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청자 실패작, 왜 깨버리는가? | ||||||||||||||||||||||||||||||||||||||||||||||||
옹동 비봉리, 산외면 주루실에 있는 고려청자기 도요지는 태인허씨 소유지 | ||||||||||||||||||||||||||||||||||||||||||||||||
| ||||||||||||||||||||||||||||||||||||||||||||||||
| ||||||||||||||||||||||||||||||||||||||||||||||||
고려청자기를 굽고 꺼내어 봐서 흠이 생기거나 잘못 만들어진 것은 즉석에서 깨버린다. 엄청난 경비를 들여 만든 것이니 싸게 팔아도 되는데 유독 고려청자기 만을 깨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도공의 장인정신 때문에 그런다고 요즘에는 말한다 이주의 자유조차 없는 천민 계급 도공이 '장인정신'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도공들은 천인과 노예계급으로 주거 이동의 자유도 없이 연명하며 살았다. 명품이니 장인이니 고급신분이 아닌 그 시대에 예술적인 가치를 말하다가는 처형될 수도 있다. 고려청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귀족계급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특히 고려청자기는 고려 현종이후 태인허씨 계통의 인천이씨인 이자연, 이자의, 이자겸의 귀족세력과 왕족이 전용하는 그릇이었다. 그래서 이들 태인허씨 소유의 지역에만 주로 최고급 청자도요지가 있는 것이다. 태인허씨 소유의 지역에만 주로 최고급 청자도요지가 있는 까닭은...
고려 의종, 명종임금의 어머니(인종왕비 공예태후)도 전남 강진 출신으로 이자겸의 손녀딸이다. 부안 곰소항 변산중학교에서 내소사 가는 길머리에 고려자기 도요지가 100여개나 되는데 1972년 이곳에서 근무했던 기자는 가정 학생방문을 하였을 때 답사하며 조사했다. 집집마다 마당을 파면 나오는 것은 모두가 고려청자 파편무더기였다. 이곳에는 그들 허씨 이씨의 후손 선산묘가 있어서 수긍이 간다. 고려청자는 신비한 기운이 있다고 믿었다
고려시대 무덤에 고려청자기를 넣어 두면 후손 번성과 귀족세력의 기운이 나온다고하였다. 유별나게 매장된 묘에 신라나 조선시대에 비하여 고려시대 묘에 그릇이 많이 매장 된 이유는 조상귀신이 청자기 기운의 힘을 받는다는 신앙 탓이다. 명당터의 비결은 고려자기? 충청북도 청주에서 약국을 하는 성균관대 약학과 출신 이명무 약사가 쓴 “명당터 만드는비결” 책에서도 정답은 고려자기 항아리를 묘지나 집에 묻어두는 것이란 실험과 결과를 의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노부모를 음식과 같이 생매장 한다는 '고려장' 기록은 정도전이 조작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고려자기에는 자기의 기운이 있어서 혼령이 편안하다고 이명무 약사는 그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책의 부록으로 군번만한 크기로 고려청자기 판을 목걸이로 준다. 그것으로 미국 발명품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는 약력이 있다. "고려청자가 품고 있는 王氣를 지켜라!" 부안군 변산중학교 근처 작도마을과 보안면 유천리의 촌노들의 말에 의하면 도공은 도요지 토성안에서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도공의 탈출로 도자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일이 생겨 왕의 혈기가 다른 사람에게 생겨서 역모의 위험을 당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탈출은 곧 죽음이라고 했다. 고려청자기는 지금의 옥목걸이, 옥팔찌, 옥침대 같이 대량생산 되었다. 아울러 묘지의 납골함을 도자기로 만들어 기운을 생성시켜 귀족의 세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신을 배척한 조선중기이후 유교시대에 묘지에는 도자기가 거의 없어졌다. 천인으로 겨우 연명하듯 굶주려 사는 도공이 명작이 아니라고 깨버리는 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장인정신에서 실패작 깬다는 것은 서구식 풍습
인도나 아랍에는 지금도 신분계급이 엄격하다. 그런 시대에는 양반 귀족만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백정, 재인, 무속인, 도공 등은 천인 신분을 탈출하려 다투어 학교에 입학하거나 군대에 입대하면서 천민신분이 벗었다. 그러니 예술가라는 서구식 풍습으로 실패작을 깨버린다는 작가정신 논리는 변명으로 보인다. 대대손손 세도 누리기 위해 못 쓰는 고려자기는 깨고, 죽을 때는 함께 묻고 고려시대 왕족이자 세력자였던 이자의, 이자겸은 사실상 왕노릇하여 고려청자기를 사용하는 고유권한을 누렸다. 그리하여 농민, 서민에겐 사용 엄금하는 제도에서 귀족이 사용할 수 없으니 실패작은 깨버리는 것이다. 노예신분인 도공이 최고예술가로서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깬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낸다. 정읍 옹동 비봉리에서 만드는 고려청자는 “덕천창”이라는 고려궁중왕족이 식사하는 관청에서 전량이 사용되었다. | ||||||||||||||||||||||||||||||||||||||||||||||||
|
||||||||||||||||||||||||||||||||||||||||||||||||
입력 : 2008년 01월 04일 10:00:33 / 수정 : 2008년 01월 07일 09:54: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