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답사 매니아, 전문가들이 부석사, 개심사와 더불어 가장 매력적인 답사의
메카로 손꼽고 다양한 장르의 답사기가 넘쳐나고 있는 선암사는 문인들에게도
문학기행의 단골 절집이라 순수한 아마츄어의 시각에서 답사기를 기술 할려니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유려한 문장, 현학적 논리, 세련된 문체에 식상한 분들에게
투박하고 거친 여행기도 또 다른 맛을 줄 수 있다는 나만의 유쾌한(?) 착각으로
발걸음을 옮겨가야겠다.
만추의 부석사, 꽃피는 봄의 선암사, 춘 마곡사, 추 갑사라고 가람분위기를
이야기하기에 꽃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에게 겨울의 선암사는 상념 한 자락
털 수 있어 가벼운 맘이지만 매표소도 잠든 이른 아침 무임 입산의 간사한
즐거움이 더 발걸음 가뿐하게 한다.
준비되지 않은 길이라 부도전을 건너 뛸려다 사사자 기단의 석탑형 부도에
눈길 머물러 잠시 영암사지,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과 화엄사의 사사자를
떠올리며 읽을 수 없는 부도비를 부끄러움 없이 스쳐지나니 잡으려는 잡신은
안중에 없는지 아니면 나란 인간이 잡신으로 보였는지 나무 장승이 검문을
한다며 발길 잡아서 쓴 소리 해버렸다
"장승영감!!!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답사객들이 영감을 보고 부부 장승이라 하요???
언제부터 성전환을 해버렸나요?"
선암사는 도선에 의해 세워진 호남의 3巖 사찰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더라도
선암사는 승선교, 강선루의 선(仙)의 표기로 인해 선녀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선녀가 목욕하고 올라가는 계곡이라는 등의 글이 많이 보이지만 근거도, 설득력도
없는 나의 시각으로 보자면 도교사상이 짙은 가람이라 여겨진다.
사찰의 산신각이 민간신앙, 독성각이 단군신앙, 칠성각이 도교사상과 어우러진
즉 불교와 타종교와의 습합 현상으로 여기듯이 仙을 도교와의 관련으로 보고 싶어진다.
비약해서 택도 없는 소설을 이어나가 보면 결국 선암사의 아기자기한 가람배치, 사찰에
드문 조경도 신선이 사는 仙界임을 상징하려고 온갖 꽃과 나무를 조성한 것은 아닐까?
잡스런 생각도 잠시 삼인당에 이른다
삼인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또는 일체개고를 말하는 것이나 연못의 조형이 상징하는 바를 난 알 수 없으며
연못 옆의 젖나무 세그루에 눈길 주며 일주문을 향한다.
산아래 있어야 마땅할 일주문 앞 하마비에서 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에서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요즘은 승도, 객도 말을 타지 않아 아니 승용차는 말이
아니어서 잘도 통과하는데 차라리 下車碑로 바꾸면 어떨까?
일주문 소맷돌의 용을 가슴으로 안고 일주문과 이어진 시멘트로 화장한 죽담을
보니 "조계산 선암사"의 편액이 걸린 일반적 고건축의 내외출목의 구성과 다른
일주문의 고풍스런 배흘림 기둥의 맛이 반감된다.
일주문 안쪽에는 "고청량산해천사" 현판이 걸려 있어 유난히 火氣에 약한
선암사의 내력을알 수 있다.
비보사찰의 냄새가 풍기지 않은가?
淸凉이 극락을 의미도 하겠지만 淸은 물 水변이며, 凉은 얼음 氷변이고
海泉 역시 水이니 火를 누르기 위해 의도적인 풍수비보에 의한 사찰인 것이다.
그래서 삼인당도 물을 저장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전국 어느
사찰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연못이 무량수각 앞에 한 곳, 만세루 및 설선당
옆에 쌍지 등 선암사 경내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연못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유난히 많이 심어 놓았다고 여기면 억지일까?
선암사를 둘러본 사람이면 보았을 대웅전 왼편 심검당 벽에 한문으로 水와 海가
모각된 것도 같은 이치이며 주역의 팔괘와 卍자도 모르긴 해도 비보의 의미가
분명할 것이다.
신라말 도선에 의해 풍수지리가 도입되어 선종사찰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었으니
선암사도 도선에 의해 창건된 까닭에 비보사찰은 설득력이 있으며 대웅전 앞의
쌍탑도 신라말의 전형이나 신라의 형식인 팔각원당형이든 백제계의 고복형이든
석등이 없는 것도 불에 약한 선암사의 지세와 연결해보면 수긍이 간다.
범종루의 계단을 지나면 만세루의 벽면에 큼직한 六朝古寺라는 현판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선종의 개산조인 달마이래 육조인 혜능 선사가 조계산에 주석 하였음을
비유하여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선풍 사찰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웅전 앞 고성 옥천사처럼 4개의 괘불대로 괘불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해보며
합각마루의 물매가 깊어 비상하는 학의 모습이 역력한 느낌의 대웅전의 어칸과
협칸에는 여타의 절에서 보기 힘든 한옥의 머름대가 중생은 옆문을 통해 출입하라고
은근히 암시하고 있어 가슴이 따뜻해 온다.
대웅전의 편액에는 세도정치의 시작인 안동 김문의 김조순인지는 모르지만 이름
석자가 적혀 있어 편치 않지만 금당의 현판에는 왕의 사액 현판도 낙관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임을 알았는지 다행히 낙관이 생략되어 있다.
선암사의 전각은 빼어난 조경 탓인지 삶의 흔적이 흥건히 배여 있는 전통 한옥의
사랑채 사랑마당, 선방은 여성의 공간인 안채 같은 분위기를 지울 수 없으나 중국
놈들의 간섭에 의해 선지 아님 알아서 건축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특이하게도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은 丁자형 건물이라 고건축의 맛을 음미해볼 만하다.
丁자형 전각은 우리 고건축에서는 왕릉의 제향 공간인 丁字閣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으며 이 또한 중국황실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현실이었는데 선암사
원통전은 설마 그럴 까닭이 없겠지?
중국의 관음과 조선의 관음이 둘이 아니기에....
선암사 원통전은 정면의 3칸 중 어칸에 퇴를 내어 퇴주를 세우고 합각지붕
으로 가구한 丁자형 건물로 내부 불단 위에도 측, 뒷면에 벽을 수장하여
마치 원통전 내부에 또 하나의 전각이 있는 듯하며 내부 전각에는 정조가
이곳의 스님들의 기도로 순조를 얻어 후사를 잇게 된 까닭에 훗날 순조가
大福田 편액을 사액하여 현재도 걸려 있다.
大福이라니?
숙종-경종-영조-정조로 이어진 소위 문화의 진경시대(간송학파)를 마감하고
찬란한 후기 조선사의 르네상스를 끝내 꽃 피우지 못하고........
조선왕조 최후의 기회를 놓친 시대가 순조부터 아니던가?
大福이란 글자에 점 하나만 붙이면 犬福(개 팔자가 상팔자인가?)이 되는 세상사이거늘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결혼한 승려인 태고종단의 대처승이 늘어나자
이승만 정권이 대처승을 추방하기 위하여 조계종을 출범시키는 과정에
비구와 대처승간의 알력으로 태고종에서 선암사를 총림으로 하였기에
오늘까지 종권 다툼이 계속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계종, 태고종이
나란히 손잡고 선암사 경내에 있다.
태고종 선원인 무우전을 제지 없이 들어가 안채 같은 각황전에 발길 옮길려니
기어코 길을 막아 신라하대 선교이래 도입된 사찰들의 특징의 하나인 철불을
친견할 기회를 주질 않는다. 생떼를 부려 본들 나의 인연이, 복이 여기까지만
머무른 것을.......
선암사 특히 선방은 ㅁ자 형의 우리나라 전통한옥 같은 맛이 짙게 우러난다.
무량수각 역시 기왓골이 깊고 지붕의 고색 등 선방이라기 보다는 사랑채를 지나
여성의 영역인 안채 같은 분위기를 지울 수 없으며, 상수도 공사로 차밭 구경을
할 수 없어 무량수각 안마당을 기웃기웃 거려 보지만 모두들 와선삼매에 들었는가?
"ㅅ간 뒤"( 맞나?) 글씨체로 인해서 선암사의 명물이 된 해천당 옆 해우소를 지나
대각암으로 발길 옮기려니 운문사 처진 소나무 닮은 솔이 감로수를 권해 달콤하게
입 축이고 한겨울에 푸른 입을 가진 참나무가 눈에 들어 다가갔더니 헉 종가시나무 란다.
종가시나무도 첨 보았지만 적묵당 추녀에 달린 학교종(?)도 기분 좋다.
유년의 시골 교무실 창밖의 정경이 떠오르며 "내 마음의 풍금"의 전도연도 떠오르고...
근데 사찰에 왠 학교종일까?
북, 종으로 모든 의례를 무난히 치룰 수 있을 텐데...
혹? 화재시 난타의 용도는 아닐까?
대각암 가는 산길에 잠시 숨돌리기 좋은 곳에 고려시대의 마애불이 있는 듯 없는 듯
자연 암석에 음각 되어 있어 등산객과 참배객의 맘을 가라앉혀 준다.
대각암 초입에는 산죽은 없고 굵은 대나무가 이채로우며 선암사 해우소 못지 않은
뒤깐이 머리 위에 잡초가 무거운(?) 듯 신음을 토해내며, 대선루와 더불어 개량
불사중이라, 이제 대각암의 뒤깐도 구경하기 힘들 것 같아 씁쓸하다.
대각암 역시 화기를 비보 하려는 듯 대선루 앞에 두 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고건축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암자 뒷뜰에는 대각국사의 부도로 알려진
팔각원당형의 참한 부도가 있지만, 그보다 산신각이 있었음직한 자리에 사라진
산신각 대신에 "산신지위"라 새겨진 작은 비석이 맘에 들어 마음공양 기분 좋게
쌓고 선암사 경내를 피해 내려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