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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제주 성지순례와 걸음여행 신청 형제님들 | |||
2박 3일 |
3박 4일 |
3박 4일 |
비 고 |
1.박건순가브리엘라 |
유영재 마틸다 |
김종식 파스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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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영선체칠리아 |
촤옥련 말가릿다 마리아 |
황정우 요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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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순옥 수산나 |
김정자 아네스 |
노병금 바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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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정란 마틸다 |
김금중 크리스티나 | 장은기 데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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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운문 루치아 |
김애경 벨린다 |
severi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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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장순 바울로 |
김미경 크리스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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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황지애 루치아 |
김순분 프란치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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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이명자 카타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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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정경숙 실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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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신명희 필로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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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現在 |
7명 |
10명 |
5명 |
22명 |
2017년 06월 성지순례와 걸음여행 일정표 | |||
일 시 |
행 선 지 |
세부 일정 |
비 고 |
첫 째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
06:16’06:50 |
김포공항 |
2층 중앙,진항공카운터 앞, 수화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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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
김포공항 |
3층, 이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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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제주공항 |
착륙, 수화물, 랜터카 인수, 인원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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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제주공항 |
랜터카로 4,3공원으로 이동. 셔틀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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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4.3공원 |
셔틀버스로 사려니 숲길 입구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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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
사려니 숲 입구 |
표찰인수 및 입산허가 트레킹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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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 |
사려니 숲 입구 |
트레킹 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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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생이소리 |
점심식사 |
064-753-4567 |
14:20 |
김기량 현양탑 |
기도와 묵상,(순교자의 성가와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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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김기량현양탑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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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 |
황사평 성지 |
무명순교자 참배, 공덕비, 성직자묘역참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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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 |
황사평 성지 |
성가와 기도 후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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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 |
중앙성당 |
제주 최초 성당. 주교좌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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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중앙성당 |
감사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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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 |
관덕정 |
형장에 이슬로 사라진 생명들을 위로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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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
관덕정 |
기도와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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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
정난주성당 |
고귀하고 거룩한 서울 할망을 기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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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 |
정난주성당 |
성가와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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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 |
한림성당 |
성 이시돌 목장의 출발지 |
064-796-4044 |
18:40 |
한림성당 |
구 성전과 현 성전 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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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용수성지 |
묵상과 기도(김대건 신부님 표착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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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성지 |
걸어서 이동 5분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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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펜션 하우스 |
(숙소배정,짐 풀고,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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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바베큐파티 |
저녁식사 및 친교의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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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션하우스 |
휴식과 취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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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의 영성 안에서 평화와 사랑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공동체 |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된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과 사공들에게 돌아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5년에 두 번째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무사히 귀국한 후 육지로 나와 리델 신부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다.
김기량(金耆良, 1816-1867년)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신학생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극동대표부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1832-1900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기에 앞서 육지에서 페롱(S. Feron, 權) 신부와 함께 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났다. 그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뒤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1858년 10월 4일자 서한)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과 사공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고, 1859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를 만난 베르뇌 주교는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5년에 두 번째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무사히 귀국한 후 육지로 나와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 무렵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라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박하유는 천주학쟁이의 물건이다.”라고 말하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통영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그럼에도 목숨이 붙어있자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특히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9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무속신앙의 영향이 강한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제주의 사도’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김기량의 행적을 밝혀줄 사료가 2001년에 대량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영세 날짜와 순교 행적을 보다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특히 박해 시대 한국 순교자 중 세례 날짜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2001년 5월 28일 교구청에서 첫 전체회의를 가진 자리에서 김기량 순교자의 행적 등을 담은 서한 등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김기량에 관한 기록이 있는 편지가 파리 외방전교회의 ‘전교회지’를 통해 알려진 적은 있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가 새로 발굴한 루세이유 신부의 편지 4통은 원본이라는 점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기량은 1857년 성령강림 주일에 영세와 동시에 첫영성체를 했다. 1857년의 부활절이 4월 12일이므로 그의 영세일은 5월 31일이 된다. 이에 따라 제주교구는 이날을 성대히 기념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김기량 순교자 일가의 족보인 것이 확실시되는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도 발굴되어 공개된 것이다. 이는 가톨릭신문사 제주지사장인 이창준 씨가 족보의 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과 함께 입수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족보의 발굴로 순교자의 정확한 생몰 연대와 집안 내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는 2002년 1월 18일 역사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김기량 순교자의 시복시성 운동을 본격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서 최석우 신부는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순교자의 세례명이 ‘펠릭스 베드로’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두 세례명이 김기량 순교자에게 세례를 준 루세이유 신부의 서한 등 곳곳에 함께 나타나 혼란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알려진 자료들에 따르면 ‘펠릭스’라는 기록보다 ‘펠릭스 베드로’라는 기록이 훨씬 많은 것으로 보아 ‘펠릭스’는 ‘펠릭스 베드로’의 약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최석우 신부와 차기진 소장이 역사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김기량 순교자의 순교지는 경남 통영의 수군통제사영(통제영) 옥터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기량 순교자는 통영 산양읍의 게섬에서 순찰하던 포교들에 의해 체포되어 통제영의 옥에서 교수형 당했다. 현재 이 순교터는 통영시가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어서 순교자의 행적 등을 새긴 기념탑 등 기념물 건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순교 행적에 있어 중요하게 꼽히는 순교 날짜의 경우 1866년 12월(양력 1867년 1월)로 드러났다. “병인치명사적” 18권 등에 따르면 김기량 순교자는 곤장 60대를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나자 옥으로 옮겨져 목이 졸려 죽었으며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슴 위에 대못을 박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순교와 관련한 관변자료가 미비해 정확한 순교 일시에 대한 연구는 더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김기량 순교비를 세웠고, 2003년 1월 조천 성당에도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2005년 4월 24일에는 그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의 함덕 중학교 서쪽 도로변에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그리고 2006년 9월 10일 김기량 순교 14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열었고, 그해 10월에는 순교 140주년 기념 가톨릭 합창 페스티벌을 열었다.
또한 2007년 11월 그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시복시성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순교자
김기량(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 67세손) 펠릭스 베드로 종친 기도회’ 창립총회가 종친 후손 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처럼 제주교구는 ‘제주의 사도’로서 제주에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본받고 현양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그 첫 열매를 맺었다.
황사평 성지는 제주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제주도는 1899년 두 분의 외방선교회 선교사가 입도하여 천주교가 시작 되었으며 이후 교세가 급속하게 성장을 이룬 곳이었다. 입도한 선교사들은 미신행위를 근절시키고 외래 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도민들에 반감과 저항을 극심하게 받았다. 또한 구한말 왕실재정 확보를 목적의 과중한 조세정책은 1901년 신축교안이라는 비극적인 민란을 일으킨다. 그 영향으로 수백명의 천주교 신자와 양민들이 희생된다.
사태가 진정된 후 조정과 협의 끝에 황사평 땅을 보상 받아 무연고 28구의 유해를 안장하여 무명 순교지로 가꾸고 또한 초대 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 새로운 성경을 번역한 임승필 요셉 신부님과 제주도 최초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 파리외방전교회, 골롬반 외방전교회 공덕비도 세워져 있는 황사평은 거룩한 성지다.
제주교회의 최초 본당이다.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다. 당해 6월 삼도 1동 108번지 성당부지를 확보 한 뒤 1921년 향청까지
매입하여 성당과 함께 교구청부지 까지 마련하였다. 1930년 고딕성당을 2000년에는 현재 대성당을 봉헌하였다. 1900년에는 6월12일 자본당으로 한논본당을 1952년 6월29일에는 신창본당을 1967년 6월 15일 동문 본당, 1970년 11월 9일 광양본당, 1977년 6월 30일 서문본당을 분리하였다. 1988년 2월 10일 추자공소를 서문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제주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인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로서 조선 시대 세종 30년(1448)에 목사 신숙청이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상무 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이 건물을 세웠다. 관덕정이란 이름은 [사이관덕]이란 문구에서 나온 것으로 활을 쏘는 것은 평화시에는 심신을 연마하고 유사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까닭에 이를 보는 것은 덕행으로 태어난 곳이다. 대들보에는 십장생도, 적벽대첩도, 대수렵도 등의 격조높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편액은 안평대군의 친필로 전해오고 있다.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은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는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하였으나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린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이로인해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에 의하면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 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 받아 이장하였다.
정난주는 정약현의 딸로서 이벽의 누이가 바로 어머니가 된다. 정난주와 혼인을 맺은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배론 토굴에 숨어 작성한 백서를 인편으로 북경에 보내려다 발각되어 체포된다. 갖은 고문끝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고 남은 가족들인 황사영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노비되어 유폐되고 정난주와 아들 황경환은 제주도로 노비가 되어 제주도로 향하다 정난주의 기지로 황경환은 추자도 바위에 버려져 어부인 오씨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오씨로 추자도에서 여생을 보내다. 사망한다. 이에 반해 정난주는 제주도에 도착한 후대정현 노비 신세로 전락하지만 학식과 인격으로 현지 모든 사람들에게 한양 할망이라 불림을 받으며 존경 받다 대정현에서 사망한다.
이 분이 바로 정난주, 황사영의 6대손 인수씨(그들은 오씨로 살았다)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살다 그곳에 묻혔다.
용수 성지, 김대건 신부님 표류중 도착하여 첫미사를 드렸던 장소에 봉헌된 기념관, 공소, 입니다.
첫날 일정은 용수성지 방문을 끝으로 종료됨~~ 수고하셨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
2017년 06월 성지순례와 걸음여행 일정표 | |||
일 시 |
행 선 지 |
세부 일정 |
비 고 |
둘 째날~~ 하느님께서는 항상 함께 하십니다. | |||
05:30 |
기상 |
출행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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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
모임 |
용소성당로 걸어서 이동 후, 아침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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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
아침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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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 |
출발 |
차로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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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 |
어리목 |
주차장,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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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0 |
출발 |
트레킹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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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 |
위세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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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남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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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
위세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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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영실 |
휴게소 도착(30분간 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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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5 |
어리목 |
주차장(차량이동을 위해, 운전자만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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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영실 |
주차장(차량을 영실로 이동) |
|
14:00 |
영실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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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 |
모슬포 |
부두식당,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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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모슬포 |
차량으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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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 |
모슬포성당 |
묵상과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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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모슬포성당 |
차량으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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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 |
추사 김정희 |
유배지와 기념관 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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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추사 김정희 |
걸어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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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 |
정난주 |
대정현 성지 참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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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 |
정난주 |
황경환의 어머니, 황사영의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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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용수성지 |
기념관 탐방과 주변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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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성당 |
하루일과 마침 기도와 감사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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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펜션하우스 |
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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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펜션하우스 |
제철어류 해산물 파티와 친교의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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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간 그리고 고단한 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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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가 온누리에 가득함을 위하여 걸어서 하늘까지 |
어리목을 출발하여 윗세 오름을 오른 후 다시 남 벽까지 올랐다가 윗세 오름을 경유하여 영실로 내려 올 계획이다. 오름 길은 상당히 평이하고 대부분 테크가 설치되어 누구나 걷기가 편한 코스다. 남벽의 웅장하고 멋진 광경과 적정한 기후로 6월 중순 남벽 부근에서 철쭉을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영실로 내려 오는 길목에서 제주도 서 남부에 펼쳐진 광활한 오름들의 모습과 영실부근에서 만나는 멋진 암벽과 소나무 군락에서 색다른 한라산을 정취를 만끽하게 된다. 오름과 내림을 합쳐 4시간30분에서 50분 사이면 충분하게 완등할 수 있는 코스다.
영실 주차장으로 내려 온 후 20-30분 휴식을 갖음. 어리목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을 이동하기 위하여 약 30분이 필요함. 이 부분은 서둘러 내려와 진행하면 대기하지 않고 곧장 모슬포 식당으로 이동할 수도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식당은 외지 사람들이나 내지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자자한 식당이다. 또한 대물림으로 내려 온 식당이면서 주인이 직접 잡아온 해산물로만 요리하여 신선한 맛과 양념 맛이 최고다. 식사 후 모슬포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기도와 묵상을 갖으려 한다.
모슬포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1954년 3월 7일 모슬포성당이 완공됨과 동시에 서귀포본달 관할 '모슬포공소'로 편입되었으며, 1958년 6월 29일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본당에서는 화순공소(안덕면 화순리)와 무릉공소(대정읍 무릉 1리)를 설립하였으며, 1987년 8월에는 화순공소를 새로 신축(슬라브)하였으며,1966년 6월에는 본당 내 새교육관(2층)을 신축하여 완공하였고 2002년 5월에는 무릉공소를 현부지로 신축 이전하였으며, 2008년 7월에는 본당을 리모델링하여 완공하였다. | |
모슬포 성당에서 다음 행선지 추사 유배지까지는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있다. 차량으로 이동 한 후 추사 유배지와 기념관을 탐방한 후 정란주 마리아 묘역까지는 걸어서 이동하려 한다. 소요시간은 약 5분정도,
예산 고택에서 자란 추사는 양자로 입적하여 한양으로 옮겨 성장한다. 예산 집 주련에 추사 나이 여섯 살 즈음 다음과 같은 시를 올린다. 고요히 앉아 차를 반이나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 같고 그 향기가 안에 오묘한 맛이 우러 나오 매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靜坐盧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이 시를 통해 차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추사가 차를 접하기 시작한 것은 동지사로 연경에 가서 부터지만 초의를 수락산 학림사에서 만나고 나서다. 동갑나기 두 사람은 밤을 새며 다담을 나눈 후 평생 지음의 관계로 여생을 보낸다. 참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남양주 마재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깊은 학문을 딱아 나간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은 조카사위 황사영백서에 연류되어 약전형과 더불어 유배의 길에 들어선다. 자산어보 저자로 유명한 형 약전은 흑산도에 안치되고 본인 약용은 강진 허루한 주막에 유배되어 장장 18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대흥사에 머물며 용맹정진하던 초의선사는 그 소식을 접하고 약용을 만나 스승처럼 벗처럼 모시고 교우한다. 약용은 유교와 시를 가르치고 초의선사는 다도를 전수한다. 초의선사의 안내로 그 사이를 끼어든 사람이 바로 추사 김정희다. 이 교분은 오래토록 유지되면서 대물리기 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다산이 18년을 유배생활을 한 것처럼 추사 역시 9년을 제주 대정에 머물며 유배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모략에 의하여 걸려든 추사는 죽음에 이르는 길목에 섰지만 재상으로 있던 두 친구의 조력으로 유배의 길로 나서게 되어 목숨을 건진 것이다.
한양에서 부 터 내 내걸어 온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하루를 묵는다. 밤새 차를 다려 마시며 초의선사는 화북진도를 그려 추사에게 선물하며 유배생활의 편안함을 우정으로 기원한다. 그리고 그 후 제주도로 넘어가 초의는 반년을 넘게 대정에서 추사와 함께 생활하며 차나무를 심고 가꾸며 차를 달여 마시며 禪을 하며 禪論을 정립 한다. 이 때 추사도 禪에 깊이 침잠되어 禪과 茶는 일치됨을 깨닫고 글을 써서 초의에게 선물한다. 茗禪이란 글씨인데 茗은 바로 茶이니 茶禪과 같은 말이다. 명선이라함은 茶禮 一如뜻하는 말이 된다.제주도에 차 밭이 생긴 연유도 알고 보면 초의와 추사의 덕택인 것이다.이런 깊은 우정이 그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며 학식을 높이고 추사체라를 대정에서 완성한 것이다. 차와 선의 세계가 이끌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짐작이 된다. 다산, 초의, 추사 세 사람은 학문과 서화와 시, 차 등으로 엮인 사람들이었다. 초의는 다산에게 유교를 배우고 다산은 초의에게 茶의 세계를 배운다. 추사는 시문을 배우고 두 사람은 글씨를 배우며 추사 역시 초의에게 다도를 익힌다. 그러다 년장자인 다산이 타계하자 둘은 슬픔을 나누며 배웅하고 그의 아들인 학유와 학연과 인연을 맺으며 교분을 이어간다.
제주 대정에는 또 한 사람의 유배자가 있었다. 유배라기 보다는 신분 강등 자라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은데... 나주 정씨 정재원은 남씨와 혼인하여 아들을 둔다 그 아들이 약현이다. 약현은 이벽의 누이를 아내를 맞이하여 딸 셋을 두는데 맏딸이 명련이다. 명련(난주)은 황사영에게 시집을 가 아들 황경한을 낳는다. 세째 명현(난수)은 홍재영에게 시집 가 홍봉주를 낳고 홍봉주는 심조이를 아내로 맏이한 후 홍아기를 낳는다. 심조이는 기해박해 당시 전주에서 옥사하고 옥사 후 2시간 만에 홍 아기도 옥사한다. 홍봉주는 재혼을 하여 홍베드로를 낳지만 홍베드로는 남종삼의 아들과 함께 전주 초록바위에서 떨어져 수장으로 순교함. 이것이 바로 약현 집안 순교사다. 본인은 진사에 합격하고도 외지에서 관직 때문에 늘 출타 중이신 부친을 대신하여 집안의 대소사와 동생들 건사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던 약현은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부친의 의도를 따라 천주교를 의식적으로 멀리했던 사람이었다.(계속)
2017년 06월 성지순례와 걸음여행 일정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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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행 선 지 |
세부 일정 |
비 고 |
세 째날~~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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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
기상 |
출행준비(2박3일 팀은 짐을 모두 챙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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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
용수성당 |
아침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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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
순레자의 집 |
아침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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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 |
출발 |
차량으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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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
성 이시돌목장 |
이시돌 목장 안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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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동산 |
십자가의 길& 묵상과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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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
곳곳 참례와 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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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삼위일체성당 |
주일 교중 미사 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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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
성 이시돌 성지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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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
제주동문시장 |
점심식사와 장 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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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 |
제주동문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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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 |
절물휴양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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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절물 휴양림 |
트레킹 종료와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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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삼양해변 |
커피와 담소, 정리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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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
삼양해변 |
공항으로 출발 (12인승 차량 반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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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
제주공항 |
짐 붙이고. 탑승권 발권하고 탑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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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제주공항 |
이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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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
해단식 |
김포공항 도착 후 요기하시고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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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화와 선 |
일명 돼지 신부라 부르는 성직자가 제주도 있다. 반백 년 이상을 제주도에 머물며 제주도를 지금모습으로 변모 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성골로반 수도회 소속 PJ Mcqlinchey 신부님이시다. 한국명으로는 임피제라 부른다. 아일랜드 신학교를 이수하고 사제서품을 받은 후 가난의제주를 1954년 땅을 찾아 발을 딛은 후 올해 89살이 되도록 한국사랑을 멈추지 않고 계신 사제다. 임피제 신부는 한림 본당에 부임하던 시절의 제주는 모든 것은 참혹했다.
4,3사건과 한국전쟁으로 빈곤과 정신적 상처를 입고 절망하던 시기였다. 임신부께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우선 자존감 회복이 될 수 있도록 한 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잇는 자립경제를 갖추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신부님은 제주의 청정한 환경을 통해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목축업은 제주에서 절대가치를 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우선 신부님은 미국에서 원조물자를 싣고 들어온 화물선에 관심을 기울여 9000톤급 선상에 실려 있는 목재를 얻어 한림성당 부근에 살던 비신자들까지 설득하고 동원하여 옮겨와 성당을 세운다.
인분을 이용하여 키우는 돼지 사육방법을 보고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주민들에게 외면 당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청소년들에게 눈을 돌려 4H 클럽 활동 청소년들과 끊임 없이 소통하며 방법을 찾아 나간다. 지금도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때 그 청소년들이 없었다면 이시돌 목장도 없다”성당주변에 축사를 짓고 요크사 종자 돼지를 원조 받아 키운 후 새끼가 생기면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 돼지들이 성돈이 되어 새끼를 놓으면 다시 반환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명 돼지 은행을 발족시킨 것이다.
( 1961년 한림성당 옆에 있던 축사가 부족하여 금악으로 옮겨 데쉬포라는 공법으로 건물을 짓기 위하여 공사 관계자들과 협의하는 임피제 신부님 모습. 독특한 건축 양식인 테쉬폰(Ctesiphon) 건축 기술을 제주에 선보인
임피제(Pj Mcglinchey)신부님에게 2016년 대한건축사협회 제주도 건축사회,
건축학회 제주지회, 한국건축가협회
제주건축가회가 마련한 제주건축인 상이 수여되었다.독특한 건축양식인 테쉬폰 건축기술을 1961년 국내 처음으로 제주 이시도레 하우스에 적응하여 전파한 공로다.)
또한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하여 한림 항에 버려진 생선 내장을 보릿단과 섞어 먹여 생산성을 더욱 놓여 나가 결국
성과를 이룬다. 축사가 좁아지자 현재 성 이시돌 목장 자리로 이사하여 이시돌 목장으로 발전의 틀을 마련한다. 또한 목축업을 위한 교육시설을 마련하여 군대에서 제대 후 돌아 온 청년들을 상대로 교육시켜 제주를 목축업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한림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저리로 사업자금을 빌려주어
지역개발 사업의 초석을 만들었다. 이런 일들은 제주 도민들의 고용 창출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것 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신부님은 직조 회사도 만든다. 양털로
실을 짜 담요와 의류를 공급함으로서 도내 여성들의 노동 가치를 향상 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원들을 만들기 위하여 초창기 고향 가족돌과 친지와 이웃들에게 밤새 원조요청의 편지를 썼고 미국, 독일 등 선진국의 원조를 일으키려고 사업 계획서을 만들어 제출하여 트렉터 등의 농기구를 들여와 현대적 낙동의 발판도 만들 수 있었던 역할도 신부님의 몫이었다. 그리고 성골반 수녀회 소속으로서 의사면허를 갖고 있는 수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고 설득하여 결국 이시돌의원도 개원하기에 이룬다, 병원 개원으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던 제주 서남부지방 여성들이 많은 의료지원을 받게 된다.
그런 시설을 시대에 맞게 지금은 2002년부터 임종이 가까운 가난한 환자들에게 육채적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존엄한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재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런 비용은 전부 이시돌 목장의 사료공장과 종마사업으로 나오는 이익금을 전부 충당하지만 매년 3억원씩 적자 상태다.
(지금도 현존하는 데쉬포 건물, 포르치운 쿨라를 연상시키는 소박함 때문에 마음에 파고드는 전경이다. 내부에 들어가면 건물 개념으로 있을 것은 다 있다. 그리고 개구부(창문) 앞에 서서 외부를 조망해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을 사로 잡는다. 스펙더클한 풍경이 오래토록 남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삼위일체 성당 위에 계신 주님이시다. 성글라라 수도원에 있는 금악성당은 리모텔링중이라 요즈음 교중 미사는 삼위 일체 성당에서 집전된다.)
하늘에서 바라본 성 이시돌 전경
금악성당은 1957년 한림 본당 공소로 출발하였으나 1981년 11월 29일 준본당으로 승격되고 1958년 토지를 매입 성 이시돌 목장이 출발, 1972년 성 글라라 수도회가 목장 부근에 진출한다.이어서1985년 금아성당 본당으로 승격된다. 이어서 제주교구 3대 교구장 김창렬 주교께서 삼위일체 공경과 신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이시돌 목장 임피제 신부님과 협의끝에 이시돌 목장 안에 1991년 9월, 순례와 기도를 위한 은총의 동산을 조성한 후 1991년 10월 28일 축성식을 갖게 된다.
오병이어의 기적, 제주 한림 이시돌의 기적, 맥그린치신부 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신 신부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참석을 놀라워 하시며 이렇게 당부 하셨다. 제주의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호스피스 사업에 어려움이 따르지만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하시며 제주 도민들께서 관심을 갖고 1000원, 3000, 5000원씩만 매월 도와준다면 또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이시돌 성지에서 일정을 마친 후 제주시내에 있는 동문 재래시장을 찾아 제주의 숨은 모습을 보고 부근에서 점심을 먹으려 한다. 점심후 다시 차량으로 절물 휴양림으로 옮겨 산책을 하며 2박3일 팀의 여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공항으로 가기 전 공항과 가까운 검은 모래로 유명한 삼양 해변을 함께 걷고 커피를 마시며 형제적 친교로서 일부 일정을 전부 내려 놓으려 한다. 시간에 맞춰 공항에 수속을 밟고 19시30분 이륙을 돕고 남은 일행은 숙소로 귀소 할 것이다.
2017년 06월 성지순례와 걸음여행 일정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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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행 선 지 |
세부 일정 |
비 고 |
네 째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찬미 예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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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
기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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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
용수성당 |
아침기도, 묵상, 감사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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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
순례자의 집 |
아침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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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5 |
순레자의 집 |
숙소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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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
모슬포 |
모슬포 여객선,탑승수속, 명단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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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가파도 |
승선 |
064-794-5490 |
09:15 |
가파도 |
도착(트레킹- 및 탐방,( 점심식사,해물잠봉) |
064-794-6463 |
12:55 |
가파도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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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 |
모슬포 |
도착 |
|
13:20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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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0 |
서귀포 녹차밭 |
설록차(도순 다원) |
064-739-0419 |
15:10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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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6 |
서귀포휴양림 |
|
064-738-9544 |
1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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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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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
제주공항 |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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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
제주공항 |
짐붙이기, 탑승권 발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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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제주공항 이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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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
김포공항 |
간단한 저녁과 해단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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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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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적 친교와 창조적 질서 안에서 하느님과 걸었던 순례와 걸음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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