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역사동호회
 
 
 
 
 
카페 게시글
일 본 사 스크랩 문화 사상 15세기 말 유구국(琉球國)과 일본을 여행하다
고리아이 추천 0 조회 23 09.09.03 11: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주(濟州)에 표류(漂流)했던 사람 김비의(金非衣)ㆍ강무(姜茂)ㆍ이정(李正) 등 세 사람이 유구국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지나온 바 여러 섬의 풍속(風俗)을 말하는 것이 매우 기이(奇異)하므로, 임금이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그 말을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105, 성종 10년(1479) 6월 10일(을미)에 홍문관이 기록함].

 

우리들이 정유년(丁酉年9 : 1477 성종 8년) 2월 1일에 현세수(玄世修)ㆍ김득산(金得山)ㆍ이청민(李淸敏)ㆍ양성돌(梁成突)ㆍ조귀봉(曹貴奉)과 함께 진상(進上)할 감자(柑子)를 배수(陪受)하여 같이 한 배에 타고 바다로 출범(出帆)하여 추자도(楸子島)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크게 불어오는 동풍(東風 : 샛바람)을 만나 서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습니다.

처음 출발한 날로부터 제6일에 이르러서는 바닷물이 맑고 푸르다가, 제7일부터 제8일까지 1주야(晝夜)를 가니 혼탁(渾濁)하기가 뜨물과 같았으며, 제9일에 또 서풍(西風 : 하늬바람 또는 갈바람)을 만나서 남쪽을 향하여 표류해 가니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14일 째에 한 작은 섬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미처 기슭에 대이지 못하여 키가 부러지고 배가 파손되어 남은 사람은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고, 여러 가지 장비도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으며, 우리들 세 사람은 한 판자에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표탕(漂蕩)하는 사이에 마침 고기잡이배 두 척이 있어서 각각 네 사람이 타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거두어 싣고 가서 섬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윤이시마(閏伊是麿)라고<그곳 풍속에 섬을 일컬어 시마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인가(人家)가 섬을 둘러 살고 있고, 둘레는 이틀 길이 될 듯하며, 섬사람은 남녀 1백여 명으로 풀을 베어 바닷가에 여막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제주를 출발한 때로부터 큰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파도가 이마[顙] 위를 지나고, 물이 배 가운데 꽉 차서 뱃전이 잠기지 않은 것은 두어 판자뿐이었습니다. 김비의와 이정이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내고, 강무는 노(櫓)를 잡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다 뱃멀미를 하여 누워 있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어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넣지 못한지가 무릇 열나흘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섬사람이 쌀죽[稻米粥]과 마늘을 가지고 와서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부터는 처음으로 쌀밥 및 탁주(濁酒)와 마른 바닷물고기를 먹었는데, 물고기 이름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7일을 머문 뒤에 인가에 옮겨 두고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을 하는데, 한 마을에서 대접이 끝나면 문득 다음 동네로 체송(遞送)하였습니다. 한 달 뒤에는 우리들을 세 마을에 나누어 두고 역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하는데, 무릇 술과 밥은 하루에 세끼였으며, 온 섬사람의 용모(容貌)는 우리나라와 같았습니다.

1. 그 나라 풍속은 귀를 뚫어 푸르고 작은 구슬로써 꿰어 2, 3촌쯤 드리우고, 또 구슬을 꿰어 목에 3, 4겹을 둘러서 1자[尺]쯤 드리웠으며, 남녀(男女)가 같이 하는데 늙은 자는 안했습니다.

1. 남자ㆍ여자 모두 다 맨발로 신이 없었습니다.

1. 남자는 머리를 꼬아 곱쳐서 포개어 삼베 끈으로 묶어서 목 가에 상투를 틀었는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염은 길어서 배꼽을 지나갈 정도인데, 혹은 꼬아서 상투를 두어 겹을 둘렀습니다. 부인(婦人)의 머리도 길어서 서면 발뒤꿈치까지 미치고 짧은 것은 무릎에 이르는데, 쪽을 찌지 않고 머리 위에 둘렀으며, 옆으로 나무빗을 귀밑머리에 꽂았습니다.

1. 가마ㆍ솥ㆍ숟가락ㆍ젓가락ㆍ소반ㆍ밥그릇ㆍ자기(磁器)ㆍ와기(瓦器)는 없고, 흙을 뭉쳐서 솥을 만들어 햇볕에 쪼여 말려서 짚불로써 태워 밥을 짓는데, 5, 6일이면 문득 깨져 버립니다.

1. 쌀을 전용(專用)하고, 비록 조(粟)가 있더라도 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밥은 대나무 상자에 담아서 손으로 뭉쳐 덩어리를 만들되 주먹 크기와 같이 하고, 밥상은 없고 작은 나무 궤(几)를 사용하여 각각 사람 앞에 놓습니다. 매양 밥을 먹을 때에는 한 부인이 상자를 맡아서 이를 나누어 주며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인데, 먼저 나뭇잎을 손바닥 가운데 놓고 밥덩이를 그 나뭇잎 위에 얹어 놓고 먹으며, 그 나뭇잎은 연꽃잎과 같았습니다. 한 덩어리를 다 먹으면 또 한 덩어리를 나누어 주어 세 덩어리로 한도를 삼으나, 먹을 수 있는 자에게 덩어리 수를 계산하지 않고 다 먹는 데에 따라 주었습니다.

1. 염장(鹽醬)은 없고, 바닷물에 채소를 넣어서 국을 만들며, 그릇은 바가지[瓠子]를 사용하거나 혹은 나무를 파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 술은 탁주는 있으나 청주(淸酒)는 없는데, 쌀을 물에 불려서 여자로 하여금 씹게 하여 죽같이 만들어 나무통에서 빚으며, 누룩을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많이 마신 연후에야 조금 취하고, 술잔을 바가지를 사용하며, 무릇 마실 때에는 사람이 한 개의 바가지를 가지고 마시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는데, 양(量)에 따라 마시며 수작(酬酢)의 예가 없고, 마실 수 있는 자에게는 더 첨가합니다. 그 술은 매우 담담하며, 빚은 뒤 3, 4일이면 익고 오래 되면 쉬어서 쓰지 못하며, 나물 한가지로 안주를 하는데, 혹 마른 물고기를 쓰기도 하고, 혹은 신선한 물고기를 잘게 끊어서 회(膾)를 만들고 마늘과 나물을 더하기도 합니다.

1. 혹 쌀을 불려 보구(步臼 : 디딜방아)에 찧어서 이를 뭉쳐 떡을 만들되 종려나무 잎의 크기와 같이 하고, 종려나무 잎으로 싸고 짚으로 묶어서 삶아 먹습니다.

1. 그 거처는 모두 1실(室)을 만들고, 내실(內室)이 따로 없고 창[戶牖]이 없으며, 앞은 조금 높이 들려 있고, 뒤는 처마가 땅에 드리워져 있으며, 대개 띠[茅]를 사용하고 기와가 없으며, 밖에는 울타리가 없고 잠자리는 목상(木床)을 사용하며, 이불과 요가 없고 포석(蒲席)을 깔아서 사용하며, 사는 집 앞에 따로 누고(樓庫)를 만들어 거둔 바의 벼를 쌓아 두었습니다.

1. 관대(冠帶)가 없고 더우면 혹 종려나무 잎을 사용하여 삿갓 모양의 것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승립(僧笠)과 같았습니다.

1. 삼[麻]ㆍ목면(木綿)이 없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시[苧]를 짜서 베를 만들고, 옷을 만들되 직령(直領)과 같았으며 옷깃과 주름은 없고 소매는 짧고 넓으며, 염색(染色)은 남청(藍靑)을 쓰고, 속옷은 백포(白布) 세 폭을 써서 볼기[臀]에 매었으며, 부인의 옷도 같았으나, 다만 속치마를 입고 속옷이 없으며 치마도 푸른빛을 물들였습니다.

1. 집에는 쥐ㆍ소ㆍ닭ㆍ고양이가 있으나, 소와 닭의 고기를 먹지 않고 죽으면 곧 묻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르기를, ‘소ㆍ닭의 고기는 먹을 만한데 묻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더니, 섬사람들은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材木)이 많고, 잡수(雜獸)가 없었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오직 비둘기와 황작(黃雀)뿐이었습니다.

1. 곤충(昆蟲)으로는 거북ㆍ뱀ㆍ두꺼비ㆍ개구리ㆍ모기ㆍ파리ㆍ박쥐ㆍ벌ㆍ나비ㆍ사마귀[螳蜋]ㆍ잠자리ㆍ지네[蜈蚣]ㆍ지렁이ㆍ개똥벌레[螢]ㆍ게가 있었습니다.

1. 철야(鐵冶)는 있으면서도 쟁기[耒耜]를 만들지 않고 작은 삽을 사용하여 밭을 파헤치고 풀을 제거하여 조[粟]를 심습니다. 수전(水田)은 12월 사이에 소를 사용하여 밟아서 파종(播種)을 하고, 정월 사이에 이앙(移秧)을 하되 풀을 베지 않으며, 2월에 벼가 바야흐로 무성하여 높이가 한 자쯤 되고, 4월에 무르익는데, 올벼[早稻]는 4월에 수확을 마치고 늦벼[晩稻]는 5월에 바야흐로 추수를 마칩니다. 벤 뒤에는 뿌리에서 다시 자라나 처음보다 더 무성하며, 7, 8월에 수확합니다. 수확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근신(謹愼)하여, 비록 말을 하더라도 소리를 크게 하지 아니하고,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지 아니하며, 혹 풀잎을 말아서 불면 막대기로 이를 금하다가, 수확을 한 뒤에야 작은 피리[管]를 부는데, 소리가 매우 가늘었습니다. 한번 수확한 벼는 이삭을 연달아 묶어서 누고(樓庫)에 두고, 대나무 막대기로 이를 털어서 디딜방아로 찧습니다.

1. 풀과 벼를 베는 데에는 낫[鎌]을 쓰고, 쪼개거나 찍는 데에는 도끼와 무자(䥈子)를 사용하며, 또 작은 칼이 있고, 궁시(弓矢)와 부극(斧戟 : 도끼와 창)은 없으며, 사람들은 작은 창(鎗)을 가지고 기거(起居)하며 놓지를 아니하였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관(棺) 속에 앉혀서 언덕의 석굴[厂] 밑에 두고 흙으로 묻지 않았으며, 만약 언덕의 석굴이 넓으면 대여섯 개의 관을 함께 두었습니다.

1. 그 지역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서리와 눈이 없고 풀과 나무가 마르지 아니하며 또 얼음이 없습니다. 섬사람들은 홑옷 두 벌을 입고 여름에는 다만 하나를 입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채소로는 마늘ㆍ가지ㆍ참외ㆍ토란[母鴟]ㆍ생강이 있는데, 가지의 줄기 높이가 3, 4척이나 되고 한 번 심으면 자손(子孫)에게까지 전하는데 결실(結實)은 처음과 같고, 너무 늙으면 가운데를 찍어 버리나 또 움이 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1. 나무는 오매(烏梅)ㆍ뽕나무ㆍ대나무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청귤(靑橘)ㆍ작은 밤[栗]이 있는데, 귤은 사시(四時)로 꽃이 피었습니다.

1. 등촉(燈燭)이 없고, 밤이면 대[竹]를 묶어서 횃불을 만들어 비추었습니다.

1. 집에는 뒷간[溷廁]이 없고 들에다 그냥 눕니다.

1. 베를 짤 때에는 성서(筬抒 : 바디, 베틀에 달린 날을 고르는 제구.)를 사용하는데 모양은 우리 나라와 같았고, 그 밖에 다른 기계는 같지 않았으며, 승수(升數 : 새수)와 추세(麤細 : 굵고 가늚)도 우리나라와 같았습니다.

1. 땅을 파서 작은 우물을 만들고 물을 길을 때에는 바가지와 병을 썼습니다.

1. 배는 키와 돛대만 있고 노(櫓)는 없는데 순풍(順風)에만 돛을 달 뿐이었습니다.

1. 그 풍속에 도적이 없어서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지 아니하고, 서로 꾸짖거나 큰 소리로 싸우지 아니하며, 어린아이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비록 울더라도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1. 풍속에 추장(酋長)이 없고, 문자(文字)를 알지 못했으며, 우리들은 저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땅에 있으니, 조금은 그 말하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항상 울었는데, 그 섬 사람이 새 벼의 줄기를 뽑아서 옛날 벼와 비교해 보이고는 동쪽을 향하여 불었는데, 그 뜻은 대개 새 벼가 옛 벼와 같이 익으면 마땅히 출발하여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었습니다.

무릇 6삭(朔)을 머물고, 7월 그믐에 이르러 남풍(南風 : 마파람)이 불어오는 것을 기다려서 섬사람 13명이 우리들과 같이 양식과 탁주를 준비해 가지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서 1주야(晝夜) 반을 가니,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소내시마(所乃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자(護送者)들은 8, 9일 동안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내시마는 좁으면서 길었는데, 둘레는 4, 5일정(日程)이 될 만하였고, 그 언어(言語)ㆍ음식(飮食)ㆍ의복(衣服)ㆍ거실(居室)ㆍ풍토(風土)는 대개 윤이시마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코를 양쪽으로 뚫어 조그마한 검은 나무를 꿰었는데, 모양이 검은 사마귀와 같았고, 정강이에는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둘러매었는데, 그 넓이가 수촌(數寸)쯤이었습니다.

1. 벼와 조를 쓰는데 조는 벼의 3분의 1쯤 되었습니다.

1. 수확한 나락은 가까이 있는 빈터에 쌓아 두었는데 높이가 모두 두 길쯤이었고, 같은 마을 사람은 한곳에 모여서 사는데 많은 것은 4, 50여 소(所)에 이르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ㆍ닭ㆍ고양이ㆍ개를 기르는데, 소는 도살하여 이를 먹고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산에는 산돼지가 있는데 섬사람이 창을 가지고 개를 끌고 가서 사냥해 잡아다가 그 털을 태우고, 베어서 삶아 먹으나, 사냥한 자만 먹고 비록 지극히 친한 자일지라도 주지 않으니, 만일 남에게 주면 잡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1. 과실로 유자(柚子)ㆍ작은 밤ㆍ도토리[橡栗]가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ㆍ치과(夂瓜)ㆍ생강ㆍ마늘ㆍ가지ㆍ호박이 있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材木)이 많아서 혹은 실어내어 다른 섬에 무역(貿易)하기도 하고, 또 동백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두어 길[丈]이며 꽃이 피었습니다.

1. 마[薯蕷]가 있는데 그 길이가 한 자[尺] 남짓하고 사람의 몸 크기와 같으며, 두 여자가 함께 하나를 이고 도끼로 끊어서 삶아 먹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까마귀ㆍ비둘기ㆍ바다가마우지[鸕鷀]ㆍ갈매기ㆍ해오리ㆍ황작(黃雀)이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ㆍ파리ㆍ두꺼비ㆍ개구리ㆍ뱀ㆍ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는 달팽이를 삶아서 먹었으며, 큰 뱀의 길이는 5, 6척이나 되고 크기는 서까래와 같았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구렁이를 보고서 아이의 발을 구렁이 등에 올려 놓고 구렁이의 꼬리를 어루만졌는데 커서 흔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윤이도(閏伊島)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5삭(朔)을 머물다가, 12월 그믐에 이르러서 남풍(南風 : 마파람)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과 같이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갔더니, 한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었는데 모두 다 모래와 돌로 된 땅이었고, 둘레는 소내도(所乃島)에 비교하여 조금 작았습니다. 그 언어와 의복ㆍ거실ㆍ풍토는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기장ㆍ조ㆍ밀ㆍ보리가 있고 논과 벼는 없어서, 소내도에서 무역(貿易)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밀ㆍ보리를 심고, 가을이 되면 우분(牛糞)을 사용하되 손으로 움켜서 밭에 넣고, 삽을 사용하여 흙을 일으켜서 덮으며, 2, 3월에 바야흐로 익습니다. 추수를 마치고 난 뒤에 밭을 일구어 심는데 아홉 종류의 곡식을 심고, 또 10월 사이에 파종(播種)하여 2, 3월에 수확해서 마치고, 다시 심어서 7, 8월에 또 수확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ㆍ황작ㆍ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ㆍ닭ㆍ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으나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ㆍ토란ㆍ마늘ㆍ박[瓠]이 있었습니다.

1. 남녀가 귀를 뚫어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꿰었고 또한 구슬을 꿰어서 목에 걸었습니다.

1. 재목은 없고 집을 지을 때에는 모두 다 소내도에서 가지고 와서 짓는다고 하였으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모기ㆍ파리ㆍ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서 먹는다고 하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2일정이 될 만 하였습니다. 인가(人家)는 겨우 40호 남짓하고, 언어ㆍ의복ㆍ음식ㆍ거실ㆍ토풍(土風)이 대개 윤이도와 같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그 풍속은 푸른 구슬로써 팔 및 정강이를 둘러 감아 매었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ㆍ황작ㆍ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기장ㆍ조ㆍ밀ㆍ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으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ㆍ닭ㆍ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ㆍ토란ㆍ마늘ㆍ박이 있었습니다.

1. 재목이 없고, 과일나무도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ㆍ파리가 있고, 거북이ㆍ뱀ㆍ두꺼비ㆍ개구리는 없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마파람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에 올라서 하루 낮 동안을 가니, 한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섬의 이름은 훌윤시마(欻尹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였으며, 그 언어ㆍ음식ㆍ의복은 또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ㆍ조ㆍ밀ㆍ보리가 있고, 벼는 없는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한다고 합니다.

1. 날짐승은 비둘기ㆍ황작ㆍ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ㆍ닭ㆍ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ㆍ토란이 있었습니다.

1. 과일나무와 재목이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ㆍ파리ㆍ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 먹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마파람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8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배를 타고 1주야(晝夜)반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며, 사람은 50여 호가 살고 있었고, 그 언어ㆍ음식ㆍ거실ㆍ토풍이 대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ㆍ조ㆍ밀ㆍ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습니다.

1. 재목이 없어서 혹은 소내도에서 가져오고 혹은 이라부도(伊羅夫島)에서 취해온다고 하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그 풍속에 저포(苧布)를 사용하여 남색을 물들여 두드려서 옷을 만들었는데, 그 빛깔은 채단(彩段)과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ㆍ황작ㆍ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과 가축(家畜)은 앞의 섬들과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ㆍ토란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마파람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둘레는 2일정이 될 만하고, 그 언어ㆍ음식ㆍ거실ㆍ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그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고,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수정(水精)으로 된 큰 구슬을 목에 걸었습니다.

1. 기장ㆍ조ㆍ밀ㆍ보리가 있고, 또한 벼도 있었는데 벼는 보리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1. 작은 산골짜기가 있어서 종려나무ㆍ뽕나무ㆍ대나무가 있고, 또한 재목도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ㆍ닭ㆍ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술을 빚는 데에는 쌀 누룩[米麴]을 사용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갈매기ㆍ해오라기ㆍ황작ㆍ비둘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ㆍ파리ㆍ달팽이가 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고 뱀은 없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ㆍ토란ㆍ생강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마파람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멱고시마(覓高是麿)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고, 둘레는 5, 6일정이었으며, 그 언어ㆍ음식ㆍ거실ㆍ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고,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술을 빚는 것은 이라부도와 같았으며, 벼ㆍ기장ㆍ조ㆍ밀ㆍ보리가 있었습니다.

1. 밥을 짓는 데에는 쇠 솥[鐵鼎]을 사용하는데, 발은 없고 가마와 비슷하였으며, 이는 곧 유구국(琉球國)에서 무역한 것이었습니다.

1. 부인은 구슬을 목에 걸었는데 또한 이라부도와 같았습니다.

1. 집에는 뒷간이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ㆍ닭ㆍ고양이ㆍ개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날짐승은 새ㆍ비둘기ㆍ황작ㆍ갈매기ㆍ해오라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은 거북이ㆍ뱀ㆍ두꺼비ㆍ개구리ㆍ모기ㆍ파리ㆍ달팽이가 있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ㆍ수박ㆍ가지ㆍ토란이 있었습니다.

1. 종려나무ㆍ뽕나무ㆍ대나무가 있고, 산에는 잡목이 많았으나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마파람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1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 2주야 반을 가서 유구국(琉球國)에 이르게 되었는데, 바닷물의 기세가 용솟음치고, 파도(波濤)가 험악(險惡)하여, 섬사람도 모두 배멀미를 했습니다.

유구국(琉球國)의 국왕(國王)이 호송인을 포상(褒賞)하여 각각 청홍 면포(靑紅綿布)를 하사(下賜)하고, 술과 밥을 후하게 먹이어 종일토록 취해 있었으며, 그 사람들은 하사받은 면포로써 옷을 만들어 입고 한 달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나라 사람과 통사(通事)가 와서 우리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므로, 우리들이 대답하기를, ‘조선 사람이다.’라고 하니, 또 묻기를, ‘너희들은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되어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하므로, 우리들은 같이 의논하여 대답하기를, ‘다 함께 조선국 해남(海南) 출신 사람인데, 진상(進上)할 쌀을 싣고 경도(京都)로 향해 가다가 바람을 만나서 여기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습니다. 통사는 우리들이 한 말을 써가지고 국왕에게 아뢰었는데, 조금 있다가 두어 관인(官人)을 보내어 와서 우리들을 맞아 한 객관(客館)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 집은 바다와의 거리는 5리(里)가 되지 못했는데, 판자로써 집을 덮었고, 문호(門戶)와 창벽(窓壁)이 있었으며, 돌 담장이 있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요, 담장에 문이 있어 밤에는 자물쇠를 걸었습니다. 또 관사(官舍)가 곁에 있었는데, 수령(守令) 두 사람과 감고(監考) 두 사람이 있었고, 따로 하나의 창고를 두어 재물(財物)ㆍ전포(錢布)ㆍ어염(魚鹽)을 저장해 두었습니다. 무릇 출납(出納)하는 데에는 수령이 이를 감독하였는데, 통사가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나라에 군읍(郡邑)의 관청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을 대접하는 데에는 매일 세 끼이고, 술도 있었습니다.

1. 한 집에서 5일의 양미(糧米)와 탁주와 생선젓을 관청에서 받아 대접하기를 마치면, 다음 집에서 또 받아서 돌아가면서 대접하였습니다. 대개 5, 6일마다 수령이 한 번 우리들을 찾아와 술과 안주를 대접했고, 또 관인(館人)으로 하여금 언제나 풍성하게 대접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마침 국왕의 어머니가 출유(出遊)하는 것을 보았는데, 칠련(漆輦)을 타고 사면(四面)에 발을 드리웠으며, 멘 자가 거의 20인으로 모두가 흰 저의(苧衣)를 입고 비단으로 머리를 쌌습니다. 군사는 긴 칼을 가지고 활과 화살을 찼는데, 앞뒤를 옹위(擁衛)한 자가 거의 1백여 인이었고, 쌍각(雙角)ㆍ쌍태평소(雙太平嘯)를 불었으며, 화포(火砲)를 쏘았습니다. 아름다운 부인 4, 5인이 채단(綵段) 옷을 입고, 겉에는 백저포(白苧布)의 긴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길 곁에 나가서 배알(拜謁)하니, 연을 멈추고 두 개의 납병(鑞甁)에다 술을 담아서 검은 칠을 한 목기(木器)로써 우리들에게 주었는데, 그 맛이 우리 나라의 것과 같았습니다. 어떤 소랑(小郞)이 조금 뒤에 따로 갔는데, 나이는 10여 세가 될 만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왔으며,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땋지 않았으며, 붉은 비단옷을 입고 띠를 묶었으며, 살찐 말을 탔습니다. 말굴레를 잡은 자는 모두 다 흰옷을 입었고,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4, 5인이며, 좌우(左右)에서 부옹(扶擁)하는 자도 매우 많았습니다. 위사(衛士)로서 긴 칼을 가진 자가 20여 인이요, 일산(日傘)을 가진 자는 말을 나란히 타고 가면서 햇빛을 막았습니다. 우리들이 또한 배알하여 뵈이니 소랑이 말에서 내리어 납병에다 술을 담아서 대접하는데, 마시기를 마치자 소랑은 말에 올라서 갔습니다. 국인(國人)이 이르기를, ‘국왕(國王)이 훙(薨)하고, 사군(嗣君)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모후(母后)가 임조(臨朝)하게 되었는데, 소랑이 나이가 들면 마땅히 국왕이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1. 7월 15일에는 모든 사찰(寺刹)에서 당개(幢蓋 : 기(旗).)를 만드는데, 혹은 채단(彩段)을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채증(彩繒)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꼭두각시와 조수(鳥獸)의 형상을 만들어 왕궁(王宮)에 보냈습니다. 거민(居民)은 남자 가운데 소장(少壯)한 자를 뽑아서 혹은 황금 가면(假面)을 쓰고 피리[笛]를 불고 북을 치면서 왕궁으로 나아가는데, 피리는 우리 나라의 작은 피리[管]와 같고, 북 모양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크게 잡희(雜戲)를 벌이고 국왕이 임석하여 관람하였으므로, 남녀로 가서 보려는 자가 길을 메우고 거리에 넘쳤으며, 재물을 말에 싣고 왕궁으로 나아가는 자도 많았습니다.

1. 해안(海岸)에서 왕궁과의 거리는 10여 리였는데, 우리들이 멀리 바라보자 한 전각이 매우 높으므로 물어보았더니, 곧 국왕의 거처라고 하였으며, 인가(人家)는 간혹 개와(蓋瓦)였으나 판옥(板屋)도 매우 많았습니다.

1. 남녀가 상투를 이마의 가장자리에 틀어 올렸는데, 비단으로 싸고, 서인(庶人)은 모두 다 백저(白苧) 옷을 입었습니다. 부인은 머리 뒤에 머리카락을 쪽지어 올렸고, 모두 다 백저포(白苧布)의 적삼과 백저포의 치마를 입었고, 혹은 백저포의 장옷을 입었으며, 그 귀한 자는 또한 채단을 입었고 유오아(襦襖兒)ㆍ유상(襦裳)도 있었습니다. 그 수령은 아롱지게 물들인 비단을 사용하여 상투를 싸고 백세저포(白細苧布)를 입었으며, 의대(衣帶)는 붉은 물을 들인 비단이고, 나갈 때에는 말을 타며 종자(從者)가 수인(數人)이었습니다.

1. 논과 밭은 서로 반반이었는데, 밭이 조금 많고 논은 겨울에 파종을 해서 5월에는 벼가 다 익어 수확을 마치며, 또 소[牛]로서 이를 밟아 다시 파종을 해서 7월에 이앙(移秧)하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또 수확을 하였습니다. 밭은 작은 삽으로 이를 일구어서 조를 심는데, 또한 겨울에 처음으로 파종하고 5월에 수확하고, 6월에 다시 파종하면 8월에 처음으로 이삭을 드리우고 익어갑니다.

1. 밥은 쌀을 사용하고 또 염장(鹽醬)을 사용하여 국을 만들며, 채소를 섞는데 혹은 고기를 쓰기도 합니다.

1. 술은 청주와 탁주가 있는데, 납병에다 담고 은술잔[銀鍾]으로써 잔질하며 맛은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또 남만국(南蠻國)외 술이 있었는데 빛은 누렇고 맛은 소주(燒酒)와 같으며, 매우 독하여 두어 종지를 마시면 크게 취하게 됩니다.

1. 사찰은 판자로써 덮개를 하고, 안에는 옻칠을 했으며, 불상(佛像)이 있는데, 모두 다 황금(黃金)이었고, 거승(居僧)은 머리를 깎았으며, 치의(緇衣 : 중이 입는 검은 물을 들인 옷.) 도 입고 백의(白衣)도 입었으며 그 가사(袈裟)는 우리나라와 같았습니다.

1. 밥은 옻칠한 목기에 담고, 국은 작은 자기(磁器)에 담으며, 또 자접(磁楪 : 자기 대접)이 있고, 젓가락은 있으나 숟가락은 없는데 젓가락은 나무였습니다.

1. 국중(國中)에 시장이 있는데, 채단(綵段)ㆍ증백(繒帛)ㆍ저포(苧布)ㆍ생저(生苧)ㆍ빗[梳]ㆍ전도(剪刀)ㆍ바늘ㆍ채소ㆍ어육(魚肉)ㆍ소금ㆍ젓갈이 있었고, 남만국(南蠻國)의 아롱진 비단ㆍ아롱진 면포(綿布)ㆍ단향(檀香)ㆍ흰 날에 검은 씨의 면포[白經黑緯綿布]ㆍ등당(藤唐)의 푸르고 검고 흰 면포ㆍ자기(磁器) 등의 물건이 있었습니다.

1. 중국 사람이 장사[商販]로 왔다가 계속해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집은 모두 다 기와로 덮었고 규모도 크고 화려하며 안에는 단확(丹艧 : 단청)을 칠하였고 당중(堂中)에는 모두 다 의자[交倚]를 설치하였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감투(甘套)를 쓰고 옷은 유구국과 같았으며, 우리들에게 갓이 없는 것을 보고서는 감투를 주었습니다.

1. 나라 사람은 모두 맨발이고 신발을 착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통사는 반드시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그 나라에 있는 자로 하여금 하게 하였습니다.

1. 강남인(江南人) 및 남만국(南蠻國) 사람도 모두 와서 장사를 하여 왕래(往來)가 끊이지 아니하는데, 우리들도 다 보았습니다. 남만인은 상투를 틀어올렸는데, 그 빛이 매우 검어서 보통 사람보다 특이하였고, 그 의복은 유구국과 같았으나 다만 비단으로 머리를 싸지 아니하였습니다.

1. 활ㆍ화살ㆍ도끼ㆍ갈고리[鉅]ㆍ도검(刀劍)ㆍ무자(䥈子)ㆍ낫ㆍ삽ㆍ갑옷과 투구[甲胄]가 있었는데, 갑옷은 혹 철(鐵)을 쓰기도 하고 가죽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1. 군사(軍士)는 철로써 정강이를 싸고, 혹은 가죽에 옻칠을 입힌 것을 사용했는데, 행전(行纏)과 같았습니다.

1. 그 지대는 따스하기가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소나무ㆍ종려나무ㆍ대나무가 있고, 그 나머지는 잡목(雜木)인데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말ㆍ소ㆍ염소ㆍ고양이ㆍ돼지ㆍ개ㆍ닭ㆍ집비둘기ㆍ거위ㆍ오리를 기르며, 말과 소를 잡아 먹기도 하고 혹은 저자에 팔기도 하며, 또한 닭을 먹었습니다. 날짐승으로는 까마귀ㆍ까치ㆍ황작(黃雀)ㆍ매ㆍ제비ㆍ갈매기ㆍ바다 가마우지ㆍ올빼미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매화ㆍ복숭아ㆍ유자ㆍ청귤(靑橘)이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ㆍ가지ㆍ참외ㆍ동과(冬瓜)ㆍ무우ㆍ파ㆍ마늘ㆍ해바라기ㆍ박ㆍ파초(芭蕉)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ㆍ파리ㆍ두꺼비ㆍ개구리ㆍ거북ㆍ뱀ㆍ달팽이ㆍ벌ㆍ나비ㆍ사마귀ㆍ잠자리ㆍ등에[蝱]ㆍ연가시새끼[蜱]ㆍ지네ㆍ거미ㆍ매미ㆍ빈대[臭蟲]ㆍ지렁이ㆍ개똥벌레가 있었고, 또한 메뚜기와 비슷하며 큰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잘 먹었으므로 혹 저자에 팔기도 하였고, 또 박쥐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석 달을 머물다가 통사에게 말하여 우리나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통사가 국왕에게 전달하자, 국왕이 대답하기를, ‘일본 사람은 성질이 나빠서 (너희들을) 보전할 수가 없으므로, 너희들을 강남(江南)으로 보내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보다 앞서 통사에게 물어서 일본은 가깝고 강남은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본국(日本國)으로 갈 것을 청하였습니다. 마침 일본의 패가대(覇家臺) 사람 신이사랑(新伊四郞) 등이 장사하러 와서 국왕에게 청하기를, ‘우리나라는 조선(朝鮮)과 통호(通好)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보호하여 돌려보내기를 바랍니다.’ 하니, 국왕이 이를 허락하고, 또 이르기를, ‘도중에 잘 무휼(撫恤)하여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어 우리들에게 돈 1만 5천 문(文), 호초(胡椒) 1백 50근, 청염포(靑染布)ㆍ당면포(唐緜布) 각 3필을 주고, 또 석달의 양미(糧米) 5백 근, 염장(鹽醬)ㆍ어해(魚醢 : 생선 젓갈.)ㆍ왕골 자리[莞席]ㆍ칠목기(漆木器)ㆍ밥상[食案] 등의 물건을 주었습니다.

8월 1일에 신이사랑 등 1백여 인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큰 배를 같이 타고서 4주야(晝夜)를 가다가 일본의 살마주(薩摩州)에 이르렀으나, 기슭을 오르는 데에 파도가 매우 사나워서 겨우 바다를 건넜는데, 형세가 제주(濟州)와 같았습니다. 김비의(金非衣)가 포라이도(捕剌伊島)에서부터 두통이 생겨서 낫지 않고 유구국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는데, 국왕이 이를 알고 남만국의 약주(藥酒)를 주었습니다. 신이사랑 등도 이를 보고 또 쑥으로 뜸을 뜨는 등 곡진히 치료해 주었으며, 배 가운데에 있어서는 대변이나 소변 때에도 사랑이 매양 그 종자(從者)로 하여금 붙들어 주게 하였는데, 이는 뱃머리에서 추락할까 걱정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살마주에 도착하여서는 병이 즉시 나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9월에 이르러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서 신이사랑 등이 별선(別船)을 사가지고 우리들을 데리고서 같이 타고 연안(沿岸)으로 해서 무릇 3주야 만에 타가서포(打家西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말을 타고서 우리를 데리고 육로(陸路)로 왔습니다. 김비의가 병들었다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기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말을 구하여 타게 하고 남은 두 사람은 도보(徒步)로 2일을 갔는데, 산골짜기가 매우 험했습니다. 패가대(覇家臺)에 이르니, 부관인(副官人) 좌미시(左未時) 등이 비용[盤纏]을 마련해서 해로(海路)를 경유하여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인가(人家)가 조밀(稠密)한 것이 우리 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았고, 그 가운데 저자가 있는 것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집에 머물게 하였는데, 대접하는 술ㆍ밥ㆍ안주ㆍ반찬이 매우 풍부하였으며, 상관(上官)ㆍ부관(副官) 두 사람이 차례로 하루 세 끼씩 대접해 주었습니다. 대내전(大內殿)에서 보낸 바 주장(主將)이 우리들과 신이사랑을 맞아서 술과 안주를 대접하였는데, 사는 바의 기와집은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뜰 아래에 시립(侍立)해 있는 자 30여 인은 모두 다 칼을 찼고, 문밖의 군사도 집을 지키는 자가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주장을 보고난 뒤 그는 소이전(小二殿)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나갔는데, 창ㆍ칼, 작은 깃발을 가진 자가 3, 4만 명이었습니다. 무릇 4일 만에 싸움에 이기고 돌아왔는데 6급(級)을 베어서 장대 끝에 효수(梟首)하고, 혹 어떤 사람은 그 이빨을 살펴서 그 사람의 귀천(貴賤)을 징험하였는데, 이는 대개 관작(官爵)이 있는 자는 이빨을 물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병란(兵亂)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도망하여 숨었던 자가 몰래 해도(海島)에 있다가 나와서 노략질을 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달을 머물다가 병란이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려, 금년 2월에 이르러 우리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 15리쯤 가서 작은 섬에 이르니, 이름을 식가(軾駕)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머물면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초저녁 어두울 무렵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기슭에 오르니, 인가가 매우 많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주인집에 투숙시키고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우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사흘을 머물고 또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 대마도(對馬島)의 초나포(草那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옛 주인집에 투숙시켰는데, 그 주인은 곧 신이사랑의 숙부(叔父)였으며,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대접해 주었고, 주인도 술을 대접하였습니다. 그 땅은 메마르고 밭이 없으며 백성은 모두 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 지나온 바의 여러 섬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도주(島主)가 떠나기 어렵다고 만류하기도 하였고 바람도 순조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 달을 머물러 있다가 4월 어느 날에 샛바람을 만나 연안을 따라 가서 사포(沙浦)에 이르러 투숙(投宿)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틀을 머물고 바람이 순조로우므로 또 기슭을 따라 가서 도이사지포(都伊沙只浦)에 정박하였으며, 사흘을 머물다가 동풍을 만나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야 염포(鹽浦)에 이르러 머물었습니다. 울산 군수(蔚山郡守)는 우리들이 감투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각각 갓[笠子]과 베 1필씩을 주었으므로, 우리들은 옷을 만들어 입고 올라왔습니다. 이상 윤이도(閏伊島) 이하 여러 물산(物産)을 우리들이 본 것은 이 정도 입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