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에서 7층 탑을 조망하며 땀을 연신 훔치며 노가리를 풀고 있고 있는
내가 안스로웠던지 청바지,청자켓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30대 같은 피부와 미모를 간직한
40대의 재미교포 여인이 슬며시 파라솔 안으로 나를 감싼다.
수백년 묵은 당산목 그늘 아래 매미소리 들린 듯한 착각에 고개 돌려 마치
가섭존자인양 님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냈더니 웃는 모습이 홍조를 머금은 새악시처럼 고웁다.
이즘의 성주는 금싸라기 참외의 비닐하우스 물결이 마치 큰바다 같아서 달리는
승용차는 일엽편주로 느껴지지만 굽이굽이 산길 돌아 태실로 향하는 맘은 한없이 편안하다.
월항면 인촌리의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조성된 태실이며
뒤에는 수양대군(세조),계유정란의 희생자이며 명필인 안평대군,단종복위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에서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등 문종 형제 출신의 대군의 태실7기 및 세손인
단종의 태 8기가 앞에는 후궁이 낳은 11기의 군의 태가 봉안 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오끼나와로 빠져 보자(삼천포 사시는 회원 여러분 저 착한 놈이죠?)
태조.세조가 오늘날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이라면, 세종은 참모의 기능을 중시한
수상 같은 인물이라 늘 여겨 오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세종임금은 평생을 병약해서
골골 거리며 살았다고 왕조실록에는 기록되 있건만 자랑스런 세종은 밤 일 하나는
훌륭히 너무도 훌륭히, 그가 남긴 문화적 과학적 업적에 버금 갈 정도의 능력을 발휘 하시었다.
문종을 포함 18명의 대군과 군, 공주와 옹주 장하다 왕이시여....
사실 여부를 떠나 왕자 태실이 봉안된 곳은 성산 이씨의 시조의 묘가 있었다고 하나
왕자 태실로 인해 그분의 묘는 대가면 능골로 이장되었다는 성주 승지 총람의 글은
흡사 세종대왕의 영릉이 광주 이씨의 묘자리를 빼앗았다는 내용과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세종 년대 4년간에 조성된 태실은 4면에 앙련이 새겨진 장방형의 기단석, 공 모양의
둥근 몸돌, 복련을 새긴 옥개석의 단순한 양식이 오히려 화려 하지 않아, 거부감이 사라진다.
이번이 3번째의 답사지만 태실은 겨울의 한가운데 깔비(솔잎)가 소복히 길에 깔려 양탄자처럼
푹신한 발의 촉감을 느낄 때가 가장 좋다, 눈까지 날리는 날이라면 금상첨화 이고...
오늘은 사찰은 답사하지 말자는 암묵적 동의로 태실을 지키는 절이 되어 영조의 어필이 사액된
건너편의 선석사를 뒤로 하고 태실을 나오면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하게 오디를 한웅큼
따온 동행한 벽진 이씨인 빨간무씨는 성주가 제 관향이라며 한 수 거든다.
그렇다.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성주는 성주(성산,벽진,경산) 이씨, 성주 도씨,
성산(성주) 배씨 , 성주(벽진)여씨, 경산(성주)김씨, 황씨, 석씨 등 19개 관향을 가진 고을이다.
어린시절 성주에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지 않은 까닭은 성주의 지기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반들, 그 중에서도 한개 마을의 성산 이씨의 반대가 심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왔지만 성년이 되어서 김천 대구간의 경부선 철로의 궤적을 확인 후에야 이해가 되었다.
그로인한 지역개발의 공과 여부를 떠나 향리를 지키려는 자존심의 동리 큰 나루 한개 마을을
한눈에 조망하기 위하여 신라 애장왕(?) 왕자의 눈병을 치료한 샘물이 있다는 영취산 감응사 중턱으로
차를 몰고 올랐지만 우거진 숲은 고색창연한 고택의 자태를 쉽게 나타내지 않는다.
새마을 운동이 비켜간 듯 흙담이 정겹고, 고샅이 포근한 마을은 자랑스런 모습을 감추려는 듯
월곡댁, 사도세자의 경호실장 이석문이 세자를 그리며 북쪽으로 문을 내고 칩거한 북비 고택, 하회댁,
초등학교 담임 샘의 집인 교리댁은 답사객의 바램과는 달리 대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 허용치 않아 밖에서 한숨만 지었다.
한말 유학자인 한주 이진상 고택은 행랑채, 안채가 구분되어 내외의 엄격한 반가의 한옥 구조에
충실하면서도 중문을 내어 자식들의 교육 장소이자, 풍류의 공간인 한주정사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누마루가 있고, 영취산 계곡물을 집으로 잠시 끌어 드린 천원지방에 충실한 연못, 세월의 풍상이
베인 소나무, 정원 가득한 난, 석류, 뒤뜰의 대나무, 선비의 올곧은 기개를 배우려는 듯
절개와 의를 상징하는 나무와 식물이 가득한 한주정사는 거의 손길이 가지 않아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고 동행한 어느 님의 말처럼 전설의 고향 촬영 셑트장 같은 분위기다.
그래도 우리는 좋다 좋아(훌라, 고스톱 장소 포함)를 연발하며 먼지 쌓인 대청에 오르기도 했고,
우리나라 문화정책이 어쩌고 저쩌고... 애국자도 되기도 하였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일행은 아쉬움을 접어야 할 시간이다.
더 많은 문화의 향을 쫓아 가고도 싶지만 오늘 함께한 맘 인간의 살아 있는 정 보다 더한 문화 유산이 어디 있어랴?
멀리 부산에서 동참하여 주신, 수제비의 달인답게 맛난 수제비를 준비해 주신 씽비게 형님
묘령(?)의 재미교포 크라라 님, 그냥요 님, 내가 머리 깍고 출가할까 봐서
한달음에 달려온 창원의 빨간무시, 나문답 모든 님들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