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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도보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손성일[손성일]
강화 역사관과 甲串(갑곶)돈대 | ||||||||||||||||||||||||||||||||||||||||||||||||||||||||||||
강화도 전체를 우린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단군이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으로 알려진 마니산의 첨성단부터 고인돌 등의 역사 깊은 유적들이 있고, 또 몽고와의 항쟁 때 고려의 임금이 이곳 강화로 피난 온 곳이기도하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혹독한 박해를 겪어야 했던 믿음과 순교에 이르는 성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강화역사관과 갑곶돈대는 나란이 붙어 있어 한 번에 모두 돌아 볼 수 있어서 좋다.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곳으로 고종 21년(1234) 최의가 금속활자로 상정고문예문 28부를 인출한 사실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후집에 기록되어 있다. 서양보다 200년 앞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한다.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 등의 영세 불망비 및 선정비이며,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삼충신(강흥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호국정신이 깃든 삼충신사적비 등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며, 총 67기이다. 자연보호의 일환인 금표를 숙종 29년(1733) 강화유수부(고려궁지) 앞과 여러 지방에 세웠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졌다한다. 금표에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곤장80을 때린다고 적혀있다. 우리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표석이기도하다. 당초 이들 비석들은 1965년 강화대교 착공시 그 주변에 있었던 것을 용정리 1086번지로 이전하였다가 비석군 정비사업으로 이 곳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화역사관은 강화도에 위치한 각종 전적지와 유적을 둘러보는데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1988년 9월 문을 열었으며, 강화와 인천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해 꾸며 놓았다. 선사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 등 모두 4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전쟁과 관련된 유물등이 전시돼 있다.
이섭정은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측이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며 지은 팔각정자라하지만, 무너진지 오래된 것을 태조 7년(1398)년 강화부사 이성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 오르면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맑게 개인 날에는 북한도 보인다고한다.
강화도는 남북 거리 28Km 동서 거리 16Km 전체 둘레 112Km 에 달하는 크기라한다. 최근에는 섬의 둘레를 잇는 해안도로가 잘 정비돼 있어 자전거 여행도 가능하다하며, 섬 안쪽의 길도 대부분 말끔하게 포장되어있어 자가운전으로 섬 곳곳을 둘러 보기에도 편리하고 좋다
대포(홍이포)를 보관하고 있는 누각
홍이포는 215cm의 길이로 꽤 큰 포이며 사정 거리가 약700m에 달하지만 화약의 폭발하는힘으로 포탄은 날아 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매우 약해 그 당시 서양 대포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墩臺(돈대)' 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甲比古次(갑비고차)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甲串墩臺(갑곶돈대, 사적 제 306호)' 강화도는 서울의 주요 방어기지인 동시에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왕실이 피난하는제일의 후보지였다. 갑곶의 성문인 진해루가 강화도 동문 역할을 하였으며, 이 돈대는 1977년 복원한 것이다.
'佛狼機(불랑기)'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으로서 포 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子砲(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 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小砲(소포)'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 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갑곶돈대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와 강화대교. 강화도와 김포를 잇는 다리. 江華大橋(강화대교)는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경기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잇는 다리다.
여러 곳을 둘러보고, 역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첨성단을 비롯하여 천문도, 고인돌, 조선시대 관복을 디오라마로 표현하였으며, 선사시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등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까지의 유물이 전시 되어 있다. 강화의 유적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유적 분포도 모형도를 터치스크린과 연결하여 해당되는 유적지를 손으로 클릭하면 모형도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어 강화의 유적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강화인의 강인한 정신으로 일구어낸 찬란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곳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을 디오라마로 재현하여 제작과정을 누구나 알기 쉽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작된 경판을 이용하여 직접 인쇄 할 수 있도록 체험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조선 제 19대 숙종때 강화 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에 유수 민진원이 정족 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큰 규모의 종으로 주조하였으며, 강화성문을 여는 시간과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쓰던 종이라한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스님 사인비구에 의해 만들어진 사인비구주성동종(보물 11호) 8개 중 하나이라 한다. 사인비구는 전통적인 신라의 종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가해 새로운 종을 만들었는데, 전해지는 작품이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인다.
민족문화의 정수이자 강화 3대 문화유산 중 하나로 고려상감청자를 들 수 있다. 청자의 은은한 빛깔은 우리 선조의 얼을 느낄 수가 있으며, 전시된 자기류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유물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인 '백자', '청자' 등 자기류와 고서, 강화에서만 생산되는 '화문석' 과 '반닫이'가 전시되어 있다.
인조 5년(1627)과 인조14년(1636)에 일어난 후금(청)의 침략 당시 조선군 복장 및 당시 사용하던 무기류등이 전시되어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정족산성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의 치열한 전투모습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과 부상자 4명 뿐이었다고한다.
우리나라의 개화의 관문으로서의 역할과, 구한말 서양세력의 잦은 침략에도 굴하지 않은 강화인의 자주정신을 소개한 전시실이라 할 수 있다. 구한말 서양세력의 잦은 침략에도 굴하지 않은 강화인의 자주정신을 소개한 전시실로 병인양요시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 전투하는 장면을 재현한 정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 장군의 영정과 미국의 침략전쟁인 신미양요의 참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패주 하였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다가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등을 약탈하고 조선궁전 건물은 불을 질러 소실 되었다 그리고 구한말 강화에서 사용된 소포 및 불량기포 등 구한말 총통류가 전시되어 있다.
1849년 6월 조선25대왕 철종을 서울로 모시고 가기 위해서 강화도로 오는 관리의 행렬을 그린 세로149cm 가로434cm, 비단 채색, 12곡병풍, 인 '江華行列圖(강화행렬도)'는 소중한 역사기록화로 그 시대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역사와 풍물,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강화도는 우리의 역사와 생활상을 알아 볼 수 있는 가족 모두의 즐겁고 보람있는 여행지가 될 수 있을것 같다. |
연미정·불장돈대
늘 새벽에 나섰건만 오늘은 오후 느지막이 나섰다. 강화도는 한 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려니와 노을이 내리는 바다로 한강이 스러지는 장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 새벽부터 공부방의 창가에 붙어 서성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창으로 한강이 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이었다. 아예 의자를 창가로 옮겨 놓고 그곳에 앉아 지난 1년 동안의 여정을 되짚어 살피다가 강을 건넌 것이다.
김포를 지나 염하(鹽河)에 걸린 강화대교를 건너 연미정(燕尾亭)에 잠시 들렀다. 예전의 초라한 모습은 간 데 없이 너무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15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하더라도 정자만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 이곳이 돈대(墩臺)였다는 사실은 눈여겨봐야 겨우 찾을 수 있을 만큼 석축의 흔적만이 남아 있지 않았던가. 당시 정자 끝에 서서 유도(留島)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었다. 유도는 염하의 짠물과 조강의 민물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 있으니 한강의 막바지에 있는 섬이기도 하다.
사실 이곳에서부터 조강의 모습은 강과 같이 산과 산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북쪽의 반도와 남쪽의 섬인 강화도의 해안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니 유도에서부터는 염하로 거슬러 올라오는 짠물과 한강과 임진강으로부터 흘러온 민물이 직접 뒤엉키면서 짠물이 되는 곳이니 바다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북쪽의 육지와 남쪽의 섬들이 마치 골을 이루듯이 펼쳐져 있는 까닭에 아직 강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남쪽의 섬은 강화도를 지나면 교동도, 그리고 볼음도(乶音島)와 말도(唜島)로 이어지며 말도에서 비로소 한강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곳부터는 망망한 바다만 보일 뿐 더 이상 섬이 가로막지 않기 때문이다. 1995년 말도에 다녀 온 적이 있다. 거리상으로 보면 강화도의 외포리에서 얼마 되지 않지만 NLL이라는 북방한계선 때문에 해병 경비정은 무려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빙 돌아서 가야 했다. 섬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바라본 북녘은 연백평야와 염전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뒤로 고개를 돌리면 바다에는 멀리 백령도가 가물거리며 보일 뿐이었다.
연미정에 걸터앉아 건들건들 다가드는 바람과 함께 조강과 염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민통선 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승천포를 지나쳤다. 1231년 7월7일, 고려 고종이 몽고군을 피해 강화로 천도하면서 강화에 첫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려니와 여말 선초의 선승인 함허(涵墟) 득통(得通, 1376~1433)이 배를 띄우고 “고운 바람, 넓은 바다, 유유히 흐르는 물 / 서산에 해는 지고 동산에 달 오른다. / 한 조각 거룻배의 그 무한한 뜻이여 / 만 리 흰 구름이 아득한 속에 있다”라고 노래한 곳이기도 하지만 저만치 해가 기울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강을 에워싼 철조망을 곁으로 두고 허겁지겁 달려가 다다른 곳은 불장(佛藏)돈대였다. 강화의 가장 서북쪽 끝은 불장돈대에서 뻔히 보이는 구등(龜登)돈대이지만 구태여 불장돈대로 오른 것은 북녘 땅을 흘러 온 예성강이 바다로 스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성강은 벽란도(碧瀾渡) 앞에서 어느 것이 조강이며 예성강이고 또 바다인지 가늠할 길 없이 뒤엉키고 만다. 오대산의 우통수나 태백 금대산의 검용소라는 작은 샘에서 시작된 미약한 물이 반도를 가로지르며 수백 개의 계곡과 하천을 받아들이며 힘겹게 흘러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강이 예성강이려니 어찌 그 아름다운 어우러짐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돌로 쌓은 문루가 남아 있는 돈대에 오르자 다시 철조망이 눈앞을 가로 막았지만 사실 가로 막힌 것은 시야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러나 강은 이미 그것을 아는지 한 줄기 바람을 보내주었다. 그 바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기어코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심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줄기 강물과 파수공행(把手共行)하며 한강을 걸어온 그 누군들 이곳에 다다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현실과 맞닥뜨리면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 있으랴. 하지만 바람이 있었다. 천지간의 모든 것 데리고 떠돌아다니는 바람이 나를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그 살가운 바람조차 불지 않아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강화도 연미정 |
마음은 바람에게 맡기고 눈은 강에 어리는 윤슬에게 고정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붉은 빛을 머금은 강물은 다른 곳과는 달리 검은 빛을 띤 때문인지 유난히 반짝이며 빛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물로 뒤덮였던 곳이 모래톱으로 드러났으니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을 테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2시간쯤, 안내를 나온 해병 장교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지난 1년 동안 한강을 속속들이 톺아온 나에게는 그 시간도 모자랐다. 언제나 끝이란 새로운 시작을 수반하는 것이련만 이곳에서는 되돌아 갈 수만 있을 뿐 새로운 곳으로의 시작이 없으니 어쩐 일인가. 더구나 쉽사리 끝이라는 말을 내뱉기에는 너무도 두렵지 않은가.
이렇게 앉아 이곳에서 저 강물처럼 스러져 사라지는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인 범경(泛梗)이라도 되어 물 위를 둥둥 떠다닐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차라리 범경이 되기로 했다. 그리하여 해가 기울수록 붉게 짙어가는 강물과 함께 저 넓은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싶었다. 그렇게 긴 바람을 타고 만 리의 파도를 헤치며 벽란도도 다녀오고 예성강을 거슬러 그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고 싶었다.
다산 정약용이 어느 날 황해남도 백천군 백마산 기슭에 있는 강서사(江西寺)에서 지금 건너다보이는 벽란도까지 배를 타고 온 적이 있다. 그리곤 “바다 위 가랑비에 아름다운 화문 일고 / 저녁 물 날 무렵에 순풍이 불어 왔네. / 부들로 짠 돛을 펴니 깃발이 픽픽 박박 / 청산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빨리 간다. / 양 언덕에 소 있어도 구별을 못 하겠는데 / 빠졌다 하면 만 길이요 표류했다 하면 만 리라서 / 남쪽 배들 닻 내리고 굽이진 곳 의지하여 / 무릎 안고 고개 떨구며 죽을 듯이 걱정인데 / 활달해도 겁을 먹고 느릿한 자 걱정하니 / 어차피 인생에게 환락이란 없는 법 / 배를 두고 뭍에 오르니 마음이 조금 놓여 / 수양버들 숲 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내가 범경이라도 되어 저곳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다산이 느꼈던 두려움조차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뒤엉켜 소용돌이를 치듯이 호된 바람이 불어 제멋대로 처박혔다가 솟구쳐 오르며 마치 정신을 잃을 듯이 질탕한 몸짓으로 어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렇게 몸부림이라도 치는 듯이 나를 팽개쳤다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강안으로 올라와 쓰러져야지만 이 긴 장정의 막을 내릴 수 있을 것만 같이 여겨졌다.
강을 함께 걸어 온 사람들아, 골똘히 되돌아보라. 강이란 과거의 기억 속에 잠재하는 샘에서 시작되어 항상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가 하면 종래에는 바다와 같은 미래를 펼쳐 놓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강의 끝은 비록 폭포가 되어 곤두박질치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나 무한대로 열려져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강은 어떤가. 과거로부터 현실에 이르기까지만 충실할 뿐 철조망에 가로막힌 미래는 준비는 되어있으되 펼쳐지지 못했으며 단절에 이어지는 상실감만이 강물처럼 넘실거릴 뿐이다.
철조망이란 것이 물리적인 제재를 상징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리적인 단절일 것이다. 비록 뾰족하긴 하지만 그 가녀린 쇠로 만든 몇 가닥 철조망이 어찌 나의 분방한 마음마저 붙들어 맬 것인가.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단절을 넘어서는 것은 물리적인 요소의 철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철조망보다도 날카로우며 시멘트보다도 견고한 서로 마음을 해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너에 앞서 나의 마음부터 말이다.
오늘은 붉게 물들어가던 저녁놀조차 검은 구름에 갇히고 말았다. 떠나가는 강물에게 그나마 찬란하게 빛나는 저녁놀이라도 벗으로 보내려 했건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언젠가는 범경이 아니라 철조망이 제거된 이곳에서 비록 일엽편주일지라도 배를 띄워 북녘은 물론 거침없이 서해를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오늘 미처 가 닿지 못한 우리들이 당대에 이루어야 하는 미래이리라.
-강화 월곶진 오른족에 연미정… 민통선 안에 있으나 출입가능-
연미정은 인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도 월곶진(月串鎭) 오른쪽에 있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후 1244년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 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여름 공부인 하과(夏課)를 시켜 55명을 가려 뽑았다고 한다. 또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부장(副將)인 유해(劉海)와 1627년 강화조약을 맺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에 앞서 언평(彦平) 황형(1459∼1520)의 집이 연미정 근처에 있었다. 그는 집 근처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후 임진년(선조 25년, 1592)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강도(江都)에 들어와서 지키면서 선박·영책(營柵)·방패·기계 등을 만들 때에 모두 황형이 심은 소나무를 사용했다. 이때에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양경리(楊經理)가 왕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가려 할 때 관부(官府)에서 베어다가 행궁의 치비(峙備)와 건물과 성책(城柵)을 만들었다.
강화도는 섬의 외곽이 5군데의 진(鎭)과 7군데의 보(堡), 그리고 54군데의 돈대(墩臺)로 싸여 있다. 섬의 외곽 해안선을 따라 돌출된 곳에는 어김없이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방어시설 중 하나가 만들어져 있고 그 규모에 따라 가장 작은 것이 돈대, 다음이 보, 그리고 가장 큰 규모가 진이다. 널리 알려진 진으로는 초지진, 보로는 광성보, 돈대로는 갑곶돈대, 분오리돈대와 같은 것들이 있다.
예성강은 서강(西江)이라고도 불렀으며 벽란도와 예성항은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무역뿐 아니라 중국을 통한 문물의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벽란도를 떠난 배가 조강을 거슬러 경강을 지나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앞에까지 가는 데 4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사인 이덕무에 따르면 “벽란진은 나라 안에서 아주 험한 곳이다. 북쪽 전탄(錢灘)에서 나와 남으로 바다에 들어가는데, 물길이 넓고 굽이진 데다 개펄은 잘 빠지고 악석(惡石)이 톱날 같아 돌다리를 거쳐야 배를 탈 수 있는 곳”이었다고 전한다.
연미정은 민통선 안에 있지만 관광객은 초소에서 신고만 하면 들어갈 수 있다. 강화대교를 건너 48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군청과 경찰서 언저리에서 우회전하여 농로를 따라 줄곧 들어가면 민통선 초소와 만나며 바로 앞에 연미정이 있다.
강화도 연미정과 전등사를 찾아서 |
산과 들에는 푸르름이 짙어가고 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어떻게 달라질지 설레게 하는 때이다. 도심에서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싶어 하는 때이기도 하다. 사신을 영접하던 연미정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가보기 쉽지 않은 강화군 답사를 떠나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을 가보고자 지도를 보고 찾아보았다. 강화대교를 지나 우측으로 월곶리 마을을 찾아보았다. 이 마을에는 한강을 낀 마을로 연미정 이라는 정자가 있다. 연미정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국정을 논의하고 협약을 체결하던 역사적인 사적지이다. 이곳은 인천시 문화재로 관리를 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찾지를 않는 조용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관리인이 성곽주변을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연미정 정자에는 연이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곳에는 정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자주변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 머물게 하여 주고 있다. 느티나무의 가지가 성벽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만들어주고 있다. 성벽에는 적군이 쳐들어올 때 감시하면서 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눈을 돌려 조금만 쳐다보면 북한의 개풍군도 관찰할 수 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보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척에 두고도 눈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실향민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연미정에서 더 북쪽으로 바닷가를 따라 가보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병대 초소에서 막는다. 허가증이 있어서 들어간다고 한다. 사람이 못 들어가게 하면 더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북한 땅이 지척에 보이는 곳이니 민통선으로 지정되어 있어 그런 것 같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면 평생 고생 강화 전등사를 가고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다 보니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올라갔다. 전등사 진입로에는 아직도 상점 등이 정리 되지 않아 보기가 좋지 않다. 전등사를 들어가고자 성문을 통과하니 도심에서 이제는 완연히 벗어난 느낌을 받았다. 시골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흙길을 걸어가니 새로운 곳을 거니는 마음이 든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많이 걷던 길이다. 낙낙장송이 우거진 곳으로 뚫리어 있는 길을 걸으니 더 좋은 것 같다.
전등사로 향하는 길에는 석가탄신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벌써 연등이 설치되어 있어 나를 인도하여 준다. 부처님 앞으로 안내하여 주는 것 같다.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좋다는 느낌아 와 땋는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더 시원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전등사에 다다르기 전에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하여 놓은 윤장대가 있다. 윤장대를 돌려보니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윤장대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전등사의 역사만큼 오래 지켜주고 있다. 전등사 경내는 계단을 오르면서 들어가게 된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면서 참회하면서 오르라고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건물에는 전등사(傳燈寺)라는 현판이 보인다. 경내에 들어가서 삼배를 드리고 전등사를 둘러보게 되었다. 전등사 대웅보전 건물을 유심히 살펴보니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 눈에 띄어 안내도를 읽어보았다.
“조선 광해군 때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자리 목조 기와 건물이다. 네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여 놓았다.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려고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던 이야기이다. 요즈음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사귀던 친구가 군대에 갔을 때 3년을 참지 못하고 고무신을 거꾸로 바꾸어 신는 여인이 많았다고 한다. 군대에 갔다 나오면 벌써 그 여인은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어 있다. 애인이 변신한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이라도 하여보았는지 모르겠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장식도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다. 단청은 건물이 오래되어 화려하지도 않다.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을 장식되어 있으며, 불상을 모신 불단과 닫집도 화려 하게 장식돼 있다. 부처님에게 삼배를 드리고 앉아서, 스님의 불경 소리를 들으면서 금강경을 읽어보았다. 금강경을 읽고 있는데 측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다. 아이고, 시원하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시원하였다. 그곳에서 금강경을 읽어보니 저절로 불경으로 빠져드는 느낌도 받는다. 전등사 경내에는 벌써 많은 연등이 설치되어 있고 자기의 이름을 붙여놓은 연등도 많이 보인다. 연등에는 부처님 오신 날, 소원성취 글귀가 쓰여 있다. 범종 옆에는 보지 못하던 달마 상을 고목에 조각하여 놓았다. 많은 사람이 그곳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곳에는 수목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오래전에 TV에서 보았었다. 고 A 시인 나무 가는 길이라는 글귀를 보았다. 산책로가 꺾이는 곳에서 다시 또 보았다. 이렇듯 장묘문화도 많이 변하는 것 같다. 사람이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다가온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정족산에는 삼랑성 산성이 잘 관리되어 있다. 산에는 불이 난 것 같다. 분홍색으로 갈아있고 있다. 진달래꽃으로 아름답게 변신하여 전등사를 찾아온 관광객을 사로잡아 산책로를 따라 정족산을 오르게 하여 준다. 전등사 들어가기 전에는 전통찻집이 있다. 찻집 밖에서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의자가 만들어져 있다. 아름다운 꽃을 감살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여 놓았는가 하면 조각물도 감상을 할 수 있다. 하루하루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시간을 내어 멀지 않은 곳에 가서 아름다운 자연을 살펴보는 것 또한 좋다. 농촌의 아름다운 모습도 보기가 좋다. 자연은 나에게 순수하게 다가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