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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의술인 스크랩 한동석 선생
작약 추천 0 조회 596 13.04.03 18: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도사(道士) 공부의 왕도(1) - 한동석 선생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cyh062@wonkwang.ac.kr)


天-地-人 삼재의 기본은 음양오행

천-지-인 삼재에 모두 적용되는 공통분모를 좁혀 들어가면
음양오행이라는 거대담론 체계가 나타난다. 명리학과 한의학도 역시 마찬가지다. 양자가 일정부분에서 상호 호환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도 역시 음양오행이다. 하늘에 해와 달, 그리고 목·화·토·금·수성이라는 별이 있듯 땅에도 역시 거기에 부합되는 형상이 있으며, 인체의 장부에도 음양오행이 적용된다.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여의주를 하나 가지면 사주·풍수·한의학을 하나로 꿸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시스템적 사고’다. 이것을 건드리면 저것이 움직인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물코와 같이 촘촘하게 연결된다. 이것이 동양사상의 특징이다. 그래서 동양사상은 시간이 필요하고 연륜이 필요하고 흰머리가 나야 한다. 전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시스템적 사고를 체득하는 데 가장 선결문제이면서도 어려운 부분이 기본 전제의 이해다. 기본 전제가 되는 개념에 대한 파악이 확실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본 개념 파악이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오행에 대한 개념 파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명리학이나 한의학이나 오행이라는 기본 틀에 얹혀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 오행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매우 포괄적이면서도 중층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have’동사가 여러 가지 중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오행은 그 이상으로 포괄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명리학과 한의학의 연결고리는 음양오행사상에 있고, 이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한 인물이 한동석(韓東錫·1911~68)이다. 1911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한 한동석은우주변화(宇宙變化)의 원리(原理)(대원출판, 2001년)라고 하는 문제의 저서를 남겼는데, 66년에 초판이 발행된 이 책은 4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내려오고 있다. 한의학도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한의과대학 학생치고 이 책 안 본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판이 자자한 책이다. 그런가 하면 명리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려는 술사들 사이에서도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워낙 난해하여 끝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한의대 교수 중에서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기누설을 너무 많이 하여 하늘에서 잡아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경지에 있던 한동석 선생의 학문 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도학 사상의 결정판!

동서양의 우주론, 인간론, 심성론, 종교론의 근본을 정확히 짚어낸, 출간 후 30여 년간 동양학 및 한의학계 최고의 베스트셀러!

 

명리학에서도 지하실 깊은 바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행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데, 기존의 책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한 이야기만 반복해 오늘날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전하게 이해되지 않는 수가 많다. 이 책 저 책 들여다보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후학들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해야 하는데, 옛날 이론만 앵무새처럼 반복만 하고 있을 뿐이지, 오늘의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해석을 못 해내기 때문이다. 법고(法古)는 하지만 창신(創新)을 못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한동석은 오행사상에 대한 창신을 해낸 인물이다. 오행의 원리를 스스로의 입에 넣고 하나씩 씹어 철저하게 맛본 다음 쓴 책이다.

근래에 한·중·일 3국 중 오행에 대한 이해를 오늘의 맥락에서 이처럼 확실하게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중국 수(隋)나라 때 소길(蕭吉)이라는 인물이 ‘오행대의’(五行大義)를 쓴 이래 오행에 대한 역작이 바로 한국의 한동석이 저술한 ‘우주변화의 원리’다. 한국에서 인물 나왔다. 이 책은 중국이나 일본의 연구자들도 공부해야 할 명저다.


한동석 선생의 사주 : 支地에 불이 많은 사주

지지(支地)에 불이 많은 남자는 결혼을 여러 번 하는 수가 있다. 소위 ‘처궁(妻宮)에 불지른 사주’라고 표현한다. 지지에 불이 많으면 이는 곧 배우자 자리(妻宮)에도 불이 많은 셈이고, 처궁에 불이 훨훨 타면 같이 사는 여자가 남자의 화기에 타버리는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통계적으로 이혼이나 사별이 많다. 배우자 복은 없지만 머리는 비상하다. 판단력이 신속 정확할 뿐더러 기발한 발상을 하기도 한다. 처궁에 불지른 사주는 불교의 고승들에 많다. 고승의 자격요건은 여자도 물론 없어야 하지만, 화두(話頭)를 돌파할 수 있는 집중력과 두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처궁이나 남편궁에 불지른 사주를 간혹 목격하면 필자가 하는 말은 “결혼 늦게 하시오”이다.

일찍 결혼하면 실패가 많으니 젊은 시절에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은 다음에 결혼하면 실패가 적다. 충분히 수업료를 냈으니까. 알고 보니 한동석 선생 본인이 여기에 해당하는 사주였다. 그는 6·25 전후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결혼을 여러 번 하였다. 도인이 어떻게 결혼을 여러 번 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의 사주를 바라보면 이해가 간다.

생년월일은 1911년 6월8일(음) 인시(寅時)이니 이를 만세력에서 간지(干支)로 환산하면 신해(辛亥)년 갑오(甲午)월 갑술(甲戌)일 병인(丙寅)시가 된다. 지지에 인(寅)·오(午)·술(戌) 삼합으로 온통 화기가 충천한 사주다. 불이 훨훨 타고 있다. 어떤 여자든 들어와 살면 타버리는 사주다. 더구나 일주는 갑목이다. 이렇게 되면 ‘목화통명’(木火通明) 사주이기도 하다. 목화로 되어 있으면 밝음에 통한다는 뜻이다.

사주팔자가 마른 통나무에 불 붙이는 형국이 되어놔서 명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목화통명’ 사주는 보통 머리좋은 사주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런 사주는 무욕담박하고 여자가 타죽는 사주이니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더라면 이름 높은 고승이 되었을 팔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화기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사주를 볼 때나 한의사가 환자를 볼 때도 참고되는 바가 많다. 화는 심장을 가리키므로 처궁에 불지른 사주의 소유자는 고혈압이나 심장질환을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나온다.


 

한동석 선생이 남긴 예언


한동석 선생의 사상과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하던 중 논문이 하나 눈에 띄었다. 대전대 한의학과 대학원 석사논문인 ‘한동석의 생애(生涯)에 관한 연구’(權景仁, 2001)이다. 한동석의 친척들과 제자 그리고 동료들을 인터뷰함으로써, 그의 출생에서부터 가정생활과 공부 과정, 환자들에 대한 임상 그리고 학술활동을 밝혀 놓았다. 한동석에 관한 학계 최초의 논문이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다. 한동석이 이승만 대통령 이후 한국의 정권교체에 대하여 밝혀 놓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항간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한동석은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예언 능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의사이면서도 앞일을 귀신 같이 아는 도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언이 한국의 정권교체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 예언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권경인 씨의 소개로 한동석의 사촌동생인 한봉흠(76) 박사를 서울 정릉의 자택에서 만났다.


한봉흠 교수가 본 한동석

한봉흠은 1960년대 초반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독문학 박사를 하였으며, 63년부터 93년까지 고려대 교수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 하였다. 한씨들 집안 내력인지는 몰라도 이 양반도 역시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박사는 사촌 형님인 한동석과는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주고받은 친밀한 관계였으므로 반드시 인터뷰해볼 만한 인물로 여겨졌다. 

"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 좀 해 주시죠?"
“내가 독일 유학을 갈 때가 1959년도인데 이승만 정권 때죠.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나에게 형님이 그랬어요. ‘이기붕 집안은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이 박사는 하야하고 마는데 난리 나서 갈팡질팡 할 것이다. 그 다음에 1년 정도 민주정부가 들어선다. 그 다음에는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독일에 있으면서 한국 정세를 보니 형님 말한 것이 전부 맞는 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형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귀를 쫑긋하고 들었죠. 1963년도에 귀국해 보니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 있더군요.

박정권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형님에게 물었더니, 육 여사를 포함해서 부부간에 객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이 어떻게 객사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으니 ‘누군가가 장난하지 않겠니’ 하더군요. 총 맞아 죽을 수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나서 1968년도에 형님은 죽었죠. 이 말을 머릿 속에 담은 나는 1970년대에 고려대 총장을 지내던 김상협 씨와 단둘이 만나 식사할 때마다 ‘대통령은 총 맞아 죽는다’고 이야기하고는 했죠.

그때가 유신치하라서 살벌한 시기인데, 대통령 총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를 대낮에 떠들어대니 김상협 씨가 놀라서 ‘한교수 제발 대통령 총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저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고는 했습니다. 저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두들겨 맞기도 해서 박정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총 맞아 죽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 그밖에 다른 예언은 없었습니까?"
“박 대통령이 죽고 난 후에 정치적 혼란기가 다시 한번 오게 되는데, 이때에도 1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정치형세가 서너 번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정부 상태를 거친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군사독재가 한번 더 온다는 겁니다. 군사독재 다음에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인물이 정권을 잡은 다음 금기(金氣)를 지닌 사람들이 한 10년 정도 정권을 잡는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금기를 지닌 사람들이란 양김(兩金) 씨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금기 다음 정권은 목기(木氣)와 화기(火氣)를 지닌 사람이 연합한다고 했습니다. 목기와 화기를 가진 연합 팀이 정권을 잡았을 때 비로소 남북이 통일된다는 것이죠.” 

" 목기와 화기의 연합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죠? "
“저도 그것은 확실하게 모르겠어요.” 

"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의 기질이나 성격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형님 지론에 의하면 대통령은 목·화 기운이 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목·화는 밖으로 분출하는 형이어서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운이 밖으로 팽창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금·수는 수렴형이어서 안으로 저장하고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내무부 장관이나 중앙정보부장 같은 자리는 금·수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하고, 상공부나 생산하는 분야는 목·화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금융분야는 토기(土氣)를 많이 가진 사람이
적당하다는 거죠. 금융은 양심적이고 공정해야 할 것 아닙니까. 토는 중립이어서 공정하죠. 이게 오행에 맞춘 인재 배치법이자 용병술이죠. 국가적인 차원의 인재 관리는 오행을 참고해야 한다는 게 형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다


그 밖의 예언을 간추려 보면 2010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임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될 수 있으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딴따라’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 또한 그대로 되고 있다. 한동석은 1963년 1월부터 자신이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생일, 생시인 6월8일(음력) 인시(寅時)에 닥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 생일, 생시를 넘긴다면 자신이 더 살 수 있을 것이나 아무래도 그것을 넘기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본인의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룡산으로 내려가 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예견대로 6월8일 축시에 사망하였다. 2시간 정도만 견디면 인시를 넘길 수 있었으나 자신의 생시를 코앞에 두고 그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임종한 것이다.


 

한동석 선생과 이제마 선생


한동석은 이처럼 탁월한 한의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앞일을 내다보는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적 뿌리는 어떻게 되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한동석의 한의학에 대한 뿌리를 소급해 올라가면 놀랍게도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1837~ ?)를 만난다. 한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동석의 외할머니가 원씨(元氏)였는데, 그 외할머니에게 오빠가 있었다. 이 오빠가 이제마 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제마의 고향도 함경남도이고 한동석의 집안도 같은 함경남도였던 만큼 서로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연유로 한동석의 집안에서는 이제마에 관한 일화들이 구전되어 왔다. 그 구전을 보면 이제마는 시간이 나면 아무 풀이나 입으로 씹어 맛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약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우물우물 풀을 씹고 있다 보니 미각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독초를 씹었을 때는 며칠 동안 음식을 못 먹고 고생하다 회복되면 다시 새로운 풀을 씹어보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이제마는 비방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였던 한동석 외할머니의 오빠가 “그 비방은 언제나 보여주실 겁니까”하고 물으면 “내가 죽을 무렵에 주겠다”고 답변하고는 하였다. 그 비방을 얻기 위해 외할머니의 오빠는 이제마 선생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잡아놓고 살았다. 임종이 가까이 오면 곧바로 이제마 선생에게 달려가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이제마 임종 후 도착해 비방을 입수할 수는 있었으나 거기에 씌여진 한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한자들은 이제마가 새로 창안한 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이야기가 묘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마는 생전에 자신의 묘자리를 미리 보아놓고, 자신이 죽으면 관을 깊이 파묻으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9자(270㎝) 가량 깊이 파서 관을 묻으라는 당부였다. 왜 그렇게 깊이 묻어야 하느냐고 물으니 이제마는 “말 발굽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다”는 대답을 하였다. 과연 해방 이후 소련군이 진주할 때 바로 그 묘의 옆길로 소련군 탱크들이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이를 목격한 후인들은 “이제마가 과연 명인은 명인”이라는 이야기들을 하고는 하였다. 해방 이후 함흥 일대에서 이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한동석은 이처럼 유년시절부터 이제마에 대한 전설을 들으면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제마와 얽힌 또 하나의 인연은 전처의 죽음이다. 한동석은 20대 후반에 함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재혼을 하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인이 폐병을 앓아 1942년에 사망하였다. 부인이 죽기 전 폐병 치료를 위해 이제마의 이전제자(二傳弟子) 중 하나라고 하는 김홍제라는 한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김홍제가 부인의 폐병을 치료해 주면서 “다음에 다시 재발하면 그때는 손을 쓰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다. 결국 처음에는 치료가 되었으나 나중에 부인의 폐병이 다시 재발하면서 사망하고 말았다.

한동석은 이 일을 겪으면서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홍제 밑에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후일 한동석이 이제마의 저술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의 주석서를 남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마와 한동석의 한의학적 연결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모두 이북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동석 선생과 계룡산파


한동석의 사상적 뿌리 가운데 또 하나는 계룡산파다. 그는 사색을 하고 도인을 만나고 싶을 때는 수시로 계룡산으로 내려가고는 하였다. 그에게 계룡산은 영감의 원천이자 정신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휴식처이자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할 무렵에도 수시로 계룡산에 가서 동학사 근방에 한 두 달씩 여관을 잡아놓고 장기체류하고는 하였다.

그가 계룡산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장소는 계룡산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香積山房)이었다. 향적산방은 충남대 총장을 지낸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 선생이 정역(正易)공부를 하기 위해 1950년대 후반에 지어놓은 토굴이자 일종의 아카데미였다. 향적산방 바로 옆에는 19세기 후반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토굴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사가 배출된다는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은 좌우로 청룡·백호가 바위 맥으로 내려와 야무지게 감싸고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案山)은 두부처럼 평평한 토체(土體) 안산이다.

토체 안산에서 제왕 나온다는 것 아닌가. 여기는 당대 우리나라에서 주역이나 풍수 또는 사주를 연구하는 마니아들의 아지트였다. 자기가 공부한 바를 서로 주고받고 때로는 밤새워 논쟁하기도 하였고, 국사봉 정상에 올라가 국운 융창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김일부 선생 이후 근세 계룡산파를 형성하던 일급 멤버들이 득실거리던 장소이기도 하다. 천학비재한 필자를 정역의 광대한 세계로 이끌어준 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 선생도 이 시절 향적산방에 장기체류하면서 학산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한동석도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계룡산파의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골간을 이루는 내용이 지구의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음에 주목하는 정역사상(正易思想)이고, 정역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내경’ 一萬讀한 한동석

한동석은 동생인 한 박사가 주역 공부의 비결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기(天氣) 보는 방법을 배워라. 하늘을 쳐다보면 천기를 보는 거냐? 아니야. 땅을 봐라. 땅에 이렇게 보면 풀이 있고 돌멩이가 있고 이렇게 흔들리지? 지렁이·털벌레·딱정벌레 요거로 천기를 보는 거야. 딱정벌레가 많이 있는 거는 이 지상에 금기가 많이 왔다는 거야. 이제 발이 많은 돈지네가 많이 끓을 때가 있다면 화기가 왔다는 거야. 땅에 지렁이가 많으면 토기가 많다는 것이고. 이렇게 천기를 보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이른 봄인데 금기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대답하였다.(권경인, 28쪽)

 

딱정벌레는 등껍질이 단단하니 금기로 본다. 지렁이는 땅속에 사니 토기로 본다. 이처럼 지상에 어떤 기운을 많이 받은 생물이 나타나면 그 해에 거기에 해당하는 하늘의 기운이 우세한 것으로 추론하였던 것이다.

 

천기를 보는 것은 일상사 사물에 대해 세심한 관찰을 요한다. 도사의 자질은 세심한 관찰력이 필수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은 관찰력 외에 한동석이 전념한 수도(修道)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이다. 방법은 독경(讀經)이었다. 그는 ‘황제내경’(黃帝內經) ‘운기편’(運氣篇)을 일만독(一萬讀) 가까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불교 수행자들이 ‘천수경’(千手經)을 수만독(數萬讀)하듯 그도 운기편을 1만번이나 외웠다. 이는 놀라운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로 소문나 있다. 1960년대 중반 그의 한의원이 있던 인사동 주변 골목에서는 길을 걸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한동석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이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앉으나 서나 중얼중얼 운기편을 외웠다. 처음에는 3,000독을 목표로 하였으나, 3,000독을 해도 신통찮다고 여기고 다시 6,000독 9,000독에 이르렀다고 한다. 9,000독에 가니 약간 보이더라고 술회하였다. 마지막 1만독을 채우면서 활연관통했던 것 같다. 한동석이 필생의 연구 대상으로 삼은 소의경전(所衣經典)은 황제내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면 이해가 되는데, 황제내경만큼은 쉽게 이해되지 않으니 무식하게 막고 품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사실 무식한 방법이 정공법이다.

무조건 외우는 방법이 막고 품는 방법이다. 변화구나 체인지업 말고 무조건 강속구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꿈에서도 경전을 외울 정도면 도통한다고 한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사지사지 귀신통지’(思之思之 鬼神通之)라는 말이다. ‘밤낮으로 생각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활연(豁然)하게 깨닫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에서도 낮에 생각한 마음과 같음)가 바로 이 경지다.

조선 후기의 유가의 도인이었던 이서구(李書九)가 ‘서경’(書經) 서문(序文)을 9,000독 해서 이름을 ‘서구’(書九)라고 지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황진이 묘를 지나면서 “잔 잡아 권할 사람 없으니 이를 슬퍼 하노라”고 절창을 읊었던 임백호(林白湖)가 속리산 정상의 암자에서 ‘중용’을 5,000독 하고 나서 한 경지 보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한동석이 보여주었던 파워의 진원지는 ‘황제내경’ 1만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노느니 염불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사주 공부에서도 마찬가지 방법이 적용된다. 막고 품어야 한다. 명리학에 관계되는 고전들을 수 백번씩 읽다 보면 영대(靈臺)가 열린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술회다. 명리학의 고전을 보면 ‘연해자평’ ‘명리정종’ ‘적천수’ ‘궁통보감’ 등을 꼽는데, 이 가운데 ‘궁통보감’은 명리학의 가장 진화된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 진화되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복잡하다는 뜻도 된다. 컴퓨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연해자평’이 386이고, ‘명리정종’은 486, ‘적천수’가 586, 그리고 ‘궁통보감’은 686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궁통보감’의 특징은 사주의 격국을 기존의 이론에 비하여 몇 배로 세밀하게 나누는 데 있다. 그런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등명이라는 사람은 10여 년에 걸쳐 ‘궁통보감’을 달달 외우다시피 탐독하였다. 그 동안 어느 정도 읽었느냐고 물어보니 지금까지 약 400독을 하였다고 한다. 가지고 다니는 책갈피를 보니 손때가 시커멓게 묻었다. 어떤 때는 꿈에서도 ‘궁통보감’의 내용들이 나타나는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는 고백이다. 100독을 넘어서자 그 어렵던 격국론이 대강 정리되었다고 한다. 그는 1,000독을 목표로 요즘도 시간만 나면 열심히 읽는다. 책장이 너덜너덜하게 될 때까지. 이것을 보면 사주 공부에도 왕도는 없다. 자나깨나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다. 도사 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趙龍憲
1961년생. 원광대 철학박사 불교민속학 전공.지난 15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암자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奇人) ·달사(達士)들을 만나 교류를 가짐. 그 동안 음지에 갇혀 있던 천문·지리·인사에 관한 담론을 양지로 끌어올려 ‘학문적 시민권’을 얻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음.


 

-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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