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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과 망명, 고단하고 위험한 세월
♣ YMCA와 105인 사건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이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했다면, 미국에서 괜찮은 대학 교수로 여생을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비록 그의 조국은 지도상에서는 사라져 버렸고 가슴에만 남아 있는 나라였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첫해 겨울의 이승만을, 서정주는 시인다운 필치로 표사한다.
"이 질식할 합병 초의 고국에 돌아와서 아직도 집집마다 통곡이 끊이지 않는 장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몇몇 어린 아이들로 더불어 한겨울의 하늘을 쳐다보며 연만 날리고 지냈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민족의 통곡을 능히 대표할 감정과 의리를 가진 사람이면, 그 통곡의 때에 연 같은 걸 날리고 있던 심정도 알 수가 있단 말이다. 그렇다. 그는 1910년 합병되던 해의 한겨울을 날마다 남산 마루턱에 올라, 종이연을 하늘에 띄워놓고는, 자새에 감긴 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며, 수두룩이 짓밟히고 있는 조국의 혼(魂)을 모조리 그의 속에 불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서정주가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위임받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던 사실을 참조한다면, 그해 겨울, 연날리기에 몰두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늘에 연을 띄워놓고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해 보면, 반만년 독립국이 사라져버린 허망함을 달래는 행위로 적절해 보인다.
돌아온 이승만의 활동 무대는 YMCA였다. 감옥 시절 이후로 기독교 입국론과 교육을 외쳐왔던 그의 소신을 고려해 보면, 참으로 어울리는 사역이었다. 그는 YMCA에서 한국인이 맡은 최고위직인 총무로 취임했다.
당시의 YMCA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특기할만한 활동을 벌였던 기독교 단체였다. 이승만은 교회에서 설교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여 백만인 구령 활동에도 참여했다. 전국에 YMCA를 조직하는 한편, 성경과 국제법을 강의하고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기독교 교육 사역에 열중했다.
이 무렵에 이승만이 길러낸 인물들은 혁혁한 이름을 자랑한다. 훗날의 외무 장관 임병직, 공화당 의장 정구영, 과도 정부 수반 허정, 대한 상공회의소 회장 이원순 등이 그들이다.
기독교 활동은 위험했다. 총독부는 기독교인이라면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거의 민족주의자들이었고 기독교를 통해서 독립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기독교를 탄압했다.
한 종교 간행물은 한국인들에게 내면의 마귀를 축출하라고 외쳤다. 이에 검열관은 "여기서 말한 마귀는 일본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당신들은 일본에 대항하도록 조선인들을 사주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곧 모든 종교 간행물에 '마귀'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는 지시가 내려졌다.
또 다른 잡지는 봄에 싹트는 새 생명을 찬양하는 글을 실었다. 총독부는 그것에도 시비를 걸었다. 새 생명이란 말은 조선의 기독교도들이 궐기해서 새 정부를 세우도록 선동한 글이라는 이유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일본을 비판한 숱한 강연과 인터뷰 기록을 남겼었다. 그러니 요시찰 인물인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집필과 강연에서 일제의 비위를 거슬릴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조심하고 주의하면서도, 타고난 활동가인 이승만은 멈추지 않았다. 1911년 여름, 이승만의 활동 궤적은 신들린 듯한 활약상을 보여준다. 기차, 배, 말이나 나귀, 우마차, 가마 혹은 인력거를 타고 도합 3천 7백 킬로미터를 여행했다.13개 선교 구역을 방문하고 33회 집회를 열었으며, 7535명의 학생을 만났다.
남으로 광주, 전주, 군산까지 내려갔고 북으로는 평양, 선천까지 올라갔다. 이런 맹활약으로 지방 학교들에서도 모임이 만들어져, YMCA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조선 총독부를 자극했다. 이에 일제는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으니, 105인 사건이다. 유영익은 이승만이 너무 열심히 전국적인 조직을 만든 것이 105인 사건의 단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일제가 뒤집어씌운 죄목은 어마어마했다. 1911년 11월 11일, 기독교인들이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하여 무려 700여명을 검거했다. 그들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한 뒤에, 123명을 기소했다.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 이가 3명, 정신 이상을 일으킨 이가 4명이었으니, 얼마나 잔인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최종 유죄 판결을 받고 구속된 이가 105명이었다.
탄압의 마수는 처음부터 이승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본인도 구속될 각오를 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또 한번 미국 선교사들이 그를 구출했다. 서울 YMCA에서 활동하던 질레트 총무와 마침 그때 한국을 방문했던 YMCA 국제 위원회 모트 총무의 개입으로 체포를 면했다. 그들은 총독부 측에 미국 교계에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말썽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단 구속은 면했지만, 한국에 머무르는 것은 여전히 위험했다. 마침 1912년 기독교 감리회 4년차 총회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주한 선교사들과 감리교계 목회자들은 한국 대표로 이승만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은 집을 저당 잡혀서 여비를 마련했다. 그가 한국을 다시 떠난 것은 공교롭게도 만 37세 되던 생일날이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지 2년이 채 못 되어 기약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난 것이다.
당시 75세였던 아버지 이경선은 중풍으로 누워있었다. 이승만은 눈물로 작별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문 앞까지 마중 나와서, 차마 6대 독자 외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었다.
영웅은, 못할 짓이다. 가족에게도 그렇고 부모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양반이며 왕족이었던 이승만은 일찌기 상투를 잘라 유교 문화에서 살아온 부모에게 충격을 주었다. 스물두 살 나이에 보부상들과 격투를 벌일 때, 시위 현장까지 찾아온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로 만류했다.
신문에 이승만이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보부상에게 맞아죽었다고도 했고 고문 받다가 죽었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감옥까지 찾아와 아들의 시체를 달라며 울고 불고 한 적도 있었다.
그 모든 고난에 더하여, 아들은 이제 시대의 풍운(風雲)에 밀린 떠돌이 망명자가 된 것이다. 1912년 3월 26일, 눈물의 인사를 나눈 것이 부자(父子)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승만은 세계 감리교 대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기독교 정신에 호소했다.
"기독교나 민주주의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한국인을 지독히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의 기독교도들은 모름지기 단결하여 이 피압박 민족을 하루바삐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며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 유지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의 연설에 공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과 오랫동안 사실상의 동맹 관계에 있었다. 미국 기독교인들의 입장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은 감리교 세계 대회를 마치고 프린스턴 시절의 스승 윌슨을 찾아갔다. 당시 그는 주지사를 거쳐서 대통령 후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알리는 성명서에 서명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당신의 뜻에 동의하오. 그러나 미국의 정치를 위해 서명할 수 없소. 하지만 모든 약소국을 위해 할 일을 생각중이오."
훗날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을 때, 이승만은 "약소국을 위해서 할 일"이 그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윌슨은 한국 독립을 위한 서명은 거절했지만, 강연을 위한 추천장을 기꺼이 작성해주었다. 그러면서 이승만에게 충고했다.
"나 한 사람의 서명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인들의 마음의 서명을 받도록 하시오."
필자의 소견으로, 이때 이승만에게 던지 윌슨의 한마디는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에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훗날 이승만은 미국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하는 독립 운동을 줄기차게 진행한다.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에서도 미군정과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군정 당국을 뛰어넘어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는 직설적인 행동으로 맞선다. 휴전 협정의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뉴스를 만들어내고 여론을 일으키는 선동으로 미국을 압박한다.
이후로도 윌슨은 이승만을 거절하고 상심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가르쳐준 것은 절묘한 한 수였다. 스승은, 과연 스승이다.
♣ 애국과 신앙의 교과서, 「한국교회 핍박」
이승만은 1912년 8월 14일, 옥중 동지 박용만을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Hastings)에서 만났다. 무력(武力)에 의한 독립 운동을 주장한 박용만 답게, 그가 훈련시킨 무장 소년병 학교의 학도 34명이 제복을 입고 이승만에게 거수 경례를 했다.
의형제 관계였던 두 사람은 밤을 새워 독립 운동의 방책을 논의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와이였다. 한국 교포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서 장기적인 독립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1913년 1월 28일,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호놀룰루행 기선 시에라호에 몸을 실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날이 2월 3일, 교민들은 그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보(悲蕔)가 도착했다. 호놀룰루에 막 상륙한 때, 부친이 별세하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저술이었다. 105인 사건을 비롯한 일제의 탄압상과 고난당하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또 하나의 명저(名著) 「한국교회 핍박」이 탄생했다.
이한우의 논평이다. "독립정신이 잘 정리된 개화 지침서라면 「한국교회 핍박」은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한국 지성 이승만 박사의 학식과 정신 그리고 체험이 하나로 녹아들어 탄생한 것이다. 이 책에 드러난 이승만의 양대 정신적 축은 간단히 말하면 애국 사상과 기독교 신앙이다. 「한국교회 핍박」은 바로 이 두 가지 축을 식민지 한국이라는 조건 하에서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역작이었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교회를 핍박한 것은 "교회와 민족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05인 사건을 중심으로 일본의 탄압 사례와 동기, 기독교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는데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외교상의 이유와 내치상의 이유들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일제가 왜 이승만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면서, 단순히 독립 운동가라고만 하지 않고 "예수교의 거괴(巨魁)"라는 죄목을 붙였는지가 이해된다. 일본인들에게는 거괴일지 몰라도,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교의 거성(巨星)이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핍박'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이승만 특유의 고난신학이요 십자가 신학이다.
"예수가 탄생하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전 생애 33년 동안 핍박 중에서 모든 사업들을 이루셨으며, 그 후 예수의 사도들도 그 핍박을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으며, 로마 제국으로부터 교회가 핍박당할 때에도 교인들은 땅 속에 굴을 파고 숨어 살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점차적으로 교회를 설립, 발전시켜 나갔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 각국의 모든 자유와 행복은 모두가 핍박 중에서 그 기초를 다져나간 기독교 문명의 힘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핍박 중에 사역을 이루셨고 사도들은 핍박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으며, 유럽과 미국의 나라들은 핍박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핍박받는 한국교회 역시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는 비전을 성취할 것이라고 이승만은 주장한다.
"각 나라 교회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같이 특별히 택하여 동양에 처음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긴 것이라고 한다 ...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벌써 제주도와 북간도, 만주, 블라디보스톡 등지와 북경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때에 교회의 일에만 전력하면 한국인들이 일본과 중국을 모두 기독교로 인도하리라 하며 ... "
이승만은 보잘 것 없는 식민지에 세워진 한국교회가 아시아를 선교하고 일본과 중국을 기독교로 인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1913년에 선언했던 예언들은 오늘날 세계 2위의 선교 대국이 된 한국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다.
핍박 속에서 일어난 기독교 정신은 민족의 활력이 된다. 이승만은 먼저 활력을 잃어버린 백성에 대해서 말한다.
"백성들은 이제 모든 희망을 잃었고 모든 의지와 의욕조차 사라져버렸으며 무엇을 하고자 하지 않으니 활동력도 없고 날로 쇠잔해지며 날로 부패해져갔다.
비유하건대 사람의 육신에 원기가 쇠약해져 버리면 저항력이 약해져서 백병이 기승을 부리게 되는 것과 같이 백성들의 활동력이 쇠함으로 인해 모든 부패와 골육상잔(骨肉相殘)의 폐단이 날로 겹겹이 생겨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골병이 들어 생명력을 잃어버린 민족에게 활력을 되찾아준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이승만은 주장한다. 한성 감옥 시절부터 계속해서 주창해온 '기독교 입국론'의 연장이다.
"그렇지만 기독교에 있어서는 한량없는 활력을 스스로 충만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이를 갖고 있는 총명하고 준수한 청년들이 서로 권면하며 격려하는 내용인즉, 온 세상이 모두 우리의 적국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갖게 되면 제일 친구가 많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비록 우리에게 군함과 대포가 없을 지라도 예수 안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리라,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만 의지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한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죽더라도 영혼을 죽일 수 없으므로 두려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세상에서 감히 막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말들이 사람들의 대화 속에 들어가며, 이런 속에서 한량없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철저한 예수 신앙이다. 온 세상이 적이 되어도 예수가 친구이면 제일 친구가 많은 것이다. 군함과 대포가 없어도 예수 안에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이 믿음 안에서 죽어버린 민족의 활력이 솟구치게 된다. 그 활력의 근원은 성경이다. 「한국교회 핍박」은 이승만의 실천적 성경론을 보여준다.
"성경을 보고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스스로 이런 굳센 의지와 담력과 지략이 생겨서 태산같은 능력이 금할 수 없이 솟아나니 당시 로마 제국의 힘으로도 이를 억제하지 못했고 유럽의 각 제국 왕들도 모두가 복종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가 어찌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리요. 사람의 행치 못한 바를 행하게 하며 없는데서 생기게 하며 죽은데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 모두가 기독교의 오묘한 이치일 것이다.
이런 이치가 마음 속에 들어온 후에는 모든 사람이 다 낙심해도 나 혼자 굳센 마음이 생기며 슬픔 중에도 기쁨이 생기며 핍박당하는 중에서도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일으키는 변화를 생생한 필치로 보여준다. 이는 머리로 생각하고 귀로 들은 것만이 아닌, 스스로 체험한 것이기에 생동감을 준다. 성경이 민족을 바꿀 수 있고 실제로 바꾸었음을 이승만은 힘주어 강조한다. 이처럼 성경이 무력(無力)한 민족을 유력(有力)케 하기에, 일제가 한국교회를 핍박한다는 것이 이승만의 논리이다.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는 인간을 자유케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유의 혁명을 일으키는 책이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동등 자녀 되는 이치와 사람의 마음이 악한 풍속과 어리석은 습관과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치를 다 밝게 가르쳤으니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혁명 사상을 얻는 것은 과연 그 책이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자유의 혁명 사상이 성경에서 나온다면, 동양과 서양도 성경과 종교의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이승만은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인종의 차이가 아니라 종교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사람들이 흔히 생각했던, 동양은 전제적이고 서양은 민주적이라는 식의 단순 논리를 거부한다.
역사를 검토해보면, 오히려 서양이 더 전제적이었던 적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전제적인 동양과 민주적인 서양, 낙후된 동양과 발전된 서양의 차이는 인종에 있지 않고 종교에 있다는 탁월한 분석이다. 기독교가 들어가면 발전하게 되며, 서양이 앞선 것은 기독교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세상 사람들이 항상 비평하는 말이 동양 사람은 천성 성질이 전제 정치에 합당하므로 정치 혁명이라는 것은 당초에 이름도 모르니 앵글로 색슨(영국과 미국 인종)은 자유 동등의 사상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서양 역사에만 혁명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연구해본지 오래되었으니, 이는 인종의 성질 때문이 아니요, 종교의 설질 때문이다. 동, 서양 종교의 구별을 연구한 자는 다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유럽 각 나라들에도 신약의 이치가 전파되기 전에는 모두가 전제 사상에 빠져 로마 문명 시대에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고 프랑스왕 루이 14세 때에 이르러서는 전제주의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자기가 곧 국가라고 칭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라와 임금을 구별할 줄 몰라서 임금을 곧 나랏님이라 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인종에 있지 않고 종교에 있다고 한 말은, 시대를 뛰어넘은 명언(名言)이다. 개명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인종 차별이 있다. 겉으로 평등을 말하며 점잖은 척 하지만, 상당수의 백인들은 여전히 우월의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네들에게 이승만을 읽히고 싶다. 당신네들이 앞서간 것은 백인종이 잘 나서가 아니고,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따지고도 싶다.
이승만은 로마 카톨릭의 전제성을 지적하고 종교 개혁의 역사를 설명한다. 서양사와 종교 개혁사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요약이다.
"교황이 앉아서 온 세상을 모두 로마교(가톨릭)로 복종시키고 자기가 천명(天命)을 대표하여 전제로 다스린다고 하며 각 나라 제왕이 모두 그 밑에 굴복하였다. 또한 신약을 감추어 보지 못하게 하며, 모든 사람은 교황과 신부 등의 여러 직명을 가진 자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섬기고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거나 죄사함을 구하는 것을 못하게 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어리석은 말과 요사한 뜻으로 겹겹이 속박하여 심지어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며, 글을 주어 행악하는 권리를 허락하기에 이르렀으니 서양 사람의 전제 사상이 동양 사람에 비하면 오히려 더 심했다고도 할수 있다."
이승만은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성서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경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종교 개혁의 결과로 서구 문명이 발전했다는 논리이다. 오랫동안 중국을 대국(大國)으로 섬겨온 우리나라를 서구 지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이승만의 관점을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후로 200년 동안 루터가 시작한 개신교가 정치 제도를 개혁하기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각국의 정치적 대혁명이 여기서 일어났고 오늘날 구미 각국의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모든 인간 행복이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를 근대 문명의 시조라 칭함이 과연 적당하며 이러한 루터 선생의 능력은 곧 예수의 진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성서에서 나온 진리가 인간을 자유케 하고 민족에게 활력을 일으키기에, 일본이 한국교회를 탄압한다고 이승만은 고발한다. 「한국교회 핍박」은 105인 사건으로 탄압받은 윤치호의 증언을 소개한다.
"내가 장차 옥중에서 죽을지라도 천국의 의(義)와 동포의 장래 항구적인 축복을 위하여 저 화(禍)를 당함이니 윤씨의 영광이요 우리의 감사할 바이며, 또한 이번에 방송된 여러 동포로 말할지라도 무한한 고초를 겪은 후에 응당 그 의를 더욱 중히 여겨 천국 일을 힘쓸지라.
속담에 이른바 정금은 풀무에 불려 내인 후에야 더욱 빛난다 하였으며, 성경에 말씀하였으되,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는 거짓말로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상 받을 것이 크리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를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였으니 이 어찌 일시적인 위로의 말씀이겠는가?
진실로 믿는 자의 피는 기독교의 씨요, 의로운 자의 핍박은 기독교 문명의 기초라. 오늘날 우리의 당하는 곤란은 장래의 행복을 위함이니 어린 양이 이리의 무리에 나가는 것같이 순종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대의를 세워서 이 다음 세상에 모든 권세를 이기리로다."
박해받는 한국교회는, 그러나 승리할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장차 한국교회가 핍박을 이겨내고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처절한 고난의 시기에 부른 승리의 노래이다.
"지난 3년 동안에 위협하는 정책을 행하였으니, 경향 각처에서 여러 가지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여러 가지로 군축하며 방해한 것을 보면 한국교회가 인력으로 세운 것 같으면 지금까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일본 당국이 한국교회를 아주 없애버리려 한다면 오래전 로마 황제 네로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조선의 대원군이 동학(東學)을 일으켰던 것이나 청국의 서태후가 의화단을 자초했던 것과 같은 비웃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한국교회를 더욱 공고케 할 따름이니 이는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진 까닭이다."
「한국교회 핍박」은 종합적이다. 깊이 있는 신학이 있고 다양한 역사적 분석이 있으며 거대한 문명 비교론이 있고 소박한 간증이 있다. 세계사의 주변부로 밀려나 멸망한 나라,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고통이 있고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희망이 있다. 동서양의 최고 지식을 습득하고 상아탑(象牙塔)이 아닌 거리에서 투쟁하며, 기독교로 현시를 개혁하고자 몸부림쳤던 이승만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1913년에 쓴 책인데,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는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고 현재를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이승만의 예언은 적중했다. 초대 교회가 네로를 견디고 살아난 것처럼, 한국교회는 핍박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당대의 권력자 네로가 패망한 것처럼, 우리 민족과 교회를 괴롭혔던 일제는 패망했다.
핍박 속에서 성장한 한국교회는 이승만이 말한 그대로 아시아 선교의 전지 기지가 되었다. 그의 글에 구체적으로 거론된 바와 같이, 오랫동안 한국을 괴롭혀왔던 중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한국교회 핍박」은 적중한 예언서이며 동시에 애국과 신앙의 교과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