
책망하는 듯한 누이의 목소리에 사비토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에 웃음을 띠고있는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한 번 만이야. 내가 언제 아티팩트에 의존하는 거 봤어? 개인적으로 조금 필요한 일이 있어서 빼돌린 거니까. 그리고 그때 누님도 좋아했잖아? 레어에서 아주 신이 났더구만. 아티팩트 몇 개 빼고는 거의 다 누님을 위한 물건이니까. 잘 써.”
옥사나는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뭐......그거야 그렇지만. 솔직히 마법사 밀히유 지스가 만든 스크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사비토는 껄껄 웃었다.
“그럼 된 거야. 아무튼 일단 휴가도 받아놨으니 좀 쉬자고.”
“그건 그렇고 왜 갑자기 폐하께 내 휴가까지 신청한 거니? 놀랐단다.”
“원정 후에도 일과가 똑같잖아. 매일 늦게 들어오고. 얼마 동안만이라도 쉬어. 드래곤을 잡은 거라고. 뭐 생각보다 쉽긴 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대규모 전투를 치른 것과 같은 정도니까. 게다가, 집에 숨겨놓은 아티팩트들 어떻게 사용하는가 물어보고 싶고.”
옥사나는 와인 두 잔에 발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입을 열었다.
“하긴 조금 피곤하긴 한 것 같고. 사도가 된, 아니 마법사가 된 이래 이 정도 큰 싸움은 처음이기도 했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골라놓은 아티팩트 중에는 꽤 위험한 것들도 많이 있으니까. 네 말대로 하는 게......”
옥사나는 앞서 가던 동생이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그의 등에 얼굴을 살짝 부딪혔다. 작게 비명을 지른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사비토를 바라보았다.
“누님. 그러고 보니 깜박했군. 좀 볼일이 있어서 말야. 먼저 궁 앞에 가 있어. 마차를 준비시켜 놨으니까. 잠깐이면 되니까 기다려 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옥사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옥사나의 모습이 사라지고 잠시 정적이 흐르던 복도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레이 경. 눈치가 빠르시군. 유성의 사도께서는 아예 모르시던 것 같던데.”
사비토는 새무얼의 말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누님께서 조금 둔한 면이 없지 않지. 전투에서는 다르지만. 그런데 누님께서 네 낌새를 못 느끼신 건 말야......”
새무얼은 사비토가 사용하는 거침없는 이인칭에 놀랐다.
“누님께서는 살의나 살기를 파악하시는 능력은 다른 사람 못지 않아. 단지 순수하신 분이라 네놈 같이 더러운 놈의 지저분한 체취는 모르시는 거다. 알았냐?”
새무얼은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몸 주위로 순수한 살의가 번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사비토에게 짓씹었다.
“칼밥 먹고사는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이봐 사비토 그레이. 기사란 놈들은 결국 마법사의 서포트 없이는 인간 대 인간의 싸움에만 효과 있는 소모품일 뿐이야. 자인테라를 잡았다고 해서......뭐 좋아. 세상 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사비토는 무심히 귀를 후빌 뿐이었다. 곧 그는 따분해 견딜 수 없다는 듯 무색의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너. 너무 가까이 와 있는 것 같군.”
사비토의 말이 끝나고 새무얼의 시신경이 사비토와 자신이 떨어져 있는 거리가 5미터 정도라는 정보를 그의 뇌에 전송했을 때 이미 그의 복부에는 프릴리스의 검집이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엎어져 끅끅 숨을 들이키는 새무얼의 머리를 검집으로 툭툭 건드리며 사비토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간격이라는 게 있지 않나. 검을 쓰는 자들에게는. 그게 말야. 이런 거다. 근데 또 골 때리는 게 말야. 내 간격은, 내 시야다. 결국 내가 보고 있는 상대는 나를 죽일 수 없다구. 그게 수 백 미터라고 해도. 그러니까 날 죽이고 싶다면 전방위(全方位) 공격마법을 제도 전체에 뿌려대든지 해.”
사비토는 시선을 돌려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조만간 제도를 떠나 여행을 떠날 지도 모르겠군. 내가 없다고 해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새무얼은 다시 온 몸을 바늘로 쑤셔대는 듯한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살기였다. 사비토의 온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은 진정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기운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무얼은 오금이 저려왔다.
“......누님께 이상한 짓 할 생각 마. 알겠나, 혈우의 사도?”
새무얼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비토의 최고급 구두가 대리석 복도와 부딪히며 내는 일정한 간격의 소리가 어서 빨리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끙, 하는 소리가 나며 에이델라가 지붕위로 올라왔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헤밀즈는 지붕 위에 누워 달을 바라보고 있었고 에이델라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풀썩 주저앉았다.
“아니, 대체 손도 안 잡아 주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있담?! 게다가 데이트 장소가 지붕 위라니. 정말 매너라고는......기자들 피해 도망 나오는 건 또 어떻구.”
헤밀즈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궁시렁거리는 에이델라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에이델라는 빙긋이 웃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여자들은 대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면 먼저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붉히며 왜 그러냐는 식으로 물어왔던 경험에 비추어 보아, 헤밀즈는 역시 이 계집애는 또라이다,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헤밀즈는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네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결혼이라니. 아니 대체. 정말 뭐야? 내가 뭘 잘못했다구......이거 정말 미치겠구만.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안하다. 그만해 응?”
“갑자기 어느 날, 처음 만난 여자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면. 헤밀즈씨는 어떻게 하실 거죠?”
뜬금 없는 대답에 헤밀즈는 일어나 앉아 에이델라를 바라보았다.
“사랑노래만 불러왔지만. 사실 해 본적도 없죠. 뭐 대단한 걸까 생각이 들기도 해요. 3년 동안 비슷비슷한 노래만 부르다보면.”
에이델라는 고개를 들어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었다.
“제 노래에서는 오랜 기간 한 남자를 사랑하다가 결국 그에게 배신당한 여자도 나오고. 터프한 여자가 소심한 남자를 리드해 가기도 하죠. 나약한 남자가 아름다운 미녀를 얻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를 일찍 떠나보낸 사람의 아픔도 있어요.”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헤밀즈였지만 그가 아는 건,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입다물고 있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에이델라는 갑자기 헤밀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그리고 다급히 생각난 것은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진심.”
헤밀즈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어. 정말 그런 거였나. 한 눈에. 나에게 반했다고? 그런데 보통 그런 고백을 여자가 먼저 하나? 아냐 또 모르지 요즘 애들은 조숙하니까. 아 그런데 정말 어린애는 취향이 아닌데. 하긴 또 보면 귀여운 얼굴이긴 해. 잘 키우면 꽤 쓸만할지도. 가슴 따윈 찾아볼 수도 없다는 게 걸리긴 하지만 그거야 뭐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요법이 있지. 발센녀석에게 배워야겠군. 아 근데 아버지가 정말 울 때까지 놀려댈텐데. 영계랑 사귄다고. 어쩌지? 기니스 꽃집의 세브레 누님은? 아냐 그 전에 빵집의 레이시가 또 칼을 들고 달려들면? 정말 그땐 죽는 줄 알았다구.
미친 듯이 고민하는 헤밀즈의 귓가에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본~순간~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그리고 다급히 생각난 것은~♪”
미간을 좁히는 헤밀즈에게 에이델라가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캬하하! 내 두 번째 앨범의 노래 중 한 곡의 가사였다! 아이고 저 표정 좀 봐요! 으하하하하아악~”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데굴데굴 구르는 에이델라의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헤밀즈 라이본은 다리를 모으고 쭈그려 앉았다. 그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첫댓글 추석 다음에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추어 연재.... 이 사람 꽤 하는걸..
다음은 빠르면 신정 늦으면 구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