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기행문
현대사회는 여가생활이 점점 풍부화되면서 려행이 붐을 이루고 있다. 려행은 우리에게 신선하고 생기넘치는 기쁨을 준다. 늘 변화없이 따분한 일상 삶을 훌쩍 떠난다는것은 기분 전환의 계기가 되며 부단히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탐색해가는 스릴을 맛보게 한다. 인간은 지적이고 정(情)적이며 의지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끊임없이 새로운것을 알려고하는 지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정서적으로 흥분하고픈 정적인 면이 있으며, 자기중심의 리해득실에 따라 가치판단을 하는 의지적인 면이 있다. 려행에 있어서 눈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정경들을 바라보면서 얻게 된 감상에는 이 세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되여 있다. 그러므로 감상을 피력하는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자아실현의 한 형태가 되겠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것이 되겠다. 기행문을 쓰게 되는 희열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려행을 하면 으례 기행문을 썼다. 조선고대문학사에서 혜초의《왕오천축국전(王五天竺國傳)》, 박지원의《열하일기》(熱河日記)》, 김인겸의《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유길준의《서유견문(西遊見聞)》등은 그 보기가 되겠다.
제1절 기행문의 개념 및 특성
기행문이란 려행중의 견문과 소감을 려정(旅程)에 따라 기록한 글을 가리킨다. 즉 특정 지방의 풍토 및 풍속, 인정세태, 생업 그리고 명승고적 등을 돌아보며 새로운 경험과 신기한 감흥을 기록하고 나타낸다. 기행문은 사건이나 사실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서사문(敍事文)과는 성격이 다르며, 서정문처럼 작자의 내면적심정을 주관적으로 기록하여 엮어가는데 중심을 두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눈앞에 전개되는 자연풍경이나 려행의 도정을 서술하는데 주안점을 두는것이니 서경문의 특색을 가장 많이 지닌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행문은 일종의 문학성을 띤 기행문학으로 성립되는것이다. 기행문은 출발에서 귀로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낀 새로운 체험을 시공간적으로 인상깊게 정리하는 경험담, 보고서, 확인서가 될뿐만아니라 알게모르게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려는 의도에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기행문을 읽는 이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친절한 길잡이가 되기도 하는것이다. 기행문은 또한 쓴 사람이 훗날 읽어 보면 재차 려행하는 쾌락을 맛볼수도 있다. 기행문은 려행의 기록으로서 견문을 비롯한 새로운 체험과 감흥을 나타낸다. 기행문은 개인려행, 단체려행, 전문성을 띤 학술답사, 고적답사, 참관, 견학을 통해서 좋은 소재를 얻을수 있다. 이를테면 전공분야에 따라 문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민속, 세태, 명승 등을 대상으로, 력사를 전공하는 분들은 사적이나 고적을 대상으로 기행문의 소재를 얻을수 있다.
제2절 기행문의 종류
기행문은 쓰는 목적에 따라 크게 견문기와 답사기로 나누어볼수 있다. 견문기적 기행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행문 또는 려행기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업무나 연구목적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느끼고 살핀바를 적는 려행담이다. 이런 글에서는 대개 려행중에 받은 흥미롭고 깊은 인상 또는 여느 지방에서는 못 느끼던 신기하고 유별난 점이 주로 다루어진다. 대개의 경우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한 흥미진진한 수필의 맛이 풍기는 것이 견문기의 특색이다.
특정한 목적의 답사기는 학술 조사 또는 시찰 따위의 사명을 띠고 정해진 지역을 탐방하거나 답사한 기록을 말한다. 이런 답사기는 탐방 목적에 충실하여야 하므로 그 내용이 사무적이고 전문적인 것이 보통이다. 이런 글은 일반 대중의 관심과 흥미는 끌기 어렵고 전문 분야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료로서의 구실을 하게 된다. 견문기와 답사기를 기행문을 쓰는 사람의 취미나 문체에 따라서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누어보면 수필체문장, 일기체문장, 서간체문장, 보고체문장 등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여기서, 수필체문장은 려행에서 얻은 체험을 마치 수필을 써나가듯하는 그러한 스타일로 기록하는 문체를 말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견문이나 감상이 중요시되는데 비하여 려정, 특히 날짜(年月日)는 그렇게 중요시되지 않는다. 정판룡(1931-2001) 저명한 중국조선족 교육가, 문학평론가.《20세기중국조선족 문학사료집 제22집 (정판룡문학편)》(연변인민출판사 2001)의 제주도기행문가운데《돌하르방》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제주도는 오래동안 륙지와 떨어져있었으므로 언어, 풍습, 생활방식에서 륙지사람과 차이가 많다. 말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북경말과 상해말이 서로 다른것처럼 거의 알아들을수 없는 정도로 다르다. 이를테면 《여보시오》하는 물음도 제주도에서는 《날 봅서》라고 하며 할아버지는 《하르방》, 오빠는 《오라방》이라고 한다. 그리고 륙지에서는 마을의 수호신(守護神)구실을 한다는 장승은 모두 나무로 깎아세우는데 제주도에서만은 돌로 만든 《돌하르방》을 곳곳에 세워둔다. 그리하여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특색으로 되여 어디나 돌하르방만 서있으면 제주도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여길 정도이다. 돌하르방이란 《돌할아버지》라는 제주도방언인데 처음에는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던것이 그만 이 석상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되였다고 하였다. 제주도각지에 세워놓은 돌하르방들을 보면 지방마다 좀 다르기는 하지만 공동적인것은 머리에 둥근 감투가 씌워졌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큰편이며 입은 품위있게 다물고 한쪽어깨를 치켜올려서 두손을 배부분에 가지런히 우아래로 모아붙인 모습을 하고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사람키만한 육중한 돌에다가 일부 현대파조각의 풍격으로 깎아놓았는데 얼핏 보면 할아버지모양같아 아마도 돌할아버지라는 이름이 붙여진것 같다.
《돌하르방은 언제부터 제주도에 나타난것입니까?》고 내가 묻자 《돌하르방이 언제부터 생겼는가 하는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략 18세기중엽부터 이런 석상이 나왔으리라고 추측할뿐입니다.》라고 안내자는 대답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돌하르방의 용처는 륙지의 장승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대체로 돌하르방은 성문앞에 세워놓는데 첫째는 성안 관아의 위용을 보이고 다음은 성문앞이라는 경제표지 및 성문의 수호신으로서 성안의 안전을 지키는 종교적기능을 담당하였으리라고 하였다.
일기체문장은 려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그날그날 일기를 적어가는 식으로 써내려가는 스타일의 문체를 말한다. 여기서는 수필체기행문과는 달리 날마다의 시제(년월일)가 꼬박꼬박 기록되는게 특색이다. 일기체문장은 우선 일정한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이 쓰는 문장이기 때문에 편하다. 여기에 해당되는 일기체 기행문으로는 하멜의《하멜 표류기》를 보기로 하자. 그 앞부분을 여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1653년 8월 15일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상갑판에서는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고, 또 돛을 올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수는 심하여 모든 펌프를 총동원해야만 했습니다. 배는 때로 심한 바람에 휩싸여 그때마다 배가 침몰되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서간체문장은 려행을 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낀것을 어느 특정대상에게 편지하는 형식으로 서술하는 문체를 말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리은상의 기행문《신록의 고허(新綠의 古墟)》앞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형이어. 춘광이 쉽다더니 과연 옳습니다. 눈 녹이고 얼음 풀리기 그리도 어려운 양 겨우 왔던 그 봄이 언젤지도 모르고 지난 그 어느 날 밤비에 갔나 봅니다. 진실로 춘광은 이리도 쉬웁습니다. 명종시(明宗時)의 사람 운곡(云谷) 송한필(宋翰弼)의 시 중에 화개작야우(花開作夜雨) 화락금조풍(花落今朝風) 가련일춘사(可憐一春事) 왕래풍우중(往來風雨中)이란 구를 다시금 읽어봅니다. 그리고 나도 노래 한 수를 남깁니다.
보고체문장은 려행의 내용을 자초지종 보고하는 형식으로 기록하는 문체를 말한다. 즉 보고자의 주관을 개입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서술하는 문체를 말한다. 공적인 임무를 맡고 려행하는 경우에는 실용적인 보고의 형식을 지니기도 한다. 르포도 여기에 해당된다. 르포는 현장에서 쓰는 기사이기 때문에 될수록 현장감있는 실감을 주어야 한다. 정판룡의 기행문 《통일된 베를린》은 독일이 통일된지 3년후에 베를린을 찾아 “통일된 베를린은 어떤 모양을 하고있는지? 그곳 사람들은 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지에 대해 “베를린으로 가는 길”, “베를린탑”, “서부에서 동부로”, “통일독일의 상징물-브란덴부르그문”, “《베를린벽》이 있었던 곳”, “유서깊은 제국의회의사당”, “아름다운 운터 덴 린덴거리”, “맑스와 엘겔스의 이름을 단 거리와 건축물들”, “베를린의 밤”이라는 테마로 나누어 비교적 객관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제3절 기행문의 요소 및 형식
1. 요소 첫째, 행선지사항. 려행을 떠나는데에는 반드시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행선지없이 막연하게 떠날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때로는 정처없이 떠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정처없이 떠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막연히 걸어갈수는 없고 알게모르게 행선지를 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려행에는 반드시 행선지, 즉 목적지가 정해지기 마련이므로 기행문에 있어서도 어디를 어떻게 려행했는가하는 내용 즉 로정이 순서대로 밝혀져 있다. 둘째, 견문건.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하는 견문이 포함된다. 특정 지방의 특유한 색채, 언어, 복장, 음식, 풍속, 습관 나아가 인정세태에 이르기까지 이색적인것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셋째, 감상 즉 느낌을 피로하는것이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한다. 떠날 때의 느낌, 그리고 어떠한 사물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는가하는 감상이 없으면 기행문다운 글이 될수 없다. 이 감상은 읽는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렬한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기행문의 요소가 되는 행선지사항과 견문건 및 감상 중에서 경우에 따라서 어느 한가지가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일기체기행문에는 년월일(年月日)이 따르지만 수필체기행문에는 그것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2. 형식 기행문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①언제 ②어디를 ③ 어떻게 출발해서 ④무엇을 ⑤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고 ⑥어떠한 곳을 ⑦어떻게 다녀서 ⑧어떻게 돌아왔는데 ⑨그 의의는 어떻고 ⑩어떠한 해석을 내릴수 있는가
하는 등 시간과 공간 및 내면의식을 살려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내면의식이란 이번 려행의 중요성이나 가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①, ②, ③은 도입부분으로서 려행을 하는데는 “언제”라는 시간성, 즉 려행의 일시와 “어디”를 향해 간다고 하는 공간적인 장소, 즉 려행의 목적지를 밝히는것이 되겠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려행하는 필자의 려정 즉 려행의 일정을 밝히는 부분이 되겠다. 려행을 떠나는 그날의 일기라든가, 동행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어떤 방법으로 떠나게 되였는가에 대한 내용이 오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행선지로 향하여 출발할 때의 소감이라든가, 떠나기전의 느낌이 나타난다.
④, ⑤, ⑥은 중심부분으로서 주로 려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서술한다. 기행문은 단순히 사건의 기록만으로는 미흡하다. 차창을 통해서 풍경이 바뀌듯이 바뀌는 대상에 대한 심경의 변화도 나타내야 한다. 려행을 떠날 때나 가는 도중에서나 도착했을 때 보게 되는 견문이거나 느끼게 되는 감흥을 여실히 드러나게 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는가에 대해 선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례컨대 차를 타고 갈 때 차창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사물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같은것을 토로하는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산천을 바라보며 거닐거나 명승고적을 답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⑦, ⑧, ⑨, ⑩은 마지막부분으로서 어떠한 곳을 어떻게 다녀서 돌아왔다고하는 종착점의 제시와 더불어 려행에서 무엇을 얻었는가하는 의의라든가, 자기 나름대로 이번 려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곁들인 마무리를 하는 부분이다.
제4절 기행문의 작성요령
기행문은 한곳에 머물러 머리로 짜내는것이 아니라 어디로든가 떠나야 이루어지는 글이다. 바꾸어 말하면 실제로 려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바를 기초로 하여 쓰는 글이다. 그러므로 기행문의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자연환경이나 력사유적이나 문화유물, 또는 세상사람들 살아가는 인정세태든간에 그때그때마다 수시로 메모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기행문을 쓰게 될 때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을 쓸수 있는 모티프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도 수시로 메모하는 습관을 갖는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려행을 마치고 난후 시간이 오래 경과되면 감흥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 느낌이 식기전에 집필하는것이 바람직하다. 이로부터 기행문은 정(靜)적인 글이 아니라 동(動)적인 글이다. 기행문의 구체적인 작성요령은 다음과 같다. 첫째, 려행의 동기, 목적을 밝혀야 한다. 아마 목적없이 려행을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그 려행의 동기와 목적을 밝히고, 그 려행을 떠나는 준비과정이 글의 발단부분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기행문에는 출발을 둘러싼 느낌과 생각이 서술되여야 한다. 이는 또한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독자가 실제로 려행을 떠나지 않지만 마치 려행을 떠나는듯한 실감미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 둘째, 기행문에는 일정, 로정, 거리, 목적지를 밝혀야 한다. 기행문은 시공간의 경과에 따른 견문과 관찰의 기록이기 때문에 일정이나 시간, 공간문제가 기본선색을 이루도록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목적지까지의 로정과 목적지에서의 활동과 관찰 및 돌아올 때까지의 생활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내야 한다. 즉 어디에서 어디로 간다는 려정이 서술되는것이 바람직하다. 기행문을 읽으면 독자도 훤히 알수 있도록 려정을 생동감과 실감이 나도록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그 글을 읽으면서 려행을 같이 하는것처럼 느낄수가 있다. 그렇다해서 가는 길을 너무 자세하게 적어 려행 길잡이의 설명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어서는 오히려 기행문의 맛이 줄어지고 만다. 그런만큼 기행문에서는 필자의 느낌이나 묘사를 곁들이면서 자연스럽게 길을 밝혀주는것이 좋다. 셋째, 기행문은 그 지역만의 독특한 지방색을 나타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지방의 독특한 자 경개나, 지질ㆍ지형, 기후 및 동식물의 분포 그리고 인정세태, 언어, 풍속 등이 그 지방의 독특한 지방색을 형성한다. 기행문은 바로 이 지방색에 초점을 맞추어 그 매력이 돋보이도록 해야 한다. 독자들이 기행문에 끌리는것도 이 낯선 지방색 소개를 통해 그때마다 새로운 견문을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 기행문의 지방색을 살리자면 면밀한 관찰을 기초로 해야 한다. 모처럼의 려행이 일정이나 로정에 쫓기여 말타고 꽃구경하기식은 많은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기행문이 독자들에게 현장감을 주는 기본 바탕도 바로 지방색을 살리는데 있다. 기행문에서 다룬 특정지방의 특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딴 지방, 특히 “우리의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견주어 서술하는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 특정지방의 자연환경이나 생활, 문화가 딴 지방이나 “우리의것”과 견주어 비슷한 점, 대조되는 점을 가려보고 우리가 특별히 느끼고 관심을 가져야 할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외여행기 등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네번째, 기행문은 일반적으로 어느 지점이나 사물의 력사적배경이나 원인 및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지역특색을 설명해야 한다. 이를테면 왜 이 지방만이 그런 특색을 가지게 되였는가를 여러 각도에서 알아보고 소개하도록 한다. 가령 사적지라면 그 유래를 력사적으로 따져 볼것이고, 그밖에 생활문화와 관련된것이라면 그 지역의 생활환경, 풍습, 사람들의 성격 등을 고찰함으로써 그 까닭을 밝힐수 있다. 이러한것은 그 지방의 특색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기행문의 가치를 높이는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장황한 력사적인 고증이나 론술, 전문적인 학술적색채로만 흘러서는 안된다. 전문 목적을 띤 학술 기행문이라면 모르지만, 견문기에서는 지나친 전문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행문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마음으로 려행하는 심정으로 읽힐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적지에 관한것이라 하더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넘어갈수 있는 지식으로 한정하는것이 좋다. 되도록이면 흥미있는 일화를 중심으로 적되 반드시 자기의 느낌을 덧붙여야 한다. 또 그 력사적사실 및 지식은 웬만한 지식인에게는 상식이 되여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서는 쓸모가 적다. 만일 그렇게 되면 기행문이 마치 학술적인 글처럼 되여 경쾌한 맛을 잃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독특한 느낌이나 생각을 나타내야 한다. 기행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는데 있다. 어딘가 색다른, 독특한 개성적인 표현이 되여야 한다. 새로운 사물이건 잘 알려진 풍경이건간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독특한 견해나 감상이 나올수 있다. 아무리 명승고적을 탐방한다할지라도 이런 새로운 각도에서의 관찰과 감상이 없으면 기행문의 쓸거리가 되지 못한다. 누구나 다 느끼고 생각할수 있는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가보고 또 기행문을 남긴 곳일지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새롭게 느끼는바가 있으면 훌륭한 기행문의 소재가 될수 있다. 새롭게 체험하는 모든 사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깊이있게 표현하여야 하며 려정, 사실과 체험의 막연한 라렬은 려행의 안내서는 될수 있어도 감흥은 줄수 없다. 즉 예리한 관찰과 개성적인 표현이 기행문의 요체가 되는것이다. 요컨대, 기행문에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찰과 사색이 있어야 하며 그 특색을 소개하되 “우리의것”과 견주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하는것이 바람직하다. 아무리 낯설고 새로운 땅과 풍물을 소개할지라도 필자 자신의 독특한 솜씨로 요리하지 않으면 별 쓸모가 없다. 평범한 객관적사실 그대로만 적어 놓는것은 지리책이나 관광길잡이책에서도 볼수 있다. 더구나 오늘날은 교통수단이 발달되여 웬만한 곳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볼수가 있으므로 독특한 관점에서 쓰여지지 않는 기행문은 독자에게 줄것이 별로 없다. 반면에 흔히 가볼수 있는 곳이고 같은 정경일지라도 필자 나름대로 보고 느끼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것”과 어떻게 다르고 같은 지를 보여줄때 기행문의 가치는 커지는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느낌이나 생각을 담으려면 려행을 하는 동안 세심한 주의력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살필뿐만아니라, 왜 그런가 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이 지방에는 왜서 그런 동물이 살게 되였으며, 그 특색은 어떤한것이며, 또 그와 같은 특색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무엇을 뜻하는가를 여러모로 알아보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도록 해야 한다. 그런 노력없이 주마간산격으로 려행을 해서는 좋은 기행문을 쓸수 없다. 정판룡의 단마르크 핀란드기행문가운데《아네르슨거리에서》를 보면 단마르크 아네르슨거리에서 주로 아네르슨에 얽힌 이야기들을 객관적인 필치로 죽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소위 서방세계의 복리주의란 아네르슨이 그처럼 열렬히 동경하던 《추위도 기아도 슬픔도 없는》아름다운 세계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로 자기의 독특한 느낌이나 생각을 피력하며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경지를 창출하고 있다. 여섯번째, 과장과 거짓서술은 금물이다. 기행문은 독자를 위해서 친절한 안내서의 구실을 해야 한다. 이것이 기행문작자가 독자에 대한 기본 례의다. 그러므로 기행문이 사실과는 다르게 과장되였거나 거짓서술되였때는 필자가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사실에 충실한 객관적인 표현 즉 진실성은 기행문을 쓸때에 지켜야 할 금과옥조다. 기행문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연, 언어, 민속, 풍습, 인정, 지리에 대해 치밀한 관찰과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고증을 하면서 지루하고 장황하게 서술하여서는 안된다. 터무니없이 과장하거나 거짓으로 꾸며서는 안되고 진실한 객관적인 서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표현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러므로 글을 너무 아름답게만 쓰려고 할게 아니다. 지나치게 윤색을 가한다거나 기교에 치우치기보다는 거짓없이 진솔하게 쓰려는 마음자세가 더욱 중요하다. 일곱번째, 적당히 즉흥시, 사진, 스케치 등을 삽입하거나 음성, 영상매체와 결합하면 보다 큰 감흥을 불러일으킬수 있다. 기행문속에 즉흥시나 사진, 스케치 등을 곁들이면 훨씬 다채롭고 생동한 감을 주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필자 자신의 후일의 추억을 위해서나, 독자에게 보다 사실적인 실감미를 주기 위해서도 이런 방법은 퍽 효과적이다. 그리고 현단계 멀티미디어의 시대적특성에 맞추어 음성, 영상매체를 결합시키면 신선한 감을 주며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할수 있다. 현단계 많은 기행문 관련책들의 CD롬부착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끝으로 모델작품으로 정판룡선생의 영국 기행문가운데《대학의 도시-옥스퍼드》를 소개한다.
12월 4일 오전 10시 50분에 우리는 런던 파덴팅정거장에서 옥스퍼드로 가는 급행렬차에 올랐다. 옥스퍼드는 세상에 이름난 옥스퍼드대학이 있는 곳이다. 옥스란 영어로 소라는 말이고 퍼드는 얕은 여울이라는 말인데 옥스퍼드를 한어로 《우진(牛津)》이라고 하는것은 원어의 뜻을 의역한것이다. 옛날 옥스퍼드에 소가 건널수 있는 얕은 여울들이 많아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 몰라도 어쨌든 옥스퍼스 휘장에는 여울을 건느는 소 한마리가 그려져있다. 런던에 오기전 나는 세상에 이름난 옥스퍼드대학이나 켐브리지대학이 모두 런던시내에 있는줄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알아보니 옥스퍼드대학은 런던에 있는것이 아니라 잉글랜드남부 옥스퍼드라는 소도시에 있었으며 옥스퍼드대학 역시 하나의 대학인것이 아니라 옥스퍼드시에 있는 28개의 학원을 총칭한 이름이였다. 런던에서 옥스퍼드로 가는 렬차는 아침 8시부터 거의 매 시간에 한번씩 있었다. 일반기차로는 옥스퍼드까지 근 3시간이 걸리지만 우리가 탄 급행렬차는 한시간 남짓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렬차는 잡다한 런던시구를 지나 교외구역에 들어섰으나 오르내리는 사람이 여전히 많았다. 알고보니 최근에 런던시정청에서 런던교외에 런던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위성도시를 건설한것이였다. 런던은 옛날부터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로 세상에 이름이 있다. 제2차대전전만 하여도 런던의 인구는 500만을 초과하여 세계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2차대전후 공농업이 발전되면서 런던시구의 인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통계에 의하면 시내의 인구만 하여도 800만을 초과한다고 하니 교외까지 합치면 1,000만이 더 되리라고 한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주택, 교통등 모든것이 더욱 긴장하게 되였다. 이런 정황하에서 영국정부에서는 런던의 인구와 공장들을 소개시킬 목적으로 런던주위에 수많은 위성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12시 10분에 우리가 탄 렬차는 옥스퍼드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정거장려행복무부에 가서 옥스퍼드대학으로 가는 뻐스가 있는가고 물으니 여기는 인구가 10만도 못되는 작은 도시여서 어디나 걸어서 갈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디서나 택시를 불러 탈수도 있다고 하였다. 옥스퍼드는 실로 대학의 도시였다. 인구가 10만도 못되는 이 작은 도시에 옥스퍼드대학에 소속된 각종 콜레제, 즉 학원들이 28개나 되며 이 콜레제들에게서 공부하는 학생과 거기서 일하는 교원, 사무원이 전 시인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거리에 다니는 사람은 대다수가 옥스퍼드대학 학생이 아니면 대학의 교원, 사무원과 그들의 가족들일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다른 곳과 달리 서점과 간이식당이 특별히 많은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학생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위키스터학원부근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학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였다. 12세기전만 하여도 옥스퍼드에는 대학은커녕 중학교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2세기말부터 돈있는 귀족들이 자기의 이름을 후세에 남길 목적으로 이곳에다 카톨릭교인들에게 카톨릭교교리와 문화지식을 가르치는 교회학교를 꾸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3세기에 와서는 그것이 정식으로 교회당의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특히 초기에 세운 몇개의 학원이 영국교왕의 정식승인을 받게 되자 돈 많은 귀족들은 다투어 자기 이름으로 이곳에다 이런 학원을 꾸렸으며 자기 학원의 특색을 내기에 애를 썼다고 한다. 어떤 귀족은 소위 카톨릭교의 평등사상에 근거하여 신분이 낮은 사람도 오직 자기가 꾸린 이 학원에서 공부하기만 하면 교회당이나 관청에서 일할수 있다고 하면서 학생모집을 제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옥스퍼드에는 학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말엽에는 학생수가 15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그때부터 옥스퍼드는 점차 영국 카톨릭교의 중심으로 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영국 력사상 유명한 소위 옥스퍼드그룹운동, 옥스퍼드운동 등 카톨릭주의종교운동은 모두 옥스퍼드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자본주의근대문명이 발전되면서 옥스퍼드대학에서도 교육이 종교적속박에서 벗어날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6세기초 종교개혁운동시기에 옥스퍼드는 이 운동의 중심으로 되였다. 옥스퍼드대학의 적지않은 학원들에서는 17세기초부터 점차 세속적인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는 과목들을 배워주기 시작하였으며 부동한 인재를 양성하는 부동한 목적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학부와 학과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의 옥스퍼드대학은 중세기적종교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현대화된 종합대학인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 학원은 여전히 지난 세기에 지은 옛날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있으며 카톨릭교의 교리를 신성불가침의 진리로 인정하고있다. 그러기에 옥스퍼드대학에는 외형을 보면 현대적건물이라곤 거의 없을 정도이다. 대부분 건물들은 15~16세기에 지것이며 그후에 지은 건물도 모두 그전의 집형식을 모방하여 옛식으로 지은것이여서 몇백년전의 옛옥스퍼드가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된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처음 방문한 학교는 워커스터콜레제라는 학원이였다. 그것은 옥스퍼드대학에서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학원이였다. 학교에는 18세기에 지었다고 하는 3층집교사 두채가 있었다. 초겨울이건만 정원에는 백합꽃이 만발해있었다. 출입구벽에는 2차대전시기에 희생된 학생들의 성명과 출생년월일을 적은 기념비가 붙어있었다. 점심휴식때가 되여서인지 학원은 매우 조용하였다. 우리는 학교후원으로 흐르는 시내물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한 늙은이를 만났다. 이 늙은이는 워커스터콜레제는 1298년에 건립된 학원인데 옥스퍼드에서는 력사가 유구한 학원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시인 쉘리가 학습한 링컨콜레제라는 학원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워커스터콜레제에서 나와 브라세노스콜레제로 향하였다. 브라스노스콜레제는 원래 1509년 런던의 한 홍의주교가 세운 학원인데 여기서는 주로 카톨릭교목사를 양성하였다고 한다. 이 학원도 지금은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난 세속적인 대학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 학원에 있는 성마리야교회당은 옥스퍼드에서는 가장 높은 건축물에 속한다고 한다. 교회당입구에서는 려행자들을 위하여 몇몇 늙은이가 옥스퍼드를 소개하는 각종 사진책들을 팔고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옥스퍼드대학에서는 매년 수많은 려행자들이 모여드는데 그들은 주로 옥스퍼드의 건축물을 보러 오는것이라고 하였다. 옥스퍼드는 오래동안 카톨릭교중심가운데의 하나로 되였으므로 카톨릭교와 관계되는 건축물이 특히 많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교회당층계를 따라 올라가니 옥스퍼드 전시의 면모가 한눈에 안겨왔다. 근년에 새로 건설한 몇개 중요한 거리외에 옥스퍼드의 대부분 건축물은 지난 세기에 지은것들이여서 우리는 마치 중세기 구라파의 한 도시에 서있는것 같은감이 들었다. 우리는 성마리야교회당에서 나와 옥스퍼드동쪽에 있는 케블콜레제의 건물을 보러갔다. 죤 케블은 19세기 옥스퍼드대학번영시기에 여기서 교편을 잡은 저명한 시인이며 교수라고 하는데 이 학원은 1866년에 그의 학생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연금을 모아 꾸린 학원이라고 한다. 1952년 런던의 한 자본가가 이 학원을 접수한뒤부터 이 학원은 옥스퍼드대학의 많은 대학들처럼 사립대학으로 변하였다. 케블콜레제는 19세기 70년대에 지은 집이여서 현대적인 특점을 다소 가지고있었다. 정각 오후 4시에 우리는 옥스퍼드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 비록 말타고 꽃구경하는 격으로 옥스퍼드대학의 몇몇 콜레제의 특색있는 고대건물들을 보기는 하였으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옥스퍼드대학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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