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광학(光學) 사상의 연원(淵源)
현대 사진술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광학사상은 언제쯤 싹트기 시작하였을까. 사진사가들은 제각기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그들 중에서 그 사상의 발아기를 가장 먼 옛날로 상정하는 사람은 루시아 모홀리(Lucia Moholy)이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중국에서는 지 금부터 2천년 전에 벌써 사진술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
유리를 렌즈의 형태로 만든 것이 아시리아의 니네베 폐허, 고대 이집트의 묘지, 또는 폼페이의 폐허 등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히 광학상의 목적에 이용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 B.C. 5세기경 그리이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렌즈로 태양광선을 모아서 물건을 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학자인 유클리드는 B.C. 300년경에 빛의 굴절을
연구하였다.'
고대 오리엔트문명의 중심이었던 이집트나 인도문명의 유적에서 렌즈형의 유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인류가 기원(紀元) 훨씬 전에 이미 광학의 원리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실생활에 응용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는 특히 정치나 풍속을 풍자한 희극으로 명성을 떨친 극작가였는데,
그러한 예술가가 물리적 광학현상에 대하여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오늘과는 달리 다방면의 지식에 정통했던 것 같다.
희랍민족은 연극 중흥에 창의적인 의욕을 보였을 뿐더러, 미술 분야에서도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이를테면 희랍 조각과 파르테논 신전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또 철학과 사상의 분야에서도 후세에 더없이 중대한 영향을
미친 탁월한 학설이 수없이 발표되었다. 희랍 철학의 삼거봉(三巨峰)이라 할 수 있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모두 빛의 본성에 관한 학설을 발표하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광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등장하였다.
과학자인 프리에, 천문학자인 프톨레미, 그리고 스토아철학의 태두인 세네카 등이 빛의 굴절과 렌즈의 성질에 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다.
로마제국의 쇠망과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중세는 유럽에서 봉건제도가 형성된 시대였다. 희랍과 로마시대에
번성했던 예술과 문화가 이 시기에는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해 있었기 때문에, 중세를 '암흑시대'라 일컫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시기에는 고대의 예술과 문화가 일부 지배계급에 독점되다시피 했고, 노예의 노동이 모든 생산의
기반이던 때였다.
그러다가 과학상의 새로운 발명이 연쇄적으로 등장함에 따라 생산의 기반이 차츰 노예의 노동으로부터 기술로 옮겨갔다.
우선 제분작업의 유력한 동력원으로 등장한 물방아는 나중에는 각종 공업에 응용되었다. 12세기에는 풍차가 발명되어 역시
중요한
동력원으로 이용되었다. 이어서 경작기, 방직기, 운송기 등이 차례로 발명·개량되었으며, 중세의 혁명적인 진보를 상징하는
인쇄술도
등장하였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무렵 몇몇 학자가 현대 사진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는 사실이다.
1.2. 사진(photohraphs)의 어원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포토그래피(photographic)'라는 말은 이미1839년 영국의 과학자 허셜(Herschel)에
의해 공식적으로 언급된 바 있으며, 그 이전에 사진술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오던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 '
포토제닉 드로잉(photogenic drawing)'등의 용어들은 그 후 자연스럽게 '포토그래피'하는 말로 바뀌어 왔다.
'포토그래피'라는 용어는 본래 그리스어의 '빛'이라는 의미의 포스(phos)와 '그리다'라는 그라포스(graphos)의 합성어로
'빛으로 그리다.', 즉 광화(光華)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포토그래피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실물과 닮았다(likeness)'라는 뜻의 '사진(寫眞)'이라 전달되었다. 이 사진이라는 말은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의미와 사실 그대로를 베껴(찍어·박아)낸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으며,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사진술',
'사진'이라는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다.
1.3. 렌즈의 발자취
렌즈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Linse(콩)에 어원을 두고 있다.
현재까지의 지식으로는, B.C. 1000년경에 괴멸한 니네베의 폐허에서 발견된 것이 최고(最古)의 렌즈이다.
유리는 이집트의 초기부터 모래, 소다, 구각을 원료로 하여 생산되었으며, 다른 지방에도 대량 수출되었다.
이집트 민족은 장식품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유리를 생산한 모양인데, 각종 자료로 미루어 보면,
그들이 렌즈의 점화력을 생활에 이용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세네카는 그의 저서 [자연의 탐구]를 통하여 최초로 렌즈의 확대력을 설명하였다.
알하젠은 1000년경, 로저 베이컨은 1267년에 평볼록렌즈의 확대력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볼록렌즈의 노안경은 1300년경 이태리의 살비노 아르마티에 의해 발명되었고, 오목렌즈의 근시안경은
15세기 초엽부터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1440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은 화약, 나침반과 더불어 르네상스 운동을 추진시킨
삼대발명(三大發明)의 하나였다. 서적의 보급이 활발해지자 거기에 비례하여 안경의 보급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렌즈를 조합하여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150년 후의 일이었다.
네덜란드의 얀센 부자(父子)는 1590년에 복식현미경을, 이탈리아의 갈릴레이는
1609년에 망원경을 각각 발명하였다. 갈릴레이가 손수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달을 관측한 사실을
바탕으로, 로마 법왕청의 박해를 무릅쓰면서까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 후 독일의 요한 케플러는 1611년 갈릴레이의 학설을 이어받아 볼록렌즈를 조합한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의 아이자크 뉴우튼은 갈릴레이 및 케플러의 선구정신을 계승하여 1666년에는 스펙트럼 분광기를,
68년에는 최초의 반사망원경을 발명했다.
빛의 속도는 1727년 영국의 브래들리에 의해서 최초로 측정되었고, 적외선은 1800년에 F.W. 허어셸과 W.H.
월래스톤에 의해, 자외선은 1801년 독일의 리터에 의해 각각 발견되었다.
한편 영국의 존 돌론드는 1758년 최초의 색소렌즈를 만들었고, 이듬 해에는 비인의 포이그틀랜더 주식회사가
렌즈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광학 체계에 의한 렌즈의 제조술은 사진술의 탄생 이전에 이미 눈부신
발달을 보이고 있었다.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달은 생물학, 천문학을 비롯한 각종 과학의 발달에 다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과학자가
망원경이나 현미경에 비친 상을 기록하려면 스케치의 방법을 빌리는 도리 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사람은 좌안(左眼)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우안(右眼)으로 그 상을 스케치하는 훈련을 쌓아야 했으며,
이에 숙달되지 못하면 일급 생물학자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은 불편하고도 불합리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상의 신속하고도 정확한 기록법을 누구보다도 더 애타게 갈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4. 카메라 옵스큐라(obscura)
'사라져 버리는 영상을 잡으려는 생각은, 독일 사람들이 해온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단지 욕망에 불과한 것이며, 그런 의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어떠한 기계도 신의 이미지를 잡을 수 없다.'
1839년에 성공적인 사진 프로세스의 발명에 관한 최초의 공식발표에 대해서 독일의「라이프찌히 시공보(市公報)」는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시공보는 만약 과거의 아르키메데스나 모세와 같은 현인들이 '거울에 비춰진 것을 영원히 있게
하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것을 떠벌리는 프랑스의 다게레오를 우리는 당장에
바보 중의 바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극도의 오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진의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광학적, 화학적 원리들이 그 시대 훨씬 이전부터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현대 카메라의 효시이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바늘 구멍을 통해 들어온 광선이 영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려져 있었다. 10세기에 아라비아의 학자 알하젠(Alhazen)이 그 효과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했고,
바늘 구멍을 밖으로 뚫은 암실인 카메라 옵스큐라(글자 뜻 그대로 '어두운 방')속에서 일식(日飾)을 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했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구멍에 렌즈를 끼워 넣게 되었다. 그리고 카메라 옵스큐라는 더 작아져서 가지고
다니기에 더욱 편리해졌다. 그것은 방에서 작은 오두막으로, 거기서 일종의 가마로, 작은 천막으로 결국에는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상자로 축소되었다.
16세기에 델라 포르타(G.B. della Porta)가 그의 책 「자연의 마술」(Natural Magic)에서 예술가들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만약 당신이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해도 연필로 이 영상의 윤곽선을 따라 그리고,
그 위에 색깔을 칠하면 된다. 화판 위의 종이에 영상을 반사시키면 이 일이 가능해진다.' 그 당시 서구사회의 예술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목표는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와, 환상의 깊이를 창출해내는 대상의 정확한 배치였기 때문에,
위의 제안은 매우 열띤 반응을 일으키며 채택되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18세기 경 어떤 예술 전문가가 지적했던 대로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대상을 그만큼 사실에 가깝게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들은 이 새로운
발명품을 매우 유용하게 써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그 당시에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이미지를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일정한 은화합물을 빛에 노출시킴으로써 짙은 색을 띠게 된다는 것이 17세기 초반에 관찰되기는 했으나,
해결할 수 없었던 어려운 문제는 이미지가 모두 까맣게 되기 전에 이 작용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였다. 19세기초에
영국의 유명한 도공의 아들이었던 웨지우드(T.Wedgwood)가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의 렌즈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기록하는 시도를 했다. 그는 카메라 이미지로는 실패했으나, 질산은으로 감광된 흰 가죽이나 흰 종이 위에 곤충의 날개와
잎사귀를 놓아, 햇빛에 노출시킴으로써 네가티브의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빛이 닿은 종이 부분은 어두워졌으나 위에 놓인 물건에
의해 가려진 부분은 변함이 없었다. 웨지우드는 이러한 실루엣을 영구히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노광 후에 다시 빛이 닿으면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그 이미지들도 어두워져 버렸다.
웨지우드는 비록 그가 연구해낸 은화합물을 이용하여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사진이라고 볼 수 있는
최초의 변하지 않는 사진이 되기까지는 그 은화합물은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의 사진은 프랑스 중부지방에
살았던 발명가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에 의해 1826년에 비로소 만들어졌다. 그는 그 당시 석판인쇄술의
새로운 공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석판인쇄는 그림을 인쇄할 때는 우선 인쇄판 위에 그림을 뒤집어 놓고
손으로 복사를 해야 했다. 그는 그림을 복사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내기로 작정하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자연으로부터 직접 그 모습을 복사하려고 시도하였다.
처음에는 염화은으로 실험했으나 1820년 경 초에는 빛을 쐬게 되면 굳어지는 일종의
아스팔트인 주데아 비투멘(bitumen of Judea)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니스 칠에 쓰이는 용제인 라벤더 기름에
비투멘을 녹이고 나서 그 혼합물로 얇은 백랍에 층을 입혔다. 그리고 그 판을 카메라 옵스큐라 속에 넣고 창가로 가서
그의 안뜰을 향해 놓고 8시간 동안 노출하였다. 그 판 위에 이미지를 만드는 빛은 밝은 부분의 비투멘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어두운 부분에 있는 것은 부드럽게 그리고 용해될 수 있도록 남겨두었다. 그 다음에 그 판을 다시 라벤더 기름으로 씻었다.
이 기름은 빛이 닿지 않은 부분의 아직도 부드러운 비투멘을 제거해 버렸다.
그는 웨지우드가 실패했던 바로 그 부분을 성공시켰다.
즉 그는 빛에 노출되지 않은, 아직 빛에 민감한 부분을 제거하는 방법을 발견해냄으로써 이미지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니엡스가 헬리오그라프라고 이름 지은 그 결과는 아직 미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사진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도록 유도하였다. 한편 그의 작업에 대한 소식이 다른 프랑스인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에게 전해졌다.
다게르는 당시 알프스 산맥과 같은 장관을, 특수조명과 대형의 투명한 그림을 통해서 환상적인 효과로 재현하는
디오라마(Diorama)를 개발해냈다. 다게르는 디오라마로 장관을 묘사하는 데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 이미지들을 보존하기 위한 시도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니엡스에게 정보를 교환하자는 편지를 내게 되었고
마침내 1829년에 그의 파트너가 되었다.
19세기 중반은 사진과 같은 발명품의 성숙기였다. 서양에서는 그 당시 부를 축적하여 새롭게 상승된 부르조아지가
사진을 갖기를 원했다. 또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여건이 허락되면 여행을 하여 멀리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여행안내서나 사진을 구입하였다.
니엡스는 그 이후로 사진이 사회에 주게 될 큰 충격을 볼 때까지 살지 못했다. 그는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을 세상에
공표할 수 있을 만큼 니엡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 과정을 완벽하게 성공하기 몇 년 전인 1833년에 사망했다.
1.5. 광화학의 발달
사진술은 두 개의 측면, 즉, 하나는 대상물체의 상을 카메라로 촬영한다는 물리적 측면이고, 또 하나는 감광 물질에
반영된 잠상(潛像)을 현상·정착시킨다는 화학적 측면으로 형성돼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물체의 상을 감광 재료에 투영시켜 주는 광학기계류는 일찍이 17세기의 중엽부터
실용 단계에 들어가 있었는데, 선진화학은 그보다 훨씬 뒤늦게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
먼 옛날로부터 감광 물질이 발명되기까지의 연혁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8세기의 과학자 게버는 빛과 물질(物質)과의 관계를 물리적으로 상세히 설명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또 다니엘로 바르바로, 포르타 등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연구·제작하던 16세기 경, 유럽의 연금술자들은 질산은에다
바닷물을 조금 넣으면 희게 흐려졌다가 햇빛을 받으면 급히 까맣게 변색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은 연금술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광화학적 변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광화학에 관한 지식은 그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였는데, 만일 그때 그 연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면,
사진의 발명은 실제보다 훨씬 더 먼저 이루어졌을 것이다.
각은광(角銀鑛)이 채굴되면 처음에는 은백색을 띠고 있다가 차츰 암갈색으로 변색된다는 사실은 16세기에 알려진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공기와 습기의 작용으로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역시 그런 현상을 광화학적인 입장에서 철저히 분석·연구하였다면, 사진술이 좀 더 일찍 탄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사상의 정도로 판단컨대,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금술의 목적은 일반의 값싼 광물을 화학적으로 처리하여 순금으로 변환시키는 데 있었다. 결국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숱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긴 했어도, 그 부산물로서 각종의 화합물과 약품류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질산은이나 염화은은 연금술자에 의해서 발견되었지만 이런 은화합물이 흑변(黑變)하는 것은
태양열이나 공기 때문이 아니고 빛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사람은 뉘른베르크 부근의 알트도르프대학에서 해부학을
담당하던 요한 하인리히 슐쩨(Johann Heinrich Schulze)교수였다(1725년).
애당초 슐쩨는 인광 물질을 만들어 보려는 생각으로 백악(白堊)과 질산을 섞는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그 질산에는
약간의 은이 녹아 있었다. 즉 소량의 질산은이 함유돼 있었다. 해가 비치는 창가에서 실험을 하던 중, 혼합물 가운데 햇빛을
받은 쪽이 자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물론 햇빛을 받지 않은 쪽은 흰 색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는 불 옆에서도 실험을 해 보았지만 질산은이 변색되지 않자, 이 변화는 열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혼합물 속의
은의 양을 증가시키면 변색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최후로 그는 어떤 글자 모양을 칼로 도려낸 검은 종이로
그 혼합물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를 덮어 보았다.
그 결과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도려낸 부분으로 새어 들어간 빛은 그 혼합물에 글자의 형상을 뚜렷하게 그려 놓았다. 그것이 어찌나 선명했던지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의 속임수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나 그 혼합물이 들어 있는 비이커가 흔들리게 되자 뚜렷이 그려졌던 자형은 곧 사라져 버렸고,
슐쩨 역시 그 실험을 더 추진하여 사진술과 연결시켜 보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고 말았다. 그는 이 실험 결과를 뉘른베르크의
황실학사원(皇室學士院) 회보에, [황린을 만드는 과정]이란 제목 하에 흥미 본위로 소개하였다. 결국 슐쩨는 어떻게 해서라도
어두운 데서 빛을 내는 '인광 물질'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는 '인광 물질'이 아닌 '감광 물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슐쩨의 사진사상의 공적은 질산은의 감광성의 발견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조국인 독일의 일각에서는
그를 사진술의 발명자로 꼽고 있다. 그러나 슐쩨는 그의 실험을 카메라 옵스큐라와 연관시키지도 않았고 또 영상을
고정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를 사진의 발명자로 간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슐쩨의 발견을 더 발전시킨 사람은 스웨덴의 화학자 카알 빌헬름 셰엘레(Karl Wilhelm Scheele)였다. 셰엘레는 태양광선의
스펙트럼에서 파장이 가장 짧은 보라빛이 다른 파장의 빛보다도 염화은을 더 빨리 흑변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보라빛의 이런 성질 때문에 모노크롬을 가지고는 자연의 색채를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전정색(全整色)의 감광제가 등장할 때까지 사람들은 보라빛을 사진에 불리한 빛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셰엘레는 또 광선의 작용을 받은 염화은은 암모니아에 용해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표하였다.
스위스의 제네바 도서관원인 장 쎄느비에(Jean Senebier)는 셰엘레의 광도계(光度計)를 이용한 실험·연구를
더 발전시킨 사람이다.
그는 햇빛의 스펙트럼의 각 색광이 염화은을 흑변시키는 속도(보라의 15초에서 빨강의 20분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발표하였다.
또 쎄느비에는 빛이 수지(樹脂)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중대한 연구를 한 끝에, 수지 중에는 빛을 받으면 테레빈류에 녹는 성질을
잃고 경화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6. 다게레오타입 : 은판 위의 디자인 (Designs on Silver Bright)
그 당시 다게레오 타입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니엡스와 합께 또는 단독으로 수년동안 실험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다게르는
그의 다게레오 타입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게레오 타입은 1839년 1월 7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공표되었다.
프랑스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그것에 관해 보도했다. '그 업적이 너무도 훌륭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명암의 배합이다. 그리고 굉장히 섬세하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성공이다. 원근감에 의한 축소가 굉장히
훌륭하게 나타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 그 자체가 아닌가!'
한 영국의 과학자는 좀더 독특하게 표현했다.
'그 사진의 완벽함과 본래의 물체와 거의 똑같음은 마치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고 육안으로는 결코 알기 어려운 세부묘사까지
보여준다. 석회벽의 갈라진 틈, 삐죽이 튀어나온 처마 밑의 장식에 붙어 있는 시든 나뭇잎, 멀리 떨어진 건물에 장식된 조각품
위에 쌓인 먼지들이 이 경탄할 만한 사진 위에 정확하게 복사되어 있다.'
다게레오 타입이 보여주는 클로즈업 사진은 아직도 우리에게 큰 자극을 준다. 그 중 몇 점이 여기에 실려 있는데 어떠한
인쇄술도 오리지날의 명료한 톤의 범위와 디테일을 재현해내지 못한다. 이 다게레오 타입은 구리판 위에 도금하는 표면을
잘 마무리해서 그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판은 상자 속의 옥소 결정체가 든 그릇 위에 은면을 아래로 하여 놓음으로써
감광물질이 그 면에 생기게 된다. 옥소로부터 생기는 증기가 은과 반응하여 빛에 민감한 옥화은화합물이 생성된다.
카메라 안에서 노출되는 동안 이 판은 잠상을 기록하게 된다. 다시 말해 화학변화가 일어났으나 그것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 형상을 현상하기 위해, 그 판을 가열된 수은을 담은 접시가 있는 다른 상자 속에 은면을 밑으로 하여 놓는다.
그러면 수은으로부터 나온 증기가 판에서 빛에 노출된 부분과 반응을 하게 된다. 빛이 닿은 부분에서 수은이 은과 함께
서리같이 생긴 아말감을 형성하게 된다. 이 아말감이 형상의 밝은 부분을 메우게 된다. 빛이 닿지 않은 부분은 아말감이
생기지 않고, 변화하지 않은 옥화은은 사진의 어두운 부분을 형성하기 위해 검게 보이는 순수한 금속판만을 남게 하도록
티오황산나트륨(sodium thiosulfate) 정착액 속에서 용해된다.
그 과정이 공표 된 후, 사진을 원하는 대중에게 '태양이 그린 정밀묘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즉시 다게레오 타입 스튜디오가
문을 열었다. 1853년경에는 미국에서만 1년 동안 3백만 장이 만들어졌었다. 풍경사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인물사진이었다.
그 당시에는 다게레오 타입이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방향에서만 이미지가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는 어려움에 대해 불평이 생기게 되었다.
또 그 과정에 쓰여진 수은증기가 상당히 강한 독극물이기 때문에 아마도 다게레오 타입을 만드는 여러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커다란 결점은 판이 각각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원판을 다시 찍는 방법 외에는 복사품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네가티브로부터 원하는 만큼의 포지티브를
만들 수 있고, 이미 발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었던 네가티브-포지티브 과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1.7. 칼로타입 : 종이위에 사진 (Calotype : Pictures on paper)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다게레오 방법이 공표된 후 채 3주 못된 1839년 1월 25일 영국의 아마추어 과학자인
탈보트(William Henry Fov Talbot)가 영연방의 왕실학회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이미지를 정착시키는 방법을
오랫동안 발명해 왔다고 발표했다.
탈보트가 서둘러서 준비해 온 보고서를 발표할 때 그는 상당히 실망한 상태였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게레오의 앞선 발표는 내가 거의 5년간에 걸쳐 추구해 왔던 희망을 좌절시켜 버렸다.' 다시 말해서 그의 희망이란
곧 포토그래피라고 하는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세상에 공표하는 첫 번째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탈보트의 초기실험은 웨지우드의 실험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염화은으로 감광된 종이 위에 물건을 놓은 다음
빛을 비춤으로써 네가티브 실루엣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의해 생긴 이미지로 실험을 했다.
그가 초기 실험에 사용한 빛에 반응하는 감광도료는 노출하는 동안에 이미지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1840년 6월에 탈보트는 노출시간을 상당히 단축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사진화학의 기초가 되는 기술을 발표하였다.
감광시킨 종이에 잠상을 형성할 동안만 노출한 다음 그 잠재된 이미지를 화학적으로 현상하는 것이다.
탈보트는 노출된 후 종이 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단지 보이지만 않을 뿐 거기에 사진이 있으면 화학적인
처리에 의해 그 이미지가 완벽하게 나타나게 된다.'고 보고했다. 네가티브의 잠상을 보이게 하기 위해 탈보트는
질산은계로 처리된 은옥하물을 사용했다. 그는 그의 발명품을 칼로 타입(Calo-Type)이라고 이름 붙였다.
탈보트는 금속보다는 종이에 찍힌 사진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지를 쉽게 다시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밀착인화로 알려진 완전히 현상된 종이 네가티브를 다른 감광종이에 밀착시켜 함께 노출시켰다.
밀착된 종이의 밝은 부분이 빛을 통과하는 동안 네가티브의 어두운 부분은 빛을 차단하게 된다.
마침내 원래 풍경의 자연스러운 톤을 살린 포지티브 이미지가 종이 위에 나타나게 된다.
그것의 복사 기능에 의해서, 칼로 타입은 다게레오 타입보다 중요한 장점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게 광범위한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칼로 타입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는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주된 원인은 종이의 결 때문에 목탄화처럼 선명치 못하고,
약간 결이 있는 사진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칼로 타입은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
러나 보는 사람들은 다게레오 타입과 비교하여 칼로 타입의 불분명한 디테일에 실망했던 것이다.
1.8. 사진술의 참 발명자
지금까지 우리는 초창기 사진술이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사진에 대한 막연한 개념이 선인들의 마음속에 배태된 때부터,
숱한 사람들이 그의 순산을 위하여 있는 정성을 다 쏟았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누가 독자에게 사진술을 직접 탄생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꼬집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니엡스라고 하겠는가 아니면 다게르라고 하겠는가?
허어셀이라 하겠는가?
아니면 탈보트라 하겠는가? 아아처라 하겠는가? 아니면 마독스라 하겠는가? 아직도 망설인다면
그 이전의 슐쩨나 웨지우드 중의 어느 한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뜸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우선 1925년 일본 동경에서는 [사진발명 백년제]란 기념 행사가 열린 일이 있었다. 그해에 이런 기념행사를 갖게 된 근거는
니엡스를 사진술의 발명자로 간주한 데 있었다. 그 당시에 니엡스를 사진의 발명자로 보는 것에 이의를 품은
동경 고등공예학교 사진과 겸전미수치 교수는 마리아 에더 박사에게 명확한 해석을 내려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에 대한 에더 박사의 회신은 다음과 같다. '현대 사진술의 발명자는 다게르이다. 왜냐하면 다게르는 카메라 속에서
옥화은판에 짧은 노광을 주었고 또 그것을 현상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니엡스의 헬리오그라피,
슐쩨의 광화학 실험, 웨지우드의 염화은 실험 등도 각각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는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결국
사진의 발명자는 다게르이다.
과거에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 사진가로 활약한 일이 있으며, 빅토리아 왕조의 미술품 감정가로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부부 공동으로 사진사 연구에 귀중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헬무트 게른샤임(Helmut Gernsheim)은 그의 다른 저서에서는
물론, 사진의 발명을 상세히 파헤친 [다게르]란 저서에서도, 사진술의 발명자를 꼬집어서 지적하지 않고 있다.
그는 어느 저서에서도 다게르와 니엡스의 연구 과정을 놀랄 만큼 정밀하게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근년에 발굴한 새로운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게르와 니엡스 중 어느 사람이 참 발명자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다게르]란 저서의 타이틀 밑에는 '세계 최초의 사진가이며 다게레오 타입의 발명자'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이것이 게른샤임의 견해를 암시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그는 다게르를 '다게레오 타입의 발명자'로
그리고 세계 최초의 사진가로 보고 있을 뿐이지, 그를 세계 최초의 '사진 발명가'로 보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보다 늦게 [사진의 역사]를 저술한 미국 이스트만 하우스의 관리자인 보우먼트 뉴홀(Beaumont Newhall)은
그의 저서에 '1839년에서 현재까지'란 부제를 붙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는 다게르 설을 지지하는 것 같다.
흔히 그의 사진사관은 다분히 전통주의적이라고들 하는데, 아니나다를까 그는 아라고에 의한 다게레오 타입의 공표를 사진술의
탄생이라고 하는 종래의 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미국 예술가연맹 이사장과 시카고 예술대학 사진부장을 역임한 바 있고 현재 매사추세츠의 우스터 미술박물관의 사진부장으로
있는 피터 폴락(Peter Pollack)은 그의 대저 [사진으로 보는 사진사]에 이런 말을 적었다.
'무엇보다도 니엡스는 최초로 영상을 고정시킨 사람이다. 다게르는 사진술을 발명하진 않았어도 그것을 실용적인 것으로,
대중적인 것으로,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폴락은 니엡스의 발명설을 내세운다.
대체로 다게르를 사진술의 발명자로 여기는 사진사가가 많은 편이지만, 미국의 이스트만 하우스의 연구소장이던 미이스 박사는
폭스 탈보트를 내세우고 있어서 이색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일본의 [사진발명 백년제] 행사 때, 겸전(鎌田) 교수는 에더 박사에게 물었던 동일한 질문을 그에게도 물었는데,
그의 회답은 이러했다. '현재 세계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일반 사진술의 원조는 폭스 탈보트이다.
그는 다게르와 같은 시기에 탈보 타입이라는 최초의 사진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한 종이 네가를 최초로 사용하였고,
또한 잠상을 현상하였다.' 탈보트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국인이었고 미이스 박사 역시 영국인이기 때문에,
혈통적인 심리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말에는 상당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역시 탈보트는 존 허어셀이나
그 밖의 실험, 연구가들의 이론을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게레오 타입이 발표되기 이전의 그의 '포토제닉 드로잉'은 실용성이
희박한 것이었으므로, 탈보트를 사진술의 참 발명자로 보는 것도 어딘가 찜찜한 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영국인들이 웨지우드 혹은 탈보트를 사진술의 발명자로 친다든가, 혹은 독일 사람들이 슐쩨를 사진의 시조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의 사진사가들의 견해 역시 서로 엇갈리고 있다. 겸전 교수는 '마리아 에더 박사는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다게르 설을
주장한 사람이니, 그의 말에 찬동한다'고 했다. 사진사가인 이내신남(伊奈信男)은 '게른샤임의 노력 덕분에 니엡스가 1826년에
촬영한 사진이 영국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사진의 최초 발명가가 니엡스임은 이제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대학 사진과 김환중령 교수는 '사진술의 발명은 다게르의 화려한 등장의 그늘에 묻혀버리긴 했어도,
니엡스의 공적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볼 때, 사진술의 참 발명자는 과연 누구일까? |
첫댓글 세줄요약!!^^
사진 링크 다풀렸다!!
너무 읽기 부담이다..!! 조금씩 자주올려 읽기 좋게한는 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